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약제사
'말투가 달라졌어.'
타이온은 분노 때문에 가려졌던 망나니의 변화가 눈에 들어왔다.
천박하면서 동시에 어린 아이 같았던 말투는 온데간데 없어졌다. 차분하고 기품까지 느껴지는 말투였다.
게다가 다시 보니 자세 역시 달라졌다. 예전에는 항상 등이 굽은 채 비굴한 거렁뱅이 같았다면 지금은 목발까지 짚고 방금 깨어났음에도 올곳게 서 있었다.
격투가인 타이온이 보기에도 조금의 흠결이 없는 자세였다.
'각성하신 건가?'
인물이 죽음의 위기를 극복했을 때 한계를 극복하고 다음 단계로 진화하는 현상. 매우 드물게 벌어지는 현상이지만 역사에 이름을 남긴 대다수의 영웅들은 한 번 이상은 '각성'을 겪었음 생각하면 크라운가드 가문의 피를 이은 진이 각성하지 말라는 법은 없다.
타이온은 타인이 진 크라운가드의 몸에 [빙의]했다는 생각을 하지는 못했다.
고위계 흑마법인 [빙의]를 사용할 수 있는 흑마법사는 극소수였으며 흑마법사가 다른 사람에게 빙의하는 건 어린 아이들 전래동화에서나 등장할법한 이야기였다. 대다수는 그런 마법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조차 못했고 그건 타이온도 마찬가지였다.
그렇다고 진 크라운가드가 각성했다고 쉽게 받아들일 수도 없었다. 마약 급성 중독으로 쓰러진 사람이 각성했다는 이야기 또한 타이온은 들어본 적이 없었다.
'오러가 느껴지지도 않고.'
진에게는 검사가 되기 위해 필수적인 오러가 여전히 티끌만큼도 느껴지지 않았다. 크라운가드 가문의 피를 이은 자가 각성했다면 빗방울 만큼의 오러라도 감지되어야 하건만 그의 단전에서는 여전히 조금의 오러도 느껴지지 않았다.
타이온은 짙은 다크서클에 목발에 간신히 의지해 서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한땐 가문 내에서 헤이온에 버금가는 천재라 불리우며 차기 가주의 유력한 후보였다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지금 진은 망가져 있었다.
초라한 도련님의 모습에 안타까움을 느끼며 타이온은 좋게 타이르자 결심했다.
"달라지셨다면 여기에 내려온 이유가 무엇입니까?"
"약을 만드는 곳에 온 이유가 약 만드는 거 말고는 또 있나?"
"도련님께서 약을 제조하실 줄 아신다는 겁니까?"
"책을 읽은 적이 몇 번 있었지. 약초로 유명한 홀타인 만큼 공부하면 영지 관리에 도움이 될까 싶어서."
이번 말만큼은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저 망나니가 춘화집을 제외한 책을 펼친 적이 있다니. 하녀가 진의 침대 밑에서 발견한 춘화집만 100편이 넘었다. 진이 영지 관리에 관심 있다는 이야기는 신빙성이 없었다. 진은 언제나 본인이 유배당한 홀타를 혐오했었다.
"약이 필요하면 약제사 카인즈 님께 부탁하시지요."
"기존에 없는 약을 제조해보고 싶어서 말이야. 내가 직접 제조해보려고 하네."
타이온은 제약에 대해 무지했지만 약이라는 게 새로 만들고 싶다고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는 것은 안다.
"의심하나보군. 그럼 증명해보지."
타이온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되도 않는 오기를 부리는 건 전과 차이가 없었다.
이럴 때는 말로만 진을 설득하는 건 불가능했다. 타이온은 잠깐 생각하더니 시중을 들던 하녀에게 말했다.
"알겠습니다... 약제사 카인즈 님을 데려오도록."
이윽고 영문도 모른 채 하녀와 황급히 내려온 카인즈는 유진을 보더니 두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도, 도련님. 어, 어떻게 서 있으신 겁니까? 아니, 지금 도련님은 절대 안정을 취하셔야 합니다."
"괜찮네, 걱정할 정도는 아니야."
"타이온,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자초지종을 들은 카인즈의 표정이 더더욱 이상하게 변했다.
"그러니까 타이온 자네 말은 도련님께서 새로운 약을 제조할 능력이 있는지 평가해달라는 건가?"
"그렇습니다. 가능하겠습니까?"
"가능은 하네만... 도련님은 괜찮으신 겁니까?"
카인즈는 제국 내에서도 50명 정도밖에 없는 상급 약제사. 다른 약제사를 평가할 능력은 당연히 차고도 넘친다.
다만 평가할 대상이 진 크라운가드라는 것이 문제였을 뿐. 망나니가 항상 해오던 기행이라고 생각하면 이해할 수 없는 건 아니었으나 문제는 난이도였다.
"새로운 약을 제조한다는 건 중급 약제사 정도라는데... 대부분의 약제사는 20년 이상 공부해야 오를 수 있는 경지입니다."
진의 나이보다 긴 시간 동안 공부해야 오를 수 있는 경지. 하지만 진은 별 상관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당연히 괜찮네."
"허어... 그럼 알겠습니다."
"전에 잠깐."
말을 끼어든 타이온이 진을 보며 말했다.
"도련님. 전에 하나만 맹세해주십시오. 이번 평가에서 카인즈에게 인정받지 못할 경우, 몸이 '완전히' 회복되기 전까지 방에서 안정을 취하기로 말입니다."
"어렵지 않지. 크라운가드 가문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겠네. 카인즈에게 인정 받지 못하면 자네 말대로 안정을 취하도록 하지."
'됐다.'
타이온이 일이 잘 풀렸다고 생각했다.
사실상 타이온이 관리하고 있는 영지였지만 어찌 되었건 영지의 주인은 진 크라운가드였으며 타이온은 일개 고용인이었다. 지금도 진 크라운가드가 막무가내로 약을 만들겠다고 설쳤으면 타이온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달랐다. 한 귀족이 가문에 대고 맹세를 했다는 건 가문의 이름을 버리지 않는 한 무조건 지켜져야 하는 맹세였다. 이제 타이온은 맹세가 지켜지는 선에서 진의 명령을 거절할 수 있었다.
그리고 몸이 '완전히' 회복된다는 맹세는 진이 오랫동안 앓고 있던 불치병의 치료를 포함하고 있었다.
물론 이 모든 건 진이 카인즈의 시험을 통과하지 못한다는 전제하지만 타이온은 진이 시험을 통과할 것이라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럼 문제를 내보겠습니다. 바다지네 독에 중독된 마법사를 치료하기 위해서는 무슨 약이 필요하며 약을 제조하는 방법에 대해 말씀해주십시오."
문제를 낸 직후, 카인즈는 처음부터 너무 어려운 문제를 낸 것 같아 후회했다. 이 문제는 작년 중급 약제사 진급 시험에서 출제된 문제 중에서 꽤나 어려운 문제에 속했다.
바다 지네는 매우 희귀해서 독에 중독된 사람이 드물었고 그만큼 약제사 중에서도 해독 방법에 대해서 아는 자가 얼마 없었다.
어려운 문제를 냈다며 진이 난리를 피우지 않을까 걱정됐지만...
"바다지네의 독은 마나 회로를 응고시켜 흐름을 차단시키는, 마법사에게는 매우 치명적인 독이지. 독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먼저 회로 속에 응고된 마나를 녹이는 마나 항응고제를 만들어야 하는데..."
답안을 듣는 카인즈의 입이 점점 벌어졌다.
***
흑마법사 중에서는 의외로 의학에 능통한 사람이 꽤나 많았다.
신성력이 담긴 치료마법은 흑마법사에게는 독이었기에 그들은 스스로를 치료하기 위해서라도 의학에 능통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흑마법사 중에서는 인체 실험을 자행하던 도중 새로운 약이나 치료법을 개발하는 경우도 많았다.
유진은 흑마법사를 죽이고 그들의 연구 성과를 이용한 것과 더불어 스스로도 의학을 연구하여 불치병으로 불리우는 많은 병의 치료제를 개발해냈다.
다만 흑마법사였기에 자신의 연구 결과들은 공표할 수 없었다. 흑마법사의 의학은 그들에게는 금지해야 할 사술에 지나지 않았으니까. 그렇기에 유진은 자신이 지난 세월 동안 개발해온 모든 연구 결과를 성녀인 아일레에게 맡겼다.
'확실히 그것들이 남겨지지는 않았나 보군.'
"그, 그럼 이 문제도 풀어보십시오..."
카인즈가 계속해서 낸 문제 중에선 유진 렉시노즈의 유산은 없었다. 되려 수백 년이 흘렀음에도 발전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럼 다음 문제는..."
"이 정도 맞췄으면 충분하지 않나? 벌써 13문제인데."
"그, 그렇군요."
"그래서 새 약을 제조할 재능은 충분한가?"
"... 차고 넘치시는 것 같습니다."
카인즈는 순순히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마지막 문제는 상급 제약사 진급 시험에 출제된 문제였다.
한 문제, 한 문제가 극악의 난이도라는 상급 제약사 진급 시험의 문제를 진은 듣자마자 풀어버렸다.
"카인즈 님, 진짜로 도련님에게 재능이 있는 겁니까?"
방에서 나온 타이온은 카인즈에게 물었다. 제약에 무지해서 무슨 대화가 오고 가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카인즈의 표정만 보고서 결과만 어렴풋이 이해할 뿐이었다.
처음에는 둘이 짜고 치는 게 아닌가 싶었지만 카인즈의 놀란 표정은 아무리 봐도 진짜였다.
"도련님은... 천재일세."
"..."
"클레피오스 님이 젊었을 적에 저렇지 않았을까 싶네."
"그 정도라고요?"
대현자 '의술과 제약의 아버지' 클레피오스.
현재 존재하는 해독, 영약, 의료술의 기반을 닦은 그는 역사상 단 다섯 명밖에 부여 받지 못한 대현자 중 한 명으로 당당히 이름을 올린 사람이었다.
제약에 무지한 타이온도 대현자 클레피오스는 알고 있었다.
"이론이 제약의 전부는 아니니 확실하지는 않지만... 이론에 한해서만큼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네. 도련님은 천재네."
밤새워 공부한다해도 열여덟의 나이로 이룰 수 있는 경지가 아니었다. 게다가 가문의 망나니가 공부를 했다면 얼마나 할 수 있었겠는가.
진이 보여준 능력은 오로지 재능으로만 설명할 수 있는 영역이었다.
"아마 혼수 상태를 겪고 나서 제약에 관해 각성한 게 아닐까 싶네."
타이온은 이 기막힌 상황에 말문이 막혔다. 검술 가문의 막내 아들이 천재 제약사 소리를 듣다니. 물론 천하의 무재나 가문의 수치라는 말을 들을 때에 비하면 훨씬 낫지만...
타이온은 울어야 할지 웃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
며칠이 지난 후, 해독약을 먹은 진 크라운가드의 몸은 빠르게 나아져 갔다.
온몸을 갉아먹는 듯한 통증도 가라앉았고 다크서클도 사라졌다. 목발도 더 이상 짚을 필요가 없어졌다.
이는 유진이 제조한 약의 효능이 좋았던 것도 있지만 그의 정신력이 더욱 큰 몫을 차지했다. 경지에 다다른 정신이 육체의 회복을 촉진시킨 것이다.
카인즈는 이건 기적이라고 말하며 기뻐했지만 유진은 그래도 회복 속도가 뎌디다고 느꼈다.
그리고 곧 깨달았다. 회복속도가 느린 게 아니라 진의 육체가 원래 허약했다는 것을.
유진은 헤이온의 후손이 이렇게 허약하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모계쪽 유전이라고 넘어가기에는 이상한 점이 많았다.
가장 신경 쓰이는 건 역시 단전에서 조금의 오러도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
오러의 재능이 없는 사람은 있지만 이 정도로 오러의 재능이 없는 사람은 매우 드물었다.
이상한 건 육체뿐만이 아니었다. 지금 진 크라운가드의 환경 자체도 자세히 보면 기이했다.
가문의 적자가 수도에서 제일 멀리 떨어진 곳인 홀타에 덩그러니 혼자 살고 있는 것으로 모자라 마약 중독으로 죽어가는데 가문에서는 방관만 하고 있다.
기억이 잘 안나는 척 하면서 옛날에 어떤 일이 있는지 카인즈에게 물어봤지만 카인즈는 기억이 안 나는 것이 다행이라는 식으로 말할 뿐이었다.
'기구한 사연이 있는 자인 건 분명해 보이는데.'
어찌 되었건 진 크라운가드는 동료의 후손이었으며 유진은 그 몸의 새 주인이 된 사람이었다. 진 크라운가드에 대해 알고 싶었지만 흑마법사인 유진이 진 크라운가드의 몸에서 할 수 있는 것이 그다지 없었다.
흑마법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블랙하트라고 부르는 마족 특유의 마기 생성 기관이 필요하다.
마족과 계약하는 방식이나 다른 방식으로 흑마법을 사용할 수 있지만 그건 고려 대상이 되지 못했다. 흑마법사가 되는 이점에 비해 단점이 지나치게 크니까.
'벌써 흑마법사의 힘을 그리워하다니.'
분명 되살아나기 전까지만 해도 다시 태어나면 흑마법사가 될 일은 없을 것이라고 동료들에게 말하고 다녔는데.
벌써 생각이 바뀌는 군.
힘이 없는 건 참 답답한 것이라 생각하며 유진은 다 읽은 책을 덮었다.
[제2차 천마전쟁 평전]
1500페이지에 달하는 책에서 유진은 전쟁 중에서 꽤나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가 헤이온에게 요구했던 대로 유진은 '최악의 흑마법사'로서 많은 악행을 벌인 흑마법사로 기록되었다.
유진은 자신에 관해 적은 마지막 문구가 마음에 들었다.
[유진 렉시노즈는 인류 역사상 다시 없을 최악의 흑마법사였다.]
맞는 말이라 생각하며 유진은 책을 새로 장만한 서가에 꽂았다.
피곤이 몰려왔다. 허약한 육체는 책을 오래 읽는 것마저도 버거워하고 있었다.
'저건...'
방문 아래에 편지가 남겨져 있었다. 편지가 왔다면 하녀가 직접 가져왔을 것이다. 이건 편지를 보낸 사람이 자신이 누군지 들키지 않고 싶다는 증거였다.
유진은 편지 봉투를 찢은 다음 쪽지를 읽었다.
[오늘 밤 자정, 제조실]
아무래도 자신을 보고 싶어하는 사람이 있는 모양이었다.
- 작가의말
재미있게 읽으셨으면 선작, 댓글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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