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수

“밖에서 자면 춥다.”
레이의 말에 시엔의 표정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왜 이렇게 당연한 듯 말하는 건데.”
투덜거리며 방 안으로 들어왔다. 레이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침대에 몸을 눕히며 한마디 던졌다.
“얼른 쉬어. 늦게까지 돌아다녔잖아.”
시엔은 잠시 레이를 바라봤다. 그 태연한 모습이 더 기가 찼다. 작게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정말 귀 막는 걸로 스레드를 막을 수 있긴 한 거야?"
레이가 반쯤 누워 있던 몸을 일으켰다. 대답은 단호했다.
"하급 괴수는 방법만 알면 쉬워."
그는 조용히 말을 이어갔다.
"최하급은 근육과 뼈가 지나치게 발달하면서 형체가 뒤틀리지. 거기서 특성을 얻으며 하급으로 진화하는거고. 하지만 그 대가로 뚜렷한 약점이 생겨."
말을 멈춘 레이의 시선이 잠시 흔들렸다.
“···대신 중급부터는···"
"뭐라고?"
시엔이 물었지만, 레이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먼저 자라. 생각할 게 좀 생겼어."
시엔은 대답 대신 짜증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같은 방에서 자라고 하면 잘도 자겠다."
궁시렁대며 침대에 누웠지만, 몸을 뒤척이다 금세 균일한 숨소리가 들려왔다. 투덜대던 모습과는 다르게 피곤이 몰려왔던 듯했다.
레이는 그런 시엔을 잠시 바라보다가 희미하게 웃었다. 그러나 이내 표정이 굳었다.
'중급 괴수가 있다면 상황이 더 심각해질 거다.'
머릿속이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하급 괴수가 이렇게 많다면 중급이 나오는 것도 시간문제야. 그런데 적색 오크의 죽음··· 아무리 뒤에서 기습당했다고 해도 한 방에 당할 녀석이 아닐텐데 반항도 못 하고 죽었다는 건··· 중급 괴수가 개입했을 가능성이 높다.'
생각은 점점 대전쟁으로 이어졌다.
그때 본격적인 재앙은 중급 괴수부터 시작됐다. 단순한 괴물이 아니었다.
지성을 얻고 뚜렷한 약점은 사라진 채 순수한 힘으로만 상대해야 했던 그들. 병사들에게는 그 자체가 악몽이었다.
레이는 조용히 검을 소환했다. 차가운 금속의 감촉이 손끝에 닿았다.
눈빛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중급이든 뭐든··· 여기선 막아야 한다.'
레이는 조용히 생각을 멈추고 잠시 시엔을 보며 미소를 지은 후 잠들었다.
창문 사이로 따스한 햇살이 흘러들었다.
초록빛 영토를 비추는 태양은 스레드의 기생으로 피에 물든 어젯밤과는 다르게, 따스하고 평화롭게 빛나고 있었다.
시엔은 눈을 뜨며 멍하니 천장을 바라봤다. 한참을 그러다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둘러보았다.
“···뭔가 익숙한 상황과 방이네.”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헛웃음을 내뱉었다.
간단히 세수를 하고 방을 나서니, 밖에서 검을 쥔 채 단련 중인 레이가 보였다. 검이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일정한 리듬을 이루며 이어졌다.
'참 한결같네, 이런 거 보면.'
시엔은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레이와 눈이 마주쳤다.
“일어났어? 잘 자더라?”
“데자뷴가 싶네···”
작은 목소리로 답하며 얼굴이 붉어졌다. 그러나 금방 표정을 가라앉히고 툭 던졌다.
“밥이나 먹으러 가.”
천천히 걸음을 옮기려던 그녀가, 레이의 한마디에 멈칫했다.
“장소는 알고?”
시엔의 얼굴이 다시 붉어졌다.
레이는 그걸 보고 웃음을 터뜨렸다.
“일단 어제 상황도 있으니 가란이나 바르카한테 가보자.”
둘은 가볍게 걸음을 맞추며 마을 쪽으로 향했다.
시엔이 말을 꺼냈다.
“어제 생각하던 건 뭐였어? 스레드를 처음 잡았을 때 불길하다고 했던 거랑 관련 있어?”
“그걸 기억하고 있어?”
“궁금한 걸 참는 건 마법사가 아니거든.”
레이는 잠시 걸음을 멈추며 답했다.
“영토마다 하급 괴수 종류가 다르다면, 중급 괴수가 나올 가능성도 있다는 생각이었어.”
“중급···?”
시엔의 얼굴이 굳었다. 레이의 시선은 멀리 어딘가에 머물렀다.
“중급이 나오면 이야기가 달라지니까.”
둘 사이에 무거운 공기가 흐를 때쯤, 가란이 모습을 드러냈다.
“여기 있었군!”
가란은 손에 들고 있던 귀마개를 가리키며 말했다.
“덕분에 기생 못 한 스레드를 전부 처리했다. 고맙다.”
레이는 미소 지으며 답했다.
“다행이네.”
“부상자도 금방 회복될 거다. 우선 아침부터 먹자고.”
“얼른 먹으러 가자!”
시엔은 들뜬 목소리로 외치며 먼저 걸음을 재촉했다.
식당 문을 열자 오크들이 앉아 식사를 즐기고 있었다.
커다란 나무 테이블 위엔 고기와 곡물로 만든 소박한 음식들이 푸짐하게 놓여 있었다. 레이와 시엔은 자연스럽게 자리에 앉아 음식을 집어 들었다.
시엔은 한 입 먹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오, 녹색 오크 아침밥은 또 다른 맛이네?”
레이도 숟가락을 들며 대꾸했다.
“맛있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가란이 의외라는 듯 말했다.
“오크 음식에 이렇게 익숙한 사람은 처음 본다. 예전에 먹어본 적이라도 있나?”
레이가 피식 웃으며 답했다.
“시엔이 회색 오크 영토에서 혼자 밥상을 싹 다 비워버렸거든.”
시엔이 젓가락을 멈추며 고개를 돌렸다.
“말을 그렇게 하면 어떡해!”
얼굴이 붉어진 시엔이 버럭하더니 다시 고개를 숙였다.
투덜거리며 음식을 씹는 모습에, 레이는 웃음을 참으며 밥을 계속 먹었다.
식사를 마친 세 사람은 바르카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부상당한 오크들이 누워 있는 곳에서 바르카는 아무 말 없이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의 눈엔 씁쓸함이 서려 있었다.
뒤에서 다가오는 발소리에 바르카가 고개를 돌렸다.
“고맙다, 레이. 덕분에 더 이상의 피해는 없었다.”
레이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렇게만 하면 이제 스레드로 인한 피해는 없을 겁니다.”
바르카는 잠시 생각에 잠긴 듯 눈을 감았다. 그 틈에 레이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타칸에게 간단하게 들었는데, 화합장에서 말한 적색 오크 시흔에 대해 조금 더 자세히 들을 수 있을까요?”
바르카의 표정이 굳었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 적색 오크··· 등에는 거대한 구멍이 뚫려 있었다. 무언가에게 통째로 파인 것처럼. 발톱··· 거대한 발톱 같은 걸로 한 번에 찢긴 것 같았다.”
그 말을 듣자 레이의 눈이 미세하게 좁혀졌다.
바르카가 말을 이었다.
“흔적을 보니보통 놈이 아니야. 저항도 하지 못한 채 죽임을 당한 것 같았다. 적색 오크가 그렇게 허무하게 끝났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레이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깊은 생각에 잠긴 듯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말했다.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바르카는 고개를 끄덕이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게 도움이 된다면 다행이겠군.”
바르카의 이야기를 들은 레이는 짧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큰 도움이 될 거같네요.”
바르카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고, 레이와 시엔은 건물 밖으로 나왔다.
문을 나서는 순간 대초원의 차가운 아침 공기가 두 사람을 감쌌다.
잠시 침묵하던 시엔이 레이를 향해 물었다.
“뭔지 알 거 같아?”
레이는 고개를 약간 기울이며 대답했다.
“음··· 확실하진 않은데, 대충은 감 잡았어.”
시엔이 다시 묻자, 목소리에 약간의 긴장감이 묻어났다.
“그 적색 오크를 죽인 게 중급 괴수라고 생각해?”
레이는 조용히 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지금으로선 거의 70퍼센트?”
“반 이상이라는 거잖아, 그럼.”
“그치. 심증으론 사실상 90퍼 이상이야.”
시엔은 눈썹을 찌푸렸다.
“그 시흔 얘기를 듣고 그렇게 판단한 거야?”
레이는 잠시 시선을 멀리 두었다가 대답했다.
“아까 말했지만, 영토마다 하급 괴수가 다르게 나온다면, 그 개체 수가 많아질 수밖에 없어. 그리고 하급이 많아지면 중급이 나올 확률도 높아져. 그뿐만 아니라 적색 오크를 뒤에서 잡아 단번에 죽였다는데··· 거대한 발톱으로 찢겼다는 게 이상하단 말이지.”
그는 짧은 침묵을 두었다가 마음속에서 떠오른 이름을 되뇌었다.
‘설마, 라이칸인가··· 그럼 머리아파지는데.’
레이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좀 더 빠르게 움직여야겠어."
시엔은 그를 따라 걸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 건물에서 나오던 가란과 눈이 마주쳤다. 레이가 바로 물었다.
"여기서 가장 가까운 영토가 어디야?"
가란은 잠시 생각하더니 답했다.
"흑색 오크 영토가 가깝다. 적색 오크는 초원의 끝자락이고, 그 옆엔 수인족이 초원과 사막 사이에 모여 살고 있다."
레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럼 흑색 오크 영토로 가봐야겠네."
가란은 미소를 지었다.
"흑색 오크 영토로 가면 대전사를 볼 수 있을 거다."
시엔이 흥미를 느낀 듯 물었다.
"대전사가 흑색 오크인가 보네?"
가란이 자신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흑색 오크 크라가. 그의 영토에 감히 쳐들어오는 종족은 없다."
레이는 가볍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럼 안심이네. 대전사가 있는 곳이라면 걱정할 필요는 없겠어. 지금 바로 떠나지."
가란의 얼굴엔 자부심이 가득했다.
"크라가가 있는 곳은 어떤 위협에도 흔들리지 않을 테니까."
그러면서 흑색 오크 영토의 방향을 가르쳐 주며 전사의 인사를 하는 가란.
가란이 가르쳐준 방향으로 레이와 시엔이 걸음을 옮겼다. 초원의 바람이 옷자락을 스치며 지나갔지만, 두 사람은 묵묵히 발걸음을 이어갔다.
시엔이 고개를 살짝 돌려 물었다.
"도대체 어떤 중급 괴수길래 이렇게 마음이 급한 건데?"
레이는 짧게 대답했다.
"아마도 라이칸일거 같아."
"라이칸?"
레이는 앞으로 시선을 고정한 채 천천히 설명을 시작했다.
"멀리서 보면 늑대가 두 발로 서 있는 것처럼 보여서 그렇게 이름이 붙었어. 하지만 실제로 가까이서 보면 전혀 달라. 털은 없고, 근육 가닥들이 뭉쳐서 늑대의 형상을 이룬 괴물이야."
시엔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근육 가닥들? 상상하니까 더 역겨운데."
레이는 덤덤하게 덧붙였다.
"그뿐만 아니라 거대한 발톱과 미친 재생력도 갖췄지. 쉽게 죽지도 않고, 공격 하나하나가 치명적이야. 상대방 입장에선 악몽 그 자체라고 보면 돼."
시엔은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괴수들은 왜 생긴 게 하나같이 다 비호감이야?"
레이가 어깨를 살짝 으쓱하며 말했다.
"진화할수록 외관이 변하니까."
시엔이 흥미를 느낀 듯 고개를 갸웃했다.
"변한다니?"
레이는 천천히 대답했다.
"강해지면서 생존에 최적화된 형태로 변하는 거지. 보기 좋은 외형은 중요하지 않아. 효율이 우선이니까."
시엔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투덜거렸다.
"효율 좋으라고 그렇게 보기 흉하게까지 변해야 돼? 진짜 괴수들, 끝까지 비호감이네."
레이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말을 이었다.
"흉칙할 수도 있어. 하지만 아름다울 수도 있지."
시엔이 의아한 얼굴로 레이를 바라봤다.
"아름답다고?"
레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했다.
"괴수는 가면 갈수록 육체의 끝으로 진화할 수도 있고, 마법을 깨달아서 마법의 끝으로 진화하는 경우도 있어. 뭐랄까... 마치 가능성을 생명으로 만든 느낌? 그 방향은 아무도 모르는 거지."
시엔이 입술을 삐죽이며 중얼거렸다.
"그래도 흉측하든 아름답든 결국엔 다 괴수라는 거네."
레이는 대답 대신 멀리 하늘을 바라봤다. 그의 눈빛이 잠시 날카롭게 가라앉았다.
'그 모든 걸 초월하는 존재로 진화할 수도 있겠지··· 괴수왕 오거처럼.'
괴수왕 오거의 모습이 머릿속을 스쳤다. 순수한 육체의 힘이 마치 어떠한 경계를 초월해, 모든 것을 압도했던 그 존재.
대전쟁 당시 오거의 출현은 단순히 재앙을 넘어선, 절대적인 공포 그 자체였다.
레이는 짧게 숨을 내쉬며 그 기억을 떨쳐냈다.
"어쨌든, 괴수는 괴수야. 흉측하든 아름답든 결국, 무언가를 죽이고 싶어하는 본질. 그 원초적인 본질은 변하지 않으니까. "
시엔은 여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지만 더 묻지는 않았다.
두 사람은 발걸음을 재촉하며 초원의 길을 따라 나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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