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어머니의 원수
“이건 파편이군.”
블랙하트에서 흘러나오는 기운은 분명히 그의 것이었지만 크롬벨에게 느껴졌던 마기에 비하면 미약하기 그지없었다.
[나머지 파편은 크롬벨이 죽으면서 인간계 전체에 흩어졌어. 네가 그 파편의 힘으로 흑마법사가 되면 나머지 파편의 위치를 느낄 수 있는 힘을 갖게 되겠지.]
고작 이 작은 파편 하나로 유진이 과거의 힘을 전부 찾는 건 불가능했다. 하지만 이 힘을 전부 모은다면··· 과거의 자신보다 강해지는 것도 불가능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과거의 나와는 달리 이 몸은 순수한 인간이다. 나한테 마족의 흔적 기관이 없는 이상 블랙하트를 이 몸에 이식할 수 없어.”
흑마법사가 되기 위해 블랙하트를 인간의 몸에 이식하기 위해서는 마족의 흔적 기관이 필수다. 그리고 기관을 가지기 위해서는 선조 중에 마족이 적어도 한 명은 있어야 한다.
[마신 님이 그걸 모르고 너한테 그 귀한 걸 준 줄 아는 거야?]
야렌티는 유진을 비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너는 이미 흑마법사가 되기 위한 조건을 충족시켰어.]
“뭐라고?”
유진은 급히 목뒤를 어루만졌다. 약간 부풀어오른 감촉이 느껴졌다. 흔적 기관이 확실했다.
‘이게 이 아이의 몸에 있다니.’
귀족 가문에서는 혈통을 매우 중요시 여긴다. 그렇기에 그들은 더러운 피가 섞인 마족 의 후손과 결혼하는 일이 매우 드물었다. 그것이 고귀한 검술가문인 크라운가드 가문이라면 더더욱.
인간의 피가 75% 이상인 쿼터부터는 블랙하트 대신 흔적 기관만 남기에 사실상 인간과 아무런 차이가 없지만 사회적으로 차별 받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하지만 분명히 이 아이에게는 흔적기관이 남아있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하나뿐이다.
‘서자였군.’
가문의 성을 이어받았기에 유진은 진 크라운가드를 당연히 적자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크라운가드 가문에서는 서자를 가문의 명예에 먹칠을 하는 행위로 받아들였기에 유진은 진이 서자일 가능성에 대해서는 조금도 염두해두지 않았다.
진 크라운가드의 과거에 대해 더욱 궁금해졌다. 아니, 어떻게든 알아내야 한다.
“그래서, 마신이 아무런 조건도 걸지 않고 이걸 나한테 주지는 않았겠지.”
마신이 내거는 조건이 마족의 편에 서서 제3차 천마전쟁을 일으키라거나 언데드 제국을 건설해라 따위의 일이라면 유진은 당장 파편을 가지고 꺼지라고 말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야렌티의 대답은 예상을 한참 비껴나가 있었다.
[마신 님께서는 네게 바라는 것이 아무것도 없어. 크롬벨의 힘으로 무엇을 하든지 그건 네 자유지.]
유진은 반사적으로 미간을 찌푸렸다.
바라는 것이 없을 리가 없다.
유진을 부활시키고 크롬벨의 블랙하트 파편을 주는 것은 마신에게 있어서 어마어마한 힘을 부여한 것이나 다름없다. 과거에 적이었던 사람에게 바라는 것이 없다면서 대가 없이 나눠줄 만한 힘이 절대 아니다.
그럼에도 말하지 않는다는 건 유진이 이 힘으로 흑마법사가 되는 것만으로도 마신은 자신의 뜻이 이뤄진다는 확신이 있다는 뜻. 하지만 유진은 마신의 목적이 무엇인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짜증나는 군.’
유진은 짧은 시간 동안 무수히 많은 가능성을 고민했다. 그리고 결론을 내렸다.
“거절하겠다.”
이 힘이 있으면 분명 유진은 진 크라운가드의 몸으로 다시 강해질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유진 렉시노즈였던 시절보다 더.
하지만 유진 렉시노즈는 다시 흑마법사가 되고 싶지 않았다. 흑마법사가 되면 평생 정체를 숨기면서 살아야 한다. 이 성을 당장 떠나야 하며 친우의 가문에 먹칠을 하게 된다.
무엇보다도 상대방의 목적을 알 수 없는 거래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것이 마신과의 거래라면 더더욱.
흑마법사로 살아온 유진의 철칙 중 하나였다.
하지만 이번에도 야렌티의 대답은 유진의 예상을 한참 벗어나 있었다.
[마음대로 해. 내가 받은 명령은 블랙하트를 너한테 전달하는 것뿐이거든. 그걸로 뭘 하든지는 내가 신경 쓸 바 아니지.]
당연히 블랙하트를 회수할 것이라 생각했다. 거절의 대가로 죽음까지 각오했었는데 아무것도 바라는 것이 없다니.
[당황하다니, 너에게서는 처음 보는 감정이네.]
“··· 당황한 건 나만이 아니겠지, 야렌티. 너는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있나?”
유진을 비웃던 야렌티는 인상을 찌푸렸다. 그녀 또한 이 상황을 완전히 이해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중요한 건 마신의 의지뿐.]
“광신도나 할 법한 말을 내뱉는군.”
의문을 가지지 않는 자는 맹목적이다. 유진은 야렌티가 그런 부류의 마족이 아님을 알고 있다.
[진짜 죽고 싶은가 보구나?]
순간 야렌티의 기운이 사방에 퍼지며 유리기구들이 죄다 깨져 나갔다. 유진은 가까스로 의식을 부여잡았다.
서열이 낮은 서큐버스였지만 야렌티는 한 마족의 정점. 그녀가 마음만 먹으면 지금의 유진 정도야 단순히 기운을 방출하는 것으로 죽일 수 있었다.
하지만 유진은 겁먹지 않았다. 육체가 약해졌다고 한들 정신은 과거 초월의 경지에 이르렀을 때와 차이가 없었다.
견고한 자아를 유지하는 유진을 바라보며 야렌티는 기운을 거뒀다.
[할 말은 다했으니 나는 갈게. 더 이상 이 육체에 있으면 기껏 어렵게 구한 계약자랑 너를 죽어버릴 것 같으니.]
록시는 강림의 대가를 정면으로 받고 있었다. 안 그래도 신체에 부담이 컸는데 방금 그녀의 분노로 인해 마기가 폭주하면서 피부가 검게 물들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유진은 문득 과거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강림을 끊고 마계로 되돌아 가려는 야렌티의 모습이 과거의 모습과 겹쳐 보였던 탓이었다.
유진에게는 결코 잊을 수 없을 기억이었으며 야렌티에게는 가장 큰 기억이자 악몽.
맹세해라, 유진 렉시노즈. 무슨 일이 있어도 그 아이를 지켜주기로.
머릿속에서 들리는 한 여성의 목소리. 그 목소리를 떠올린 유진은 입을 열었다.
“네 어머니를 죽인 것은 미안하게 되었다.”
으득.
야렌티는 감정을 간신히 추스렸다. 방금은 진짜 위험했다. 자신도 모르게 저 인간을 죽여버릴 뻔했으니까.
[한 번만 더 그 따위 동정하면 여왕으로서 모든 걸 걸고 널 죽여버릴 거야.]
야렌티가 짓이기며 마지막 말을 내뱉은 직후, 방 안을 휘몰아치는 마기가 순식간에 소멸되었다. 야렌티가 마계로 돌아간 것이다.
의식을 잃은 록시가 쓰러지지 않게 그녀의 몸을 받아낸 후, 유진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제조실에 있는 기구들이 전부 망가져 있었다.
‘이걸 또 어떻게 타이온한테 설명해야 하나.’
귀찮음이 몰려들었다.
***
본신이 있는 마계의 서큐버스 성으로 귀환한 야렌티는 왕좌의 팔걸이를 꽉 쥐었다.
‘유진, 네가 날 동정하다니.’
“너 따위가···”
가느다란 손으로 쥐고 있던 왕좌의 팔걸이가 우그러졌다. 어머니부터 사용하고 있었던 왕좌를 야렌티는 무척이나 아꼈지만 지금 느껴지는 분노만큼은 쉽게 조절할 수 없었다.
어머니를 죽인 원수가 눈앞에 있었는데 야렌티는 유진을 죽일 수 없었다.
혀를 뽑아버릴 수 있었는데 그러지 못했다.
팔다리를 비틀어버릴 수 있었는데 야렌티는 유진에게 손을 대지 못했다.
그럴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더욱 화가 났다.
그때, 옆에서 기다리고 있던 서큐버스가 다가왔다.
“여왕님, 괜찮으세요?”
남성을 유혹하는데 특화되어 성숙한 이미지를 주는 보통의 서큐버스와 달리 그녀는 둥그스런 눈매에 토끼 같은 인상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투명한 눈망울만큼 순수한 성격을 지녔는데 이 역시 서큐버스들에게는 매우 드문 특성이었다.
그렇기에 모든 서큐버스의 사랑과 보호를 받고 있는 그녀는 카샨티, 야렌티의 동생이었다.
하지만 지금 카샨티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
“괜찮아. 그리고 단 둘이 있을 때는 편하게 불러, 카샨티.”
“네 언니. 그 흑마법사는 어땠나요?”
“하나도 달라진 게 없어. 과거마냥 강한 것처럼 굴더군. 건방진 남자야.”
카샨티는 언니가 인간계에 강림하여 의식을 잃고 있던 동안 언니 옆을 홀로 지키고 있었다.
둘의 대화를 들을 수는 없었지만 야렌티에게서 흐르는 사나운 마기는 여동생마저 등줄기가 서늘해질 정도였다. 그토록 분노한 언니를 보는 건 카샨티도 거의 처음 보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 상대가 유진 렉시노즈라면 카샨티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녀는 야렌티 그 이상으로 유진에게 분노하고 있으며 마신 님의 결정에 의구심을 품고 있었다.
“저는 마신님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어요. 마신 님께서 고작 인간 남자 하나를 왜 그렇게 신경 쓰는 거죠? 그것도 적이었는데.”
“그건 나도 모르겠어. 유진 그 흑마법사도 전혀 감이 잡히는 게 없는 모양이야.”
마신님은 마족을 위해 계시를 내려 주시지만 의문을 풀어주는 존재는 아니었기에 야렌티 또한 마신님의 의중을 전혀 알 수 없었다.
“···그 흑마법사가 그렇게 강했나요?”
“강해. 일개 인간이라는 게 믿기 힘들 정도로.”
야렌티는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서큐버스의 여왕이 일개 흑마법사 하나를 강하다고 단정짓자 카샨티의 눈이 커졌다.
강한 인간은 많다. 그 사실을 모르는 마족은 없었다. 만약 마족이 더 강했다면 두 번의 전쟁에서 모두 패배하는 일 따위는 없었을 테니까.
하지만 유진은 검사, 마나를 다루는 마법사도 아닌, 흑마법사다.
야렌티를 포함해 대다수의 마족들에게 흑마법사란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 ‘강해지기 위한 도구’ 혹은 ‘갖고 놀기 좋은 장난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마신님께서 마족에게 부여한, 마족의 고유한 힘, 마기.
흑마법은 그 마기를 활용한 죽음의 마법이다. 마족들에게 주어진 힘을 인간이 더 잘 다룬다는 건 마족들에게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것을 상상 가능한 영역으로 만든 흑마법사가 바로 유진 렉시노즈였다.
“얼마나 강하길래···”
“초대 리치왕을 흑마법으로 죽인 인간이니까.”
초대 리치왕은 [최초의 마족 13인] 중 한 명이자 [흑마법의 창시자]. 흑마법을 창시한 자가 일개 흑마법사한테 패배했다.
힘으로만 놓고 보면 마신의 관심을 받을 자격은 차고 넘쳤다.
“그래도 적이었잖아요. 왜 적에게 다시 힘을 주는 거죠?”
“···”
야렌티는 이번 질문에 대답할 수 없었다. 그녀 역시 아무리 고민해도 답을 얻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저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어요. 마신 님께서 그 일을 다른 왕이 아닌 언니에게 맡긴 것도 그렇고요.”
카샨티는 이 불합리한 상황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전쟁에서 패전한 후, 마계는 아직도 그 피해에서 완전히 회복하지 못한 상태였다. 13 종족 중에서 서큐버스는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종족이었다.
하지만 마신은 잔인하게도 서큐버스의 왕에게 마족의 가장 큰 적이었던 자에게 심부름꾼 역할을 맡겼다.
언니도 가까스로 참으며 마신 님의 명령을 따랐겠지. 카샨티는 언니의 감정을 이해할 수 있었기에 더욱 화가 났다.
“마신님께서 우리를 버리신 게 아닌 이상에야 이럴 수 있나요?”
“카샨티, 믿음을 저버려서는 안 돼. 어머니의 가르침을 벌써 잊은 건 아니지? 마신 님은 언제나 마족을 위하고 계신다는 것을.”
“그런 신이 언니에게 어머니를 죽인 사람을 되살리라고···”
“그만!”
야렌티가 기운을 실은 채 외치자 카샨티가 얼어붙었다. 지금까지 한 번도 동생에게 화낸 적 없던 언니였기에 그 충격은 더욱 컸다.
“두 번 다시 그런 불경한 말을 입 밖에 내지 마. 두 번 다시는!”
“언니···”
두려움에 떠는 여동생을 바라보며 야렌티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유일하게 남은 가족인데 지나쳤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장 야렌티도 마신 님의 의중을 알 수 없는데 카샨티는 오죽할까. 게다가 두 번째 전쟁까지 패배하고 나서 마신님에 대한 불신이 마족 사이에 퍼진 것도 부정할 수 없었다.
“슬슬 나가보렴, 카샨티··· 화내서 미안해.”
카샨티는 입술을 깨문 채 말없이 등을 돌렸다. 야렌티는 말없이 그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방에서 나온 카샨티는 복도를 걸으며 생각에 잠겼다.
“카샨티 님께서 안 좋은 일 있으신가?”
“여왕님께서 조금 화나신 것 같던데.”
자신에게 고개를 숙이는 서큐버스들을 무시하며 지나치며 그녀는 결심했다.
‘설령 마신 님의 뜻을 거스르더라도··· 난 그 남자를 용서할 수 없어.’
유진 렉시노즈. 어머니를 죽인 인간.
그 인간을 죽여야 한다.
다만 제2차 천마전쟁에서 패배한 이후, 마족은 본체를 유지한 채 인간계에 강림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뿐. 카샨티는 그녀의 뜻을 이뤄줄 인간과 계약하기로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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