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주 한잔의 여유

지상의 깨끗한 공기가 지하로 흘러들어오며 먼지가 점차 걷혔다.
새롭게 드러난 광활한 공터를 보며 라움은 망연자실한 눈빛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흩어진 잔해와 텅 빈 공간을 바라보던 그는 허리춤에서 광장에 들어오기 전 주었던 망치를 꺼내 들며 중얼거렸다.
"옛... 옛 문헌들이... 옛 유적들이..."
레이는 곧 시엔을 돌아보며 물었다.
"언데드를 유지하던 힘은 끊긴 거 맞지?"
시엔은 잠시 레이를 바라보다가, 다시 위로 뚫린 하늘을 올려다보며 대답했다.
"누가 보면 대마법이라도 터진 줄 알겠네... 지형이 바뀌었으니 당연히 끊겼지."
레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먼지가 걷히는 광장을 바라보다가, 손을 들어 무언가를 가리켰다.
"그럼 저건 뭐지?"
점차 흩어지는 먼지 사이로 희미한 영체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영혼들은 천천히 스톤가드 쪽으로 몰려들었다.
시엔은 그들을 보며 조용히 말했다.
"저건... 해방된 영혼들... 같은데?"
영체들은 스톤가드의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그들의 움직임은 느리지만, 그 속엔 깊은 감정이 담겨 있었다.
영체들은 감사하다는 듯 고개를 숙이며 하나둘씩 빛으로 사라졌다. 그중에서도 강한 의지를 가진 드워프의 영혼 하나가 스톤가드 앞에 멈춰 섰다.
- 현재의 왕이십니까? -
스톤가드는 사라져가는 영혼들을 잠시 바라보다, 말을 건 영혼에게 고개를 돌리며 대답했다.
"내가 드워프의 왕, 스톤가드다."
- 저희를 해방시켜 주셔서 감사합니다. -
일행이 스톤가드에게 다가오는 동안, 시엔은 말을 건 영혼을 유심히 바라보다가 물었다.
"강인한 전사의 영혼일수록 의지가 강해서 망령으로 변하기 어려운 걸로 알고 있어요. 그런데 어떻게 망령이 되어 언데드로 일어날 수 있었죠?"
시엔의 질문에 드워프의 영혼은 잠시 스톤가드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리며 대답했다.
- 그 의지를 꺾을 만큼 강렬한 원념이 여기에 스며들었으니까. -
레이는 그 말에 움찔하며 다시 물었다.
"그 강렬한 원념··· 어떤 느낌이였는지 기억 납니까?"
드워프의 영혼은 잠시 침묵하다가 낮고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 단순했다. 그러나 그 단순함이 모든 걸 집어삼켰다. 끝이 아니다. 부활하라. 그 메시지는 칼날처럼 머릿속을 가르고, 다른 어떤 생각도 허락하지 않았다. 단순하고, 그래서 더 강렬했다. -
영혼은 점차 흐려지며 스톤가드를 향해 마지막으로 고개를 숙였다.
- 암페리온에 무한한 영광이 깃들기를. -
말을 마친 영혼은 완전히 사라졌다.
시엔은 스톤가드가 뚫어버린 지하의 구멍을 올려다보더니 마법으로 일행을 부유시켜 천천히 지상으로 이끌었다.
지상에 오르자마자 바위산 곳곳에서 드워프들이 놀라서 무기를 들고 몰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들은 갑작스럽게 울린 굉음과 함께 분화구처럼 뻥 뚫린 꼭대기와 솟아오른 지반을 보며 경계심을 품고 있었다.
분화구에서 나오는 일행을 확인하자 긴장감이 풀린 듯 안도하며 몰려들었고 라움이 상황을 차분히 설명하며 그들을 진정시켰다.
레이는 그 틈에 스톤가드에게 다가가 물었다.
"저 공간은 어쩔려구요? 이제는 공터가 아니라 암페리온처럼 산이 돼버렸는데요."
스톤가드는 잠시 분화구를 내려다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나의 방임이 어떤 식으로 돌아오는지 알았으니, 다시는 그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해야지."
그는 천천히 드워프들을 향해 걸어가더니 목소리를 높였다.
"과거의 터전이자 새롭게 솟아난 이 산을 중심으로 지하까지 제2의 암페리온을 만든다."
그리곤 라움을 향해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부탁드리겠습니다, 장로님. 내부가 완전히 무너지지 않았으니, 옛 문헌이나 기술이 꽤 남아 있을 겁니다."
라움은 "옛 문헌"과 "기술"이라는 말에 흥분한 듯 반짝이는 눈으로 대답했다.
"왕이시여,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어떻게든 복구해 보이겠습니다!"
그의 열정적인 목소리가 드워프들의 의지를 북돋우며, 새롭게 태어날 암페리온의 시작을 알렸다.
바위산 암페리온 광장은 축제의 열기로 가득 차 있었다.
드워프들은 새로 생긴 터전을 기념하며 술과 고기를 나누고, 뜨거운 열기에 취해 있었다.
커다란 술잔이 넘쳐흐르고, 고기를 굽는 냄새가 공기를 메웠다. 축제는 점점 더 뜨거워졌고, 드워프들의 웃음소리가 밤하늘에 울려 퍼졌다.
라움은 드워프들 사이에서 중심에 서서 손짓하며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옛 지하 도시들의 웅장함, 언데드와의 치열했던 사투, 본드레이크의 무시무시한 위용, 그리고 시엔의 마법까지.
생생한 묘사에 드워프들은 환호하며 넋을 놓고 빠져들었다.
"그 본드레이크라는 놈은 얼마나 거대했다고?"
"손 짓으로 그런 마법을?"
라움의 이야기가 점점 더 고조되자, 드워프들은 술잔을 들고 환호하며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한편, 시엔은 자신의 마법 이야기가 나오자 얼굴을 붉히며 술잔을 들었다.
"아, 뭐··· 그냥 평범한 마법이에요. 다들 너무 과장하시는 거 아니에요?"
그녀는 쑥스러워하면서도 드워프들과 함께 웃고 떠들며 축제의 분위기를 즐겼다.
반면, 레이는 한쪽 구석에 앉아 조용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결국 변종 몬스터는 최하급 괴수였고, 오거의 부활을 암시하는 거였나.’
머릿속에는 드워프 영혼이 남긴 마지막 말이 맴돌았다.
- 끝이 아니다. -
그 목소리는 점점 커지며, 오거의 목소리와 겹쳐 들리는 듯한 착각을 일으켰다. 레이는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그때, 스톤가드가 맥주잔을 들고 레이 곁에 다가왔다.
"생각이 많은 것 같군."
레이는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며 잠시 망설이다 대답했다.
"··· 설명하기가 좀 복잡하네요."
스톤가드는 잠시 레이를 바라보더니 웃으며 말했다.
"지하도시에 들어가기 전에도 똑같이 말하지 않았나."
그러면서 손에 들고 있던 맥주잔을 건네주며 말했다.
"일단 한잔 마시면서 생각하지."
레이는 맥주잔을 받아들고 잠시 쳐다보았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잔을 들어 한 번에 쭉 들이켰다.
그 모습을 보던 스톤가드는 조용히 미소를 짓다가 말했다.
"인간의 수명은 짧지만, 어떤 종족보다 불타는 삶을 사는 것 같군. 마치 끝없이 담금질을 당하는 쇠처럼."
스톤가드는 멀리서 드워프들과 어울리며 웃고 있는 시엔을 바라보더니 다시 레이를 쳐다보며 말했다.
"넌, 여유가 없어 보인다. 뭐가 그리 급한 거지?"
레이는 입을 열 듯하다가 말을 삼켰다. 스톤가드는 레이의 그런 모습을 보고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 후, 스톤가드는 빈 맥주잔을 들고 다시 돌아왔다.
뜬금없이 빈 맥주잔을 들고 온 스톤가드의 행동에 레이는 의아한 눈길로 그를 쳐다보았다.
스톤가드는 아무 말 없이 맥주잔에 커다란 자갈들을 담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레이에게 물었다.
"이 맥주잔, 가득 찼다고 말할 수 있나?"
레이는 잠시 그를 바라보다 대답했다.
"당연히 다 찼죠."
스톤가드는 웃으며 자갈들 사이사이에 작은 알갱이들을 집어넣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시 물었다.
"그럼 이제는?"
레이는 잠시 멈칫하다가 대답했다.
"··· 다 찼죠."
스톤가드는 이번엔 모래를 가져와 자갈 사이를 채워 넣었다.
"지금도?"
레이는 당황한 듯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 뭐, 이제는 진짜 다 찼겠죠."
그러자 스톤가드는 웃으며 맥주를 그 잔에 천천히 부었다. 맥주가 모래 사이사이를 메우며 맥주잔에 채워졌다.
스톤가드는 잔을 기울이며 조용히 말했다.
"너무 많은 생각은 오히려 머릿속을 더 복잡하게 만들지. 가장 중요한 것을 기준으로 잡고, 나머지는 맥주 한잔 마시는 여유를 가지면서 되돌아봐라."
그러더니 레이를 가리키며 웃었다.
"그리고 누군가와 함께 마시면서 고민을 털어놓으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
레이는 스톤가드의 말을 곱씹으며 조용히 잔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는 작게 웃으며 술잔을 들었다.
"맥주 한잔의 여유라···" 그는 스스로 중얼거리듯 말하며, 그 말이 어쩐지 가슴속 깊이 와닿는 듯했다.
레이는 맥주잔을 들고 스톤가드를 향해 내밀었다.
"역시 오래 사는 종족은 생각의 깊이가 다른데요?"
스톤가드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난 아직 드워프 중에선 젊은 편이다."
두 사람은 잔을 부딪히며 맥주를 들이켰다. 스톤가드는 시원하게 웃으며 맥주를 비웠고, 레이는 잔을 내려놓으며 미소를 지었다.
"덕분에 생각이 얼추 정리됐어요. 일단 즐길 거부터 즐기고 다시 고민해볼게요. 고마워요, 스톤가드."
스톤가드는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이며 잔을 내려놓았다.
"그거면 됐다. 지금은 즐길 때니까."
레이는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라움과 시엔이 있는 쪽으로 걸음을 옮기자, 라움은 손을 흔들며 반겼다.
"레이! 빨리 와서 같이 마셔!"
시엔도 술잔을 들고 레이를 향해 환하게 웃었다.
"레이! 혼자 심각하게 있더니. 빨리 와서 마셔! 이 누나가 같이 마셔준다!"
레이가 그들과 어울리기 위해 다가가자 웃음소리는 더 커졌고, 축제는 더욱 활기를 띠었다. 술잔이 부딪히고, 웃음이 광장을 가득 메웠다.
암페리온의 밤은 그렇게 웃음과 함께 깊어지고 있었다.
***
광활한 사막과 초원 사이, 희미한 빛만이 어둠을 간신히 비추는 고대의 던전.
깊은 침묵 속, 두 형체가 서 있었다. 빛 아래 서 있는 자는 2미터에 달하는 키에 날렵한 실루엣을 지녔다.
뼈와 검은 금속으로 이루어진 지팡이를 짚은 모습은 마치 죽음이 형상화된 듯했다.
그가 지팡이를 바닥에 한 번 두드리자, 희미한 푸른빛이 어둠 속에서 깜빡였다.
"본드레이크가 끊어졌군."
어둠 뒤에서 움직이는 또 다른 형체가 천천히 드러났다. 비슷한 키였지만, 그는 훨씬 거대했다.
단단한 갑각처럼 보이는 피부와 울퉁불퉁한 뿔들이 흐릿한 빛 아래 모습을 드러냈다. 발소리만으로도 공간이 미세하게 떨리는 듯했다.
"암페리온?"
거대한 형체가 말하자 낮은 목소리가 던전에 울렸다.
"그래."
지팡이를 짚은 형체가 고개를 들자 붉은 눈이 어둠 속에서 빛났다.
"드워프들이 옛 지하 도시를 신경 쓸 정도로 한가했단 말인가?"
목소리는 의아함과 조소가 뒤섞인 냉랭한 울림이었다.
지팡이를 짚은 형체는 어둠 속에서 천천히 연기를 피워 올리며 중얼거렸다.
"이상하군. 드워프 따위가 지하에서 일어나는 일을 알아챘단 말인가."
거대한 형체는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부정했다.
"왕께서 퍼뜨려둔 원념이야. 아주 서서히, 몇백 년 동안 땅속 깊이 스며들게 했지. 드워프 따위가 감지할 수 있는 영역은 아니었다."
지팡이를 짚은 형체는 연기를 손끝에서 흩날리며 흥미롭다는 듯 낮게 웃었다.
"아깝군. 원념에 물든 본드레이크가 완성되었다면, 꽤 흥미로운 장난감이 되었을 텐데."
거대한 형체가 천천히 벽 쪽으로 걸음을 옮기자, 발소리가 던전 바닥을 울렸다.
"어차피 방치된 곳이었다. 왕께서 그리 신경 쓰시지 않았던 자리였으니까."
그는 어둠 속 어딘가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왕께서 퍼뜨려둔 원념은 이제 서서히 깨어나고 있다."
붉은 눈을 빛내던 지팡이를 짚은 형체가 낮게 중얼거렸다.
"깨어난다라··· 그래. 서서히 발아하는 이상, 속도는 빨라지고 막을 수 없을 거다."
거대한 형체는 고개를 들며 낮고 묵직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왕께서 남긴 의지가 모든 것을 삼킬 테니. 이번엔 인간 따위가 과연 우릴 막을 수 있을까?"
그 말을 들은 지팡이를 든 형체가 연기를 흩날리며 고개를 저었다.
"아직은 우리가 움직일 수 없다. 힘이 회복된 게 아니니. 게다가 아직 깨어나지 않은 장군들도 있다."
거대한 형체가 잠시 침묵하며 붉은 눈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그러자 지팡이를 든 형체가 나직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어차피 인간은 화합이란 걸 하지 못하는 종족. 대전쟁 때처럼 거대한 적이 나타나지 않은 이상, 내버려두면 알아서 약화된다."
그는 손끝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를 흩뿌리며 차갑게 말했다.
"우리가 직접 움직일 필요는 없다. 괴수들은 이미 세상에 퍼질 준비를 마쳤으니, 그들이 저들 스스로를 갉아먹게 만들 것이다."
두 형체는 말을 멈추고 어둠 속으로 천천히 사라졌다. 남겨진 공간에는 차가운 공기와 불길한 기운이 짙게 남아 있었다.
던전의 끝없는 어둠 속, 진화한 괴수들이 서서히 깨어날 준비를 하고 있는 듯, 희미한 떨림이 바닥을 타고 퍼져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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