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도시

스톤가드는 주먹을 꽉 쥔 레이를 잠시 보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야기는 이쯤에서 마무리하자. 편히 쉬도록 해라."
그의 말에 장로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흩어졌다. 라움은 떠나기 전, 레이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두르만님의 소식을 전해줘서 고맙다. 그분의 이름을 다시 들을 수 있어 영광이었다."
그렇게 모두 자리를 떠나고, 레이와 시엔은 대공방을 나와 드워프가 안내하는 숙소로 갔다.
시엔은 자신이 할 말을 다 했다는 만족감에 얼굴이 밝아 보였다.
"같은 8왕이라도 스승님이나 칼리온이랑은 분위기가 완전히 다르네! 스톤가드는 처음엔 무서운 줄 알았는데, 진짜 뭔가 강철 같은 느낌이야."
조잘조잘 말을 이어가던 시엔은 레이의 표정이 어두운 것을 보고 멈칫했다.
"레이, 무슨 일 있어? 표정이 안 좋아 보여."
레이는 그제야 자신의 표정이 좋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억지로 웃으며 말했다.
"아무것도 아니야."
시엔은 의아한 듯 레이를 쳐다보다가, 그의 팔에 새겨진 각인을 보며 물었다.
"그나저나, 드워프 장로랑은 어떻게 친분이 생긴 거야?"
"우연히 서부에 들렀다가 알게 된 드워프야. 그런데 이 정도의 영향력을 가진 분인지는 몰랐어."
레이는 대답을 하고 시엔에게 물었다.
"근데 제국에서의 회의는 뭐였어?"
시엔은 자신감이 찬 듯 붉은 머리를 손으로 쓸어 넘기며 말을 이어갔다.
"내가 그래도 인간국가에서는 영향력이 강한 사람이거든. 중요한 스승님의 말씀을 대신 전한 거야."
그러면서 제국에서 이야기했던 내용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그녀가 레지오의 이야기를 꺼내자, 레이는 미세하게 움찔했다.
그 반응을 본 시엔이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레지오 알아?"
레이는 애써 평정을 유지하며 얼버무렸다.
"그냥 좀···"
시엔은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
"아~ 레지오가 말한 게 너였구나!"
레이는 눈썹을 살짝 찌푸리며 반문했다.
"레지오가 뭘 말했는데?"
"재밌는 녀석을 만났다고 하던데?"
레이는 레지오를 떠올리며 얼굴을 찡그렸다.
깔끔하게 올백으로 넘긴 금발과 사파이어 같은 눈동자가 선명히 떠올랐다.
"재수 없는 놈."
시엔은 레이의 반응이 재미있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레이, 너 되게 강한가 보다?"
레이는 뚱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왜?"
"레지오가 그렇게까지 말한 사람은 8왕들 말고는 없었거든. 게다가 칼리온이 전에 말한 적 있어. 레지오랑 진심으로 싸우면 쉽게 끝나지 않을 거라고."
"몰라."
레이는 짧게 대답하며 시선을 돌렸지만, 시엔은 그의 반응에 더욱 흥미를 느낀 듯 말을 이어갔다.
"처음 길드에서 봤을 땐 괴수왕이니 용족이니 옛날이야기에 관심 많은 사람인 줄 알았는데, 드워프 친우 각인에 레지오랑 한바탕 한 사람이었네?"
붉은 머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웃음을 머금은 시엔을 보며, 레이는 인상을 찌푸렸다.
"라시엘은 알아?"
시엔의 질문에 레이는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봤다.
"그 미친 여자는 어떻게 알아?"
"어쩌다 보니."
"그 여자? 반은 인간, 반은 마계인이지. 엮이는 거 별로 안 좋을 텐데."
"반은 마계인? 그게 무슨 말이야?"
"뱀파이어야. 정확히는 인간과 뱀파이어 사이에서 태어났다고 들었어."
레이는 그녀의 설명을 듣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렇게까지는 안 보이던데."
"특이 케이스라 그래. 무튼, 엮이는 건 별로 좋은 일이 아닐 거야."
시엔은 손을 저으며 더는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는 듯 말을 끊었다.
"암페리온에 온 김에 좀 더 자세히 둘러봐야겠어. 드워프들이 만들어 놓은 시설들을 직접 보고 싶거든."
레이는 피곤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알겠어. 난 쉬러 들어갈게."
하지만 시엔은 그의 손을 잡아끌며 말했다.
"무슨 소리야! 같이 가자니까. 이런 기회를 놓치면 안 되잖아!"
레이는 힘없이 끌려가며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며칠 동안 암페리온을 돌아다니며 다양한 것을 구경한 시엔은 학구열을 불태우며 드워프들과 친해졌다.
한두 번 레이까지 끌고 다니며 바위산 이곳저곳을 탐방했지만, 결국 레이는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방으로 도망쳤다.
그럼에도 시엔은 특유의 친화력으로 암페리온 곳곳에서 드워프들과 금세 친해졌다.
특히 장로 라움과는 이야기를 나누며 점점 가까워졌다.
어느 날, 시엔은 라움에게 물었다.
"라움 장로님, 혹시 지하도시가 번영하던 시절에 대해 알 수 있을까요? 그때는 어떤 모습이었나요?"
라움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나는 그 시절에 태어나지 않아 직접 본 것은 없지만, 몇 안 되는 기록들을 통해 알 수 있지.
그때의 암페리온은 정말로 찬란했어."
라움은 드워프들의 역사가 담긴 부조를 가리키며 이어 말했다.
"기록들을 보면, 지하에 인간 국가와 같은 구조를 설계하고 건설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 당시의 기술력이 얼마나 뛰어났는지 알 수 있다. 우리 드워프들은 빛을 끌어들이는 마나 기술을 사용해 지하에서도 밝게 살았고, 각종 공방과 연구소가 끊임없이 돌아갔다고 하더군."
시엔은 눈을 반짝이며 라움의 말을 경청했다.
"지하에서 그런 국가를 만들었다니, 정말 놀라워요! 드워프들이 그렇게 정교한 설계를 했다니··· 상상만 해도 멋지네요."
라움의 얼굴에 잔잔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 시절은 기록으로만 봐도 굉장히 빛나던 시기였던 것 같아. 우리가 만든 것들로 얼마나 많은 것을 이뤘는지 생각하면 정말 자랑스럽지 않을 수 없지."
그는 벽에 새겨진 오래된 부조를 손끝으로 어루만지며 덧붙였다.
"비록 지금은 모든 것이 무너졌지만, 그때의 기술력과 열정은 우리가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는 전통의 뿌리야."
시엔은 대화 중에 문득 물었다.
"라움 장로님, 혹시 옛 터전 근처에는 가볼 수 없나요?"
라움은 잠시 고민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갈 수는 있지. 하지만 이제 거긴 다 무너지고, 들어가는 입구조차 사라져서 황량한 공터일 거야. 과거 선조들이 살았을 때는 '옛 터전'이라며 관리를 했지만, 대전쟁이 터지고 500년이 흘렀지. 우리가 바위산으로 터전을 옮긴 후에도 두르만 님이 계셨을 때는 관리가 되었지만, 그 이후 300년 가까이 방치된 곳이야."
시엔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그래도 그곳이 뿌리 아닌가요? 그렇게 둬도 괜찮은 거예요?"
라움은 잠시 공터를 바라보듯 고개를 들어 생각에 잠겼다.
"솔직히 말하면, 나를 포함해 대부분의 드워프들은 이제 바위산이 우리의 고향이라고 생각하지. 우리가 태어나고 지켜온 곳은 여기니까. 지하도시는 과거의 빛나는 유산이 매몰된 장소일 뿐이다."
라움은 다시 부조를 가리키며 미소 지었다.
"진짜 유산은 장소가 아니라, 드워프들에게 계승되고 있어. 지금 이곳에 숨 쉬고 있는 드워프들이야말로 과거의 뿌리 아니겠나."
시엔은 그의 말에 감탄하며 웃었다.
"정말 멋진 말씀이네요."
그러나 그녀의 학구열은 쉽게 사그라들지 않았다.
"그래도 한 번 가보고 싶어요!"
라움은 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 나도 정말 오랜만에 그곳에 가보는군. 같이 가보자."
옛 터전, 지하도시 근방
라움과 시엔은 바위산을 내려와 옛 지하도시 근방에 도착했다.
그곳은 이미 황량한 공터로 변해 있었다.
한때 드워프들이 살았다는 흔적은 거의 사라졌고, 무성한 풀이 넓은 공간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간간히 삐져나온 건축물의 잔해만이 이곳이 과거 지하도시였다는 것을 미약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시엔은 넓은 공터를 둘러보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뭔가··· 많은 생각이 드네요."
라움은 그녀를 잠시 바라보더니, 다시 공터를 응시하며 말없이 가만히 서 있었다.
그 순간, 시엔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녀는 공터의 끝자락에서 아주 약하게 흔들리며 땅밑으로 스며드는 마나 입자들을 느꼈다.
"음?"
시엔은 고개를 갸웃하며 공터 끝자락을 응시했다. 그녀의 반응을 본 라움이 물었다.
"왜 그러느냐?"
시엔은 잠시 공터를 살피더니 대답했다.
"아니요··· 뭔가 좀 이상해서요. 마나가 왜··· 스며들어가죠?"
라움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주변을 둘러봤지만, 별다른 이상은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시엔은 달랐다. 그녀는 '마나의 화신'이라 불리는 이명을 가진 자였다.
마나에 대한 감각만큼은 절대적인 수준으로, 미세한 이질감도 그녀를 피해 갈 수 없었다.
시엔은 공터에 존재하는 마나가 아주 미량이지만 지하로 스며드는 것을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장로님,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시엔은 몸을 띄워 공중으로 올라갔다. 미묘한 이질감이 느껴지는 장소로 삽시간에 날아가며, 넓은 공터 전체를 내려다봤다.
그리고, 마나를 집중시켜 공터에 대한 스캔을 시작했다.
마나 스캔이 점점 깊어지던 중, 그녀의 감각이 지하 어딘가에서 무언가를 포착했다.
라움에게 돌아온 시엔은 의아하다는 듯 말했다.
"···뭔가 있어요."
라움은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뭔가 있다니? 이 밑에?"
"네. 뭔가 움직이고 있어요."
라움은 잠시 멈칫하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잘못 느낀 게 아니겠지? 여긴 아무도 없는 곳인데."
하지만 시엔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확실히 밑에서 무언가가 움직였어요. 아주 미약하지만 분명히 감지됐어요."
라움은 팔짱을 끼고 지하로 시선을 돌리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여긴 살아있는 생명이 사라진 지 오래인데···"
그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돌려 시엔을 바라봤다.
"이건 왕께 보고해야겠군. 진짜로 무언가가 움직이고 있다면, 꽤 심각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존재해서는 안 되는 게 이 지하에 있을 가능성이 있다는 거니까."
라움의 말에 시엔은 어딘지 불길한 기운을 느낀 듯, 얼굴이 살짝 굳었다.
"설마··· 언···언데드···?"
그녀는 그렇게 말해놓고는 고개를 저으며 스스로 부정했다.
"아니에요, 말도 안 돼요. 언데드는 생성 조건이 상당히 까다롭다고 알고 있어요."
라움이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는 가운데, 시엔은 빠르게 생각을 정리하며 말을 이어갔다.
"상당히 오래된 원망 어린 사념체가 필요하고, 그 사념체들이 스며들 수 있는 대량의 시신. 그리고 그런 걸 유지할 수 있는 음습한 공간까지··· 게다가 이 모든 걸 가능하게 하는 마나가 있어야만 언데드가 만들어질 수 있는데···"
시엔의 말이 점점 느려졌다. 그녀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리며 무언가를 깨달은 듯 조용히 멈췄다.
"···지하도시가···"
시엔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
레이는 며칠 동안 시엔의 학구열에 시달리며 암페리온의 구석구석을 끌려 다니다가 틈을 봐 방으로 도망친 상태였다.
잠시나마 시엔에게서 벗어난 레이는 한숨을 돌리며 스톤가드를 찾아 대공방으로 향했다.
스톤가드는 대공방에서 커다란 망치를 들고 무언가를 담금질하고 있었다. 레이가 들어오자, 담금질을 멈추고 천천히 돌아봤다.
"뭔 일인가, 레이?"
레이는 스톤가드가 하던 일을 멈춘 것이 신경 쓰였는지 물었다.
"그렇게 멈춰도 괜찮아요? 중요한 작업 같은데."
스톤가드는 망치를 내려놓으며 웃었다.
"이미 마무리 단계였으니 괜찮다. 그런데 무슨 일이냐?"
레이는 잠시 망설이다가 솔직히 말했다.
"대련이 하고 싶어서요. 막연히 강해지고 싶다는 생각만 했었는데, 오랜 친우의 조언 덕분에 뒤늦게 길의 방향을 찾아가고 있는 중입니다."
스톤가드는 레이를 바라보다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바위산 아래에 대련장이 있다. 그곳으로 가자."
스톤가드는 망치를 내려놓고 대련장으로 향하려던 찰나, 대공방의 문이 급하게 열렸다.
라움과 시엔이 다급한 얼굴로 대공방으로 들어왔다.
라움이 스톤가드에게 말했다.
"왕께서 옛 터전에 가보셔야겠습니다."
스톤가드는 순간 당황한 얼굴로 되물었다.
"옛 터전이요? 그곳은 갑자기 왜?"
라움이 대답하려 했지만, 시엔이 대신 말을 받았다.
"지하도시에 무언가가 움직이고 있어요."
스톤가드는 잠시 이해하지 못한 듯 미간을 찌푸렸다.
"옛 터전 지하에 무언가가 움직일 리가 없을 텐데? 그곳은 오래전에 다 무너졌지 않나?"
시엔은 단호하게 말했다.
"언데드일 확률이 있습니다."
그 한마디에 스톤가드와 레이의 얼굴이 동시에 굳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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