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상실자의 마을 생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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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프드림
작품등록일 :
2024.11.03 18:12
최근연재일 :
2024.11.07 2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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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04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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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살라고? (2)

DUMMY

일단 집 안에 있는 잔해들을 바깥으로 옮기고, 도중에 돌아온 마릭에게 어디다 버려야 하는지 들었다.

여전히 무뚝뚝한 소년은, 내가 잔해를 치우는 모습을 잠시 지켜보더니 담담히 말했다.


“보기와 다르게 힘이 있진 않으시네요.”


“······몸이 좀 무거워서······.”


핑계는 아니다. 짐칸에서 대체 얼마나 잤던 건지, 깨어난 지 시간이 좀 지났는데도 나른한 게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는다.

아일라가 움직이는 것보단 훨씬 낫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럼 도와드릴게요.”


곧장 잔해에 다가가는 마릭. 황급히 손을 내저어 말렸다.


“어, 아뇨. 괜찮아요. 마릭 씨의 눈엔 시원찮을지 몰라도, 어쨌든 진행은 되고 있으니······.”


“그 속도론 해가 질 때까지 다 못 끝내요. 그리고 편히 부르세요. 말도 놓으시고. 아저씨한테 존대 받으니까 기분 이상해요.”


마릭은 심드렁하게 말을 마치고 작업에 착수했다.

심부름 보낸 사람에게 돌아가야 하지 않나? 아니면 내 착각이었을 뿐, 누구에게 고용된 게 아니라 그냥 마을 일원이었던 걸까?


아무튼 보기보다 고집이 세구만.

더 말해봤자 입만 아플 거 같아, 옆에 가서 같이 잔해를 치우기 시작했다.


“흠흠······.”


혼자 쉬고 있기 거북한 걸까? 구석에 앉아있던 아일라가 기웃거리면서 슬쩍 잔해 더미에 다가갔다.


“앉아있으라고 했어. 손대기만 해. 머리 다친 사람으로 볼 거야.”


“······”


그리고 마릭이 돌아보지도 않고 쏘아 날린 일갈에 격추되어, 다시 터덜터덜 제자리로 돌아갔다.

뾰로통한 표정으로 무릎을 모아서 앉는 게 조금 가엾기도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두둔해줄 순 없었다. 실내에서 보니 안색이 조금 창백했던 것이다.


필시 마릭의 말대로 기운이 없는 것일 터. 힘쓰는 일을 했다가는 정말 쓰러질지도 몰랐다.

때문에 그녀의 추욱 처진 모습을 못 본 척하며, 마릭과 둘이서 차츰차츰 방 안을 정리해갔다.


그렇게 입구 앞의 공간을 확보하고, 안쪽 문을 통해 건너간 또 다른 방······ 거실 겸 부엌이라는 곳의 잔해도 들어냈다.

그런 다음, 마릭은 어디서 빗자루를 찾아와선 아일라에게 무심하게 내밀었다.


“자.”


“응?”


습격자들의 관심을 끌지 않았던 건지, 용케 멀쩡히 남아있는 긴 의자에 앉아 시무룩해하고 있던 그녀가 눈을 멀뚱거렸다.


“일 줄게. 나랑 아저씨가 쓰레기 옮길 동안, 집 안의 먼지 좀 쓸어.”


“아, 응. 알았어.”


곧바로 얼굴이 환하게 펴지는 아일라. 빗자루를 낚아채듯 받아 들고서 쪼르르 방을 나섰다.


“······일하길 좋아하는 성격이신가 봐?”


“아일라 누나요? 아뇨, 그냥 혼자만 쉬는 걸 못 견디는 것뿐이에요. 소외감을 느낀다나 뭐라나.”


“양심에 찔려서가 아니고? 특이하시네.”


“네. 보시다시피 되게 귀찮은 성격이에요.”


마릭은 한숨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리고서 성큼성큼 방을 나섰다.

그 뒤를 따라서 정문 앞으로 나가자, 아일라가 콧노래를 흥얼거리면서 먼지를 쓸고 있었다.

여전히 안색은 그리 좋지 않지만, 표정만큼은 바깥에 내리쬐는 햇살처럼 화사하게 빛나고 있었다.


······진짜 특이하네. 무슨 재미있는 놀이를 하는 것도 아닌데.


속으로 헛웃음을 흘리며 마릭을 따라 밖으로 나갔다.




집 마당에 모아놓았던 잔해를 한아름 안고, 자신을 따라오라는 마릭의 뒤를 쫓아 광장으로 향했다.


지금 마을 안의 사람들이 다 그렇듯, 광장에 나와있는 주민들의 표정도 그리 좋지 않았다. 중앙에 한데 모여있는 나무 쓰레기들 주위에 앉아선, 음울한 분위기를 풍기며 손도끼로 간단한 작업을 하고 있었다.

쪼개지거나 부러진 탓에 본래 역할을 수행할 수 없는 널빤지들을 뚝뚝 토막 내어선, 자신의 옆에 휙휙 던져서 쌓고 있었다. 물어볼 필요도 없이, 땔감으로 재활용 중임을 알 수 있었다.


“저것들, 저 사람들이 가져가나?”


“아뇨. 이따 해질 때쯤 되면, 사제님이 마을 사람들에게 골고루 나눠줄 거예요.”


“사제······.”


“아, 모르세요?”


“신을 모시는 사람이라는 건 알아.”


하지만 어떤 이름과 능력을 지닌 신을 섬기는지, 이 마을을 비롯한 사회에서 맡은 역할이 무엇인지는 모른다. 몬스터가 활개 치는 세상이니, 그에 좌절하지 않도록 독려하는 게 일일 거 같긴 한데.


“무슨 신을 믿는 거야?”


“창조주요. 이름은 따로 없다고 들었어요.”


“아, 그래?”


“네. 그 신이 우리와 세상을 만들었대요. 사제님들은 창조주의 명령으로 우리를 보살피는 거고요. 그거만 알면 돼요.”


“······너무 간단한 거 아냐?”


허망하다고 해야 하나? 중간에 뭐가 많이 빠진 거 아닌가 싶다.

그러나 마릭은 어깨를 으쓱이며 담담히 대꾸할 뿐이었다.


“사제님이 그리 말씀하셨는걸요. 길게 말해봤자 안 듣지 않느냐면서.”


“······”


사제가 그런 말을 해도 되는 건가? 이거 원, 기억하는 게 없으니 뭐라 할 수가 없구만.


“더 궁금하시면 이따 사제님께 가보세요. 저쪽에 신전 있어요.”


마릭이 가리키는 방향을 돌아보았다. 자그마한 종탑이 우뚝 솟아있는 건물이 하나 보인다.

주위 집들은 죄다 무너져 있건만. 뭔 방법을 쓴 건지, 홀로 멀쩡한 게 위화감이 상당하다.


그 때문일까? 어쩐지 내키지 않았다.


“생각해볼게.”


“안 가신다고요? 네에, 뭐, 맘대로 하세요.”


“······아니, 생각해 본다고 했는데.”


“그게 싫다는 뜻이잖아요. 저도 다 알아요.”


시큰둥하게 대꾸하면서 한숨을 푹 쉰다. 평소에 솔직하게 말하길 꺼려하는 어른들을 자주 상대하고 있는 듯했다.

어쩐지 안쓰러워,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주었다.


“고생이 많은가 보구나. 힘내, 마릭.”


“괜찮아요. 아저씨보단 백 배 나은 형편이거든요. 기억도 멀쩡하고, 오지랖 심한 사람이랑도 떨어져 있으니까.”


“·········”


악의 없이 하는 소리겠지? 표정에 아무 변화가 없는 걸 보면, 담백하게 사실을 이야기한 거 같긴 한데.

이 녀석, 적을 만드는 데에 재능이 좀 있군. 한 마디 하지 않곤 배길 수 없었다.


“마릭, 말을 좀 골라서 하는 게 좋아.”


“생각해볼게요.”


마릭은 무뚝뚝하게 되받아치면서 먼저 걷기 시작했다.

하하, 싸가지 없는 자식 같으니. 녀석의 뒤통수에 대고 주먹을 흔들고 싶은 걸 꾹 참으면서 뒤따라 걸었다.




그렇게 가게에 돌아와, 다시 잔해를 들고 광장을 오가기를 수차례. 마침내 쓰레기를 다 치운 우리 셋은, 상대적으로 말끔해진 마당을 돌아보며 한숨 돌렸다.


“그럼 난 갈게.”


“아, 잠깐만!”


아일라는 인사하는 마릭을 붙잡고 집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잠시 후에 다시 나온 그녀의 손엔, 나무 잔 하나가 들려 있었다.


“물이야. 좀 전에 샘 아저씨가 한 통 나눠 주셨어. 마시고 가.”


“고마워.”


의외로 순순히 받고서 쭉 기울인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꽤 목이 탔던 모양이다.

단숨에 잔을 말끔히 비운 뒤, 마릭은 입가를 닦으면서 그녀에게 잔을 돌려주었다.


“그럼 갈게. 이따 저녁에 들를 테니 쉬고 있어.”


“알았어. 고마워.”


“아저씨도 한숨 돌리고 계세요. 이 누나가 쫑알거리는 거, 다 받아주지 마시고요.”


“아, 그래. 잘 쉬고 있을게.”


적당히 걸러서 대답하자, 마릭은 조금 서두른 기색으로 떠나갔다. 그렇게 짐을 옮겼는데도 기운이 아직 넘치는지, 금세 시장 저편으로 멀어져 갔다.


“하여간 싸가지가 없어요. 저러니 또래 여자애들한테 인기가 없지!”


한숨 섞인 투로 투덜거린 후, 아일라는 나를 돌아보며 쓰게 웃었다.


“쟤가 좀 건방지죠? 그래도 그냥저냥 착한 애니까, 너무 나쁘게 보진 마세요. 이번에 일어난 일 때문에 평소보다 더 예민해져 있는 거 같아요.”


아일라는 그리 말하고서 크게 기지개를 켰다.

후련하다는 듯이 한숨을 내쉰 후, 문을 가리키면서 안에 들어가자고 제안했다. 거절할 이유는 당연히 없었다.


잠시 후, 우리는 각자 물이 든 잔을 든 채 침대에 나란히 앉았다. 거실에 있는 긴 의자는 상대적으로 딱딱하니 불편할 거라며, 그녀가 침실로 끌고 오다시피 한 것이었다.


“수고 많으셨어요~”


퉁.


자신이 든 잔을 가볍게 부딪쳐온 후, 한 모금 꿀꺽 마시는 아일라.

어쩐지 나도 마셔야 할 거 같아 잔을 기울였다. 잔해를 치우느라 땀을 흘려서 그런지, 그냥 맹물인데도 왠지 달게 느껴졌다.


“아까 신전에서 막 돌아왔을 땐 이걸 어쩌나 했는데. 덕분에 편히 쉴 수 있을 거 같아요! 정말 고마워요.”


“신전에······?”


어째 머물렀다는 뜻으로 들리는데. 사제도 아닌 사람이 왜 거기서 잠을 자지?


“습격이 있던 건 이틀 전이라 들었는데요. 오늘 새벽에야 물러난 건가요?”


“응? 아뇨, 쳐들어온 당일에 어찌어찌 쫓아냈다고 들었어요.”


“그럼 정말로 신전에서 하룻밤을 보내신 건가요? 왜요? 이렇게 침대도 멀쩡한데요.”


“아, 제가 제때 피난을 못 갔거든요.”


아일라는 멋쩍게 웃으며 설명했다.


“마침 배달 온 물건이 있어서, 그걸 창고로 옮기느라 신전 종소리를 못 들었지 뭐예요. 다시 가게로 나왔을 땐 이미 오크들이 시장에 와 있었죠. 달리 숨을 데도 없고 해서, 틈을 보았다가 빠져나갔어요.

당연히 놈들한테 들켰고, 골목에서 골목으로 정신없이 뛰었죠. 이 다음은 기억이 없어서 물어보니, 제가 등에서 가슴까지 창에 관통된 채로 신전 문을 두드렸대요.”


“······용케 살아 계시네요.”


“그러게나 말이에요~ 저도 제가 그렇게 질긴 줄 몰랐어요! 뭐, 사제님들이 저를 뒤쫓아오는 오크를 물리치고, 또 열심히 치료해주신 덕택이지만요.”


“사제가 치료를······?”


“응?”


멀뚱멀뚱.


두 눈을 빠르게 끔벅이고, 고개를 살짝 옆으로 기울이면서 그녀가 말했다.


“의아해할 일인가요? 그게 사제님들 일 중 하나잖아요. 그 중에서도 녹색 옷 입은 분은, 터진 심장도 도로 붙이는 치료의 대가이시고요. 신전에서 치료 받아보신 적이 없나요?”


이런, 사제가 부상자를 돌보는 게 당연한가 보군. 모르는 게 이상한 상식이었구나.


······아니, 차라리 잘됐어. 이 기회에 털어놓자.

어차피 당할 일이라면 빨리 해치우는 게 좋다는 옛말도 있잖아. 뭐였는지 생각 안 나지만.


나는 물을 한 모금 홀짝인 뒤, 조용히 심호흡을 하고서 입을 열었다.


“저, 아일라 씨.”


“네.”


“그··· 이상하게 생각하실지도 모르지만······.”


끔벅끔벅.


동그랗게 뜬 눈이 나를 응시하고 있다. 의아함 말고는 아무 감정도 담겨있지 않다는 게 그나마 위안거리였다.


“제가 지금 기억이 없습니다. 제 이름이 테일러 파이버라는 것 외엔 제대로 생각나는 게 없어요.”


“어·········.”


갸름한 얼굴에 당황해하는 빛이 서린다.

당연히 그렇겠지. 나 자신도 황당하고 어이가 없는데, 다른 사람은 오죽할까.


“그렇···군요······. 으음·········.”


“······”


“으으으음~······.”


어찌 반응할지 고민하는 걸까? 아일라는 얼굴을 살짝 찌푸리고서 턱을 매만졌다.

그러다 천장을 노려보기 시작할 즈음, 나도 왠지 어색해져서 고개를 돌려버렸다.


괜히 말했다 싶진 않다. 언젠가 거칠 상황이었으니까.

얼마나 신세 질지는 모르나, 아무튼 같이 지내게 된 이상 조금 전처럼 어긋나는 때가 또 생길 터.

미리 말하지 않은 탓에 괜한 의심을 사는 것보단, 경계를 사게 되더라도 먼저 밝히는 게 낫지 않겠나.


······아, 몰라. 될 대로 되라지. 가장 나쁜 결말이라 해봤자 여기서 쫓겨나는 것 정도일 텐데, 뭐.

당장 죽지는 않을 테니 어떻게든 될 거다.


그래도 가능하면 여기 머무르게 해줬으면 좋겠다. 고생해서 치운 집에서 잠 한숨 못 자고 쫓겨나면 좀 많이 억울할 거 같아.


나는 나무 잔을 매만지면서 그녀의 고민이 끝나길 기다렸다. 물을 홀짝여도 목이 타는 듯한 느낌에 이맛살을 찌푸리던 중.


“그러면······.”


마침내 아일라의 목소리가 들렸다. 조심스레 시선을 옮기자, 그녀가 흠칫하더니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혹시, 제가 여자인 것도 모르시는 건······.”


“············”


“아시는군요?! 다, 당연히 그렇겠죠! 그런 건 누가 가르쳐줘서 아는 게 아니니까요! 아하하! 아, 민망해라~! 아하하핫!”


······나도 따라서 웃는 게 나으려나? 하지만 피곤한 탓인지, 입꼬리를 올리는 게 고작이었다.

그리 없는 의욕을 있는 대로 쥐어짜내 입 밖으로 내보내보았지만, 내가 듣기에도 굉장히 메마른 소리만 울릴 뿐이었다.


웃음이란 게 이렇게나 메마를 수도 있구나.

몰라도 될 듯한 사실을 마음에 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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