서부 수도 벨포로트(3)

헤르디안 상업지구 외곽숲
불길이 휩쓸고 간 창고는 이제 잿더미와 뒤틀린 금속 조각만을 남겼다.
검게 그을린 재가 바람에 흩날리고, 무너질 듯한 뼈대가 위태롭게 서 있었다.
한때 북적이던 상업지구는 고요 속에서 황량함만 뿜어내고 있었다.
일반 시민들은 출입이 금지되었다. 이곳에 발을 들인 것은 레지오와 그의 측근들 뿐이었다.
그중 한 제국 관리가 다가와 보고를 시작했다. 그의 목소리는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창고 입구 쪽에서 시체를 발견했습니다. 화재로 인해 뼈만 남아 있고 근처에서 도(刀)로 보이는 물체가 녹아 붙어 있었습니다.”
레지오는 조용히 입을 다물고 시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반으로 갈라진 채 타버린 뼈, 그리고 녹아내린 도. 그가 잠시 침묵을 지키자, 주위의 공기가 묵직해졌다.
“오벨인가...”
그는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제국 10강이면 오히려 과하다 생각했는데... 한심하군, 오벨.”
레지오의 눈빛이 불길 속으로 깊이 잠겼다. 문득 머릿속에 한 장면이 스쳐갔다.
- 불구경은 재미있게 하셨나? -
그 순간 떠오른 것은 황금연맹의 딸 옆에 서 있던 그 남자였다.
그 여유롭고 비꼬는 목소리와 짙은 웃음기가 아른거렸다.
“하, 불구경이라... 재미있게 해 준 덕분에 일이 더러워졌군.”
레지오는 시체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혼잣말처럼 낮게 중얼거렸다.
‘오벨을 죽이고, 불까지 질렀다고? 그런데... 이 장소를 어떻게 알았지? 아무 상관도 없던 녀석이?’
그의 시선은 점점 날카로워졌고, 주위의 공기가 팽팽히 긴장감으로 일그러졌다.
레지오는 차갑게 부하를 향해 손짓했다.
“헤르메스 운송단 책임자를 끌고 와라. 당장.”
잠시 후.
어느덧 부하들이 창고 뒤쪽에서 끌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묶인 채 끌려온 남자는 이미 얼굴에 멍과 피가 범벅이었다.
입술은 터져 있었고, 발걸음은 비틀거렸다.
“테온이라는 자입니다.”
부하들이 그를 창고 앞에 무릎 꿇렸다.
테온은 몸을 일으켜 세우려 했지만, 레지오의 시선이 머무는 순간 다시 주저앉았다.
온몸이 저절로 떨렸다. 그는 자신의 머리 위로 느껴지는 압박감을 쉽게 떨쳐낼 수 없었다.
레지오는 천천히 테온 쪽으로 다가가며 손을 뻗었다. 그의 손가락은 테온의 머리 위로 올라갔다.
순간 테온의 얼굴에 공포가 가득 찼다. 그러나 레지오는 머리를 치지 않고 가볍게 머리카락을 털어냈다.
“머리카락에 재가 묻었군.”
그는 속삭이듯 말했다.
테온은 움찔하며 눈을 치켜떴다. 그제야 레지오가 얼굴에 느릿한 미소를 띠며 다시 입을 열었다.
“테온.”
그는 나직하게, 그러나 명확하게 이름을 불렀다.
“내가 알고 싶은 답을 내놓는 건 네 자유다. 하지만, 그 답이 나올 때까지 숨을 쉴 수 있을지는 네 자유가 아니야.”
레지오는 테온의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그가 천천히 뻗은 손끝이 테온의 어깨에 닿는 순간, 테온의 몸이 저절로 움찔거렸다.
“그러니까, 내가 더 기다려야 하나? 아니면... 여기서 끝내볼까?”
레지오는 손으로 테온의 어깨를 두드리며 차가운 표정을 지었다.
테온의 입술이 바들바들 떨리며 간신히 목소리를 짜냈다.
“말... 말하겠습니다! 제발... 기회를...!”
레지오는 천천히 입꼬리를 올리며 몸을 뒤로 젖혔다.
“좋아. 기회를 주지. 얼마나 잘 말할 수 있을지 들어보겠어.”
테온이 입을 열고 이야기를 듣던 레지오가 말을 멈췄다.
“에델리안의 잎사귀?"
테온은 그 말을 듣는 순간 몸이 굳어졌다.
움찔하며 고개를 떨군 그는, 바닥을 바라보며 떨리는 입술을 움직였지만, 말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
레지오는 천천히 걸음을 내디뎠다.
“내가 분명 이종족 특산품에는 손대지 말라고 했을 텐데?”
그의 말은 명확했지만, 오히려 그것이 테온을 더욱 옥죄었다.
테온은 결국 간신히 입을 열었다.
“아, 아니... 그것도... 정말 우연히 얻어걸린 겁니다! 믿어주십시오!”
그의 목소리는 점점 더 떨렸고, 눈은 바닥만 향하고 있었다.
레지오는 고개를 갸웃하며 묘한 미소를 지었다.
“우연히 얻어걸렸다?”
그는 천천히 테온 쪽으로 다가갔다. 그의 발소리가 땅에 가볍게 울렸지만, 테온의 심장은 그 소리에 맞춰 요동쳤다.
레지오는 테온 앞에서 멈추고 천천히 몸을 숙이며 말했다.
“그럼 우연히 잎사귀를 팔아먹고, 우연히 엘프를 끌어들여서, 우연히 여기까지 온 건가?”
그의 목소리는 점점 낮아졌고, 마지막 한 마디는 귓가를 파고드는 바늘 같았다.
테온은 바짝 엎드리며 떨리는 손으로 바닥을 짚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레지오님! 정말 작게 벌어볼 생각이었을 뿐인데... 이렇게 커질 줄은 몰랐습니다! 제발 한 번만, 한 번만 기회를 주십시오!”
그의 울부짖음은 절박했다. 그는 머리를 조아리며 손으로 땅을 긁었지만, 레지오의 표정은 미동조차 없었다.
레지오는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다.
그 단순한 손짓 하나로 주위의 공기가 바뀌었다.
부하들은 그의 손짓에 반응하며 일제히 뒤로 물러났고, 그제야 테온은 사색이 되어 고개를 들었다.
“레지오님! 제발! 정말 한 번만...!”
그의 비명은 허공에서 끊겼다.
순식간이었다.
- 쉬익 -
바람 소리가 날카롭게 찢어지고, 테온의 목은 떨어져 나가 바닥을 굴렀다.
그의 눈은 죽어서도 공포에 질린 채였다.
바닥에 흩뿌려진 피가 뜨겁게 번지며 잿더미와 섞였다.
레지오는 고개를 돌려 바닥에 굴러다니는 머리를 무심히 내려다보았다.
“버러지 같은 녀석 하나 때문에 일이 이렇게까지 꼬일 줄이야.”
그는 조용히 한숨을 내쉬며 시체를 넘겨 창고의 잔재를 바라보았다.
“우연히 얻어걸렸다, 이건가? 하... 정말이지, 우연치 곤 최악의 결과를 남겼군.”
레지오는 바람에 흩날리는 잿더미를 천천히 손으로 털어내며 중얼거렸다.
“에델리안의 잎사귀에 있는 마나를 빼돌린거. 그거 하나 때문에 엘프와 같이 원흉을 찾다가, 결국 여기를 발견하게 되서 날려버린 건가.”
그는 천천히 숨을 들이쉬며 손가락으로 이마를 지그시 눌렀다.
머릿속엔 골칫거리들이 꼬리를 물고 떠올랐다.
일레아나 암살 실패.
헤르디안 상업지구 물류창고 화재.
제국의 자금 지원 문제.
그리고 자기를 비웃던 한 남자.
하나하나가 거대한 문제였지만, 모든 게 한데 얽혀 그의 머릿속을 짓누르고 있었다.
레지오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들었다.
주위의 부하들은 그의 움직임에 긴장하고 있었다.
그는 다시 입을 열었다.
“이 버러지는 같이 태워버려. 그리고 헤르메스 운송단 나머지도 전부 잡아.”
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리며 시선을 부하들에게 던졌다.
“죽든 살든 상관없다. 내가 직접 확인할 거니까.”
레지오는 짧게 웃었다.
“다시 벨포로트로 간다. 내 계획을 망친 놈, 얼굴 한 번 제대로 봐야겠어. 아주 천천히, 낱낱이 뜯어가며.”
그의 웃음 속엔 차가운 냉소와 한 줄기 광기가 담겨 있었다.
바람이 그의 옷자락을 스치며 잿더미 속에서 불씨가 흩날렸다.
창고를 한 번 더 바라보더니 등을 돌렸다.
***
수도로 돌아가는 길
레오니드는 말없이 길을 걸었다.
차가운 바람이 뺨을 스쳐갔지만, 그의 머릿속은 여전히 뜨거운 화재 현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방금 전, 헤르디안 상업지구 입구
입구 앞, 레지오의 부하들이 길을 막아섰다.
“죄송합니다만, 레지오님께서 외부인은 들이지 말라 하셨습니다.”
단호하게 뻗은 손과 차가운 목소리.
레오니드는 잠시 귀를 의심했다.
“외부인?”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든 그는 낮게 내뱉었다.
“외부인이라니, 대체 무슨 소리입니까? 제가 여기 책임자인 거 몰라서 하는 소리입니까?”
자신의 말이 당연히 통할 거라 확신했지만, 상대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외부인은 들어갈 수 없습니다.”
냉정하고 기계적인 대답만 되풀이될 뿐이었다.
짧은 한숨을 내쉰 그는 더 이상 말을 섞지 않고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그러나 거칠게 어깨를 밀어내는 손길이 그를 멈춰 세웠다.
“외부인은 못 들어간다니까.”
태도는 점점 더 거칠어졌고, 그는 마침내 검을 천천히 빼들었다.
“경고는 이번이 마지막이다. 외부인.”
그 순간, 레오니드는 속에서 울컥 끓어오르는 화를 간신히 삼켰다.
이곳은 그의 책임 아래 있는 상업지구였다.
그런데도 제국 출신의 레지오 부하가 그의 권한을 가로막는 꼴이라니.
생각이 끝난 후, 레오니드는 잠시 발걸음을 멈췄다.
짧은 한숨을 내쉬며 길가의 나무를 멍하게 바라보다, 어이없는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외부인이라니. 서부 도시 마그노르에서 날 외부인 취급하는 제국 사람이라니, 정말이지 기막히군.”
말은 비웃음 섞인 독설이었지만, 그의 눈빛은 냉정하고 차가웠다.
고개를 젓던 그는 다시 길을 걸으며 속으로 생각을 이어갔다.
‘상업지구를 맡긴다면서 그렇게 쉽게 자금을 내주던 순간부터 의심은 계속 들긴 했다. 그렇게 순수하게 돈을 쥐어주는 제국 놈들은 있을 수 없으니.’
허공을 보며 짧게 웃었다.
‘그리고 화재. 화재가 난 곳에 뭔가 있었던 게 틀림없다. 레지오가 직접 움직일 필요가 있을 정도로 중요한 무언가가.’
생각이 여기까지 이르자, 그는 다시금 머리를 흔들었다.
‘제국에 허리를 굽혔던 내가 잘못인가. 그래, 그땐 그게 최선이라 생각했지.’
그는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스스로를 비웃듯 고개를 저었다.
‘서부가 대륙 상권을 장악하려면 제국의 손을 빌리는 수밖에 없다고 믿었다. 그게 서부를 지키는 길이라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지금의 상황은 달랐다. 그때 자신이 선택한 협력이 이제는 족쇄가 되어 돌아오고 있었다.
‘제국이 서부에서 뭔가를 꾸미고 있다. 그리고 레지오가 그 중심에 서 있다.’
씁쓸하게 웃으며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그래. 결국, 서부를 중심으로 대륙 상권의 패권을 쥐겠다는 내 욕망이 화를 부른 셈이지. 레지오, 넌 날 도구로 이용하려 했겠지. 서부를 제국에 넘기는 데 협조하는 멍청이로 봤을 테니.”
그는 안경을 고쳐 쓰며 차갑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내가 그런 멍청이라고 생각했다면, 오산이야. 오로지 서부를 위해서만 움직인다. 과거에 가문을 희생했던 거도 당시 서부를 위해서였으니까.”
벨포로트를 향해 걸음을 옮기며 결심을 굳혔다.
‘마르코스와 이야기를 해야겠군. 그리고... 그 남자...'
상업지구의 불길이 사그라진 아침.
헤르디안으로 가는 길목 앞에서 레지오와 일레아나가 나누던 대화.
그리고, 일레아나 옆에 서 있던 남자가 비꼬듯이 던진 한 마디.
- 불구경은 재미있게 하셨나? -
그 순간 레지오의 얼굴이 아주 미묘하게 굳어졌던 장면이 생생히 떠올랐다.
‘수도로 가야겠군. 그 남자를 찾아야 한다. 이 모든 사건의 시작과 끝... 그 남자가 틀림없어.’
그 발걸음은 망설임 없이 벨포로트를 향하고 있었다.
***
그 시각, 실버블룸의 효능에 감탄하던 레이와 아르엔
레이는 실버름룸을 떨어뜨리자 상처가 아무는것을 보며 감탄하던 중, 갑자기 기분이 싸늘해지더니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뭐지?”
그의 갑작스러운 반응에 아르엔이 실소하며 물었다.
“이번엔 또 왜요? 갑자기 무슨 귀신 본 것처럼.”
레이는 주위를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글쎄... 남자 두 명이 날 노려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아르엔은 어이없다는 듯 째려보며 말했다.
“뭐라는 거예요? 아까는 혼자 세상 심각 하더니, 이번엔 남자 타령? 그런 거에 신경 쓸 시간 있으면 좀 더 집중하세요.”
레이는 멋쩍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게... 그냥 기분 탓인가 보다.”
- 작가의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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