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 시점의 인간국가들

처음 괴수들이 나타났을 때, 사람들은 이를 단순히 변종 몬스터로 여겼다. 외형이 기괴하긴 했지만, 용병들만으로도 충분히 처리할 수 있었다.
"요즘 나오는 놈들, 생긴 건 좀 이상해도 결국 똑같이 베어 끝내면 돼."
"맞아. 우리한테 맡겨두라니까."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괴수들의 수는 점점 늘어났고, 그 강함도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변하기 시작했다.
용병들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게 되자 각국은 병사들을 동원하기 시작했다.
"이젠 마을마다 병사들을 배치해야 할 정도야. 이건 단순한 변종 몬스터가 아니야."
"우리만으론 한계다. 병사라도 있어야 버틸 수 있어."
처음엔 병사들의 힘으로 괴수들을 간신히 막아냈지만, 그마저도 오래가지는 못했다.
괴수들은 단순히 강해지는 것을 넘어, 점차 특수한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제국은 변종 몬스터와 괴수를 명확히 구분하며 최하급 괴수와 하급 괴수로 분류했다.
- 검은 액체로 이루어진 괴수
"베었는데··· 뭐야, 다시 붙었어?"
"몸이 전부 액체야. 이걸 어떻게 죽여야 하는 거야?"
검은 액체 괴수는 물리 공격을 흡수하며 상처를 복구했다. 흘러나온 액체가 또 다른 최하급 괴수를 만들어내는 모습은 공포 그 자체였다.
- 강력한 재생력을 가진 괴수
"목을 베었는데··· 다시 붙었다고?"
"이건 단순한 괴물이 아니야. 재생이 너무 빨라!"
재생력을 가진 괴수는 상처를 거의 즉각적으로 회복하며 병사들을 압도했다.
- 치명상을 입으면 자폭하는 괴수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뭐야! 폭발했다고?"
"가까이서 싸우지 마! 저놈은 죽으면서도 주변을 다 날려버리려 해!"
자폭 괴수는 마지막 순간 치명적인 폭발을 일으켜 병사들과 도시를 초토화시켰다.
이 괴수들은 병사들로는 도저히 상대할 수 없는 존재였다.
"하급 괴수로 마을이 초토화됐다고?"
"기사 몇 명이 출동했지만 피해가 너무 컸대. 이건··· 다른 문제야."
하급 괴수의 출현은 기사단의 본격적인 개입을 요구했다. 그러나 더 큰 문제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날, 제국 수도 옆 도시 칼디아스에서 사상 최악의 사건이 벌어졌다.
칼디아스에는 평소보다 많은 최하급 괴수와 하급 괴수들이 출현했고, 이에 기사단이 출동해 전투를 벌였다.
"오늘은 수가 너무 많아. 긴장해라."
"하급 괴수들까지 이렇게 많이 나온 적은 없었는데··· 불길하다."
전투가 한창이던 중, 하늘에서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저건 뭐야?"
"늑대 같긴 한데··· 크기가 말이 안 되잖아."
거대한 근육 가닥들이 꿈틀대며 뭉쳐진 괴수. 라이칸이었다.
라이칸은 기사단 한가운데로 착지했다. 착지와 동시에 근육 가닥들이 펼쳐지며 발톱이 날카롭게 세워졌다.
"모두 조심해! 지금까지의 괴수랑은 다르다!"
라이칸은 방어선을 단숨에 뚫었다. 기괴한 각도로 움직이는 발톱은 기사들을 하나둘 쓰러뜨렸다.
공격을 맞아도 곧바로 재생되었고, 근육 가닥들은 그들의 사각을 찌르며 목숨을 빼앗았다.
"공격이 안 통해! 저놈은 너무 강해!"
"살려줘! 이건 도저히 막을 수 없어!"
칼디아스의 기사단은 단 한 명도 살아남지 못했다. 라이칸은 도시를 초토화한 뒤 홀연히 사라졌다.
뒤늦게 도착한 제국의 기사단 부단장은 참혹한 광경을 보며 무릎을 꿇었다.
"어찌 이런... 조금만 더 빨리 왔더라면...?"
"부단장님, 이제는 기사단만으로 감당할 수 없습니다!"
부단장은 무거운 눈빛으로 일어나 결단을 내렸다.
"제국에 보고하라. 이건 더 이상 단순한 토벌이 아니다."
칼디아스 사건 이후, 제국은 모든 국가에 공식 선언을 내렸다.
"괴수는 우리의 생존을 위협하는 재앙이다. 모든 것을 뒤로하고, 괴수와의 전쟁에 전력을 다할 것이다!"
***
북부의 수도 발칸.
변경백이자 권왕 발타자르의 성내 회의실.
회의실 안은 무거운 공기로 가득했다. 북부의 주요 인물들이 한 자리에 모여 심각한 표정으로 논의를 이어가고 있었다.
북부 방어선 기사단장 율리크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괴수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습니다. 기존 몬스터들은 자취를 감췄고, 최하급 괴수들이 거의 모든 지역에서 발견되고 있습니다. 하급 괴수들도 하루에 몇 마리씩 출현 중입니다."
발칸 기사단장 게일도 침통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국의 수도 옆 도시 칼디아스에서는 기사단이 전멸당했습니다. 이후 제국은 괴수와의 전쟁을 선포했습니다. 아직까지 북부는 별 문제는 없지만 안심할 수 없을 겁니다."
회의실 안은 침묵에 잠겼다. 각자 머리를 싸매며 해결책을 찾으려 애썼지만, 무거운 공기는 쉽게 걷히지 않았다.
발타자르는 말없이 창밖을 응시했다.
초록빛 머리카락이 은은한 빛을 띠며 어깨를 타고 흘렀고, 하늘빛 눈동자는 멀리 어딘가를 깊게 응시하고 있었다.
한동한 그곳을 가만히 응시하다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회의실은 순식간에 정적에 휩싸였다.
게일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변경백님?"
"무언가 나타났군. 금방 다녀오겠네."
짧은 대답 뒤, 발타자르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발걸음이 멈추기도 전에 강렬한 기운이 방 안을 스쳐 지나갔다.
초록빛 머리카락이 휘날리며 순식간에 하늘로 솟구쳤고, 그의 모습은 이미 숲 쪽으로 사라지고 없었다.
발타자르는 거의 날다시피 숲으로 향했다. 삽시간에 도착한 그는 눈앞의 광경을 보고 미간을 좁혔다.
검붉은 액체로 이루어진 거인이 서 있었다. 4미터가량의 거대한 형체가 느릿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발타자르는 팔짱을 끼고 그 광경을 지켜보며 혼잣말을 했다.
"방금 전까진 기척조차 느껴지지 않았는데··· 어디서 나타난 거지?"
거인은 그의 시선을 느낀 듯 멈추더니 몸이 천천히 무너져 내렸다. 그리고 순식간에 발타자르와 동일한 형태를 가진 네 명으로 분열되었다.
발타자르는 흥미로운 듯 미소를 지었다.
"호오? 내가 기준인가? 아니면 인간 자체를 기준으로 삼는 건가?"
그때, 분열된 괴수들이 각기 다른 목소리로 더듬거리며 말을 내뱉었다.
부···분열··· -
인···간··· -
기···준··· -
삼···는··· -
발타자르는 얼굴을 찡그리며 고개를 저었다.
"음... 별로 보기 안 좋군. 이런 것들은 얼른 끝내야겠어."
발타자르는 가볍게 손을 들어 딱밤을 준비했다.
"우선 놈들이 뭘 할 수 있는지 봐 볼까."
그는 순식간에 가장 앞에 있는 괴수의 이마에 딱밤을 갈겼다.
- 펑! -
검붉은 액체로 이루어진 머리가 딱밤을 견디지 못하고 터져버렸다.
"재생 능력은 없는 건가? 이건 좀 싱겁군."
그러나 남은 세 개체는 바로 움직였다. 방금 발타자르가 보인 움직임을 그대로 흉내 내며 빠르게 그의 주위를 에워쌌다.
발타자르는 웃음을 띠며 말했다.
"학습을 하는 건가? 목숨을 담보로 움직임을 익히다니, 흥미로운 놈들이군."
괴수들은 형태를 유연하게 변화시키며 다양한 각도로 그를 공격했다.
발타자르는 일부러 공격을 피하지 않고 몸으로 받아냈다.
검붉은 액체가 칼날처럼 변하며 그의 몸을 덮쳤다. 옷이 찢기고 너덜너덜해졌지만, 발타자르는 여전히 여유로운 미소를 잃지 않았다.
찢어진 옷 사이로 드러난 그의 신체는 신이 빚은 듯 완벽했다. 극도로 압축된 근육이 공격을 튕겨내며 위용을 뽐냈다.
발타자르는 찢어진 옷을 망설임 없이 뜯어내고 한 발을 내디뎌 단순한 발차기를 날렸다.
- 퍼엉! -
또 다른 괴수하나가 터져나가며 액체가 사방으로 흩어졌다.
남은 두 개체는 발타자르의 움직임을 흉내 내려했지만, 마치 과부하가 걸린 듯 삐걱거리며 불안정하게 흔들렸다.
검붉은 액체로 이루어진 몸이 진동하며 형태가 뒤틀리기 시작했다.
발타자르는 그들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흥미가 사라진 듯 고개를 저었다.
"태생적인 한계가 있나 보군. 대충 어떤 놈들인지 알았으니··· 이제 그만 사라져라."
그는 팔을 크게 휘둘렀다.
- 쉐에엑! -
뒤로 공기가 터지며 강렬한 풍압이 발산되었다. 두 개체의 상반신이 그대로 터져나갔다.
검붉은 액체는 사방으로 튀어 흩어졌고, 무릎 아래의 잔해만이 땅 위에 남았다.
잔해에서 흘러내리던 액체도 점차 말라가며 흔적을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 발타자르는 남은 것을 한참 바라보다가 중얼거렸다.
"북부에서 이런 것들이 더 나타난다면, 골치 아파지긴 하겠군."
액체 괴수를 처리하고 성으로 돌아온 발타자르. 성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집사장 바일스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일레아나 님께서 오셔서 아르엔님과 협상 중이십니다."
발타자르는 초록빛 머리카락을 손으로 넘기며 고개를 갸웃했다.
"실버블룸 때문인가?"
"네. 역시 알고 계시는군요."
"요즘 괴수들 때문에 회복제가 귀할 때지. 그건 아르엔에게 맡기면 될 거다. 서부에서 일도 잘 처리했으니, 그 정도는 충분히 감당할 거다."
바일스는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제국에서 손님이 오셨습니다."
발타자르의 하늘빛 눈동자가 살짝 가늘어졌다.
"제국? 그놈들이 북부까지 발걸음을 하다니. 칼디아스 사건 이후로 뭔가 심경의 변화라도 있었나 보지. 만나보도록 하지."
바일스의 안내를 받으며 성 깊숙한 방으로 향했다. 묵직한 문을 열자 안에는 한 남자가 앉아 있었다.
금발을 깔끔하게 넘긴 머리, 사파이어처럼 빛나는 파란 눈동자.
제국 특유의 정제된 분위기를 풍기는 남자가 발타자르를 보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깊이 숙였다.
"오래간만입니다, 권왕."
발타자르는 문가에 서서 남자를 가만히 바라봤다. 팔짱을 끼고 눈길을 한 번 위아래로 훑더니, 무게감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레지오. 제국에서 네가 오다니, 의외군."
방 안의 공기가 순간 팽팽해졌다. 레지오는 고개를 들며 싸늘한 미소를 지었다.
"그만큼 이번 일이 중요하다 판단했으니까."
발타자르는 천천히 걸어가며 의자를 끌어 앉았다.
"첫인사가 끝나자마자 본성이 드러나는군."
"내가 존경하는 분은 황제 폐하 한 분뿐이니까."
발타자르는 턱을 괴며 레지오를 바라봤다.
"그래. 말이라도 들어보지. 왜 온 거지?"
레지오는 손을 모으며 상체를 약간 숙였다.
"짐작하겠지만, 괴수 때문이다. 이미 제국에서 각국마다 사람을 보낸 걸로 알고 있을 거다. 모든 국가 간의 갈등은 일단 뒤로 하고, 괴수들을 뿌리 뽑는 것을 최우선 목표로 정했으니까."
발타자르는 여전히 턱을 괸 채 무표정으로 말했다.
"숫자로 밀어붙이겠다는 말은 아닐 테고."
레지오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제국에서도 꽤나 강자들이 토벌에 나설 거다. 이미 한 번 쓴맛을 봤으니까."
"칼디아스?"
짧고 직설적인 단어가 방 안에 울렸다. 레지오는 순간 눈을 가늘게 떴다.
"... 직설적인 건 여전하시군. 권왕."
발타자르는 팔짱을 끼며 의자에 등을 기대었다.
"그래서 북부도 한 손 거들어달라, 이건가?"
"북부도 손해 볼 건 없을 거다. 소규모지만 연합이라는 이름으로 괴수를 토벌하고, 각국 간의 교류를 열 기회가 될 테니까. 언제까지 고립된 채로 남아있을 거지, 권왕?"
발타자르는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젓더니 낮게 대꾸했다.
"글쎄... 제국이 워낙 구리다는 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 아니겠나."
순간 레지오의 표정이 굳어지고 방 안의 공기가 차갑게 식었다.
"제국을 모독하지 마라."
발타자르는 미소를 거두고 차갑게 응수했다.
"대전쟁 이후, 기존 제국을 뒤엎고 세운 게 지금의 제국이지. 그리고 서부 상업국, 너희는 선을 넘으려 했어. 내가 모를 거라 생각했나? 그때 내가 움직였다면 제국이 어떤 꼴을 당했을지 상상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군."
레지오는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발타자르는 그의 표정을 보며 흥미롭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그리고 북부가 고립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우리가 견제를 받는 죽어가는 국가로 보이냐? 아니지. 오히려 북부가 움직일까 두려워하는 건 다른 국가들 아닌가? 제국 또한 마찬가지일 테고."
레지오는 숨을 내쉬며 낮고 차분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 서부 상업국, 선을 넘은 건 인정한다. 그건 맞아. 하지만."
그의 시퍼런 눈동자가 발타자르를 꿰뚫었다.
"제국은 북부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방 안이 다시 팽팽한 긴장감으로 가득 찼다. 발타자르는 그 시선을 차분히 받아들이며 짧게 웃었다.
"기싸움은 여기까지 하지. 북부는 손을 거들지 않을 거다."
레지오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왜지?"
발타자르는 팔짱을 풀며 단호하게 말했다.
"지금 괴수들은 딱 골치 아플 수준이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지. 각 국가 선에서 충분히 막을 만할 텐데. 자기들 실수로 앞마당이 터졌다고 발광하는 꼴이 어이가 없군. 처음부터 단장급이라도 따라갔다면 그런 일은 없었겠지."
발타자르는 이제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는 듯, 무표정한 얼굴로 덧붙였다.
"북부의 문제는 북부에서 해결한다. 제국은 다른 국가와 손잡고 잘 놀도록 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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