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상실자의 마을 생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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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프드림
작품등록일 :
2024.11.03 18:12
최근연재일 :
2024.11.07 2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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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04 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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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살라고? (3)

DUMMY

얼마간 어색한 시간이 흐르던 중.


“크흠! 어흐흠!”


의도적인 게 뻔히 보이는 큰 헛기침이 돌연 귀를 울렸다. 고개를 돌리자, 아일라가 어색하게 웃으면서 정면을 보고 있었다.

내 시선을 느꼈는지, 나무 잔을 감싸쥔 두 손을 꼼지락거리며 입을 열었다.


“그럼 그, 궁금한 게 있으시면 물어보세요. 최대한 아는 대로 가르쳐드릴게요.”


모처럼 받은 친절이나, 유감스럽게도 당장은 궁금한 게 없었다. 머릿속이 몽롱해, 그때그때 순간적으로 떠오르는 것 외엔 생각이 잘 정돈되지 않는 탓이리라.


좀 쉬면 나아지려나? 그러고 보니 난 어디서 쉬어야 되지?


아, 그래. 이걸 물으면 되겠군.

스스로를 향해 고개를 주억거리며 입을 열었다.


“저를 재워 준다고 하셨죠. 어디서 자면 되나요?”


“네? 어, 피곤하세요? 아, 하긴. 여기 도착하시자마자 일하셨으니 빨리 쉬고 싶으시겠죠. 죄송해요, 제가 눈치가 없었네요!”


낭패감 어린 얼굴로 허둥대는 아일라. 정말로 미안해하는 것 같아,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아니에요, 아일라 씨. 지쳐서 그런 게 아니라, 당장 떠오르는 질문이 그거밖에 없어서 그래요.”


“친절하시군요···. 하지만 그리 애쓰시지 않으셔도 돼요···. 평소에도 아버지에게 자주 혼나곤 하거든요···. 그리 눈치가 없어서 이 험한 세상 어떻게 사냐고······.”


시무룩한 표정으로 웅얼거린 것도 잠시.


“뭐, 이 나이까지 산 걸 보면 앞으로도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싶어요! 안 그래요?”


두 주먹을 불끈 쥐면서 밝게 웃는다.

약간 어색한 느낌이 감돌긴 하지만, 이럴 땐 모르는 척해줘야 도리이겠지. 묵묵히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했다.


“역시 그렇죠?”


내 대답이 흡족한지, 아일라는 까르르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대로 두어 발짝 걸어간 다음, 몸을 휙 돌려 나와 마주했다.


“그리고 짠! 실은 여기가 당신 방이랍니다!”


들뜬 목소리에 눈을 살짝 크게 뜨며 새삼 방을 둘러보았다.


군데군데 금이 가있는 벽과 바닥. 흠집이 하도 많아서 곧 쪼개지지 않을까 싶은 서랍장과 협탁.

벽에 바짝 붙여서 놓은 테이블은 무슨 용도로 둔 건지 가늠이 되지 않는다.

책상이라 하기엔 조금 높고, 장식품을 놓기 위한 것치곤 너무 투박하다. 의자도 없고 말이지.


침실보다는 창고에 침대를 놓았다고 해야 할 풍경인데. 뭐, 원래 이 모양이었던 건 아닐 거다.

이틀 전에 오크가 쳐들어왔다고 했잖아. 놈들이 들쑤신 탓에 조금 허름해진 거겠지.


방을 살피면서 힐끗힐끗 본 아일라가 은근히 안절부절못해하고 있는 걸 보면 틀림없다. 입을 오물거리는 게 무어라 말을 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그래도 내가 둘러보길 마치기까지 조용히 있던 걸 보아, 꽤 참을성이 강한 듯했다.


“······어때요? 괜찮나요?”


조심스럽게 묻는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네. 괜찮아요.”


“역시 그렇죠?! 으으, 맘에 들 리가 없지!”


······어라? 나, 지금 괜찮다고 하지 않았나? 고개도 끄덕였던 거 같은데?


어리둥절해하는 사이, 아일라가 한 손을 휘저으며 다급히 말을 쏟아냈다.


“저도 알아요, 벽이랑 바닥이랑 가구랑 죄다 지저분한 거! 하지만 원래 이렇진 않았어요, 오크 놈들이 막 헤집고 다니는 바람에···! 정말이에요, 믿어주세요, 나름 깔끔하게 잘 쓰고 있었다고요······!”


“아일라 씨, 진정하세요! 저, 조금 전에 ‘괜찮다’고 했어요!”


덩달아 약간 큰소리로 대꾸해버렸다.

멍하니 나를 보며 느릿하게 눈을 끔벅이길 수차례. 이내 그녀는 무언가 깨달았다는 듯 흠칫하더니, 자신의 머리를 매만지며 어색하게 웃었다.


“아, 괜찮다고 하셨구나. 참 이상하네요. 왜 안 들렸지? 아하하하.”


“······”


뭐라고 할까······. 성급하다고 해야 하나? 아무튼 좀 독특한 성격인 거 같아.


그보다 방금 들은 말이 좀 걸린다. 복잡한 생각은 잘 되지 않는 상태인데도 자꾸 신경 쓰이는 걸 보니, 꽤 중요한 사항이 아닐까 싶다.

확실히 안 하면 찜찜해서 잠 못 잘지도 몰라.


“저기, 아일라 씨.”


“네.”


멋쩍은 기색이 선명하게 남아있는 얼굴을 향해 말했다.


“조금 전에 말씀하셨죠? 나름 깔끔하게 잘 쓰고 있었다고.”


“······아.”


아차 하는 표정으로 눈을 피한다.

역시 물어보길 잘했군. 한숨을 푹 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아, 저기, 테일러···! 전 괜찮아요, 신경 쓰지 마세요···! 물론 서랍장에 제 옷이 들어있을 거긴 하지만, 금방 치울 테니······!”


“제가 안 괜찮아요. 여자 방을 빼앗는 꼴이 되는 것도 그렇지만, 당신도 쉬셔야 하잖아요. 지금도 안색 그리 좋지 않으시면서.”


“여기 조명이 안 좋아서 그래요. 정말로 멀쩡해요! 그리고 테일러는 손님이잖아요. 손님에겐 제대로 된 침대를 내드려야 하는 법이라고요!”


······이상한 고집을 피우는구만. 고개를 젓고 싶은 걸 참고, 어처구니없어죽겠는 심경을 말로 내보냈다.


“제가 여길 쓰면, 아일라 씨는 어디서 쉴 생각이셨어요?”


“······집 안이요.”


눈을 피하면서 답한다.

어디인진 몰라도 또 다른 침실은 아니군. 더 추궁할 필요도 없겠어.

그녀에게 전할 대답에 한숨을 실어 보냈다.


“좋게 대접해주시려는 건 고마워요. 하지만 마음만 받겠습니다. 이 방을 쓰기엔 제가 마음이 불편해요. 마릭이 말했던 ‘아저씨’라는 분도 좋게 보지 않으실 거고요. 그 분이 아버지, 맞죠?”


“윽.”


무언가에 푹 찔린 것처럼 움찔한다. 그리고는 난처하다는 듯이 눈길을 피하는 아일라.

아무래도 즉석으로 떠오른 예상이 전부 들어맞은 듯했다.


즉, 그녀는 지금 아버지와 함께 살고 있으며.

이 아버지란 사람은, 큰맘 먹고 재워주려 했더니 딸자식의 침대를 차지하는 파렴치한을 용납할 만큼 너그럽진 않은 것이다!

음음, 굉장히 상식적이고 멀쩡한 사람이군. 진짜 다행이다.


가슴을 쓸어내리는 한편, 시무룩해하는 그녀에게 마저 말을 건넸다.


“방 밖이 거실이었죠? 긴 의자 있었으니, 거기서 쉴게요.”


“푹신하지 않아서 불편할 텐데요······.”


“마차 짐칸의 바닥보단 편안할 테니 됐어요.”


“······할 수 없네요. 강요하는 것도 실례이니······.”


아일라는 자그마한 한숨을 폭 쉬고, 기운을 잃은 게 역력한 목소리로 답했다.


“그럼 담요로 쓰실 만한 거 가져다 드릴게요. 가게 창고에 적당한 게 있을 거예요.”


“네?”


“이건 절대 양보 못해요.”


멀뚱거리는 나에게 인상을 쓰며 그녀가 힘주어 주장했다.


“저녁 되면 얼마나 쌀쌀한데요! 그냥 주무시면 감기 걸리실 거예요. 멀쩡한 거 분명 있을 테니까 그거 덮으세요. 아셨죠?”


“어··· 네, 그래 주시면 고맙죠······.”


“좋아요.”


아일라는 싱긋 웃으면서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내 대답이 만족스러운 모양이었다.


“그럼 기다리고 계세요. 금방 다녀올게요.”


“잠깐만요, 아일라 씨.”


불러 세우자 즉각 돌아본다. 의아함이 잔잔하게 흐르는 잿빛 눈동자를 향해 물었다.


“저도 가도 될까요?”


“왜요? 너무 허름한 거 내드릴까 봐서요?”


“아뇨. 너무 고급진 걸 꺼내실 거 같아서요. 여쭙고 싶은 것도 있고.”


장난기로 싱글거리던 얼굴이 흠칫했다. 이어서 뾰로통하게 구겨지더니, 허공을 가볍게 걷어차면서 툴툴거렸다.


“들켜버렸네요. 어떻게 아셨어요?”


“본인 침대도 선뜻 넘기려 하는 사람이, 창고에 있는 물건을 아낄 리 있나요.”


“아낄 수도 있죠~ 손님 대접이랑 장사는 별개니까!”


항의하듯 대꾸하고는, 별안간 입꼬리를 올려 씨익 웃었다.


“일부러 당신에게 빚을 잔뜩 지우려고 하는 걸 수도 있고요.”


“집을 치워드렸으니, 오히려 당신이 저에게 갚아야 하는 것 아닌가요?”


“어머, 무슨 말씀이세요? 먹여주고 재워주는 값을 미리 내신 거죠! 임시이긴 해도 당신의 집이기도 하니, 치우는 건 당연한 일이기도 하고요~”


“허, 의외로 계산이 참 빠르시네요. 장사 잘하시겠어요.”


“상인의 딸인데 이 정도는 기본이죠~

······근데 ‘의외로’ 라고 하셨나요? 제가 어떻게 보였길래 그리 말씀하시나요?”


날카로운 직감이 뒤통수를 후려쳤다. 답하지 않는 게 신상에 좋다는 진지한 알림이었다.

고개를 끄덕여 그에 수긍하고, 약간 건조한 시선을 보내오고 있는 여인에게 제안했다.


“담요부터 구하고 나서 마저 이야기하는 게 어떨까요?”


“어머, 말 돌리시는 거예요? 역시 별로 좋은 인상이 아니었군요? 으응?”


“그보다 여쭙고 싶은 게 있는데요.”


그녀의 친절이 주의를 돌려주리라 기대하며 물었다.


“담요로 쓸 만한 걸 찾겠다고 하셨죠? 털가죽일 거 같은데, 그게 왜 가게 창고에 있어요?”


“왜냐니. 상품이니까 그렇죠. 못 들으셨어요? 우리 집, 포목점이에요.”


“아, 포목점···이 털가죽 파는 곳이란 뜻이었군요.”


“······”


두 눈동자가 아주 잠깐, 초점을 잃는 게 보인 듯했다.


······기억 잃었다고 털어놓길 잘했군.

살짝 넋이 나간 얼굴에서 눈을 돌리며 생각했다.




시장에서 문을 통해 집으로 들어오면, 그럭저럭 넓은 공간을 마주하게 된다. 맨 안쪽에만 창문이 몇 개 나있는데, 그 근처의 양쪽 벽에 하나씩 문이 마련되어서 서로 마주보고 있다.

왼쪽은 방금까지 있던 침실과, 열심히 치운 거실 겸 부엌 등이 있는 생활 공간으로 이어지는 문. 그리고 오른쪽이 우리가 목표로 하던 창고라는 듯했다.


“아까 봤을 때, 문이 깨져 있지 않더라고요. 그 놈들, 문고리를 장식으로 보거든요. 열어보진 않았지만, 안의 물건들 모두 무사하지 않을까 싶어요.”


“옷감은 가져가지 않는다는 거군요. 그 오크란 놈들, 옷은 안 입나 봐요?”


“글쎄요~ 그걸 옷이라고 해야 하나?”


아일라는 계속 걸음을 옮기면서 잔을 홀짝였다. 먼지를 뒤집어쓴 긴 의자와 흠집 난 협탁을 지나, 깨진 문을 열고 짧은 복도를 따라 걸었다.


“놈들도 우리처럼 아랫도리가 달렸거든요? 똑같이 급소인지, 거기만 딱 둘러서 가려요. 치마처럼.

항상 짐승 가죽으로 가리던 걸 보면, 면직물은 안 쓰는 거 같아요.”


“속옷만 입고 다니는 꼴이군요. 뭐, 그것도 옷이긴 하죠?”


“그건 그래요. 히히.”


실없이 웃은 후, 아일라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이었다.


“근데 신기한 게 뭔지 알아요? 그 놈들, 주로 몽둥이랑 칼을 휘두르고 다녀요. 고블린이라고 어린애만 한 몬스터도 있는데, 걔네도 날붙이를 무기로 쓴답니다. 소문엔 활도 쏠 줄 안대요.

그런데도 죄다 가랑이만 가리고 다니는 거예요! 무기는 만들 줄 알면서, 옷 만들 줄은 모르나 봐요. 피부가 칼에 안 베이는 것도 아닌데. 희한하죠?”


“그렇네요. 지능이 없는 것도 아닐 텐데.”


급소를 숨겨야 함을 안다면, 다른 데도 둘둘 싸매면 다치지 않는 줄 알고 있을 터. 그런데도 꿋꿋이 가랑이만 가린다는 건, 일부러 안 한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옷 입는 걸 금지하고 있는지도 몰라요. 이유는 짐작도 안 가지만.”


“우와, 그게 진짜라면 완전 미친놈들인데요? 놈들은 인간보다 더 털이 없거든요. 옷 없이 그 꼴로 겨울은 어떻게 나는지 몰라. 싹 다 죽어버리면 좋을 텐데!”


적의가 옅게 깔린 목소리. 의외다 싶으면서도, 그럴 만하다고 납득이 간다.

왜, 놈들의 손에 죽을 뻔하지 않았는가. 아무리 선량한 사람이라 해도, 자신과 이웃을 죽이려 드는 놈들을 좋아할 순 없겠지.


그리 수긍하는 사이, 복도를 나와 드넓은 공간에 들어섰다. 그녀의 설명대로 정면에 말끔한 문이 보였다.


집 안의 잔해를 치우면서 이 앞을 몇 번이나 오갔는데 이제야 존재를 알아채다니. 왠지 나 자신이 좀 한심하게 느껴진다.

다행히 아일라는 그 점을 꼬집지 않는 친절을 베풀면서 창고 문을 열었다.


“······”


우적. 우적.


뿔 달린 생물이 대부분의 공간을 차지한 채, 무언가를 야무지게 씹어먹고 있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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