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칸

고슈안 사막과 필로안 대초원의 경계, 수인족 영토.
고르그의 붉은 문양이 더욱 강렬하게 빛났다.
움직임이 한층 빨라졌고, 거대한 도끼가 초당 수십 번씩 휘둘러졌다.
그러나 리아나는 모든 공격을 종이 한장 차이로 가볍게 피하며 말했다.
"불필요한 소모전을 할 필요가 있을까, 고르그? 널 죽일 거라면 진작 끝냈어."
고르그는 더욱 분노하며 도끼를 움켜쥐었다.
"닥쳐라!"
도끼에 붉은 문양이 새겨지며 그대로 도끼 자루의 끝을 붙잡고 거대한 횡베기를 휘둘렀다.
순간 도끼에서 방출된 힘이 부채꼴로 넓게 퍼지며 초원을 휩쓸었다.
퍼져나가는 힘이 수인족 전사들에게도 닿을 정도로 위험해지자, 리아나는 허리춤에서 단도를 꺼냈다.
"정말 적당히 좀 해라, 고르그."
단도가 날아오는 힘의 중심을 정확히 찔렀다. 방출되던 에너지는 흩어지며 힘을 잃었다.
리아나는 차갑게 말했다.
"고르그. 진짜 죽고 싶지 않으면 멈춰."
주변의 오크들과 수인족 전사들은 이미 둘의 전투 여파를 피해 멀리 물러나 있었다. 리아나는 고르그를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
"내가 널 죽이면 진짜 전쟁이야. 또 그 오랜 전쟁을 하고 싶은 거냐?"
고르그의 움직임이 잠시 멈췄다. 리아나는 그의 반응을 살피며 계속했다.
"대전쟁 이후 필로안 대초원에서 벌어진 전쟁을 기억할텐데? 그 끝에 내가 물러나는 걸로 합의했잖아. 잘 생각해, 고르그. 이미 물러난 내가 너희 오크를 죽일 이유가 있을까?"
하지만 고르그는 이를 갈며 도끼를 고쳐 쥐었다.
"닥쳐라! 그럼 동족의 상흔은 뭐냔 말이냐! 거대한 발톱으로 찢긴 시체들이 말이다!"
목소리가 떨렸다. 동족의 시체가 머릿속에 떠오르는지, 몸은 이미 붉게 타오르는거처럼 보였다. 그는 도끼를 리아나에게 겨누며 말했다.
"돌이킬 수 없다. 내가 죽더라도 동족의 원혼을 달래야 한다!"
리아나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역시 머저리같은 적색 오크. 분노에 대가리가 먹혔군."
고르그를 한심하게 쳐다보던 샛노란 눈동자가 빛났다.
눈동자가 짐승의 눈처럼 변하더니, 검은 늑대 귀와 꼬리가 하얗게 변하기 시작했다.
손과 발에는 늑대의 발톱과 털이 돋아났다. 그녀가 전투태세로 돌입하며 낮게 말했다.
"그래, 이제 말하기도 귀찮다. 죽고 싶다면 그냥 죽어."
순간 고르그의 시야에서 리아나가 사라졌다.
"크어억!"
고르그는 외마디 비명과 함께 공중으로 붕 떠올랐다.
배를 움켜쥔 채 하늘로 날아오르며 고통스러운 신음을 냈다.
그 아래, 리아나는 발로 그의 배를 찬 자세로 잠깐 모습을 드러냈다가 다시 사라졌다.
고르그는 추락하기도 전에 다시 뒤통수를 강하게 얻어맞았다.
리아나가 깍지 낀 손으로 그의 뒤통수를 강타하며 더욱 빠르게 땅으로 내리꽂았다.
빠른 속도로 추락하는 고르그. 땅이 가까워지는 순간, 리아나는 이미 땅에 내려와 있었다.
그녀의 손톱이 번뜩이며 그의 머리를 꿰뚫을 준비를 마쳤다.
"끝내자."
타이밍을 맞춰 손톱을 내려치려는 찰나, 하늘에서 어떤 그림자가 떨어졌다.
강렬한 충격과 함께 한 팔이 고르그를 붙잡았고, 다른 한 손이 리아나의 손목을 막아섰다.
리아나의 눈빛이 싸늘하게 변했다.
"크라가."
***
필로안 대초원, 고슈안 사막으로 향하는 길.
크라가는 적색 오크 전사들이 고슈안 사막으로 향했다는 소식을 듣고 곧바로 출발했다.
"결국 참지 못했군, 고르그."
드넓은 대초원을 빠르게 주파하며 고슈안 사막 경계로 향했다.
이내 전투의 흔적이 보였고, 멀리 수인족 전사들과 적색 오크 전사들이 대치 중인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중앙에는 리아나와 고르그가 있었다.
"다행히 큰 싸움으로 번지진 않았나?"
속도를 줄이며 상황을 살피던 크라가는 리아나의 털색이 눈처럼 하얗게 변하는 것을 보고 다시 급히 속도를 높였다.
"···저건 안 되지."
그는 몸에 금색 문양을 띄우며 기운을 방출했다.
전진은 삽시간에 가속되었고, 고슈안 사막 경계에 다다를 무렵 고르그가 공중으로 떠올랐다.
리아나의 발차기에 배를 맞고 추락하는 고르그. 이미 땅에서는 리아나가 손톱을 세운 채 그의 목을 꿰뚫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멈춰야 한다."
크라가는 힘을 터뜨리며 황금빛으로 빛나는 형체로 그 사이에 도달했다.
한 손으로 추락하던 고르그를 낚아채고, 다른 손으로는 리아나의 손목을 잡아챘다.
리아나는 싸늘한 눈빛으로 크라가를 쏘아보았다.
"크라가. 이게 무슨 상황인지 정확히 설명해."
크라가는 고르그를 땅에 눕히며 짧게 대답했다.
"우선 미안하다."
"잘 설명해야 할 거야."
리아나는 여전히 전투태세를 풀지 않은 채 흰색 털로 빛나고 있었다. 그녀의 노란빛 눈이 싸늘하게 번뜩였다.
"지금 아주 짜증이 난 상태거든."
크라가는 고르그를 땅에 눕히며 짧게 숨을 내쉬었다.
"이미 한 번 막은 입장이었다. 화합장에서 동족의 시체를 업고 울분을 토하던 고르그였다. 이번엔 수십 명이 죽었으니 참을 수 없었던 것 같다."
리아나의 눈이 가늘어졌다.
"동족이 죽어서 화가 나는 건 이해해. 그런데 왜 그 분노의 방향이 수인족이지? 말 들어보니 발톱? 시체의 상흔? 단순히 그것만으로 수인족이라고 단정 지은 거냐?"
그녀의 목소리가 점점 차가워졌다. 짜증이 올라오는지 말을 하는 와중에 기세가 더욱 강해졌다.
"설마 아직도 우리가 전쟁을 회피하는 겁쟁이 종족으로 보이는 거야? 과거에 내가 찢어 죽였던 그 겁쟁이 왕의 세대와 내가 이끄는 수인족 세대는 분명 다르다는 걸, 크라가, 너는 알 텐데?"
크라가는 리아나를 바라보며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미안하다."
리아나는 기세를 더 높이며 강하게 응수했다.
"미안하다는 말로 넘어가려고 하지 마."
그러나 크라가는 고개를 숙인 채 묵묵히 미안하다고만 반복했다.
"미안하다."
리아나는 한숨을 쉬며 답답하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기세가 서서히 줄어들며 그녀의 흰 털이 다시 검은색으로 돌아왔다.
손과 발도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아갔다.
"...후우."
리아나는 짧게 숨을 내쉬며 말했다.
"넌 진짜 재미없게 만든다."
크라가는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짧게 대답했다.
"미안하다."
리아나는 짜증이 폭발하기 직전이었다.
"아, 그놈의 '미안하다, 미안하다' 좀 그만해. 진짜. 더 짜증 나니까."
크라가는 미세하게 목소리를 낮추며 짧게 헛기침을 했다.
"...크흠."
리아나는 손을 털며 그를 한 번 쏘아보고 돌아서며 퉁명하게 말했다.
"여기까지 온 김에 들어와서 상황 설명이나 하고 가."
크라가는 고르그를 한 번 내려다보더니 짧게 대답했다.
"나도 자세한 건 모른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리아나의 표정이 굳었다. 고르그와는 다른 짜증이 차오르며 그녀가 크게 숨을 내쉬었다.
"아오! 답답해!!"
한 번 소리친 그녀는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다시 말했다.
"그냥 여태껏 일어난 상황이나 좀 간략하게 말해달라는 거잖아."
크라가는 잠시 침묵했다. 그러더니 초원의 끝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으음?"
리아나도 크라가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두 사람은 동시에 초원의 끝을 응시했다.
크라가가 낮게 말했다.
"무언가 빠르게 오고 있다."
리아나의 눈이 좁아졌다.
"인간 같은데?"
"그런 것 같군."
***
레이는 시엔을 업은 채 고슈안 사막을 향해 미친 듯이 달렸다.
혹여나 라이칸의 영향으로 오크와 수인족 간에 큰 전쟁이라도 벌어질까 걱정하며 속도를 높였다.
등에 딱 달라붙은 시엔은 레이의 체취가 신경 쓰이는지 얼굴이 붉어졌다.
상황과 맞지 않는 자신의 반응에 한숨을 쉬며 속으로 스스로를 한심하다고 여겼다.
레이는 달리던 중 멀리서 느껴지는 기세에 눈을 좁혔다.
‘스톤가드와 비슷한 기운··· 설마 벌써 전쟁이 시작된 건가?’
그는 속도를 더 높이며 초원을 주파했다.
마침내 대초원과 고슈안 사막의 경계에 도착했을 때, 멀리서 자신을 지켜보는 시선을 느꼈다. 주변을 둘러본 레이는 잠시 숨을 고르며 중얼거렸다.
"다행히 전쟁은 안 난 것 같네."
그 시선의 방향으로 걸음을 옮기려는 순간, 등에 업힌 시엔이 귀에 바짝 대고 말했다.
"언제까지 업고 있을 거야?"
레이는 순간 목에 닭살이 돋으며 놀라서 말했다.
"아! 미안. 가벼워서 업고 달린 걸 깜빡했네."
시엔의 얼굴이 더 붉어지며 낮게 말했다.
"뭔 헛소리야. 내려줘."
레이는 시엔을 내려주고 다시 걸었다.
주변을 살피며 그는 작게 중얼거렸다.
"전투가 완전히 없었던 건 아니네···"
곳곳에 보이는 흔적이 전투의 여파를 말해주고 있었다. 그러나 양쪽 모두 큰 피해는 입지 않은 듯했다.
레이와 시엔은 키가 2.5미터는 되어 보이는 흑색 오크와 1.9미터 정도 되는 검은 귀와 꼬리를 가진 수인족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레이가 먼저 입을 열었다.
"레이라고 합니다. 대전사 크라가, 그리고 여왕 리아나 맞나요?"
시엔도 짧게 인사했다.
"시엔이에요."
리아나는 그들을 흥미롭게 바라보며 말했다.
"여긴 인간들이 잘 찾지도 않는 지역인데··· 어린 인간 두 명이 어쩐 일로 여기까지 온 거지?"
레이는 주변을 한 번 둘러보고 침착하게 답했다.
"이렇게 된 원인을 알 것 같아서요."
크라가가 무겁게 물었다.
"오크들의 죽음이 이 전투의 원인인데, 근본적인 원인을 알고 있다는 건가, 인간?"
레이는 잠시 크라가와 눈을 마주치며 차분히 말했다.
"자세한 건 여기서 말고, 조금 더 조용한 곳에서 이야기하시죠."
리아나는 고개를 돌려 크라가를 바라보며 말했다.
"잘됐네. 원인을 알고 있다는데, 이야기 들어봐야지."
크라가는 적색 오크 전사 중 하나인 고르안을 불러 지시했다.
"고르안. 고르그를 업고 영토로 돌아가라. 나는 맹세했다 동족을 죽인 녀석을 산 채로 찢어 죽이겠다고. 그러니 믿고 기다려라."
고르안은 대답 없이 고르그를 들어 올렸다.
적색 오크 전사들은 말없이 뒤를 따르며 영토로 돌아갔다.
그 모습을 지켜본 수인족 전사들도 리아나의 신호에 따라 물러났다.
리아나는 크라가와 함께 레이와 시엔을 데리고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리아나가 뒹굴던 정원처럼 보이는 광장이었다.
리아나는 몸을 돌려 레이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주변에 아무도 없으니까, 이제 말해봐. 이 망할 사단이 난 원인이 뭔지."
레이는 숨을 고르며 조용히 물었다.
"최근에 이상하게 생긴 괴수들, 많이 보였나요?"
그 말에 크라가가 짧게 대답했다
"그래. 하지만 귀찮긴 해도 큰 문제는 없었다."
레이는 잠시 생각을 정리한 뒤, 입을 열었다.
"드워프의 바위산, 암페리온에서부터 시엔과 함께 조사를 시작했어요. 최하급 괴수와 본드레이크가 나타났고, 이후 회색과 녹색 오크 영토를 지나면서 하급 괴수인 다크에즈와 스레드를 만났어요. 그리고..."
레이는 시선을 들어 크라가와 리아나를 번갈아 보며 말을 이었다.
"적색 오크를 죽인 건 시체의 상흔을 들어보니 중급 괴수 라이칸인 것 같아요."
리아나는 팔짱을 끼며 고개를 갸웃했다.
"최하급, 하급, 중급··· 그다음 단계도 더 있어 보이는데?"
레이는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그건···"
하지만 끝내 말을 잇지 못했다.
그때 크라가가 야수처럼 으르렁거리며 레이를 노려봤다.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동족을 죽인 원수가 라이칸인지 뭔지 하는 그 망할 것이란 게 확실한가?"
레이는 크라가의 눈빛을 피하지 않고 대답했다.
"거의 100퍼센트요."
크라가는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그럼 그게 제일 중요한 거다. 그 망할 것이 대초원에서 동족을 사냥하고 있다는 것."
그는 주먹을 꽉 쥐고 이를 갈았다.
"나는 그놈을 찢어 죽인다고 맹세했다."
크라가의 몸에서 서서히 기세가 방출되며 주변에 압박감이 퍼지자 공기가 무겁게 내려앉았다.
리아나는 그런 크라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이내 천천히 그의 곁으로 다가가 손을 그의 어깨 위에 얹었다.
"크라가. 기세가 거칠어지고 있어."
크라가는 눈을 감고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이내 기세가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는 눈을 뜨고 레이와 시엔을 바라보며 낮게 말했다.
"미안하다."
크라가는 깊은 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도 동족들이 죽임을 당하고 있을 거다. 오늘 있었던 일은 그녀석을 죽이고 나서 다시 이야기하도록 하지."
그는 망설임 없이 몸을 돌려 대초원을 향해 나섰다.
리아나는 그를 잠시 지켜보다가 한숨을 쉬며 대꾸했다.
"에휴... 알아서 해라."
그러고는 광장의 한복판에 대자로 누워버렸다.
레이와 시엔은 어색하게 서로를 바라봤다. 레이가 먼저 입을 열었다.
"가야겠지?"
시엔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리아나에게 다가가 인사를 했다.
"감사했습니다."
리아나는 눈만 살짝 뜨고 손을 흔들며 대답했다.
"응, 잘 가라."
레이와 시엔은 리아나를 뒤로하고 크라가를 따라 대초원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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