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서 살라고? (1)
······이해가 안 돼.
내가 여기 살러 왔다고? 여기가 어딘데?
게다가 어째 내가 자의로 여기 온 것처럼 들린다.
근데 난 아무 기억도 안 난단 말이지? 진짜 뭐가 어떻게 된 거야??
단순히 까먹은 건지, 아니면 아까 그 망치맨이 거짓말을 한 건지 정말 모르겠다.
알아낼 방도도 없다. 누구에게 물어본다고 답이 나오겠는가!
눈을 질끈 감고서 개탄하는 순간.
--질문은, 귀하를 맞이하러 올 자에게 하십시오.
문득, 나를 휙 던져놓고 떠난 냉혈한의 마지막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맞아. 누가 오기로 되어있잖아. 그 사람의 태도에서, 방금 들은 말의 진위 여부를 알 수 있겠지.
내가 진짜로 여기 주민이 될 몸이라면 차분할 테고, 그게 아니라면 황당해하면서 나를 경계할 거다.
왜, 마을 안에 들어가는 것도 허락을 받아야 되잖아. 아예 눌러앉아 사는 거야 오죽하겠어?
그러니까 그······ 뭐라고 하더라?
맞아, 촌장. 이곳의 촌장에게 미리 허락을 구했을 거다. 촌장은 나를 마을 일원으로 들여도 될지, 다른 사람들과 논의했을 거고.
그러려면··· 그러니까···.
으으, 머리가 안 돌아가·········.
······하여간 있어. 내 의문들에 답해줄 수 있는 사람은 반드시 존재한다.
마침 이쪽으로 다가오는 발소리도 들리잖아. 원래 내가 그리 귀가 예리했나 싶지만, 아무튼 곧 모든 수수께끼가 풀릴 거다.
그리 불안을 달래면서 아치형 입구에 시선을 주었다.
경비병들도 이내 발소리를 들었는지 나를 따라 고개를 돌렸고, 마침내 모습을 드러낸 두 사람······ 또 다른 경비병과 소년에게 차례로 인사를 건넸다.
“수고했다, 브룩. 마릭, 이 사람이야.”
마릭이라 불린 소년이 심드렁하게 나를 보았다.
어수선하게 헝클어져 있는 머리칼. 낡고 해진 옷. 키는 다 자란 성인만 한 반면, 얼굴에는 아직 앳된 티가 남아있다.
고상한 티가 나지 않는 걸 보아, 나를 데려오라고 명령 받은 심부름꾼인 듯했다.
“파이버 씨, 맞으시죠?”
웃음기 하나 없는 얼굴로 말을 걸며, 마릭이 터벅터벅 다가왔다.
무뚝뚝한 태도인 게 마음에 걸린 탓일까? 저절로 허리를 굽히게 되었다.
“······테일러 파이버를 말씀하시는 거라면, 제가 맞습니다.”
“허, 신기하네.”
경비병 중 하나가 어깨를 으쓱이며 끼어들었다.
“다른 건 죄다 잊었으면서, 이름은 기억하고 있는 게요?”
“······그러게요. 제가 봐도 이상하긴 합니다.”
어디서 무얼 하며 살다 왔는지는 손톱만큼도 떠오르지 않건만. 이름만은 아주 또렷이 떠오르다니, 뭐가 어찌 된 것인가.
“하지만 확실해요. 테일러 파이버, 이게 제 이름입니다.”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명실상부한 내 ‘재산’이다.
······증거는 못 대지만.
다행히 경비병은 더 추궁하지 않고 어깨를 으쓱였다.
“뭐, 본인이 그렇다니 맞겠지. 몽땅 잊어버린 게 아니라 다행이오.”
“그나저나 당신이 테일러 파이버였다니. 그럼 아까 그 양반이 교단 사람이었구만? 다짜고짜 ‘요청대로 배달 왔다’면서 신전이나 마을 관리자에게 전하라고 닦달해서 뭔가 했는데.”
그 양반······ 붉은 옷의 망치맨 말하는 거겠지.
경비병은 다시 떠올리기도 싫다는 듯, 이맛살을 찌푸리며 한숨을 푹 쉬었다.
“굉장히 비협조적인 양반이었소. 어디서 왔느냐고 물어도 대답이 없고, 신분을 증명할 걸 보여달라고 해도 무시하지 뭐요? 안에 이야기하면 알 것이란 말만 되풀이하는데, 어찌나 난처하던지!”
수상쩍음이 하늘을 꿰뚫을 태세였으나, 풍채와 눈초리에서 기묘한 위압감을 풍기는 탓에 창을 겨눌 수 없었다.
쫓아내지 못한다면 무얼 어찌하랴. 상대의 말대로 하는 수밖에.
때문에 세 경비병 중 하나가 상황을 전하러 달려갔고, 나머지 둘은 남자와 의사소통하려 노력했다.
결과적으론 헛수고였다. 사회생활이라는 개념을 버려버린 것처럼, 대답은커녕 눈을 마주치지도 않았으니까.
그에 공포를 느낄 즈음, 망치맨이 싣고 온 짐이 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생각지도 못한 존재가, 마차 짐칸에서 몸을 일으키더니 멀뚱멀뚱 눈을 끔벅이는 게 아닌가!
그에 경악하는 사이, 수상쩍은 망치맨이 짐을 바닥에 내리곤 훌쩍 떠나버렸다.
바로 나, 테일러 파이버를 내려놓고 휙 떠나버린 것이었다.
“사람을 싣고 왔을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소.”
“황당하셨겠군요.”
“당신만 할까. 아무튼.”
경비병들의 눈길이 일제히 소년, 마릭을 향했다. 자신의 차례가 돌아왔음을 알아차렸는지, 마릭은 성문 안쪽을 향해 고갯짓했다.
“가시죠.”
호의도, 적의도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 귀찮음보다는 피로가 더 묻어나고 있다.
아직 날이 환한데, 힘이 넘칠 젊은이가 벌써 지쳐있다니. 고용주가 험한 일을 마구 시켜먹는 게 틀림없다.
그리고 그게 내 미래일 터였다.
아니, 어쩌면 몇 배나 더 고될지도 모른다. 토박이도 엄히 대하는 사람이 마을을 관리하고 있는데, 외지인인 내가 어찌 되겠는가.
······적어도 수수께끼 하나는 풀렸군. 정말로 여기 살기로 예정되어 있던 모양이야.
착잡함에 남몰래 한숨을 쉬며 돌벽 안으로 들어선 순간.
“뭐야, 이거.”
시야를 가득 채운 광경에, 안 그래도 멍한 머리가 또 다시 비워지고 말았다. 걷다가 멈춘 것답게, 한쪽 발을 앞으로 내민 채 눈을 크게 끔벅였다.
어떻게 놀라지 않을 수 있을까.
오늘부로 살게 된 마을의 집들이 죄다 터만 남아있는데.
구체적으론 거의 대부분이 무너져 있다. 땅바닥은 곳곳이 패어있고, 나무와 돌 부스러기가 여기저기 널려있다.
부러진 채로 나뒹구는 화살. 날을 절반이란 잃어버린 창. 거기에 누군가가 쏟아버린 피가 말라버린 자국까지.
어쩐지 낯설지 않은 풍경이, 전혀 모르는 마을에 펼쳐져 있었다.
“그저께 오크가 쳐들어와서요. 성벽부터 우선 보수하느라, 마을 건물들은 아직 이 꼴이에요.”
심드렁하게 말하는 마릭의 옷차림이 재차 눈에 들어왔다.
유독 올이 많이 빠져나와 있는 것 같은 튜닉. 무언가에 쓸린 자국이 선명히 남아있는 호즈.
몸 어디에도 상처는 없지만, 옷이 전부 다 받아낸 덕인지도 모른다.
궂은 일을 하느라 해진 게 아닌, 살아남으려 애쓴 흔적들을 몸에 두른 채.
마릭은 아무런 감흥도 없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였다.
“뭐, 어디나 있는 일이죠.”
“······”
흔한 일. 조금도 특별하지 않은 사건. 하루 아침에 터전이 부숴지고, 생각지 못한 순간에 죽음이 찾아오는 게 당연한 일상.
······그래. 이런 세상이었어.
내가 태어나버린 땅은, 아니 내 ‘종족’은 이런 삶을 짊어지고 있다. 그것도 까마득히 오랜 옛날부터.
텅 빈 머리에 가장 먼저 채워지는 게 이런 씁쓸한 현실이라니. 절로 깊은 한숨을 짓게 되었다.
그리고 잠시 후, 나는 다시 멍하니 입만 벌리게 되었다.
일단 마릭은 나를 시장으로 데려갔다. 거기까진 그러려니 했지만, 가위 그림이 달린 건물 앞에 멈춰 선 것엔 눈을 멀뚱거리지 않을 수 없었다.
왜 여기로 온 거지?
“여기가 촌장님 댁인가요?”
머뭇머뭇 묻자,
“아뇨. 포목점인데요. 그리고 여긴 촌장 없어요. 행정관 님이 있지.”
굉장히 담백한 부정과 함께, 소소한 정보를 돌려주었다. 덕분에 머릿속이 더 얼기설기 엉키는 것 같았다.
포목점? 그게 뭐야?
······아니, 지금은 그 다음 게 더 중요하겠구나.
“행정관···이요? 촌장이랑은 뭐가 다르나요?”
“엥.”
굉장히 이상한 질문이었던 모양이다. 처참하게 파괴된 집들을 지나면서도 담담했던 눈이 동그래졌으니까.
“농담이시죠?”
“······그게, 제가 지금 기억이 애매해서······.”
“허? 그럼 아까 하비 아저씨가 말했던 게 과장이 아니었어요? 아저씨 이름 빼고는 아는 게 하나도 없는 거예요?”
“아주 없진 않아요.”
일단 나무와 땅과 하늘을 알아봤고, 마차와 말도 보자마자 그 명칭을 떠올렸다. 경비병들이 입고 있는 게 누비 갑옷이란 것도 한눈에 알아차렸고 말이지.
“하지만 제 자신에 대해선, 이름 외엔 기억나는 게 없습니다.”
“아니, 어쩌다 그런······. 아, 모르시겠구나.”
마릭은 얼굴을 찌푸리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러다 어깨를 크게 으쓱이곤, 담담한 표정으로 돌아와서 입을 열었다.
“지금 가장 중요한 걸 알려드릴게요. 아저씨는 남자예요.”
“······알아요. 세상엔 여자라는 반대 성별이 있는 것도 알고요.”
“다행이네요. 여기서 아저씨를 재우기로 했는데, 성별이란 걸 잊으셨다면 조금 힘드셨을 거거든요.”
그리 말하며 정면의 가게를 가리켰다.
재우기로 했다는 건, 앞으로 쭉 살 집은 아니라는 거지? 왜? 나를 들이기로 한 집이 무너져서 못 쓰게 됐나?
고개를 갸웃거리던 중, 부서진 건물 안에서 누군가가 척척 걸어 나왔다.
여기까지 오면서 본 사람들처럼 먼지를 한껏 뒤집어쓰고 있는 여자가, 나무 쓰레기가 가득 든 통을 안고서 저벅저벅 걸어 나오고 있었다.
“아, 진짜.”
곧장 혀를 차고서 다가가는 마릭. 여자가 자신을 알아볼 새도 주지 않고 통을 낚아채듯 빼앗아버렸다.
“뭐 하는 거야. 이런 거 옮기지 말고 쉬라니까? 기운도 없으면서 왜 움직이려 들어?”
“깨끗한 데서 쉬고 싶어서 그런다, 왜.”
“아저씨 돌아오실 때까지만 좀 참아. 지금 상황에 무리하다가 쓰러지면 진짜 큰일난단 말야. 다들 자기 집 치우느라 정신 없는 거 알잖아. 누나가 바닥에 뻗어서 죽어 가도 모를 거라고.”
“한 명은 알겠지.”
여자는 서슴없이 나를 가리켰다.
“네 옆의 사람.”
“······예? 저요?”
“네. 달리 누가 있겠어요?”
그리고 뻔한 이야기 아니냐는 듯이 어깨를 으쓱였다.
아니 뭐···. 여기서 지내기로 돼있으니 쓰러진다면 알 수밖에 없지만······.
저리 당당하게 얘기하니까 기가 찬다고 해야 하나·········.
마릭도 나와 비슷한 감상을 품은 모양이었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한숨 섞인 투로 ‘쓰레기 버리고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가버렸으니까.
그 뒤통수를 향해 주먹을 드는 걸로 소심한 앙갚음을 한 뒤, 여자는 나에게 다가와 고개를 까닥였다.
“안녕하세요, 파이버 씨. 만나서 반가워요! 저는 아일라 드레이프라 해요. 편하게 아일라라 불러주세요.”
“······아, 예.”
서슴없이 날아온 인사에 머뭇머뭇, 마주 인사를 건넸다.
“테일러 파이버입니다. 그······ 테일러라 불러주세요. 아일라 씨.”
“으음, ‘씨’는 필요 없는데. 뭐, 강요하진 않을게요. 아무튼 잘 부탁드려요, 테일러!”
······바로 이름을 불러버리네. 거리를 너무 홱 좁히는 거 아냐?
이런 생각이 들면서도 그리 싫지 않은 걸 보면, 나도 낯을 가리는 성격은 아닌 모양이다.
“여기 서있지 말고 안에 들어가죠. 이것저것 설명 듣고 싶으실 거예요. 그쵸?”
“아, 예.”
성큼성큼 발을 내딛는 그녀를 따라, 주춤주춤 문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 다음.
“·········”
드넓은 공간 가득, 잔해가 한가득 쌓여있는 광경을 목도했다. 자연히 집주인을 돌아보게 되었다.
“아, 맞다. 어질러져 있었지.”
민망하다는 듯 뺨을 긁적이곤, 헛기침을 하고서 힘있게 말했다.
“한동안 같이 살게 됐으니, 친목을 다지는 의미에서 같이 치울까요!”
“······제가 할 테니 어디 앉아 계세요.”
마릭이 잔소리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몇 번째일지 모를 한숨을 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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