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서큐버스 야렌티

저녁 늦은 시각, 의문의 인물과 약속 시간이 멀지 않았을 때 카인즈가 갑작스레 방에 들어왔다.
"도련님에게는 최고의 잠재력이 있습니다."
카인즈는 부담스런 시선으로 유진을 바라보았다. 어떻게든 유진을 제약사로 만들겠다는 열망이 한가득 담긴 눈이었다.
유진이 이상한 약을 만들까봐 걱정되어서 약을 만들 때 참관했던 카인즈는 도련님이 칼트레아 해독제를 제조하는 모습을 보고선 소스라치게 놀랐다.
약재를 조합할 때 한 방울 마저 정교하게 양을 조절하는 디테일하며 약초에서 특정 물질을 추출해내는 동작. 행동 하나하나가 예술의 경지에 이르렀다 봐도 모자랄 정도로 정교했기 때문이다.
"옵투사 추출물과 달장미 꽃잎을 중탕하면 혈액 속의 칼트레아 독성이 중화된다니... 저는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이런 신비로운 제조법은 언제 생각하신 겁니까? "
"... 혼수 상태에서 깨고 나니 자연스럽게 깨달았네. 예전에 책에서 읽은 게 저절로 머리에서 조합되더군."
유진은 대충 얼버무렸다. 너무 자세히 설명하는 의심 받을 가능성이 높았다.
사람이 각성한다고 해도 없던 지식이 갑자기 생겨나는 건 아니다. 유진은 진이 과거에 책을 읽은 적이 있다고 둘러대기는 했지만 이 망나니가 책에 손을 댈 가능성이 없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다.
'앞으로는 적당히 해야겠군.'
카인즈와 타이온은 의심하지 않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유진의 제약 실력을 이상하게 생각할 가능성이 있었다. 적당히 책이라도 읽는 척 하면서 공부하는 모습이라도 보여야 할 듯 싶었다.
"도련님, 제약사의 길을 걸어보시는 건 어떻겠습니까? 도련님 같은 재능이 제약사가 되지 않는다면 이는 인류에게 있어서 엄청난 불운일 것입니다."
카인즈는 엄청난 결심을 한 듯 말했다.
귀족 가문, 그것도 검술로 제국을 수호하는 가문의 사람에게 제약사의 길을 걸으라고 권하는 것은 무례한 언행이었다. 만약 과거의 진 크라운가드였다면 재능이 없는 자이니 약이나 만들라는 모욕으로 받아들여 난리를 쳤을 것이다.
하지만 유진의 생각은 달랐다.
"제약사라... 그것도 나쁘지는 않겠지."
유진 렉시노즈는 모든 것을 이루고 죽은 사람. 두 번째 삶에 특별한 미련이 있지는 않다. 그리고 흑마법사로서 항상 숨어 살아야 했던 자신에게 제약사로 사람들을 치료하며 존경 받는 삶은 나쁘지 않은, 아니 오히려 유진이 원하는 삶에 가까웠다.
"내가 살고 싶은대로 살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가문 때문입니까?"
유진은 고개를 저었다. 가문에서 진 크라운가드를 구석의 영지에 처박아놓은 시점에서 진 크라운가드가 뭘 하든 그들이 신경쓰지는 않을 것 같았다. 오히려 약제사가 되어서 명망을 얻으면 좋아하겠지.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이라는 게 있지."
"그게 무슨 말씀..."
말을 하던 카인즈의 눈이 서서히 감기더니 그대로 잠에 빠져들었다. 어느새 분홍빛 아지랑이가 방 주변에 흐르고 있었다. 어느새 성 전체가 분홍색 아지랑이로 감싸진 상태였다.
'저 마법은...'
유진이 알고 있는 흑마법이다.
9위계 흑마법 [꿈꾸는 세계의 안개]. 안개 속의 생명체를 꿈 속에 가둬버리는 고위 서큐버스의 환상계 흑마법.
'그녀인가.'
유진은 천마전쟁에서 이 마법을 자주 활용했던 서큐버스를 알고 있었다. 성 전체를 감싸는 엄청난 규모부터 안개에서 느껴지는 포근한 과일향까지. 모든 현상이 한 명을 가리키고 있었다.
'일이 좀 귀찮아지겠군.'
그 서큐버스와는 그렇게 좋은 기억이 없었다. 오히려 껄끄러운 상대에 가까웠다.
달칵. 어떻게 그녀를 상대할지 고민하고 있을 때 문이 열리며 하녀 하나가 조심히 방을 들어왔다.
고개를 깊게 숙이며 인사하는 여성은 유진이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며칠 전 제조실을 청소할 때 비커를 깨뜨린 하녀였다.
"위대한 흑마법사 유진 렉시노즈 님을 뵙습니다."
쥐죽은 듯 고요한 성에서 여성의 고아한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날더러 위대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또 오랜만이군."
"지하에서 제 주인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안내하도록."
하녀는 예전에 만났을 때와는 다른 사람이라 해도 분위기가 달랐다.
예전에 봤을 땐 일에 서투른 어린 하녀다운 느낌. 하지만 지금은 좋게 보면 이지적이었으나 나쁘게 보면 감정이 없는 인형 같았다. 아마 지금이 그녀의 본모습일 것이다.
"이름은?"
"록시라고 합니다."
가명이겠지. 하지만 유진은 굳이 본명을 캐묻지 않았다.
"그래, 록시. 네가 서큐버스의 계약자인가?"
"그렇습니다."
서큐버스와 계약한 여자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목소리가 차가웠다.
서큐버스는 색욕을 먹이로 삼기에 오직 여성과 계약을 맺으며 그들과 계약한 흑마법사는 서큐버스와 비슷한 성격을 지니게 된다. 고혹적이며 남성을 유혹하는데 익숙한 여성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록시에게서는 그런 면모를 조금도 찾을 수 없었다.
'무슨 사연이 있겠지.'
사연 없는 흑마법사는 없다. 흑마법사가 되는 순간 모든 인류의 적이 된다. 신관에게 잡히면 무조건 사형이며 죄질에 따라 산 채로 화형을 당할 수도 있다. 그렇기에 흑마법사가 되는 순간부터 그 사람은 평생을 숨어 살아야 한다. 마족과 계약한다는 것은 그 모든 것을 감당할 각오를 해야 한다.
물론 태생부터 사악하게 태어난 자도 있지만 록시는 분명 전자에 가까워보였다.
록시를 따라 지하로 내려가던 도중 유진은 입을 열었다.
"내가 네 손가락에 바른 약은 바다선인장 뿌리에 콜로하의 꿀을 섞어서 바른 거네. 이게 무슨 의미인줄 아나?"
"... 잘 모르겠습니다."
"이 약은 일반적으로 소독 효과와 새 살을 돋게 해 상처 치료를 돕지만 피에 마기가 흐르는 흑마법사에게는 역으로 피부의 재생을 막아 상처 회복을 늦추지."
말을 들은 록시가 살짝 흠칫한다. 그녀의 약지 손가락은 여전히 천으로 감겨져 있었기 때문이다.
바다선인장 뿌리가 마기를 다루는 흑마법사에게 독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바다선인장 뿌리를 바를 일도 드물고 흑마법사의 상처 회복을 더디게 하기는 하지만 그게 전부이기 때문이다. 웬만큼 약학에 정통하지 않고서는 흑마법사도 모른다.
"...언제부터 알고 계셨습니까?"
"흑마법사는 항상 주위를 의심하면서 살아가는 법이지. 록시 너처럼."
유진은 주위에 흑마법사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고 록시가 비커를 떨어트리는데 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그렇기에 제조실에 있는 재료로 약을 만들어서 확인해본 것이다.
아마 록시는 유진이 어떤 사람인지 테스트해보기 위해 일부러 비커를 떨어트렸을 것이다.
"암모니아를 바르면 낫기 시작할 거야."
"...감사합니다. 그리고 무례를 범해 죄송합니다."
"꽤나 따가웠을테니 주고 받은 걸로 하면 되겠지."
둘의 대화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피어오르는 분홍빛 아지랑이 사이를 헤쳐나간 지 머지않아 유진은 제조실에 도착할 수 있었다.
제조실의 바닥에는 닭피로 그려진 마법진이 있었다.
'강림인가.'
마계에 있는 마족의 영혼을 일시적으로 강림시키는 흑마법.
"잠시 물러나 주시길."
유진이 마법진에서 물러나는 것을 확인한 록시는 마법진 중앙의 원 위에 올라섰다. 마법진에 마기를 불어넣자 피가 증발하며 마법진에서 강한 보라빛이 터져나왔다.
록시의 눈이 뒤집히며 몸이 거세게 흔들렸다. 지나치게 강한 마족이 록시의 몸에 강림하면서 마기가 폭주하는 것이다. 곧이어 보라색으로 물든 혈관이 피부 위로 튀어나온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록시의 움직임이 멎었다. 그녀가 강림한 것이다.
[유진 렉시노즈...]
"오랜만이군, 군단장 야렌티."
제2차 천마전쟁 때 마족군 제9군단의 군단장이자 모든 서큐버스의 여왕 야렌티. 록시의 계약자는 그녀였다.
강림이 완료된 록시의 몸에서는 거친 마기가 흘러넘치고 있었다. 아직 록시의 육체가 야렌티의 강림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게. 이렇게 널 보게 되다니... 그리고 전쟁이 끝난지 300년이 지났어. 이젠 여왕이지.]
"나에겐 아직 일주일도 지나지 않았다."
마기 한 줄기가 유진의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뺨에 흐르는 피줄기가 느껴졌다.
[입 털지 마. 당장이라도 죽여버리고 싶어지니까 말이야.]
유진은 야렌티의 마기에서 살기를 느낄 수 있었다. 서큐버스의 마기는 보통 적을 유혹하는 특성이 있으나 지금 야렌티에게서 흘러나오는 기운에는 적의뿐이었다.
[그나저나 참으로 꼴사납네. 말라 비틀어진 나뭇가지도 지금 네 몸보다는 튼튼하겠어.]
야렌티는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그녀의 말대로 거센 마기를 견디기 버거워하는 진의 허약한 육체가 유진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사시나무 떨듯이 떨고 있었다.
[누가 지금 너를 리치왕을 죽인 흑마법사라고 생각할까?]
"회귀 전에도 내가 죽였다고 하는 사람은 없었지."
다들 헤이온과 칼리파가 죽였다고 알고 있을 뿐 실제로 유진이 리치왕이 죽였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극소수였다.
또 하나의 마기 줄기가 뻗어 나와 반대쪽 뺨을 스치고 지나간다. 상처가 아까보다 조금 더 깊은지 약간의 열감이 느껴졌다.
[반쪽짜리 도마뱀아, 주제를 알렴. 당장이라도 너를 꿈 속에 들어가 수천 년동안 고문할 수 있으니까.]
"주제라... 재미있는 말이군. 주제를 모르는 자가 누구인지 모르는 거 보니."
야렌티의 표정이 일그러진다.
[뭐라고? 너 살아났다고 제정신이 아니구나? 지금 네가 옛날의 너인줄 알아?]
유진은 야렌티의 적의를 이해할 수 있었다. 과거 인류의 명운을 건 전쟁이 펼쳐졌고 두 명은 서로 적이었으며 큰 은원이 있었다. 야렌티라면 이 자리에서 당장이라도 유진을 죽이고 싶을 것이며 그는 그 감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자리에서 고통스럽게 죽는다 한들 스스로 쌓아 올렸던 격을 낮출 생각은 추오도 없었다.
유진은 야렌티에게 다가갔다.
다가갈수록 거센 마기가 유진을 베고 지나가며 몇 개의 상처를 더 만들었다. 짙은 농도의 마기가 온몸을 마치 바늘로 찌르는 것 같았지만 상관없었다.
"복수를 하러 온 거면 죽여라. 대신 마신의 심부름꾼으로 온 것이라면 얌전히 심부름꾼 역할만 하고 꺼져라."
[뭐라고?]
"고작 너 정도의 능력으로 나를 누군가에게 빙의시키는 건 불가능하지."
야렌티는 분명 과거보다 강해졌을 것이다. 천마전쟁 때 그녀의 나이는 전성기가 되기엔 어렸으니까.
하지만 야렌티가 강해졌다 한들 유진의 영혼을 누군가에게 빙의시키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그렇기에 나의 부활 뒤에는 마신이 있으며 너는 그 마신의 심부름꾼으로 온 것이겠지."
유진은 야렌티에 더 가까이 다가갔다. 마기의 독기에 중독된 피부에서 혈관이 터져 나와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마신의 명령을 어기고 죽이고 싶으면 죽여라. 하지만 그럴 용기도 없으면서 진행하는 같잖은 협박은 상대해주지 않겠다."
[너를 죽이지 않고 계속 고문하는 방법도 있는데?]
"해도 상관없다."
[...쳇.]
야렌티는 혀를 차며 마기를 거두어들였다. 더 이상 의미없는 줄다리기를 하는 건 야렌티에게 손해였다.
[맞아. 마신 님께서 널 부활시켰어. 나는 이걸 전달하라는 명령을 받았고.]
곧이어 야렌티는 작은 포탈을 열더니 포탈 속에서 검붉은 보석 하나를 던졌다.
보석을 쥐는 순간 유진의 동공이 커졌다. 아주 익숙하면서도 흉폭한 기운이 보석 속에서 흘러나왔기 때문이다.
"이건 설마..."
[그래. 크롬벨의 블랙하트야.]
크롬벨이라는 이름을 듣는 순간 유진의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단신으로 제국 하나를 멸망시켰던 제1군단장 크롬벨. 그는 전쟁 중 가장 많은 인류를 죽인 최강의 마족이었으며 인류 최강자 두 명이 동시에 덤볐음에도 그를 이기기 위해서 한 명의 목숨을 바쳐야 했다.
블랙하트는 마기를 생성하는 기관이자 모든 마족의 힘의 원천. 크롬벨이 고유의 검붉은 마기를 휘두르며 모든 것을 파괴하던 모습이 아직까지 선명히 떠올랐다.
"이걸 왜 나한테 주는 거지?"
[그걸 네 몸 안에 박아 넣어서 다시 흑마법사가 되라는 뜻이 아니면 뭐겠어?]
알고 있다. 그럼에도 쉽게 믿기 힘든 이야기였기에 다시 물어본 것이었다.
'다시 흑마법사가 될 수 있다고?'
유진은 마기가 일렁이는 블랙하트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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