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마주쳤으면 싸워야지 (1)

온 몸을 뒤덮고 있는 짧은 털. 얼핏 봐도 사람의 형태를 벗어난 길쭉한 얼굴. 먹잇감을 씹느라 주둥이를 여닫을 때마다 슬쩍슬쩍 보이는 칼날 같은 이빨.
소 혹은 그와 비슷한 짐승이 떠오르는 뿔은, 건드리기만 해도 베일 것처럼 날카롭다. 정체가 무언지는 몰라도, 최대한 건드리지 않는 게 좋을 듯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아일라에게도 그리 달갑지 않은 존재였던 모양이다. 정면을 본 채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으니까.
문 손잡이를 놓고 물러서지도, 반대 방향으로 밀어버리지도 못하고서 우두커니 서있었다.
‘이딴 애완동물을 키우느냐’고 묻기 전에 분위기를 살피길 잘했군. 나 자신을 칭찬하면서 머릿속을 돌려보려 애썼다.
아일라의 반응을 보아, 지금 우리는 큰 위험에 처해있는 게 틀림없다. 그렇다면 한시라도 빨리 이 자리를 벗어나야 할 터. 정체 모를 생물이 우릴 보기 전에 물러나야 한다.
다행히 놈은 먹는 데에 열중하느라 주위에 관심이 없는 듯하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발소리가 신나게 울렸을 터인데도 저러고 있잖아. 주의 깊게 움직이면 빠져나갈 수 있겠지.
일단은 아일라를 공포에서 끌어내야 한다. 마비돼버린 그녀의 몸이 다시 움직이도록 도와줘야 돼.
멍멍한 머릿속에, 말만 해선 도움이 되지 않을 거란 확신이 인다. 손을 써서, 그녀가 행동을 하도록 유도하는 게 훨씬 효과적일 거 같아.
상식에서 벗어난 행동일지라도 어쩔 수 없다. 화를 내고 싶다면, 여길 나가고서 실컷 내라고 하지, 뭐.
나는 들고 있던 잔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아일라 씨.”
한껏 목소리를 낮추어 말을 걸며, 조용히 한 걸음 움직였다. 문 손잡이를 잡고 있는 그녀의 손등을 감싸쥐었다.
“손잡이, 놓으세요. 별것 아니에요. 손가락만 펴시면 되거든요.”
“······으.”
“괜찮아요. 도와드릴 테니 걱정 마세요. 자, 저와 같이 해요.”
천천히, 그녀의 손가락을 하나씩 펴 간다.
엄지에 이어 검지를, 다음으로 중지를 손잡이에서 떼낸다. 뻣뻣하게, 부들부들 떨면서 손가락이 움직인다.
비교할 만한 기억이 없긴 하지만, 아일라는 꽤 용감한 사람이라 생각한다. 겁을 먹고 덜덜 떨면서도, 손가락을 펴는 동안 흐느낌 한 번 내지 않았으니까.
이내 손바닥만 손잡이에 머무르게 되었고, 나는 그 손을 천천히 끌어서 아래로 내렸다.
“좋아요. 잘했어요. 이제 잔 주세요.”
물이 든 잔을 넘겨받아 바닥에 놓은 뒤, 그녀의 허리를 단단히 끌어안았다.
다행히 아일라는 반발하지 않았다. 그에 가슴을 쓸어내리며 천천히,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또각···. 또각···.
삐걱거림과 섞여서 울리는 발소리. 신경 쓸 필요는 없을 터이다. 괴물은 여전히 식사에 열중하고 있으니까.
과하게 쿵쾅거리는 심장 소리도 놈에겐 들리지 않을 것이다. 그게 귀에 닿을 정도면 진작에 우릴 발견했지.
긴장하려 드는 나 자신을 그리 다독이며, 아일라와 함께 발을 움직인다. 앞으로 서너 발자국만 더 물러난 뒤, 정문으로 뛰면 될 거다.
할 수 있어. 살아나갈 수 있다.
그렇게 되뇌는 순간.
괴물 놈이 입에 물고 있던 하얀 물체를 덥석 삼켜버렸다. 꿀꺽 삼키고, 만족스러운 듯이 으르렁거리면서 코를 이리저리 킁킁거렸다.
“······!”
본능적으로 발이 멈추었다. 한 박자 뒤에, 지금 움직이면 들킨다는 사실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맞잡고 있지 않은 아일라의 손이 파르르 떨면서 소리 없이 움직였다. 제지해야 하겠지만, 그게 오히려 놈의 시선을 끌 수도 있다.
식은땀이 흐르는 걸 느끼며 숨을 삼키는 중, 그녀가 방금 움직인 손으로 자신의 입을 꽉 틀어막는 게 시야 한구석을 스쳤다. 괜찮을 거란 말도 할 수 없는 상황인 게 안타까웠다.
제발. 다른 데를 봐. 아예 뒤로 돌아버려. 배부르다고 드러누우면 제일 좋다.
뭘 해도 좋으니까, 이쪽만 보지 마!
“크르르······.”
그렇게 빈 게 통한 걸까? 놈이 창고 안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래, 그대로 계속······.
홱.
갑자기 놈이 몸을 틀었다. 무언가를 알아채고 놀란 것처럼, 두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가로로 찢어진 동공. 절로 몸서리가 쳐지는 누런 눈동자.
비치지 않길 바랐던 두 남녀의 모습이 언뜻 보인 듯했다.
“······!!”
놈의 눈이 번뜩였다. 등골을 타고 올라오는 한기와 함께 확신했다.
움직여야 해!
“뛰어요!!”
즉각 몸을 돌려, 그녀를 반쯤 들다시피 하면서 문을 향해 달렸다.
“흐하···! 흐하하하하······!!”
콰직!! 우지끈!!
무언가가 무너지는 소리와, 굉장히 뜬금없는 웃음소리가 등 뒤를 시끄럽게 울린다.
정문 앞은 이 집에서 가장 넓을 뿐, 출입문이 아득히 멀 정도로 큰 공간은 아니다. 그러니 전력으로 뛰면 금세 바깥으로 나갈 수 있을 터인데.
애석하게도, 우리에게만 해당되는 얘기가 아니었다.
“아하하하하!!”
광적인 웃음소리가 조금 더 가까워진 것 같다. 동시에 심장을 꽉 조이며 올라오는 직감.
옆으로 피해야 한다. 안 그러면 죽어!!
타앗—
아일라를 안고 측면으로 뛰었다.
“힉······!!”
숨을 삼키는 소리에 바로 이어서, 돌풍이 어깨를 스치고 질주하는 게 느껴졌다. 그 정체를 파악할 새도 없이, 그녀와 함께 바닥을 굴렀다.
콰앙—!
둔탁한 소리를 덮어버리는 파열음. 우리가 나가려고 했던 출입문이 부서진 것이리라.
고개를 들자마자 예상이 들어맞았음을 알 수 있었다. 조금 깨지긴 했어도 그럭저럭 멀쩡했던 정문은, 고칠 수 있을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망가져 있었다.
그보다 더 큰 문제는, 놈이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는 것. 문 바깥까지 돌진하지 않고, 입구만 들이박고서 멈췄다는 것이었다.
즉, 우린 갇혔다. 끔찍하게도.
“흐윽······.”
품 속에서 그녀가 크게 훌쩍인다. 갑자기 바닥을 구른 탓에 어디 다쳤는지도 모르겠다.
괜찮은지 살필 여유가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유감스럽게도 나는 괴물 놈을 응시하면서 먼저 일어나야 했다.
빠르게 주변을 살폈다. 무기가 될 만한 건······ 원래 문틀이었을 듯한 각목 조각밖에 없다.
뭐, 맨손보단 낫지. 두 손으로 집어 들면서 입을 열었다.
“아일라 씨.”
뒤를 돌아볼 여유는 없다. 흥미롭다는 듯이, 아니 가소로워하는 게 역력한 누런 눈동자를 응시하며 그녀에게 물었다.
“여기, 밖으로 이어지는 다른 문이 있나요?”
“이, 있어요···. 뒷문······.”
“잘됐네요. 그럼 먼저 나가셔서 도움을 청하세요. 위험을 알리셔도 좋고요.”
“네, 네? 저 혼자요?!”
“저 놈이 저희 둘 모두를 보내줄 거 같진 않아요. 그러니 제가 시선을 끄는 동안에 뛰세요. 아셨죠?”
답하면서 앞으로 한 걸음 나아간다. 등 뒤에서 기겁하는 소리가 울린다 싶은 순간, 정면에서 광소가 쏟아져 나왔다.
“미친 소릴 하는구나, 털 없는 원숭아! 내가 보내줄 것 같으냐? 네놈은 수컷이니 즉시 내장을 뜯어먹고, 거기 있는 암컷은 구멍 맛을 보아주마. 그러고도 산다면, 친히 장난감으로 삼아주지!”
와, 사람 말을 하네. 으르렁거리기만 하는 줄 알았는데. 내용이 쓰레기라 두 배로 놀랍다.
아무튼 저 놈은 말이 통하는 상대를 다짜고짜 죽이려 한 거군. 점잖은 소릴 했어도 대화로는 이 상황을 해결할 순 없었겠지.
다른 선택지는 없다. 나에게는 특히 더.
“네가 그럴 작정이라면, 싸우는 수밖에 없군.”
“마, 말도 안 되는 소리 마요, 테일러!”
놈이 하고 싶어할 듯한 말이 뒤쪽에서 날아왔다.
“염소인간을 혼자 이길 순 없어요! 무조건 죽는단 말이에요!”
“안 싸워도 죽어요. 당신은 더한 꼴을 당할 거고요.”
어차피 죽을 거라면, 마지막 발악이라도 하는 게 낫지 않겠나. 그걸로 나 외의 다른 사람이 살아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면 더욱 더 나서야지.
“이 길밖에 없어요. 아시잖아요?”
“몰라요!”
거짓말이다. 행여나 소리 내서 들킬까 봐, 본인 입을 꽉꽉 막을 줄 아는 사람이 모를 리 있나.
우스갯소리를 들은 기분에 입꼬리가 조금 올라갔다.
“그리 답해줘서 고마워요. 자, 일어서세요. 그리고 제가 좀 전에 말한 것처럼, 기회 봐서 밖으로 탈출하세요. 그러리라 믿어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걸음을 내디뎠다. 두 손으로 꽉 쥔 각목 조각을 겨누면서, 대략 열 걸음 정도 되는 거리에 멈춰 섰다.
“하.”
뿔 때문에 천장에 나보다 배는 더 커 보이는 괴물 놈이, 기가 차다는 듯이 콧김을 내뿜었다.
“미친놈이군.”
“상대하기 싫으면 나가.”
“그건 병신이나 할 짓이지. 공포로 돌아버린 벌레가 죽음을 자초하는 걸 왜 마다하겠나? 골만 안 먹으면 되는 것을.”
“아, 그래.”
경멸과 조소가 깃든 누런 눈동자를 응시한다. 포식자를 알아본 본능이 머릿속에 시끄러운 소리를 울려댄다.
동시에 절망적인 확신이 가슴을 메운다. 조금 후에 나는 죽을 것이라고, 시작하기도 전에 맥이 빠지는 예측을 읊조린다.
······정말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나는 조용히 심호흡을 하고, 최대한 차분하게 있으려 애쓰며 놈에게 말을 걸었다.
“죽기 전에 뭐 하나만 묻자.”
“음?”
“너, 염소와 인간 사이에서 태어난 거냐?”
“······뭐?”
놈이 얼이 나간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황당한 소릴 했나?
찰나의 침묵 후, 놈은 클클 웃으면서 허리를 약간 구부렸다.
“유언으로 실없는 농담을 하다니, 보기보다 우스운 놈이군.”
“아니, 정말 몰라서 물은 건데.”
“나를 웃긴 노력을 보아 단숨에 죽여주마.”
웃음기 어린 목소리가 귀를 울린 것과 동시에.
조금 전에 느꼈었던 날카로운 감각이 몸의 왼편에 흘렀다.
어느 방향으로 움직여야 하나?
······머리가 그리 궁리할 즈음엔 이미 발이 땅을 박차고 있었다.
타앗!
앞쪽으로 크게 뛰고, 발바닥이 땅에 닿자마자 반 바퀴 회전한다. 반대쪽 발을 뒤로 짚어 몸을 지탱한다.
숨을 고를 새 없이, 나를 놓쳤음을 이제 깨달은 괴물을 향해 내달린다.
유일한 무기를 크게 쳐들어, 순식간에 가까워진 놈의 팔을 힘껏 내리친다.
퍼억!
팔뚝을 때린 각목이 반으로 쪼개진다. 난감한 일일 터인데도, 이상하리만치 마음이 차분하다.
처음부터 그럴 줄 예상했던 것처럼, 나는 태연하게 뒤로 물러났다가 다시 달려든다.
“뭐 이런······!”
놈도 바보는 아니다. 아연해하는 것도 잠시, 두 눈을 번뜩이며 손을 휘두른다. 보기에도 날이 서있는 손톱이 서슬 퍼런 빛을 반짝이는 게 보였다.
각목으론 못 막아. 피해야 해.
휙.
각목을 공중으로 던지면서 손톱이 날아오는 쪽으로 구른다. 시야가 한 바퀴 돌자마자 발에 힘을 준다.
퉁기듯이 일어나자마자 내달려, 아직 땅에 머무르고 있는 놈의 팔을 뛰어넘는다. 떨어지는 각목을 낚아채고, 놈의 누런 눈동자를 향해 던진다.
“하!”
틱.
놈이 대가리를 휘저어, 뿔로 각목 조각을 튕겨낸다.
가소롭다는 듯이 웃는 한편, 후욱 내뿜는 콧김에 옅은 짜증이 묻어난다.
잘됐군. 이제 저 놈은 나만 보겠지.
내가 이런 움직임을 어디서 배웠는진 모르지만, 덕분에 아일라가 달아날 때까지 시간을 벌 수 있을 듯하다.
“잔재주를 부리는구나. 그리도 고통스럽게 죽고 싶으냐?”
놈이 으르렁거리며 쏘아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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