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급 괴수 (2)

"귀찮아지겠는데."
다크에즈는 몸을 움츠리더니 순간적으로 위로 튀어 올랐다.
공중에서 몸이 액체처럼 퍼지며 넓게 흩어졌다.
퍼진 몸 곳곳에서 가시가 솟구치더니, 하늘에서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검을 돌리며 가시를 튕겨내는 동시에 의념을 집중했다.
흩어진 다크에즈의 중심에서 희미하게 검붉은 핵이 보였다.
‘최하급 괴수들처럼 선명하게 보이는 게 아니군.’
공격이 끝나갈 무렵, 검을 핵 쪽으로 강하게 휘둘렀다. 그러나 핵은 순간적으로 다른 위치로 이동했다.
눈을 좁히며 중얼거렸다.
"... 설마 진화할수록 핵이 의미가 없어지는 건 아니겠지."
다크에즈는 땅으로 착지했다. 처음 공중에 점프했을 때보다 몸의 크기가 눈에 띄게 작아졌다.
검은 형체는 소리 없이 웃는 듯한 모습을 취했다. 이내 손처럼 보이는 형체를 만들어내더니 움켜쥐는 제스처를 취했다.
그와 동시에 땅에 박혀 있던 가시들이 공중으로 떠올랐다.
가시들은 다크에즈로 돌아가며 흡수되는 궤적을 그리면서, 레이를 관통할 듯한 방향으로 빠르게 움직였다.
"뻔히 보이네."
짧게 중얼거리며 손모양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가시들이 다크에즈로 향하기도 전에 빠르게 움직이는 검날에 의해 손을 포함해 8등분으로 갈라졌다.
그때 시엔이 도착했다.
시엔을 향해 소리쳤다.
"이 검은 덩어리, 불로 지져버려!"
시엔은 말을 듣자마자 손가락을 튕겼다. 순식간에 화염이 다크에즈의 조각들을 휩쌌다.
8등분 당한 다크에즈는 뜨거운 불길 속에서 그대로 녹아내리며 사라졌다.
다시 검을 거두며 짧게 말했다.
"역시 불이 약점인 건 변함없구나."
시엔은 다크에즈를 불로 태워버렸지만, 검은 덩어리가 처음 보는 괴수였는지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
"뭐야 저건?"
레이는 검을 거두며 대답했다.
"하급 괴수. 이제 최하급이 아니라 하급 괴수도 나오기 시작한 것 같아."
시엔은 놀라운 듯 다시 물었다.
"이게 하급 괴수? 최하급보다 약해 보이는데?"
레이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건 네가 마법사라서 그래. 불이 약점인 녀석이니까. 게다가 이 녀석은 암살에 특화된 괴수야. 슬라임처럼 모양을 제각각 바꿀 수 있는 데다, 평소엔 액체 상태로 숨어 있다가 공격할 땐 강철을 능가하는 경도로 변해. 일반적인 전사나 이종족들에겐 상당히 까다로운 상대지."
시엔은 다크에즈의 잔해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그럼 지금까지 오크들이 죽은 건 이 녀석 때문이겠네?"
"그럴 가능성이 높아. 하지만 하급 괴수가 나왔다는 건 다른 괴수들도 나왔을 가능성이 크지."
둘이 이야기를 나누는 도중, 호른 소리를 듣고 다른 방향에서 정찰을 돌던 오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중에는 그록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록은 불에 타고 있는 검은 덩어리와 부상을 입은 오크를 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다행히 부상자의 상태가 생명에는 지장이 없음을 확인한 후, 안도하며 레이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저 검은 덩어리는 뭐지?"
레이는 다크에즈의 잔해를 가리키며 대답했다.
"어제 죽임을 당했던 오크는 이 녀석이 공격했을 가능성이 커. 암살에 특화된 괴수라 움직임이 까다로웠어."
그러면서 다크에즈의 공격 방식과 특성을 간단히 설명했다. 그록은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군. 동족을 살려줘서 고맙다."
부상자를 부축하며 말하는 그록에게 레이가 말했다.
"부상자를 데리고 일단 돌아가. 난 주변을 조금 더 살펴볼 생각이야."
그록은 멈칫하며 말했다.
"그럼 나도 남겠다."
레이는 고개를 저으며 단호하게 대답했다.
"부상자가 먼저야. 혹시 또 다른 괴수가 암살을 시도 할 수 있으니 잘 경계하면서 돌아가."
그록은 레이의 말에 잠시 고민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 조심해라."
부상자를 데리고 회색 오크 영토로 향하는 오크 무리들이 모습을 감추었다.
레이는 조용히 주변을 살피며 다크에즈와 같은 괴수가 더 있을 가능성을 떠올렸다.
영토로 돌아가는 오크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시엔이 물었다.
"우리 둘만 있어도 괜찮겠어?"
레이는 가볍게 웃으며 대답했다.
"둘? 둘도 과해. 하급 괴수는 마법사 혼자서도 처리 가능하니까."
속으로 생각했다.
'과거의 마법사들과는 다르게 지금 시엔의 마법 발현 능력은 거짓 없이 용족 수준이다. 하급 괴수 정도라면 전혀 문제가 안 되지.'
레이는 고개를 돌려 시엔을 보며 말했다.
"마나의 화신이라며. 하급 정도는 네 손짓만으로도 처리할 수 있을 거야."
그 말을 듣고 시엔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흠흠... 뭐,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시엔이 우쭐대는 모습을 흘깃 본 레이는 천천히 하급 괴수의 특징들을 머릿속에서 정리했다.
'최하급보다 특징적인 점은 개체성이 생긴다는 것. 게다가 몇몇 개체는 단순한 물리 공격으로는 피해를 입히기 힘들어진다. 대신 마법 저항력은 여전히 낮아서, 조금이라도 마법적 힘이 닿으면 치명타가 들어가겠지.'
잠시 시선을 돌려 주변을 살피며 생각을 이어갔다.
'그리고 하나 더. 하급 괴수는 이렇게 한 마리만 있지 않아. 분명 다른 곳에도 숨어있겠지.'
레이는 대초원의 끝없는 풍경을 바라보며 짧게 숨을 내쉬었다.
'여기서 하급 괴수가 얼마나 더 있을지··· 감도 안 오는군.'
레이는 검을 손에 쥐며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주변을 더 살펴야 할 것 같았다.
주변을 돌아보다 보니 어느새 꽤 멀리까지 걸어 나온 둘이었다. 그 사이 하급 괴수 네 개체와 최하급 괴수 열두 개체를 만나 처리했다.
다행히 하급 괴수는 모두 다크에즈였고, 예상 밖의 위협은 없었다.
서서히 초원과 흙의 색이 녹빛에 가까워지는 것을 느낀 레이가 말했다.
"여기서부터는 회색 오크 영토가 아닌 것 같아."
시엔이 주변을 둘러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색깔이 좀 바뀌었네."
레이는 짧게 숨을 내쉬며 말했다.
"일단 돌아가자."
둘이 발길을 돌리려던 순간, 퍼뜨려 두었던 의념에 무언가가 걸렸다.
레이가 손을 들어 조용히 말했다.
"잠깐. 근처에 한 마리가 있는 것 같아."
시엔은 곧바로 방어 마법을 강화하며 주변을 주시했다.
잠시 후, 녹빛 풀들을 헤치며 무언가가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풀이 흔들리고 땅이 흔들렸다.
튀어나온 것은 녹색 피부의 오크였다.
시엔은 녹색 오크를 보자 방어 마법을 풀려했다. 그러나 레이가 즉각적으로 손을 들어 막으며 말했다.
"풀지 마."
녹색 오크는 괴성을 지르며 거대한 칼을 들어 시엔에게 돌진했다.
칼날이 시엔을 향해 내리치는 순간, 레이가 재빨리 검을 소환해 받아냈다.
- 카앙! -
충돌의 충격이 울리며 시엔이 깜짝 놀라 한 발 물러섰다. 레이는 오크의 공격을 받아치며 말했다.
"본능적으로 자신한테 제일 위협이 되는 마법사를 먼저 공격하는 건가."
시엔이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외쳤다.
"저 오크가 하급 괴수라고??"
오크는 다시 칼을 휘두르며 공격해 왔다. 레이는 몸을 틀어 공격을 흘려내고, 발을 뻗어 오크의 배를 강하게 찼다.
- 퍼억! -
오크는 멀리 날아가 초원 위에 쓰러졌다.
레이는 쓰러진 오크를 바라보며 말했다.
"정확히는 오크가 아니야. 눈을 봐. 초점이 잡혀 있어?"
시엔은 레이의 말에 따라 오크의 눈을 자세히 살폈다.
"뭔가 허공을 보는 느낌인데··· 초점이 전혀 없어."
레이는 차분히 이어서 말했다.
"이번엔 귀를 봐봐."
시엔은 오크의 왼쪽 귀를 주시했다. 그러자 귀 근처에서 실 같은 무언가가 꿈틀거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어? 뭔가가 움직이고 있어!"
그 순간, 오크는 다시 괴성을 지르며 일어나 레이를 향해 돌진했다. 레이는 즉각적으로 오크를 향해 달려갔다.
달리는 속도를 유지한 채, 몸을 낮춰 슬라이딩하듯 미끄러지며 오크의 뒤를 잡았다.
빠르게 자세를 바꾸며 오크의 오금을 강하게 찼다.
오크의 무릎이 꺾이며 절하는 자세로 쓰러졌다.
레이는 재빠르게 오크의 등에 올라타 왼쪽 귀 부분을 손바닥으로 강하게 후려쳤다.
꿈틀거리던 실 같은 물체가 잠시 멈추는 듯하더니, 레이가 그 실을 붙잡아 힘껏 잡아당겼다.
귀에서 가느다란 실 같은 것이 늘어지며 나오기 시작했다. 시엔이 그 모습을 보며 얼굴을 찌푸리고 외쳤다.
"으엑, 저게 뭐야?"
레이는 실 같은 괴물이 안 나오려고 버티는 듯한 느낌을 받았지만, 끈질기게 당기며 말했다.
"이것도 하급 괴수 중 하나야."
결국 끝까지 뽑아내자 레이의 손에서 꿈틀거리는 하급 괴수가 드러났다.
얼굴 부분으로 보이는 곳은 초록색을 띠고 있었고, 몸은 붉고 검은색이 섞인 형체였다.
레이는 그것을 보고 눈살을 찌푸리더니 그대로 손에 힘을 줘 터뜨려버렸다.
"스레드. 이 녀석 자체는 약하지만, 숨어 있다가 귀로 들어가서 뇌를 장악해."
"으··· 역겨워···"
시엔이 한 걸음 물러서며 몸을 떨었다.
레이는 터져버린 스레드의 잔해를 털어내며 말했다.
"우선은 이 오크부터 어떻게 해야 할 것 같은데."
그리곤 쓰러져 있는 녹색 오크의 어깨를 흔들었다.
깨우는 도중에 속으로 생각했다.
'오크 영역마다 이렇게 다른 하급 괴수가 있는 건가. 복잡해지는데··· 회색 오크 영토는 다크에즈, 녹색 오크 영토로 가자마자 스레드가 나오고··· 적색이나 흑색 오크 영역에 또 다른 종류가 있다면 하급 괴수만 최소 4종류.'
"하아···"
오크를 깨우며 한숨을 쉬자, 시엔이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왜? 오크가 안 일어날 것 같아?"
"음? 아냐, 불길한 생각이 들어서."
"뭐길래?"
레이가 답하려던 순간, 쓰러져 있던 오크가 몸을 들썩이며 정신을 차렸다.
"우으어···"
오크는 웅얼거리며 어딘가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시엔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오크를 바라보며 말했다.
"괜찮은 거야? 아직 이상한 건 아니지?"
레이는 차분히 대답했다.
"스레드에게 방금 전까지 뇌를 조정당했으니, 아직 인식이 완전히 돌아오지 않은 거야. 하급 괴수라 큰 영향은 없을 거야. 금방 회복되겠지. 중급 이상이면 이야기가 달라지겠지만."
"으어··· 어어··· 여긴···"
오크는 천천히 말을 뱉기 시작했다. 언어 능력이 조금씩 회복되고 있는 듯했다.
초점이 흐릿했던 눈이 서서히 또렷해지더니, 레이와 시엔을 천천히 번갈아 바라봤다.
시엔이 레이를 바라보며 물었다.
"정신이 좀 드는 중인 건가?"
레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런 것 같네. 어때, 우리가 명확히 보여? 너 자신이 누군지 말할 수 있나?"
오크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어으··· 나··· 난··· 녹색 오크··· 가아··· 가란···"
말은 여전히 어눌했지만, 자신이 누구인지 인식하고 있다는 걸 확인한 레이는 안심하며 말했다.
"레이다. 이쪽은 시엔. 가란, 너 방금 전까지 조정당했던 건 알고 있어?"
그러면서 손에 있던 터뜨린 스레드의 사체를 보여주었다.
가란은 터져버린 스레드의 사체를 한참 바라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기억이··· 아무것도 안 난다."
비틀거리며 겨우 몸을 일으킨 가란은, 힘겨워 보이지만 굳은 표정으로 레이와 시엔에게 전사의 인사를 건넸다.
"고맙다. 너희 덕분에 목숨을 건졌다. 이 은혜를 반드시 갚고 싶다."
레이는 가란의 진심 어린 인사에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우선 나중에 갚아. 조만간 녹색 오크 영토로 찾아갈 거니까, 그때 반겨주기만 하면 돼."
가란은 검은 잔해 위로 떨어진 시선을 들며 대답했다.
"알겠다. 레이, 시엔. 동족들에게 너희 얘기를 전해두겠다."
가란은 비틀거리는 몸을 이끌고 천천히 자신의 영역으로 돌아갔다.
레이와 시엔은 발길을 돌려 회색 오크 영토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대초원의 녹빛이 서서히 옅어지며 회빛으로 변해갔다. 땅을 뒤덮은 풀들은 미세하게 말라가듯 빛을 잃었고, 바람이 불 때마다 풀잎이 낮게 울었다.
하늘은 석양에 물든 듯 붉고 황금빛으로 물들어 있었고, 멀리 보이는 회색 언덕은 점점 또렷해졌다.
빛이 점차 사그라드는 대초원은 조용했지만, 그 안에 도사리고 있는 알 수 없는 기운이 여전히 살아 있었다.
레이는 한 손으로 검을 짚은 채 말없이 걸었고, 시엔은 조용히 손가락으로 마나의 잔여 흔적을 가볍게 느끼며 걸음을 맞췄다.
"오늘 만난 하급 괴수들, 어떻게 생각해?"
레이가 고요함을 깨며 물었다.
시엔은 잠시 침묵하다가 대답했다.
"계속 생각해 보니까 좀 섬뜩하네. 하급 괴수들이 이 정도인데, 더 강한 게 나오는 건 아니겠지?"
레이는 가볍게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글쎄... 아니길 빌어야지. 하지만 그럴 가능성은 높아. 대초원이 어지러워 지고있다는 건 확실해."
둘은 더 말을 하지 않았다.
회색 오크 영토의 경계가 눈앞에 보일 때까지, 적막 속에서 천천히 걸음을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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