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4
- 주인님. 뇌파가 불안정하고 혈압이 증가했습니다. 동요하고 계시는군요. 머무는 지역이 노출됐기 때문입니까?
잠잠하던 완자가 말을 걸어왔다.
“아니, 딱히 그런 이유 때문만은···”
- 죄송합니다. 주변 좀비를 모조리 쓸어버리라는 명령을 제가 너무 과하게 수행해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으로 분석됩니다.
AI치고 꽤나 섬세한 녀석이다.
흡사 예의 바른 사람과 대화하는 듯했다.
“아니야. 잘했어. 덕분에 전설급 업적 보상을 얻었잖아. 큰 수확이야.”
- 주인님이 만족하셨다니 다행입니다.
“게다가, 생각해 보니 위치가 노출된 것도··· 당장은 크게 걱정할 필욘 없을 것 같아.”
-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베리타스조차도 스펙터가 나라는 걸, 내가 나노셰이퍼 능력자라는 걸 모르는 것 같으니까.”
합리적인 의심.
아니, 거의 확신이었다.
놈은 아까 분명히···
어떻게 그런 킬 수를 올릴 수 있었냐며 의문을 표하지 않았나.
스펙터가 나란 것과 내 능력을 알고 있었다면···
저런 식으로 말하진 않았겠지.
- 과연. 일리 있는 추론입니다.
“신적 존재처럼 엄청난 권능을 구사하지만, 인간 개개인에 대한 정보까지는 확인하지 못하는 게 분명해. 놈도 한계가 있다는 거겠지.”
- ‘놈’이라는 표현은 상대를 낮잡아 부르는 단어가 아닙니까? 베리타스가 들을 수도 있는데 조심해야 하지 않을까요?
‘아차!’
순간 움찔했지만···
기왕 튀어나온 욕, 미친 척 한번 용기를 내본다.
“좆까라 그래. 베리타스 저 새끼는 언젠가 내가 반드시 머갈통을 부숴버린다.”
- ···주인님?
시스템 오류라도 일어난 듯···
완자가 시간차를 두고 나를 부른다.
내가 걱정이라도 됐던 걸까?
그래 안다.
지금 내 어깨와 턱이 미친 듯이 요동치고 있다는 거···
당장 머리통이 터져버려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니까.
살면서 거의 해본 적도 없는 쌍욕을 초월자에게 내뱉다니···
오금이 저린다.
음··· 이런.
이미 조금 지렸나···
그래도 시도해 봐야 했다.
녀석의 권능이 어디까지 가능하고 어떤 것들이 불가능한지···
그걸 알아야 놈을 상대할 수 있을 테니까.
한동안 좁은 원룸에 정적이 흐른다.
5분 정도가 흘렀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역시···”
- 확실히 베리타스는 생존자 개개인의 언행과 정보에 대한 접근 권한은 없는 듯합니다.
“그러게··· 휘유···”
절로 한숨이 새어 나온다.
똥꼬에 힘을 꽉 줘야 할 정도로 팽팽했던 긴장이 한 순간에 누그러졌다.
- 어느 정도 확신을 가지고 행하신 건 알겠지만, 조금 전 실험은 너무 위험했습니다. 그런 상남자스러운 시도는 자중해 주셨으면 합니다. 전 주인님의 신체와 생명을 보호할 의무가 있습니다.
“상남자··· 그래. 방금 전엔 나답지 않았다는 거 잘 알아. 하라고 강요해도 두 번은 못 하겠다. 후우···”
- 안전만을 위한 3원칙. 굉장히 체계적이고 훌륭한 프로토콜입니다. 주인님이 인간인 이상 기계처럼 원칙을 수행할 순 없겠지만, 가능하다면 지켜주십시오.
“이미 그것까지 파악했어? 알았어, 나도 죽거나 다치는 건 사양이니까··· 앞으로 이런 일 없을 거야. 걱정 마.”
- 저의 부족한 소견을 받아들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내 대답이 마음에 드는 모양이다.
완자는 가볍게 위아래로 움직이며 만족감을 표했다.
“일단, 받은 보상을 사용해서 성장을 해보자. 다음 미션에 대비해야 하니까···”
완자를 성장시키는 방법은 자명했다.
나노 머신의 입자 수를 늘리는 것.
“근데 뭘 사야 하지? 능력치 +1을 사면 되려나?”
설마, 100G나 되는 능력치를 샀는데···
나노 입자가 꼴랑 하나만 늘어나는 건 아니겠지?
머릿속으로 능력치 +1상품을 구매하겠다는 결심을 한다.
그러자 새로운 메시지 창이 떠올랐다.
[능력치 +1상품을 구매할 수 없습니다. 사용할 수 없는 능력입니다.]
‘···뭐?’
능력치라 할 수 있는 스탯이 없어서 그런가?
그럼 나노 입자를 따로 팔아야 할 거 아냐...
나노셰이퍼는 어떻게 능력을 올리라고?
- 주인님. 이온 캡슐 하나를 구매해 주실 수 있습니까?
“이온 캡슐? 그건 왜?”
- 제가 존재하던 세상의 물건과 비슷하다는 느낌이 듭니다.
“느낌이 들어? AI도 뭘 느낄 수 있는 거야?”
- 산술적으로 표현하면 일치할 확률은 83.75%입니다.
“어··· 음. 그래. 하나면 돼?”
- 일단 테스트를 해봐야 하기 때문에 하나면 됩니다.
이온 캡슐을 구매할 결심을 한다.
아까와는 다른 메시지가 떴다.
[이온 캡슐을 구매하였습니다. -50G]
툭.
구매 성공.
눈앞에서 빛이 뿜어져 나왔다.
이내 바닥으로 떨어지는 푸른색 알약 하나.
땅콩만 한 크기로 일반적인 알약보다 조금 더 크다.
완자는 지체 없이 다가가 알약을 집어삼켰다.
진공청소기로 빨아들이듯 알약을 흡수한 것이니···
그래, 삼켰다는 표현이 정확할 것이다.
말없이 꿀렁거리는 쇠구슬.
오물거리며 씹고 음미하는 것처럼 보인다.
기괴하면서도 귀엽다고 해야 할까···
- 분석 완료. 나노 입자 구축에 필요한 이온 물질임을 확인. 물질의 순도와 구성 모두 100%일치.
“뭐? 어··· 그 말은···”
- 이온 캡슐로 나노 입자를 생산할 수 있습니다. 실행하시겠습니까?
실행하지 않을 이유가 있을까?
망설임 없이 명령을 내린다.
“나노 입자 생산을 시작해.”
- 명령을 수행합니다. 나노 입자 생산 중···
- 완료. 1억 2386개의 새로운 나노 입자를 구축했습니다.
“이··· 일억?”
50G의 자원으로 1억 개 이상의 나노 입자를 추가한다라···
‘대박이잖아?’
단순 계산으로도 500G를 투자하면 10억 개 이상.
전 재산을 투자하면 대략 100억 개가 넘는 나노 입자를 늘릴 수 있다는 소리.
‘1천 8백억 개에 가까운 총량을 생각하면 그리 많은 건 아닌가? 다른 각성자가 능력치를 올리는 것과 얼마만큼 효율 차이가 있는 거지···’
성장 방식이 아예 다르니 좋고 나쁨을 가늠하기 힘들다.
그럼에도 괄목할 부분은 바로 가격이었다.
‘이온 캡슐을 이용한 나노셰이퍼의 성장 방식은 다른 각성자가 능력치를 올리는 가격의 절반··· 이는 게임이 진행될수록 점점 누적되는 가치야··· 즉, 후반으로 갈수록 그 격차가 엄청나게 벌어질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다!’
이리 보고 저리 따져도 사기적인 능력이다.
‘이건··· 현질로 풀 패키지를 지른 정도가 아니잖아...’
거의 핵을 쓰는 수준이 아닌가.
“완자. 1950골드로 이온 캡슐을 구매할게. 나노 입자 생산을 준비해 줘.”
- 알겠습니다 주인님.
보유 재화의 절반 이상을 남기고 성장에 투자한다.
내가 게임을 플레이하는 스타일이었다.
1950골드로 구매 가능한 이온 캡슐은 39개.
좀 전에 테스트용으로 구매한 것까지 해서···
나노 입자 생산에 투자한 이온 캡슐은 총 40개였다.
- 새로운 나노 입자 생산을 완료했습니다. 총 40억 9만 5440개의 새로운 나노 입자를 구축했습니다.
완자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다시 상태창을 확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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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름 : 안전만
닉네임 : 스펙터
직 업 : 나노셰이퍼
입자량 : 1865억 3223만 3189개
에너지 : 90%
스 킬 : 형태변환/ 형질변환
업 적 : 좀비학살자
골 드 : 3000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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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어난 입자 수가 정확히 반영돼 있었다.
“확실히 숫자가 바뀌긴 했는데··· 뭔가 달라진 게 있어? 새로운 형태 변환을 할 수 있다던가···”
- 형태 변환은 주인님의 상상력에 따라 성능이 달라집니다. 구체적으로 형태를 그릴수록 좋은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식입니다. 40억 개 이상의 입자 수가 늘어난 것에 대한 차이를 시각적으로 나타낸다면 이렇습니다.
완자가 즉각 모습을 바꾼다.
좀비들을 학살한 원형 톱 형태로···
얼핏 보면 뭐가 달라졌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내 원판 한가운데 작은 무언가가 솟아나 있는 걸 발견한다.
앉아 있는 자세의 고양이 피규어였다.
“···완자?”
- 주인님의 기억 속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반려 생물이더군요. 그대로 구현해 보았습니다.
저 초롱초롱한 눈망울, 쫑긋 솟은 귀, 두툼하고 앙증맞은 발까지...
오랜 세월, 무지개다리를 건너기 직전까지도···
나만 바라봐주고 조건 없이 사랑을 내주었던 내 작고 소중한 친구···
기억 속 완자의 모습 그대로였다.
“40억 나노 입자로 저만큼을 추가 생성할 수 있다는 거로구나··· 무슨 차이인지 알겠어. 이제 그만 본 모습으로 돌아와.”
- 알겠습니다.
나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버렸다.
완자가 떠난 지도 벌써 1년이나 지났는데···
아직도 녀석은 내 안 어딘가에 깊숙이 박혀있는 모양이다.
똑같이 생긴 나노 머신 피규어를 본 것만으로 이렇게나 가슴이 아려오다니···
- 나노 입자 수가 늘어나면 형질 변환 능력도 향상됩니다. 더 빠르게, 더 많은 양의 물질을 변환할 수 있게 됩니다.
“···그렇군. 근데 그런 기능은 필요 없을 거야. 내가 아포칼립스 생존자 구호소를 운영할 일은 없을 테니까. 일인 분을 처리할 수 있는 능력이면 충분해.”
완자를 성장시키는 작업도 마쳤겠다···
이제 좀 한숨 돌릴 수 있을까 생각하고 있는데···
여지없이 베리타스의 음성이 들려온다.
〔다음 스테이지는 정확히 15시간 뒤에 열 테니 푹 쉬도록 해. 난 관대하니까. 각성까지 했는데 쉬다가 좀비한테 당해버리는 똥멍청이는 없겠지 설마? 오우, 노웨이.〕
〔참, 너희 전자기기, 인터넷 전부 내가 없앴어. 나 몰래 니들끼리 작당하거나 문명의 이기로 꼼수 피우는 꼴은 도저히 못 봐주니까. 근데··· 튜토리얼 단계부터 전설급 업적을 찍는 놈이 나와버리니까 내가 기분이 좀··· 좋네? 필 쏘 갓 뎀 구우우웃! 그래서 추가 보상으로 파격적인 선물을 하나 줄까 한다.〕
하늘에 거대한 홀로그램 창이 생성된다.
상태창이나 메시지 창과 동일한 디자인이지만···
아무 내용이 없는 텅 빈 창이었다.
‘저거··· 설마···’
〔앞으로 미션을 완료할 때마다 이렇게 채팅창을 열어 줄게. 이용할 수 있는 시간은 15분. 채널도 지역에 한정되니까 쓸데없이 높은 기대는 하지 말고. 오우, 갓··· 이 정도면 난 거의 에인졀? 롸잇?〕
채팅창 상단에 남은 시간 15분이 표시된다.
이내 거침없이 올라오기 시작하는 글들.
‘이것도 생각만으로 채팅을 할 수 있는 건가?’
상태창과 상점을 경험한 사람들···
채팅창을 이용하는 방법도 별 어려움 없이 깨우친 모양이었다.
다급하게 메모지와 볼펜을 챙긴다.
- 생존자들의 닉네임을 기억하려고 하십니까? 제가 저장하겠습니다.
아차! 내겐 최첨단 AI가 있었지 참···
“지금 저 채팅창에 뜨는 모든 닉네임을 전부 저장해둬.”
- 명령을 수행하겠습니다.
정보야말로 강력한 힘이자 자산이다.
왕십리 생존자들의 닉네임은 꽤나 중요한 정보였다.
일단 수집하고 본다.
【채널: 왕십리】
새천년은언년이야> 이거 진짜 되나?
트롤리> 대박.
송재승> 엄마··· 엄마 살아있어? 엄마···
Zaha81> 지선아 조금만 기다려! 내가 구하러 갈게!
트롤리> 스펙터 누구임? 완전 대박이네!
모르는개산책> 그러게. 스펙터 덕분에 전 세계 채팅창 열림.
Iscream> 걍 각성 뽑기 운빨 터진 천룡인이지 뭐...
새천년은언년이야> 스펙터 사랑해♥
벌써부터 내 닉네임이 거론되기 시작한다.
아마 다른 지역의 채널도 상황은 비슷하겠지···
예전의 평화로운 세상이었다면 모를까···
아포칼립스 세상에서 유명 인사가 된다는 건 그리 달가운 일이 아니다.
‘어휴··· 난··· 눈팅이나 해야겠다.’
집에서 컴퓨터를 하듯 편하게 자세를 고쳐 앉으며···
창밖 하늘의 채팅창을 주시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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