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칸(2)

수인족 영토를 지나 대초원을 가로지르는 크라가의 뒷모습이 보였다.
레이와 시엔은 그를 뒤따르며 빠른 걸음을 재촉했다.
레이가 숨을 고르며 크라가에게 말을 걸었다.
"크라가. 라이칸을 잡으러 같이 가죠."
크라가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보며 말했다.
"도움 따위는 필요 없다는 걸 알 텐데."
"도움이라기보단 확인해야 해서요. 정말 라이칸이 맞는지."
크라가는 눈을 가늘게 뜨며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라면 상관없다. 어차피 이 대초원에 오크를 제외한 이종족은 인간 너희 둘과 그 라이칸이라는 녀석뿐이겠지."
그때 시엔이 조심스럽게 레이에게 말을 걸었다.
"그런데 꼭 대초원이 아니라 고슈안 사막에서 넘어온 걸 수도 있잖아?"
그 말을 들은 레이와 크라가는 순간 멈춰 섰다.
시엔은 두 사람의 반응을 보며 잠시 침묵하더니 말했다.
"···이렇게 생각하는 게 기본 아니야?"
크라가는 의문 가득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정말 사막 쪽에서 넘어왔다면, 수인족은 라이칸에게 피해를 입지 않은 이유가 설명되지 않는다."
레이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인상을 쓰며 말했다.
"누군가가 대초원에서 적색 오크를 죽이라고 명령을 내렸을지도 모르죠."
레이의 말에 시엔이 흠칫하며 물었다.
"명령? 누가? 왜?"
레이는 대답하기 싫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중급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다면, 더 위겠지. 상급이나··· 최상급?"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생각에 잠겼다.
'7장군은 아니겠지··· 그러면 지금 전력으로는 답도 없는데.'
짧은 한숨을 내쉰 레이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수인족과 가장 가까운 적색 오크 영토에서만 라이칸이 움직였다는 건···"
말을 잇기 전에 크라가가 나직하게 끼어들었다.
"전쟁을 원했던 거다. 오크와 수인족의 전쟁."
레이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크라가는 이를 악물며 말했다.
"적색 오크들은 동족의 죽음을 절대 눈감고 넘어갈 리 없으니, 일부러 부추긴 거겠지."
레이는 그 말을 받아들이며 한숨을 쉬었다.
"그런 것 같네요. 오크와 수인족을 약화시키려고 한 건가···"
레이의 말이 끝나자 크라가는 고개를 들었다.
"우선은 라이칸이 먼저다. 고슈안 사막 쪽 문제는 라이칸을 찢어 죽이고 나서 리아나와 이야기하면 된다."
그때 시엔이 나직하게 말을 꺼냈다.
"정말 라이칸이 그런 명령을 받았다면, 적색 오크 영토 끝자락에서 기다리다 보면 나오지 않을까요? 넓은 대초원과 사막을 다 뒤질 수는 없으니, 확률이 제일 높은 방법으로 가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크라가와 레이는 동시에 시엔을 바라보았다. 레이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도 일리가 있네."
***
라이칸은 근육 가닥들을 꿈틀거리며 머리를 움켜쥔 채 괴롭게 웅크려 있었다.
자신이 무엇인지 인지도 못하던 시절, 어둠 저편에서 누군가 부르는 듯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이끌려 눈을 뜨자 눈앞에 펼쳐진 어두운 공간 속, 뼈와 금속으로 이루어진 지팡이를 쥔 실루엣이 공중에 떠 있었다.
아래로 내려다보는 그 시선에 본능적으로 고개를 숙이고 바닥에 엎드렸다.
그 실루엣이 낮게 말했다.
"아직은 중급까지인가."
옆에 있던 갑각처럼 보이는 피부와 뿔을 가진 또 다른 실루엣이 천천히 움직이며 말했다.
"아직은. 그래도 다양한 개체가 깨어나는군. 몇몇은 이미 다른 곳으로 보냈다."
"어디로?"
"인간국과 에델리안."
"인간국에는 중급까지만 보내도록 하지."
"상급부터는 인간들이 뭉칠까봐 그러는 건가?"
"그래. 적당히 피해를 주며 즐길 정도로만 유지하는 게 좋아."
그때 또 다른 실루엣이 나타났다.
키는 170cm 남짓, 끝에 새빨간 보석이 박힌 지팡이를 든 여성의 모습이었다.
그녀는 이마부터 난 염소 모양의 뿔을 만지며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마계에 가보고 싶어."
"마계?"
"응, 궁금하잖아. 대전쟁의 원념과 사념을 회수한 거라면 우리와 가장 근접할 텐데. 어찌 보면 우리 후손 같은 거 아니야?"
지팡이를 든 실루엣이 냉소적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깨어난 지 얼마 안 됐으면 회복에 집중해라, 루비아."
"모르타는 항상 딱딱하네. 같은 마법사 맞나 몰라? 그로트, 마계에 같이 갈래?"
"관심 없다. 아직 4명의 장군이 깨어나지 않았으니 회복에 집중할 뿐이다."
루비아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아, 재미없네. 혼자라도 잠깐 갔다 와야겠다~"
모르타는 그녀를 무시하고 다시 라이칸을 바라보며 명령을 내렸다.
"대초원에서는 적색 오크만 사냥해라. 수인족은 건드리지 말도록."
라이칸은 세 실루엣의 기운에 짓눌려 비틀거리며 어둠 속에서 도망치듯 뛰쳐나왔다.
고슈안 사막의 건조한 바람이 자신을 이루는 근육 가닥을 스치며 지나갔다.
그때 머릿속에 강렬하게 울려 퍼지는 소리가 들렸다. 어둠 속에서 들렸던 목소리와 똑같았다.
- 끝이 아니다. 부활하라. -
동시에, "적색 오크만 사냥하라."는 목소리가 겹쳐지며 머리가 깨질 듯 아파왔다.
고통 속에서도 본능적으로 대초원으로 향하던 라이칸은 적색 피부의 오크가 보이자 그대로 등을 뚫고 발톱으로 뜯어버렸다.
그렇게 시작된 적색 오크 사냥.
머릿속에 들려오는 쉼 없는 목소리와 함께 그는 광기에 사로잡혀 대초원을 헤매며 적색 오크들을 죽였다.
그리고 어느날 다시 느껴지는 두통과 함께 멀리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라이칸은 이 두통을 없애고 싶다는 생각에 즉시 그쪽으로 달려갔다.
오크들을 죽이면 오로지 쾌락만이 자신을 지배하니까.
- 죽인다. 죽인다. 죽인다. -
오로지 죽인다는 본능만으로 근육을 꿈틀거리며 튕겨져 나가듯 내달리는 라이칸.
곧, 눈 앞에 세 명의 실루엣이 보였다.
시엔은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라이칸의 생김새를 보며 말했다.
"뭐... 저렇게 생긴 거였어?."
레이는 라이칸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크라가를 향해 말했다.
"그래. 크라가, 라이칸 맞네요."
크라가는 숨을 들이쉬며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맹세 했었다. 널, 산 채로 찢어 죽인다고."
***
크라가의 몸에서 희미한 금색 문양이 떠오르더니, 점차 기감을 퍼뜨리기 시작했다. 그의 시선은 적색 오크 영토 끝자락을 향하고 있었다.
"오크들 말고는 뭐가 잘 안 느껴지는다."
레이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저도 해볼게요."
그천천히 의념을 넓게 퍼뜨리며 걸음을 옮겼다. 시엔도 가만히 눈을 감고 마나를 확장시켜 주변을 스캔하기 시작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크라가가 이마를 살짝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움직임이 오크와는 다르다. 이건··· 짐승에 가깝다."
레이도 뒤늦게 무언가를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이쪽으로 오는 것 같은데."
순간, 수풀이 거칠게 헤쳐지며 무언가가 튀어나왔다.
광기에 물든 근육 가닥들이 꾸물거리며 늑대의 형상을 한 거대한 존재가 모습을 드러냈다.
시엔이 본능적으로 한 발 물러서며 작게 중얼거렸다.
"뭐야··· 저렇게 생긴 거였어?"
"그래. 크라가, 라이칸 맞네요."
"맹세했었다. 널, 산 채로 찢어 죽인다고."
크라가가 단숨에 거리를 좁히며 주먹을 휘둘렀다.
목표는 라이칸의 머리.
강력한 충격이 이어질 듯했지만, 라이칸의 근육 가닥들이 마치 살아 움직이듯 휘말려 들어갔다.
머리가 기이한 각도로 휘면서 크라가의 주먹은 허공을 갈랐다.
동시에 라이칸의 발톱이 날카롭게 세워지며 크라가의 목을 향해 날아들었다.
크라가는 그 궤적을 정확히 읽고 쳐내려 했지만, 발톱의 움직임이 상식을 벗어났다.
수평으로 휘두르던 발톱이 갑자기 수직으로 꺾여 심장을 향해 내리꽂혔다.
발톱이 닿기 직전, 크라가의 손이 움직였다. 단단히 발톱을 붙잡은 그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 까드득 -
발톱이 통째로 으스러졌다. 라이칸이 몸을 꿈틀거리며 반응했지만, 크라가는 미동도 없이 힘을 더하며 말했다.
"이래서 동족들이 속수무책이었나. 상식이란 게 없는 움직임이다."
발톱 째로 붙잡힌 라이칸이 남은 발톱으로 크라가에게 잡혀있는 자신의 팔을 내려쳤다.
발톱이 정확히 들어가며 붙잡힌 팔이 잘려 나갔다.
라이칸은 곧바로 뒤로 물러나더니, 잘린 부위를 보며 근육을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삽시간에 팔이 재생되며 이어붙듯 새로 돋아났다. 근육들이 떨리는 소리가 마치 말하는 듯 들려왔다.
- 오크... 죽... 죽인다... -
라이칸의 거친 소리에 크라가가 흥미롭다는 듯 낮게 중얼거렸다.
"말을 하는 괴수라···."
손에 남아있던 라이칸의 팔을 흘끗 보더니 바닥에 내팽개치며 천천히 다시 발을 내디뎠다.
순간, 두 형체가 공중에서 동시에 사라졌다.
- 쾅! -
크라가의 주먹이 바람을 찢으며 내려쳤다.
라이칸은 뭉쳐진 근육가닥을 낱개로 퍼뜨리며 공격을 흘려냈다.
그러나 크라가는 주먹과 발을 가볍게 튕기듯 이어가며 라이칸의 근육 움직임을 빠르게 읽어냈다.
- 퍽! -
라이칸의 옆구리가 터지며 피와 살점이 초원 위로 흩뿌려졌다.
- 쾅! 쾅! -
라이칸이 반격을 시도하며 발톱을 휘둘렀지만, 크라가는 그 궤적을 읽고 반 박자 빠르게 머리를 옆으로 틀었다.
이어지는 발차기가 라이칸의 다리를 꿰뚫듯 차며 날려버렸다.
- 콰쾅! -
터져나간 팔다리와 살점들이 대초원 곳곳에 흩뿌려졌다.
라이칸은 비틀거리며 재생을 시도했지만, 크라가의 공격은 이미 다음 단계를 향해 있었다.
손이 순식간에 뻗어 라이칸의 남은 팔을 움켜쥐더니 그대로 뜯어냈다.
- 크아아악! -
라이칸이 괴성을 내질렀다.
- 퍼억! -
마지막으로 크라가의 주먹이 머리 옆으로 떨어지며 라이칸의 상체가 바닥에 철퍼덕 굴러떨어졌다.
재생하던 근육들이 멈추더니, 결국 몸뚱이만 남은 채로 쓰러졌다.
크라가는 그 모습을 내려다보며 한 발 앞으로 나섰다.
"산 채로 찢어 죽인다고 맹세했다 했지."
라이칸은 공포에 질린 눈으로 자신에게 다가오는 크라가를 쳐다봤다.
하지만 그 눈빛이 이내 변했다. 공포는 사라지고, 광기 어린 빛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순간, 초원에 흩어져 있던 살점들이 꿈틀거리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터져나가 뿌려졌던 살덩이들이 마치 의지를 가진 듯 공중으로 떠오르더니, 한꺼번에 크라가를 향해 달려들었다.
- 척 착 차악 -
살덩이들은 한데 뭉쳐 크라가를 향해 달려들었다. 진흙처럼 몸을 감싸며 움직임을 막으려는 듯했다.
라이칸은 몸뚱이만 남은 상태로 기괴하게 진동하며 비웃음 같은 소리를 냈다.
- 크르르··· 죽어라··· 오크··· -
몸을 한 번 크게 떨며 뭉쳐진 살덩이들을 터뜨렸다.
- 콰아아앙! -
굉음과 함께 살덩이들이 폭발했다. 충격파가 초원을 휩쓸며 피와 고깃덩이가 사방으로 흩날렸다.
하늘은 연기로 뒤덮였고, 폭발의 여파로 땅이 움푹 파였다. 주변 풀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라이칸은 자신이 만든 광경을 바라보며 비릿한 소리를 냈다.
- 크르르··· -
흙먼지가 바람에 밀려 사라지자, 폭발의 중심에 서 있는 크라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금색 문양이 선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는 피로 뒤덮인 살덩이를 느긋하게 털어내며 라이칸을 바라봤다.
"이딴 게 마지막 발악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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