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프의 숲 에델리안

푸르른 생명으로 가득했던 엘프의 숲.
거대한 생명수, 에델리안이 중심에 우뚝 서 있던 곳은 이제 그 웅장함 뒤에 상처를 품고 있었다.
숲 곳곳에 불타고 쓰러진 나무들이 흩어져 있었다. 매캐한 냄새와 피어오르는 연기가 드넓은 숲을 뒤덮었다.
멀리서 들려오는 날카로운 비명과 괴수들의 으르렁거리는 소리. 엘프들은 괴수들과 교전을 벌이며 고군분투 중이었다.
괴수들의 첫 공격은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갑작스러운 습격으로 많은 피해를 입은 엘프들은 혼란에 빠졌지만, 현 여왕 아리엔델의 지휘 아래 빠르게 반격에 나섰다.
대전쟁을 모두 겪었던 그녀의 대응은 강렬했다.
엘프들은 쏟아지는 최하급과 하급 괴수들을 하나씩 처리하며 전선을 정비했다.
하지만 전장은 여전히 숨 돌릴 틈 없이 긴장감이 감돌았다.
숲의 후방, 치열한 전선에서 물러난 곳에서는 부상당한 엘프들이 누워 있었다.
그들 사이에서 루시가 회복 마법을 쓰며 정신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서부 상업국에서 돌아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갑작스럽게 터진 사태에 그녀는 이미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안 돼요! 버텨요!”
그녀는 부상자에게 마나를 집중하며 애타게 외쳤다.
그러던 순간, 무언가 찢어지는 소리가 귀를 때렸다.
“... 뭐야?”
루시가 고개를 돌린 그 순간, 공간이 갈라졌다.
그 틈에서 근육 가닥들이 뭉쳐진 모양의 거대한 늑대 괴수들이 튀어나왔다.
부상자들과 그녀를 향해 날카로운 발톱을 내리며 괴수들이 달려들었다.
순간 루시의 동공이 흔들렸다.
몸이 얼어붙은 듯 움직이지 못했다.
“아...!”
거대한 발톱이 눈앞까지 다가왔다.
그 순간, 괴수들이 갑작스럽게 터져나갔다.
“역시 부상자들을 노리는 습성은 어디 안 가는구나.”
차갑고도 맑은 목소리가 숲을 가로질렀다.
에메랄드빛 장발을 휘날리며 거대한 장궁을 든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엘프 여왕, 아리엔델이었다.
그녀의 연녹색 눈에서 강렬한 빛이 번뜩였다.
화살 하나 없이 장궁의 시위를 당기더니, 그대로 허공에 놓았다.
그 순간, 하늘에서 빛의 화살들이 쏟아졌다.
화살은 정확히 괴수들에게 내리 꽂히며 그들을 몰살시켰다.
루시는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숲 속의 공기는 긴장감 속에서 다시금 차갑게 식어갔다.
아리엔델이 루시를 내려다보며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정신 차려라.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건 힐러다. 너희가 무너지면 모두가 끝난다.”
장궁을 들어 올리며 그녀의 손끝에서 은은한 빛이 퍼져나갔다.
장궁의 빛이 부드럽게 흩어지더니 부상자들에게 닿으며 상처를 치유했다.
부상자들이 숨을 고르기 시작하자, 루시는 잠시 멍해진 채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아리엔델은 여전히 냉정을 유지한 채였지만, 속마음은 요동치고 있었다.
‘대전쟁 때의 괴수들이 왜 500년이 지나 다시 나타난 거지? 그 모든 희생이 허사가 된 건가?’
처음 보고를 들었을 땐 괴수들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침입자들의 생김새를 들었을 때도 내심 부정하려 했다.
하지만 전장에 도착해 직접 그 괴물들을 봤을 때, 부정은 무너졌다.
대전쟁의 기억이 떠올랐다.
그 괴수들은 그녀에게 증오와 분노 그 자체였다.
‘저 괴물들을 뿌리 뽑기 위해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렸는데...’
그 기억이 끔찍하기에, 그녀는 지금 누구보다 빠르게 대처할 수 있었다.
엘프들은 그녀의 지휘 아래 혼란을 수습하며, 더 큰 피해를 막고 있었다.
루시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어 물었다.
“여왕님... 이 괴물들은 대체 뭐죠?”
아리엔델의 시선이 짙어졌다.
“대전쟁 때의 괴수들이다.”
그녀는 낮게 대답했다.
“다른 종족들의 나라에서도 이 괴수들이 나타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상황이 좋지 않다.”
그때였다.
전방에서 공간이 심하게 일렁이기 시작했다.
루시와 아리엔델의 시선이 동시에 그쪽으로 향했다.
공간이 찢어질 듯한 괴음이 울리며 억지로 벌어졌다.
그 틈에서 무언가가 나왔다.
아리엔델의 눈빛이 차갑게 흔들렸다.
‘저건...’
그녀의 표정이 단단히 굳어졌다.
눈앞의 광경은, 전쟁의 본격적인 시작을 알렸던 거대 괴수 였다.
공간이 일그러지며 격렬한 소리가 전장을 가득 메웠다.
마치 억지로 뜯어내는 듯한 소리와 함께 찢겨진 틈 사이로 거대한 형체가 나타났다.
카르가란이었다.
15미터가 넘는 압도적인 거체는 단숨에 주변의 모든 존재를 위압했다.
온몸이 바위와 금속으로 이루어진 듯한 외형. 근육처럼 뻗은 금속질 구조물들이 빛을 반사하며, 검은 틈새에서 강렬한 붉은빛이 새어나왔다.
그 괴물의 한 걸음 한 걸음이 땅을 울렸다.
엘프들이 화살과 마법을 퍼부었지만, 카르가란은 자잘한 공격들을 무시한 채 전진했다.
터지는 화살, 불타는 마법의 폭발조차 그의 육중한 외피에 스치는 흔적으로밖에 남지 않았다.
그저 조금 더딘 속도로, 그러나 멈추지 않았다.
“저건... 뭐야!”
엘프 병사들 사이에서 공포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 존재는 엘프들이 쌓아둔 방어선을 짓밟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주변 나무들이 뿌리째 뽑히고, 땅이 갈라지며 숲의 질서가 무너졌다.
카르가란의 붉은 눈이 숲 중심부, 생명수 에델리안이 있는 방향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그의 목표는 분명했다.
엘프 병사들이 필사적으로 저항하며 더 강한 마법을 쏟아부었지만, 그 외피는 깨질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바위로 이루어진 팔을 휘두를 때마다 주변의 모든 것들이 쓸려나갔다. 엘프들의 희망마저 짓밟히는 듯했다.
공간이 찢어지며 등장한 괴수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오자 아리엔델의 얼굴이 굳어졌다.
“카르가란... 상급이 되기 직전 괴수까지...”
거대한 덩치에 후방의 힐러들이 동요하며 비명을 질렀다.
“저건... 막을 수 있는 건가?”
“저게 대체 뭐야...”
아리엔델이 루시를 돌아보며 단호히 말했다.
“부상자들을 계속 돌봐라. 방금 전에도 말했지. 너희가 무너지면 모두 끝난다.”
루시는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아리엔델은 장궁을 단단히 쥐고 숲의 가장자리로 발을 내디뎠다.
‘에델리안으로 가는 이유가 뭐지?’
그녀는 발을 강하게 박차며 공중으로 솟구쳤다.
바람 마법으로 몸을 띄우며 장궁에 마나를 집중시켰다.
거대한 화살이 형성되었고, 강력한 회전을 부여하자 공기가 찢어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공중에서 장궁을 최대 장력으로 당기며 아리엔델이 낮게 속삭였다.
“대전쟁의 망령을 에델리안에 다가가게 할수 없다.”
화살이 시위를 떠나는 순간, 공기가 갈라지는 소리와 함께 날아갔다.
화살은 눈 깜짝할 사이 카르가란의 가슴팍을 관통했다.
곧바로 폭발이 일어나면서 상체 전체가 터져 나갔다.
바위와 금속 조각들이 하늘로 튀어 올랐다가 비처럼 쏟아졌다.
카르가란의 거대한 형체가 천천히 무너졌다.
숲은 잠시 정적에 잠겼다가, 뒤늦게 엘프 병사들의 환호가 터졌다.
“여왕님이 해냈다!”
“괴물이 쓰러졌다!”
하지만 공중에 떠 있는 아리엔델의 표정은 여전히 굳어 있었다.
그녀는 바람 마법으로 몸을 안정시키며 고슈안 사막 쪽을 응시했다.
멀리, 사막의 끝에서 또 다른 거대한 형체가 모래를 헤엄치듯 숲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
고슈안 사막의 끝자락에 어스웜이 모래를 헤엄치듯 빠르게 나아갔다.
모르타와 그로트는 어스웜의 등 위에서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멀리서, 공간이 억지로 찢기는 듯한 소리가 사막을 울렸다.
그 틈에서 거대한 형체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모르타가 느긋하게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아직 디아드가 불안정하긴 하군. 카르가란이 중급 괴수 중 가장 강하다지만 상급 괴수도 아닌데 저렇게 힘겹게 나와야 하다니.”
그로트가 시선을 좁히며 말했다.
“카르가란 정도면 숲의 중심에 도달할 수 있나?”
모르타는 고개를 가볍게 저으며 대답했다.
“아리엔델이 있는데 그게 가능하겠나. 그녀의 힘은 진짜니까.”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숲 중심으로 돌진하던 카르가란의 상체가 폭발하며 터져나갔다.
멀리서도 붉은 빛과 금속 파편이 비처럼 쏟아지는 모습이 선명했다.
모르타의 시선이 숲 위로 향했다.
바람 마법으로 하늘에 떠 있는 아리엔델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저기 있네. 반가운 손님이.”
그로트가 아리엔델을 보며 말투에 비웃음을 담았다.
“전대 엘프 여왕의 도움으로 간신히 살아남은 자가 현 엘프 여왕이라... 우습군.”
어스웜은 고슈안 사막의 끝자락에 이르자 서서히 속도를 줄이며 멈췄다.
모르타와 그로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어스웜의 등에서 내렸다.
내린 그로트가 어스웜을 돌아보며 물었다.
"어스웜은 죽이지 않는 건가?"
모르타가 어스웜을 가리키며 답했다.
“쓸모없는 종족들과는 다르다. 어스웜은 필요한 종족이니까.”
어스웜은 멈칫하더니, 거대한 몸을 돌려 모래 속으로 사라졌다.
“엘프의 숲이라... 오랜만에 가보는군.”
둘의 발걸음은 엘프 숲의 중심, 생명수 에델리안을 향하고 있었다.
모르타와 그로트가 엘프 숲으로 발걸음을 옮기던 순간, 거센 바람이 몰아쳤다.
그들의 앞에 한 여인이 나타났다.
에메랄드빛 장발이 바람에 흩날렸고, 그녀의 손에는 거대한 장궁이 쥐어져 있었다.
연녹색의 눈빛이 빛나며, 그녀는 시위를 깊게 당겼다.
“여기가 어디라고 발을 들이밀지?”
그녀의 목소리는 단호하고 차갑게 울렸다.
바람은 그녀를 중심으로 회오리치듯 몰아치며 압박감을 더했다.
하늘에서 집중된 마나가 화살 형태로 응집되며 장궁 끝에서 위협적으로 떨리고 있었다.
모르타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아리엔델. 현 엘프 여왕이 직접 나와 반기다니, 영광이군?”
그녀의 눈빛이 더욱 차갑게 얼어붙었다.
“역겨운 목소리로 내 이름을 입에 담지 마라. 괴수.”
옆에서 그로트가 낮게 웃으며 말했다.
“엘루윈이 아니었다면 이미 그때 죽었어야 할 존재가 입을 여는구나.”
엘루윈.
그 이름이 언급되자 아리엔델의 시위 끝에서 마나가 흔들렸다.
마나의 흐름이 격동하며, 주위의 바람이 더욱 거세졌다.
그녀의 입술이 미세하게 떨렸고, 연녹색 눈빛이 더욱 날카로워졌다.
“감히... 그 이름을 입에 올리지 마라.”
모르타는 그녀의 반응을 흥미롭다는 듯 바라보며 조롱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왜 화를 내지? 너도 알지않나? 너 스스로가 죽인 거나 다름없다는 걸. 철부지였던 네가 전대 여왕을 죽였다는 사실은, 그 누구보다도 네가 잘 알 텐데?”
아리엔델의 눈동자가 흔들리며 번뜩였다.
모르타의 말이 그녀의 내면에 깊게 박혔다.
‘내가... 언니를...’
잠시 떠오르는 과거의 기억이 그녀의 숨결을 거칠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내 그녀의 눈빛은 분노로 불타올랐다.
“닥쳐라!”
그녀의 분노가 폭발하듯 활시위를 놓았다.
강력한 마나가 담긴 화살이 하늘을 가르며 날아갔다.
화살 끝에서 회전하며 발생한 바람이 공기를 찢는 소리를 냈고, 그 속도는 눈으로 따라잡을 수 없을 정도였다.
모르타는 화살이 다가오자 천천히 검지손가락을 들어올렸다.
“재밌군.”
그의 손짓과 함께 땅이 갈라지며 검게 뒤틀렸다.
곧바로 땅속에서 거대한 갈비뼈 모양의 뼈대가 솟아올라 화살을 막아냈다.
화살이 갈비뼈에 부딪친 순간, 폭발이 일어나며 강렬한 충격파가 사방으로 퍼졌다.
그러나 뼈 구조물은 뒤틀리며도 끝까지 버텼다.
폭발로 인해 먼지가 일렁이는 가운데, 모르타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역린을 건드렸나? 과거를 이야기했다고 발끈하는 모습이 그때의 철부지와 다를게 없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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