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법사 시엔

"500년 전 대전쟁."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그 말속에 담긴 무게는 방 안의 공기를 더욱 짓눌렀다.
"변종 몬스터들의 모습과 성향이 옛 기록에 묘사된 개체들과 매우 흡사합니다."
시엔은 망설임 없이 덧붙였다.
"정확히는, 그들 중 가장 약한 개체와 외관이 일치합니다."
"가장 약한 개체라···"
레지오가 중얼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그의 머릿속은 자연스럽게 제국으로 돌아오는 길에 만났던 변종 몬스터로 향했다.
이미 본래의 모습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뒤틀려 있었다.
근육은 과도하게 부풀어 올랐고, 검게 변한 발톱은 흉물스럽게 빛났다.
그 괴물을 썰어버리던 순간의 감각이 다시 손끝에 스쳤다.
기억이 스쳐 지나가던 찰나, 황제 아르카디우스가 시엔을 바라보며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지금 상황과 연관 짓기에는 500년 전 대전쟁은 너무 과거가 아닌가?"
시엔은 고개를 들고 황제의 질문을 차분히 받아들였다.
"그럴 수도 있습니다, 폐하. 하지만 이 기록에 나오는 개체들의 모습과 성향이 지금의 변종 몬스터들과 일치하는 부분이 너무 많습니다."
재상이 고개를 약간 숙이며 의문을 제기했다.
"어떤 근거로 대전쟁과 연관을 지은 건지 알 수 있나?"
시엔은 침착하게 손을 들어 종이를 펼쳤다.
"이 그림을 보십시오. 대도서관의 기록에 남아 있던 대전쟁 문헌에서 발견한 것입니다."
그녀가 내민 종이에는 괴물의 모습이 섬세하게 묘사되어 있었다.
레지오는 그림을 보자마자 멈칫했다. 그의 눈빛이 흔들렸다.
"이건···"
"왜 그러냐?"
칼리온이 그의 반응을 보고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레지오는 그림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조용히 대답했다.
"제국으로 돌아오는 길에 만났던 변종 몬스터와 상당히 흡사하군. 단순히 비슷하다는 말로 끝낼 수 없을 정도로."
시엔은 고개를 끄덕이며 차분히 설명을 덧붙였다.
"이 그림은 최근에 그린 것이 아닙니다. 500년 전 대전쟁 문헌에 기록된 그림을 복사한 그림입니다."
황제는 잠시 생각에 잠긴 후 입을 열었다.
"원인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겠군."
시엔은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네, 폐하. 아직 그 부분은 명확하지 않습니다."
재상이 고개를 살짝 들며 조용히 물었다.
"현자 라비로스는? 그녀 또한 답이 없다는 것인가?"
시엔은 잠시 침묵했다. 눈빛에는 약간의 망설임이 섞여 있었다.
"스승님도 명확한 답을 구하지 못했습니다."
재상이 깊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숙였다.
"허··· 8왕 중 지혜를 대표하는 라비로스조차 해답을 찾지 못했다면, 이는 단순한 문제가 아니겠군."
방 안에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칼리온이 팔짱을 끼며 고개를 돌렸다.
"시엔, 그분이 이번 문제에 대해 어떤 의견을 남기셨나?"
시엔은 침착하게 대답했다.
"스승님께서는 이것이 단순한 돌연변이가 아니라, 외부에서 작용한 결과일 가능성을 예상하셨어요."
"외부?"
레지오가 흥미롭다는 듯 고개를 들었다.
"그게 무슨 뜻이지?"
시엔은 차분히 설명을 이어갔다.
"스승님께서 말씀하시길, 500년 전 대전쟁 당시에도 유사한 변종이 등장한 기록이 있습니다. 그들의 출현은 자연적인 현상이 아니라, '괴수왕'이라는 존재에서 파생됐거나, 어떠한 작용으로 인해 변종으로 진화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추측의 문헌이 있어요."
"그럼...? 지금 이 현상도 어떤 존재에 의해 파생된 거일수도 있겠군.?"
"여러 가지 가능성 중 하나일 뿐입니다."
시엔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그 '어떤 존재'가 괴수왕인가?"
레지오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시엔은 고심 끝에 입을 열었다.
"말 그대로 가능성일 뿐입니다. 아무도 모르는 거죠. 일단 폐하 보고는 여기까지입니다."
황제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맺었다.
"좋다. 계속 조사를 진행하도록."
회의를 끝내고 대회의실을 나선 칼리온, 레지오, 그리고 시엔.
칼리온이 시엔을 바라보며 물었다.
"시엔, 당분간 돌아다니며 변종 몬스터를 직접 보겠다고?··· 위험하지 않겠어?"
시엔은 그 질문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최근 들은 농담 중 가장 재밌네요."
그녀의 붉은 머리칼이 빛을 받아 은은하게 반짝였다.
"제가 누군지 잊으셨어요? 마나의 화신이라 불리는 시엔이에요."
레지오가 그런 그녀를 보며 물었다.
"그래서 어디로 갈 생각이지?"
시엔은 팔짱을 끼고 한 걸음 앞서며 말했다.
"제국의 수도 에테른에서 서부로 향하는 길목에 있는 칼디아스부터 시작해 볼까 해요. 최근에 나온 곳이 거기니까요."
그녀는 뒤돌아 걸음을 옮기며 한 번 더 미소를 보냈다.
"나중에 다시 봐요. 아마 그때쯤이면 제가 변종 몬스터에 대한 더 흥미로운 이야기를 가져오겠죠."
붉은 머리칼이 은은하게 흔들리며 그녀의 뒷모습이 점차 멀어졌다.
***
"칼디아스로 가야겠어."
레이는 침대에서 일어나며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르엔은 놀란 얼굴로 되물었다.
"칼디아스요? 진짜 제국으로 가시겠다는 거예요? 그 용족 흔적 찾으러요?"
레이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제국을 거쳐야 동부 마법국으로 갈 수 있다니, 어쩔 수 없지."
아르엔은 잠시 말을 삼키다가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그럼 다시 북부로 돌아가는 건요? 아버지도 기다리고 계실 텐데..."
그녀의 말에 발타자르의 초록빛 머리와 터질 듯한 근육이 스쳐 지나갔다.
- 대련이나 한 번 더 해보자 -
웃는 얼굴로 다가오는 그의 모습이 머릿속을 지배하자 괜히 식은땀이 난다.
생각만으로도 기가 빨리는 것 같았다.
레이는 고개를 저으며 단호히 말했다.
"마법국으로 가야 해. 찾아야 될 게 있어."
목소리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레이는 이어 아르엔을 똑바로 바라보며 덧붙였다.
"너는 이제 북부로 돌아가. 서부에서 있었던 일들을 보고해야 하지 않겠냐? 그게 네가 해야 할 일이야."
아르엔은 그 말이 옳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마음이 편치 않았다.
따라가고 싶었지만, 이유를 찾을 수가 없었다. 결국 그녀는 고개를 숙이며 입술을 깨물었다.
"같이 가달라고 하면 따라가 줄 수도 있는데..."
그녀의 불만 섞인 중얼거림에 레이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마음만 받을게. 다시 못 보는 것도 아니잖아. 권왕 아저씨도 아닌 척하지만 네 걱정 한가득일 거야."
레이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시간을 낭비할 새가 없다는 듯 말했다.
"곧바로 마르코스 님이랑 일레아나 양한테 말하고 떠나야겠다. 준비를 해야지."
회의실 문 앞에 가니 안에서 들려오는 진지한 목소리들.
“회의 중인가 보네.”
문을 두드리자 들려오는 마르코스의 목소리.
"들어오게."
방 안에는 문서들이 어지럽게 펼쳐져 있었고, 마르코스, 레오니드, 일레아나가 깊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레이는 문턱에 멈춰 섰다.
"회의 중인데 들어가도 괜찮나요?"
마르코스는 손을 들어 레이를 안으로 들이며 말했다.
"얼마든지."
"칼디아스로 가야겠습니다."
순간 방 안이 조용해졌다. 일레아나가 먼저 말을 꺼냈다.
"눈 뜨자마자 바로 가겠다는 건가요? 조금도 쉬지 않고요?"
"지금도 충분히 쉬었다고 생각합니다만."
레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담담히 말했다.
"공식적으로 받은 서부까지의 호위 임무는 끝났고, 서부 내부 사정도 꽤 안정된 것 같고. 이제 더 이상 제가 여기 머물 이유는 없다고 생각되서요."
마르코스는 가만히 말을 듣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레이에게 다가왔다. 말없이 손을 내밀며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여러 가지로 정말 고마웠네. 말로 다 표현하기 힘들 만큼."
레이는 잠시 그 손을 바라보다가 손을 내밀어 악수를 나눴다.
"의뢰였을 뿐인데요."
떠나려던 순간, 레오니드가 입을 열었다.
"다음에 서부에 오면, 이곳이 얼마나 발전했는지 제대로 보여주겠습니다."
레이는 돌아서던 걸음을 멈추고, 살짝 고개를 돌려 미소를 지었다.
"흠... 기대해 보겠습니다."
어딘가 믿음직하지 않다는 말을 듣고 레오니드가 당황해하는 모습에 일레아나가 웃음을 터뜨렸다.
황금연맹 정문 앞.
모든 준비를 마친 레이와 아르엔이 서 있었다.
이내 일레아나가 나와 두 사람을 배웅했다.
"정말 감사했습니다. 두 분 덕분에 일이 무사히 끝났어요."
일레아나는 고개를 숙이며 진심 어린 인사를 건넸다.
아르엔은 가볍게 손을 흔들며 말했다.
"저야말로 감사합니다. 이번에 정말 많은 걸 배웠거든요."
레이는 그런 아르엔을 보며 미소를 짓더니, 두 사람에게 악수를 건넸다.
"재밌었어요. 아르엔도 발칸으로 조심히 가고."
레이가 무언가 잊었다는 듯 갑자기 고개를 들며 말했다.
"아, 맞다. 깜빡할 뻔했네요."
일레아나와 아르엔은 동시에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다.
"혹시 드워프에게 연락이 올 수도 있습니다. 그때 저를 찾는다면, 제가 제국을 거쳐 동부 마법국으로 가는중이라고 말해주세요."
"드워프요?"
아르엔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레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
"이름은 두르만이야. 외모는··· 아마 10대 초중반으로 보일 텐데 눈을 보면 바로 알 거야. 그 나이대 소년이 가질 수 없는 눈이니까."
일레아나와 아르엔은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만나게 되면 알아볼 수 있을 거예요. 부탁드릴게요."
이 말을 끝으로 두 사람을 향해 작별 인사를 건넸다.
"그럼, 다음에 보는걸로."
칼디아스로 가는 길이 묘하게 설렌다. 제국을 거쳐 마법국으로 향하고, 그곳에서 칼타의 흔적을 찾게 될지도 모른다는 기대감 때문일까.
오랜만에 눈앞에 뚜렷한 목표가 생긴 탓인지, 왠지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 기분이다.
***
"아... 분명 벨포로트를 떠날 때까지만 해도 기분이 좋았는데."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아니, 칼디아스에 도착했을 때도 괜찮았는데..."
옆에 있는 여자를 힐끔 쳐다봤다.
붉은 머리에 루비 같은 눈동자. 마치 빛을 품은 듯 오묘하게 반짝이는 그녀의 눈은 날카로운 고양이를 떠올리게 했다.
‘어쩌다 이 여자랑 엮이게 된 거지.’
속으로 탄식이 절로 나왔다.
‘망할 의뢰만 아니었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잠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칼디아스를 막 도착한 레이
벨포로트를 떠나 칼디아스에 도착했을 때만 해도, 꽤나 여유로웠다.
제국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도시라는 건 익히 알고 있었지만, 직접 보니 분위기가 확실히 달랐다.
도시 성벽은 흰 대리석으로 만들어져 햇살 아래서 우아하게 빛났다.
번화한 거리엔 제국에서 온 고급 상품들이 가득 진열되어 있었고, 사람들의 옷차림은 하나같이 화려했다.
상인들은 정신없이 목소리를 높이며 제국의 물품을 자랑하고 있었다.
‘확실히 제국에 가까운 도시라는 게 한눈에 보이는군.’
천천히 거리를 걸으며 도시를 둘러봤다. 이런 화려한 분위기를 느껴본 게 대체 얼마 만이었을까.
간단히 식사를 마치고는 늘 하던 대로 길드를 찾았다. 길드는 언제나 도시의 분위기를 파악하기에 가장 좋은 장소였다.
칼디아스 길드의 외관은 지금까지 봐왔던 길드와 완전히 달랐다.
고급 연회장을 연상시키는 화려한 장식과 웅장한 기둥, 정교하게 조각된 문양들이 건물을 감싸고 있었다.
"호오... 상당한데."
작게 감탄하며 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섰다.
길드 내부는 외관보다 더 인상적이었다. 긴장감이 가득한 분위기, 그리고 그 이유는 금세 눈에 들어왔다.
이곳에 모여 있는 이들의 기운.
한눈에 봐도 A급 이상인 용병들이 곳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번쩍이는 장비와 날카로운 기운이 그들의 실력을 증명하고 있었다.
‘제국 근처라 그런가.'
최신 소식이 붙어 있는 게시판 앞으로 다가가며 중얼거렸다.
게시판에는 크고 작은 의뢰들이 가득했다. 그러나 눈길을 끈 건 단 하나의 소식지였다.
"변종 몬스터?"
작게 중얼거리며 소식지를 읽기 시작했다.
뿔이 여러 개 달린 비정상적인 형태의 짐승.
단순히 힘만 강한 게 아니라 빠른 재생력까지 갖춘 녀석이라고 적혀 있었다.
피해 상황도 자세히 기록되어 있었는데, 여러 마을이 이 변종 때문에 폐허가 됐다는 내용이었다.
"재생력이라. 이거 점점..."
혼잣말이 저절로 나왔다. 재생력까지 갖춘 변종이라니.
단순한 돌연변이가 아니라는 기시감이 들기 시작했다.
눈을 가늘게 뜨며 글을 읽던 중, 머릿속에 떠오른 건 대전쟁 초기의 기억이었다.
본능적으로만 움직였던 최하급 괴수들.
괴수왕 오거의 힘을 티끌만큼 받았던 녀석들. 그들이 떠올랐다.
어느새 심각한 표정을 하고 중얼거리고 있었다.
"오거..."
"오거?"
갑작스러운 목소리에 흠칫하며 고개를 돌렸다.
루비 같은 눈동자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 안에 오묘하게 빨려 들어갈 것 같은 마나가 일렁이고 있었다.
붉은 머리에 날렵한 고양이를 떠올리게 하는 여자.
그녀가 들고 있는 소식지를 힐끔 보며 말을 걸어왔다.
"괴수왕 오거 말하는 건가?"
그녀의 말에 레이의 눈이 좁아졌다. 분명 처음 보는 얼굴인데, 대뜸 이런 단어를 꺼내다니.
"괴수왕 얘기를 꺼낸 걸 보니, 너도 이쪽에 관심 좀 있는 것 같네."
말끝에 입꼬리를 올리며 한마디를 덧붙였다.
"나랑 일 하나 하지 않을래?"
- 작가의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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