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 오크 영토

영토 안으로 들어서자 그록이 두 사람을 맞이했다.
“정찰하고 보고 온 상황을 이야기하고 싶어. 타칸을 만나야겠는데.”
레이가 차분하게 말했다. 그록은 주위를 한번 둘러보곤 짧게 답했다.
“타칸께 바로 가지. 따라와라.”
세 사람은 타칸의 집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풀잎이 메말라 부서지는 소리가 바람에 섞여 울렸다. 기운이 가라앉은 듯 조용했지만 어딘가 불길함이 스며있었다.
걷던 중 시엔이 문득 입을 열었다.
“아까 다친 오크들은 괜찮아요?”
그록은 어깨를 으쓱하며 가볍게 웃었다.
“괜찮다. 우리 오크는 회복이 빠르니까.”
말은 가볍지만 그록의 눈빛에는 여전히 경계심이 남아 있었다.
그때, 눈앞에 타칸의 집이 모습을 드러냈다. 단단한 돌벽과 묵직한 문이 부족의 중심임을 드러내고 있었다. 문이 열리며 타칸이 모습을 드러냈다.
“왔군. 들어와라.”
시엔이 의아한 표정으로 타칸을 바라보았다.
“우리가 오는 걸 어떻게 아셨어요?”
타칸은 느릿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뻔히 느껴지는데 모르는 게 더 이상하다.”
집 안으로 들어서자 타칸이 자리에 앉으며 무게감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록에게서 대략적으로 들었다. 그 검은 액체 괴수부터 뭔지 말해 줄 수 있나.”
레이는 잠시 숨을 고르고 입을 열었다.
“검은 액체같은 괴수는 다크에즈. 평소엔 액체처럼 숨어 있다가 기습을 할 때는 강철보다 더 단단한 경도로 습격하는 놈이에요. 하지만 불에는 치명상을 입으니. 기습만 조심하면 큰 위협은 아닙니다.”
타칸이 미간을 좁혔다.
“다크에즈··· 처음 듣는 이름이군.”
레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회색 오크 영토에서 다크에즈 네 개체, 최하급 괴수 열두 개체를 처리했어요. 문제는 그 후에 녹색 오크 영토의 경계에서 나타난 또 다른 괴수입니다.”
타칸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또 다른 괴수?”
“스레드. 귀로 침투해 뇌를 지배하는 괴수에요. 그 놈에게 조종당한 녹색 오크가 저희를 공격했습니다.”
타칸이 의자에서 몸을 조금 일으키며 중얼거렸다.
“뇌를 지배하는 괴수라니···”
레이는 확실히 짚어주듯 덧붙였다.
“스레드는 풀린 눈빛과 귀에서 꿈틀거리는 실로 구별할 수 있긴 할거에요.”
타칸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입을 열었다.
“정신이 지배당하는 괴수는 지금껏 들어본 적이 없다. 얼마 전 화합장에서 죽은 레드 오크의 시체를 봤다. 상처를 보니 마치 거대한 야수가 덮친 듯한 흔적이 남아 있더군.”
레이의 시선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거대한 야수···? 하급 괴수 중에 그 정도 흔적을 남길 놈은 없다.’
불길한 생각이 스쳐 지나갔지만 레이는 태연하게 표정을 감추며 말했다.
“회색 오크 영토의 다크에즈는 이제 대응법이 준비됐으니 더 이상 문제는 없을 겁니다. 하지만 녹색 오크 영토에서 나온 스레드는 확산되면 더 심각한 상황이 될 수 있어요. 단순히 죽는 걸로 끝나지 않겠죠. 동족이 동족을 죽이는 일이 벌어질 수도 있으니까요.”
타칸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 너희가 문제를 이렇게 해결하고 다닌다면, 조만간 화합장에서 각 부족의 장과 대전사가 너희를 반기게 될 거다.”
그록이 앞으로 나서며 깊이 고개를 숙였다.
“부족의 동료를 구해줘서 정말 고맙다. 전사의 이름으로 감사 인사를 전한다.”
레이는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도움이 될 수 있어 다행이네요. 그럼 바로 녹색 오크 영토로 가볼게요."
타칸의 집을 나서자 석양이 더욱 붉어졌다. 대초원의 바람은 한층 더 차가워졌고, 두 사람의 걸음만이 적막한 들판을 가로질렀다.
풀잎들이 낮게 울며 불길한 소리를 냈다.
시엔은 조용히 마나를 펼쳐 동그란 마나 실드를 만들어냈다.
서서히 어두워지는 대초원의 바람을 막아내며 두 사람을 감쌌다.
시간이 조금 흐르자 시엔의 표정이 점차 어두워졌다. 스레드를 떠올린 듯 입술을 굳게 다물더니 레이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 지렁이 같은 거 잡으러 가는 거야?”
레이가 고개를 돌려 시엔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지렁이가 아니라 스레드. 스레드는 아까도 봤겠지만 자체로는 무력도 없고 약해. 하지만 문제는 기생이 시작되는 순간이지. 숙주의 뇌를 지배하면 숙주가 강할수록 더 상대하기 힘들어져.”
말끝을 잠시 끊은 레이가 천천히 이어갔다.
“게다가 숙주가 정신을 지배당하는 동안 자신이 뭘 했는지 기억하지 못해. 친우나 가족을 다치게 하거나 죽일 수도 있어. 설령 스레드를 제거한다 해도 그 후가 더 큰 문제일 수 있지.”
시엔이 걸음을 멈추며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그런데 오크는 인간보다 육체 능력이 훨씬 뛰어나잖아. 본능적인 감각도 예민하고. 그런 오크한테 그 뱀지렁이 같은 게 어떻게 귀까지 타고 올라갈 수 있어?”
레이가 시선을 잠시 대초원으로 돌리며 대답했다.
“그게 스레드의 가장 무서운 점이야. 놈들은 단순히 기어가는 게 아니야. 환경에 스며들지.”
시엔이 고개를 갸웃하며 되물었다.
“스며든다고?”
“그래. 스레드는 풀잎, 흙먼지, 물방울처럼 아주 작은 것들에 섞여 접근해. 바람에 실리거나 흙바닥에 웅크리고 있다가 피로하거나 부상당한 순간을 노리는 거지. 오크라고 해도 싸움 직후나 잠든 순간, 경계가 약해질 때는 예외가 아니거든.”
시엔이 상상만으로도 몸을 떨며 중얼거렸다.
“풀에 섞여, 바람에 실려, 귀로 들어간다니... 그럼 녹색 오크 부족이 그렇게 될 수도 있다는 말이잖아?”
“그래. 그래서 서두르는 거야. 그들이 더 망가지기 전에 끝내야 하니까. 다행인 건 우리가 본 스레드가 단 하나였다는 거지.”
시엔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레이를 쳐다보았다.
“그게 왜 안심이 되는 거야?”
레이가 가볍게 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스레드는 본체가 약하다고 했지? 그래서 놈들은 무리를 지어 각 숙주를 지배해 서로의 약점을 보완해. 만약 녹색 오크 부족에 오래전부터 퍼져 있었다면 우리가 봤던 건 한 놈이 아니라 수십 마리였을 거야.”
시엔의 표정이 급격히 나빠졌다. 수십 마리의 스레드가 꾸물거리는 장면을 상상한 듯 얼굴이 창백하게 변했다.
“···제발 아니길 빌래.”
대초원의 바람이 두 사람의 마나 실드를 스치며 불었다. 말없이 걷는 두 사람의 발걸음은 점점 더 녹색 오크 영토를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멀리서 어둠이 내려앉으며 대초원은 마치 긴 숨을 쉬는 것처럼 고요해졌다.
***
녹색 오크 영토 – 밤
대초원의 밤은 늘 고요했지만, 오늘은 그 고요함이 불길했다.
달빛이 희미하게 초원을 비추었고, 바람이 풀잎을 스칠 때마다 서늘한 소리가 울렸다.
밤하늘에 가득한 별빛과는 달리, 대지에는 긴장과 혼돈의 기운이 가라앉아 있었다.
녹색 오크 영토. 초원의 생명을 지키던 그들의 터전은 이제 평온함을 잃었다.
족장 바르카는 심각한 얼굴로 앞에 놓인 건물을 바라보고 있었다. 창백한 달빛이 그의 굳은 표정을 비췄다.
건물 안에는 수많은 녹색 오크들이 쓰러져 있었다. 상처를 입은 채 기절한 동족들이 어둠 속에서 무겁게 숨을 내쉬었다.
가란이 투박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몇 명 째인가, 족장. 동족이 저렇게 변한 게.”
바르카가 낮게 답했다.
“이미 수십이 넘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바르카는 손을 꽉 쥐며 덧붙였다.
“그나마 네가 원인을 알아낸 게 다행이다.”
가란이 쓰디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인간 전사들 덕이다. 그들이 아니었으면 나도 똑같이 됐을 거다.”
가란이 영토로 돌아왔을 때, 그곳은 전투 중이었다.
그것은 적과 싸우는 전투가 아니었다. 동족이 동족에게 주먹을 휘두르고, 칼을 겨누며 싸우고 있었다.
피로 물든 땅 위에서 친우들이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고, 멀쩡한 오크들은 갑작스러운 공격에 당황하며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
족장 바르카는 혼란을 멈추기 위해 빠르게 움직였다. 무기를 든 동족들을 기절시키며 사태를 수습했지만, 원인은 알 수 없었다.
그때 돌아온 가란이 외쳤다.
“귀를 봐라 바르카! 귀에 이상한 실 같은 게 있을거다!”
바르카는 쓰러진 오크의 귀에서 꿈틀거리는 실지렁이 같은 것을 발견하고 단숨에 뽑아냈다.
그 순간, 동족의 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듯 축 늘어졌다.
바르카는 그때의 끔찍한 순간을 떠올리며 입을 굳게 다물었다.
“스레드라고 했지. 갑자기 이런 일이 터지다니··· 머리가 아프군.”
바르카는 쓰러진 동족들을 둘러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래선 자다가도 스레드에 당한 놈이 칼을 휘두를 수도 있겠어.”
족장의 말에 가란의 표정도 굳었다.
그때, 녹색 오크 영토의 입구에서 두 개의 실루엣이 어둠 속을 가로질러 다가왔다.
바르카와 가란이 동시에 그쪽을 바라보았다.
가란의 눈이 커지며 바르카에게 말했다.
“저 둘이다, 바르카. 나를 구해준 은인들. 레이와 시엔.”
녹색 오크 영토에 도착한 레이와 시엔은 난장판이 된 내부를 바라보았다.
곳곳에 핏자국이 선명했고, 부서진 담장과 금이 간 건물들이 눈에 띄었다.
땅은 흙과 피가 섞여 진득하게 젖어 있었고, 공기마저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레이는 주변을 둘러보다 조용히 중얼거렸다.
“이미 피해가 꽤 있었나 보네.”
시엔도 고개를 돌려 마을 이곳저곳을 살폈다. 눈에 들어온 건 피로 얼룩진 흔적과 쓰러진 오크들이었다. 그녀의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이게 아까 말한 그거야? 자기도 모르게 친우나 가족을 다치게 하거나··· 죽인다는 거?”
레이는 짧게 숨을 들이쉬며 담담하게 말했다.
“그래. 그래서 서둘렀던 거야. 늦으면 이런 상황이 더 번질 테니까.”
말을 끝마치자마자 무거운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레이, 시엔.”
고개를 돌리자 가란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미 회복된 듯 상처도 가벼운 표정이었다.
레이가 가란을 보며 가볍게 입꼬리를 올렸다.
“확실히 오크는 회복이 빠르군. 벌써 멀쩡해 보이는데.”
가란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겉으로만 멀쩡하다. 생각해보면 나도 똑같이 당했었으니.”
그의 말에 어딘가 씁쓸함이 배어있었다.
그때 가란의 옆에 있던 다른 오크 전사가 굵은 목소리로 말했다.
“녹색 오크의 족장, 바르카다.”
“레이입니다.”
“시엔이에요.”
족장 바르카가 천천히 앞으로 나섰다. 짙은 초록빛 피부와 굳은 표정, 그의 몸에서 느껴지는 무게감은 단번에 상대를 압도했다.
바르카는 두 사람을 한동안 말없이 바라보더니 무겁게 입을 열었다.
“가란의 은인의 방문을 환영해주고 싶다만···”
시선이 부서진 마을과 쓰러진 동족들로 옮겨졌다.
“···지금 상황이 여의치 않다.”
한숨처럼 흘러나온 그의 목소리에는 피로와 무거운 책임감이 묻어 있었다.
바르카는 굳은 얼굴로 부상당한 동족들이 누워있는 건물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을 곳곳의 흔적이 그를 짓누르는 듯 무겁게 내려앉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레이가 입을 열었다.
“스레드의 기생은 의외로 대비하기 쉬워요.”
바르카가 고개를 돌려 레이를 바라보았다.
“대비하기 쉽다고?”
바르카의 목소리에는 믿기지 않는다는 기색이 묻어 있었다.
레이는 천천히 귀를 가리키며 말했다.
“스레드는 자체적으로 아주 약하죠. 녀석들은 귀로 침투하지 못하면 아무것도 할 수 없어요. 그래서 단단한 귀마개만 만들어 착용하면 해결되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바르카의 눈썹이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그게 전부인가?”
바르카의 목소리에는 의심이 섞여 있었다. 이렇게 간단한 해결책으로 이 끔찍한 사태를 막을 수 있다는 게 믿기지 않는 듯했다.
레이는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가장 근본적인 것을 차단하는 게 제일 효과가 좋으니까요. 스레드는 은밀하게 접근하지만, 결국 단순한 방법으로 막을 수 있는 놈이죠.”
바르카는 한동안 말없이 레이를 바라보았다. 마치 농담을 하는 게 아닌가 싶어 그의 얼굴을 살폈지만, 레이의 눈빛은 흔들림이 없었다.
“하···”
바르카는 짧은 한숨을 내쉬더니 입가를 굳게 다물었다.
“그게 정말 통한다면··· 해볼 만하겠군.”
레이의 말은 너무나 간단했지만, 지금의 혼란 속에서 그 ‘단순한 답’은 어둠 속에서 발견한 한 줄기 빛처럼 들렸다.
옆에 서 있던 가란이 입을 열었다.
“정말 고맙다, 레이. 너희 덕분에 희망이 생겼다.”
가란은 진심이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일단 지금은 늦은 밤이니까, 너희가 쉴 수 있는 곳을 마련해주겠다.”
레이는 고개를 끄덕였고, 가란이 앞장서서 그들을 안내했다.
가란이 그들을 안내한 방은 단 하나였다.
“여기서 쉬면 되겠다.”
가란이 말한 후, 가볍게 목례를 하고 떠났다.
문이 닫히자 시엔은 멀뚱히 방을 바라보다가 레이를 쳐다보았다.
“··· 방이 하나야?”
레이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짐을 내려놓는 그의 뒷모습이 자연스러웠다.
그러다 시엔을 힐끗 보며 말했다.
“밖에서 자면 춥다?”
시엔의 표정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 왜 이렇게 자연스러운 건데···”
작은 한숨을 내쉬며 시엔은 방 안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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