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 10강의 정점(3)
뺨을 타고 흐르던 핏방울이 턱밑에서 잠시 맺혀 있다가, 뚝, 아래로 떨어졌다.
옷깃에 스며든 피가 조금씩 무겁게 느껴졌다.
피와 땀, 그리고 공기조차 내 몸을 짓누르는 듯한 묵직함.
방금 목을 스쳐 지나간 건 단순한 바람이 아니었다.
칼날 같은 기운이 내 몸을 도려냈다.
안일했나?
제국 10강, 오벨을 넘고 나서 이 정도쯤은 버틸 수 있을 거라 자만한 나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사파이어 같은 눈동자.
나를 꿰뚫어 보는 듯한 차가운 시선.
그 기운에 억눌린 내 심장이 요동친다.
오벨과는 차원이 다르다.
이 정도 무력감을 느껴본 게 언제였더라.
라시엘. 그래, 그 미친 여자를 상대했을 때 이후 처음이다.
머리가 어지럽다.
하필이면 낮에 했던 그 말이 떠오른다.
- 그럴 순 있고? -
한심하다. 어찌 그렇게 오만할 수 있었던 걸까.
지금이라도 돌아가서 내 뺨이라도 후려치고 말하고 싶다.
- 정신 차려, 이 멍청아. 네가 입 털고 있을 상황이 아니야. -
턱 끝에 맺힌 피를 대충 손으로 닦아내고,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봤다.
입을 열며 묻는다. 숨을 고르고, 싸움을 준비하는 자세로.
"레지오. 네가 제국에서 가장 강한가?"
질문을 받자 레지오는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흥미도 없다는 태도.
"제국에 인재가 그렇게 없을 거라 생각하진 않았으면 좋겠군."
입꼬리를 올리며 한마디를 던진다.
"미안하지만, 제국 안에서도 나보다 강한 자는 몇 있다. 대륙 전체로 넓히면? 훨씬 많지. 그중에 네가 아는 이름도 있겠군."
그 말을 듣자 귀를 스쳐 지나가는 어떤 남자의 호탕한 웃음소리.
"··· 권왕."
"좋아. 머리가 좀 돌아가는군."
레지오가 미소를 짓더니, 금세 표정이 식어갔다.
그 눈빛에서 더 이상 미소 따윈 없었다.
"하지만, 우리가 여기서 잡담이나 나눌 사이로 보이진 않는데?"
그의 입술에서 떨어지는 마지막 경고.
"더 보여줄 게 없다면··· 이만 죽어라."
손조차 들지 않았는데, 공기가 쪼개지는 거 같다.
멍하게 있다가는 이대로 반쪽이 난다.
생각하자. 아니, 생각조차 사치다.
숨을 몰아쉬며 본능적으로 내면의 세계를 끌어올렸다.
내 세계와 그의 공간이 맞부딪치며 파장이 일어났다.
순간, 공기가 뒤틀린다.
- 텅 -
두 차원의 경계에서 울리는 진동처럼.
그 비틀림을 본능적으로 느꼈다.
바로 그곳, 틈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파앗!
검 끝이 뒤엉킨 공간을 갈랐다.
한순간 모든 게 조용해지더니, 쏟아지던 칼날들이 공중에서 찢겨나갔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몸을 헤집던 날카로운 공격들이 이제는 내 검 아래서 흩어져 사라졌다.
"호오?"
레지오의 목소리가 하늘 위에서 떨어졌다.
마치 어린아이가 어른에게 덤벼드는 모습이라도 보는 듯한 여유로운 반응이었다.
"조금은 더 볼만해졌군."
그 표정, 그 태도.
일일이 대응할 겨를도 없다.
말이 끝나자마자, 하늘 전체가 울렁였다.
수많은 비틀림이 사방에서 몰려들었다.
틈마다 칼날 같은 압박이 느껴졌다.
땅에서, 공기에서, 그리고 내가 서 있는 발밑조차도.
"미치겠네."
숨을 고를 여유 따위는 없다.
눈앞에서 쏟아지는 끝없는 공격들에, 오직 본능적으로 검을 휘두르기만 했다.
공격을 베어내고 또 베어낸다.
피가 다시 흘러내렸다.
"버틸 뿐인가?"
레지오의 목소리가 천천히 울렸다.
손 여전히 단 한 번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 사실이 더더욱 날 미치게 했다.
멈출 수는 없었다. 멈추는 순간 토막이 나버릴 테니까.
한 발이라도, 한 치라도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싸움이다.
그리고 반드시, 저 하늘 끝에 닿아야 한다.
몸을 일으키며 검을 단단히 쥐었다.
바람이 갈라진 듯 짧은 틈이 보였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이 싸움에서 살아남으려면, 전부를 끌어내야 한다.
내면의 세계가 흔들리며 흩어질 것 같았다.
그러나 그 세계를 붙잡아 중심을 다시 세웠다.
흐릿하던 하늘이 또렷해졌고, 그곳에 떠 있는 검이 눈에 들어왔다.
하늘 끝에 닿아 있는, 내 힘의 상징.
그 힘을 끌어내야 한다.
"와라."
검이 진동하며 응답했다.
하늘에 맞닿은 그 거대한 검이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이 레지오의 영역에 완전히 소환되었다.
"··· 흥미롭군."
레지오의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하늘이 뒤틀리고, 그의 바람이 잠시 멈췄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거대한 검을 휘둘렀다.
"흐아아아압"
- 콰아아아아아앙! -
검이 하늘을 가르며 레지오를 향해 찢을듯이 내리 꽂혔다.
레지오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처음으로 손이 움직였다.
손끝에서 검과 비슷한 크기의 거대한 바람 칼날이 형성되었다.
그는 주저 없이 자신을 향해 휘둘러지는 거대한 검쪽으로 만들어낸 칼날을 내질렀다.
바람의 칼날과 검이 충돌했다.
두 힘이 부딪히며 하늘과 땅이 갈라질 듯한 굉음이 울렸다.
- 쿠우우우웅! -
폭발적인 압력이 모든 것을 휩쓸었다.
내면의 세계가 균열을 일으키며 무너져 내렸다.
검은 사라졌고, 몸은 무릎을 꿇었다.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며 땅에 손을 짚었다.
"레이, 역시 넌 뭔가 다르군."
레지오의 목소리가 가까워졌다.
천천히 하늘에서 내려오며 나를 내려다봤다.
"최근 싸움 중 가장 재미있었다."
그가 내 앞에 다가오더니, 조용히 물었다.
"제국으로 올 의향은?"
이를 악물며 대답했다.
"꺼져."
레지오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좋아. 그럼 잘 가라."
그 순간, 레지오의 공간이 뒤틀리기 시작했다.
주변이 검은색으로 물들었다.
마치 세상이 먹칠하듯 어두워졌다.
"내가. 우리 자기. 건들지. 말랬지."
검은 공간 속에서 울려 퍼진 목소리와 함께 여자가 나타났다.
화려한 외투와 빛을 반사하는 듯한 장신구들이 그녀의 등장만으로도 시선을 끌었다.
보랏빛 머리카락은 검은 공간 속에서도 빛나듯 흩날렸고, 핏빛처럼 붉은 눈동자는 날카로운 위협으로 번뜩였다.
그녀는 레이를 감싼 검은 공간에서 튀어나오더니, 그림자로 감싼 창을 휘둘렀다.
창은 마치 자신의 의지를 가진 듯, 레지오를 향해 휘어지듯 날아들었다.
- 쾅! -
레지오는 창을 손으로 붙잡으며 가볍게 막아냈다.
하지만 얼굴은 미묘하게 인상을 찌부린 채 그녀를 쳐다봤다.
"라시엘. 뭐 하는 거지?"
목소리에는 짜증 섞인 기색이 엿보였다.
"내 말을 무시해?"
라시엘의 붉은 눈동자가 더욱 날카롭게 빛났다.
"우리 자기는 내 거야. 나만 상처낼 수 있다고."
그녀의 목소리는 얼핏 들으면 달콤했지만, 그 안에 담긴 광기는 숨길 수 없었다.
레지오는 한숨을 내쉬며 이마를 짚었다.
"하... 머리가 아프군. 진짜."
그리고는 공간을 흔들며 자신의 영역을 풀어버렸다.
공간이 사라지고, 주변은 레지오의 바람이 멈추면서 적막이 내려앉았다.
레지오는 그녀를 차갑게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제국 소식은 들었나?"
"감히··· 감히···"
라시엘의 목소리가 떨렸다.
붉은 눈동자가 흔들렸고, 손에 들린 그림자 창이 더 날카롭게 꿈틀거렸다.
레지오는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내뱉었다.
"듣지도 않는군. 서부에서 철수하라는 명령이 내려왔다. 헛짓거리 하지 말고 철수해."
라시엘의 손이 떨리는 듯했지만, 그의 말에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대신 그녀의 눈은 여전히 레이를 향해 있었다.
레지오는 그녀를 지나쳐 뒤에 무릎을 꿇고 있는 레이를 내려다봤다.
"제법 흥미로웠어. 레이."
레지오가 차갑게 내뱉었다.
"하지만 실망감도 크군. 오늘은 널 죽이기엔 충분했으니까."
그는 천천히 발걸음을 돌려 어두운 밤으로 걸어 나갔다.
쓰러진 레이는 숨을 헐떡이며 간신히 의식을 붙들고 있었다.
체력은 이미 한계를 넘어섰다.
몸은 말을 듣지 않았고, 대답은커녕 고개를 드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검은 그림자처럼 다가온 라시엘.
붉은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짐승처럼 빛났다.
그녀는 조용히, 그러나 집요하게 레이를 내려다보았다.
"우리 자기 이름이 레이였구나."
라시엘이 손끝으로 레이의 뺨을 스치며 나직이 속삭였다.
목소리는 부드럽고 달콤했지만, 그 안에 깃든 광기는 숨길 수 없었다.
"레이, 지금은 힘들지? 나중에 나랑만 놀자."
그녀는 레이의 상처에서 흐르는 피를 조심스럽게 손가락으로 만졌다.
손끝에 맺힌 피를 바라보던 눈빛이 짙어졌다.
그러더니 뺨 상처에 입을 가져다 댔다.
"다친 건 안 돼. 내가 고쳐줄게."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레이를 조심스레 안아 올렸다.
붉어진 얼굴에 만족스러운 표정을 띠고, 어둠 속으로 천천히 스며 들어갔다.
황금연맹 본부 앞
경계하던 병사가 이상한 기척에 고개를 돌렸다.
어둠 속에서 미묘한 소리가 들려왔다.
바람이 스치는 소리 같기도, 무엇인가 움직이는 소리 같기도 했다.
"뭐지?"
병사가 조심스럽게 다가가자, 어둠 속에 누군가가 쓰러져 있었다.
"이게···!"
그는 놀란 얼굴로 급히 외쳤다.
"사람이 쓰러져 있습니다!"
쓰러져 있는 이는 레이였다.
피투성이가 된 그의 몸은 숨을 붙들고 있는 것조차 기적처럼 보였다.
병사는 황급히 레이를 들쳐 업고 본부 안으로 달려갔다.
"빨리! 응급 상황이다!"
그의 외침에 내부는 금세 소란으로 가득 찼다.
레이를 기다리던 아르엔이 피투성이가 된 그를 보고 놀라 소리치며 달려왔다.
"레이!"
옆에서 일레아나도 놀란 얼굴로 뛰어왔다.
"이건··· 너무 심각해요! 당장 치료하지 않으면 위험해요!"
그 순간, 아르엔의 눈에 스쳐 지나가는 기억.
실버블룸.
서둘러 허리춤에서 은빛 약병을 꺼냈다.
"이거면··· 이거면 괜찮아질 거야!"
아르엔은 떨리는 손으로 병을 열어, 레이의 상처에 약을 들이부었다.
"제발, 버텨줘요··· 레이, 제발···!"
그녀의 목소리에는 간절함과 절박함이 가득 담겨 있었다.
소란으로 인해 나온 마르코스가 레이의 상태를 보고 굳어진 얼굴로 말했다.
"치료소로 지금 당장! 서둘러라!"
황금연맹 본부의 소란스러운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던 라시엘.
어둠 속에서 그녀는 고요히 그 장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레이··· 다음엔 나랑 단 둘이 있자."
그녀의 기척은 이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밤은 다시 고요해졌다.
***
레이의 의식은 깊은 어둠 속에서 떠돌고 있었다.
몸은 움직일 수 없었고, 감각은 희미해져 갔다.
그 순간, 어둠 속에서 따뜻한 바람이 불어왔다.
눈앞이 서서히 밝아지며, 익숙한 풍경이 펼쳐졌다.
푸른 하늘 아래 평화로운 언덕, 작은 나무 아래 의자에 앉아 있는 한 노인.
낡은 외투를 입고 손에 나무 지팡이를 들고 있었다.
레이는 그를 보고 본능적으로 이름을 불렀다.
"칼타···?"
의자에 앉아 있던 노인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며 웃었다.
"허허, 오랜만이구나, 레이."
그는 지팡이를 바닥에 톡톡 치며 천천히 일어섰다.
레이는 놀란 얼굴로 물었다.
"당신이 왜 여기에···?"
칼타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왜긴. 쓰러져서 길을 잃은 네가 불러냈기 때문이지. 예전부터 자꾸 나를 귀찮게 하는구나."
그의 말투는 나무라듯 했지만, 얼굴에는 손자를 보는듯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칼타는 천천히 걸어와 레이의 앞에 섰다.
그는 지팡이를 어깨에 걸치고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레이, 지금 너는 강해지려는 목적이 뭔지 기억나는가?"
레이는 순간 멈칫했다.
당연히 대답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건 당연히···"
하지만 그의 입술에서 이어지는 말은 없었다.
"···"
레이는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깨달았다.
눈을 뜬 직후부터 그저 강해져야 한다는 막연한 생각만 해왔을 뿐, 그 이유를 명확히 정한 적이 없었다.
칼타는 그의 침묵을 보고 작게 웃었다.
"그럴 줄 알았네. 강해지려는 목적은 언제부터인가 흐려져 있었겠지. 그저 깨어난 이후, 힘이 있어야 뭔가라도 할 수 있겠다고 생각한 것뿐."
레이는 그 말에 절로 주먹을 꽉 쥐었다.
"힘이 있다고 해서 모든 걸 지킬 수 있는 건 아니다, 레이. 겪어 본 네가 제일 잘 알지 않느냐?"
그의 목소리 안에는 따뜻함이 담겨 있었다.
"네가 강해지려는 이유를 잃는 순간, 그 힘은 네가 아닌 다른 것을 위해 쓰일 뿐이야."
칼타의 말이 그의 마음 깊은 곳을 꿰뚫고 있었다.
"그렇다면··· 전 무엇을 위해 싸워야 하죠?"
"그건 네가 정하는 것이지. 네가 진심으로 지키고 싶은 것을 향해 검을 휘두르다 보면 방향이 잡히지 않을까?"
지키고 싶은 것···?
떠오르는 기억들, 스쳐 지나가는 얼굴들.
마음속 깊은 곳에서 무언가가 꿈틀댔다.
"저는··· 두려웠어요."
레이가 낮게 속삭였다.
"저를 믿지 못했어요. 그래서 강함만을 쫓았던 것 같아요."
칼타는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알았으니 됐다. 레이, 중요한 건 두려워도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야. 네가 믿을 수 있는 건, 네가 선택한 길뿐이다."
칼타의 말이 끝나자, 레이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러다 순간, 머릿속에 불현듯 스쳐 지나가는 단어가 있었다.
"깨어난 이후···"
레이는 문득 고개를 들며 칼타를 바라봤다.
그리고 천천히 물었다.
"칼타··· '깨어난 이후'라면··· 제가 지금 깨어난 걸 알고 있군요?"
칼타는 잠시 멈칫하더니, 묘한 미소를 지으며 지팡이를 톡톡 두드렸다.
"허허, 내가 뭐라고 했더라?"
레이는 이를 악물며 소리쳤다.
"칼타!"
칼타는 조용히 미소만 지을 뿐 더 이상 답하지 않았다.
그는 천천히 몸을 돌려 언덕 너머를 바라보았다.
"레이, 이제 기다리는 사람이 있을 테니 일어나야지."
목소리는 온화했지만, 묘하게 깊은 여운을 남겼다.
칼타의 모습은 점점 희미해졌고, 빛 속으로 서서히 사라져 갔다.
레이는 천천히 눈을 떴다.
낯선 천장이 눈에 들어왔다.
- 작가의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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