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보라의 빅풋
오르막길을 넘어서니, 언덕 아래 시뻘건 색으로 물든 눈밭이 드러났다. 박살난 운송마차 주변으로 망가진 농축산물과 쓰러진 사람이 수두룩했다. 그리고 그 사이사이로 큰 발자국이 위협적으로 나 있었다.
나와 바르사는 지체없이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내려갔다. 내려갈 수록 피비린내가 강하게 몰려왔다.
“생존자를 확인해!”
나의 명령에 바르사는 바로 마차의 왼쪽으로 향했고, 나는 반대쪽인 오른쪽에서부터 살아있는 사람이 있는지 살펴보았다.
“으으······.”
“정신이 드십니까?!”
내가 한 남자에게 다가가 그의 상체를 일으키자, 남자가 인상을 썼다.
“빅풋은 어디 있습니까?”
내가 묻자, 남자가 반대쪽 산등성이를 가리켰다. 벌써 도망간 모양이었다. 힘겹게 손가락을 올렸던 남자가 축 쳐졌다.
“이런.”
남자의 체온이 급격하게 떨어지고 있었다. 이대로 가다간 동사할 것이다. 나는 일단 생존자가 더 있는지 확인한 뒤에 그들을 마차 뒤로 옮겼다.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바람을 막아주고는 있지만, 워낙 기온이 낮았다. 불을 피워야겠따는 결심으로 자리에서 일어서는데, 갑자기 불쑥 장작으로 써도 손색없는 나무가지들이 튀어나왔다.
“도련님, 여기있어요.”
레이첼이었다.
“내가 안전한 곳에서 대기하라고 했을 텐데?”
“지금 그게 중요합니까? 사람을 구하는 게 먼저죠.”
레이첼이 다급하게 나뭇가지를 얽기섥기 세워 모닥불을 지필 수 있는 공간을 만들었다. 그리고는 나를 바라보았다. 어서 불을 피우지 않고 뭐하냐는 듯한 표정에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레이첼.”
내가 굳은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부르자, 소녀가 움찔거렸다.
“내 명을 거스르는 자를 이 여행에 참여시킬 생각은 없다.”
위급한 순간이 오면 리더의 명을 우선으로 따라야했다. 그렇지 않은 팀은 파탄나기 마련. 일부러라도 그 선을 알려줘야했다.
“앞으로는 명심하도록.”
“······네.”
풀이 죽은 레이첼이 벌 받는 아이처럼 가만히 서 있는 걸 보니 마음이 좋지 못했다.
“가서 바르사를 도와줘.”
“아, 네!”
그제야 얼굴이 조금 핀 레이첼이 나가고, 나는 바로 불을 지핀 뒤, 아까 만났던 중년 남성을 포함한 생존자들을 모닥불 주변으로 모아놓았다.
“공자님, 생존자들은 이게 다입니다.”
바르사와 레이첼이 데려온 사람까지 합하니, 생존자는 총 다섯 명이었다. 개중에는 상처가 심각한 사람들도 있었다.
나는 그들이 온기를 되찾길 기다리면서 나는 급한대로 여분의 옷을 찢어 붕대를 만든 뒤, 상처가 난 사람들을 지혈하기 시작했다. 또한 나를 따라 사람들에게 붕대를 감아주는 바르사를 보며 나는 생각에 잠겼다.
‘큰일이다.’
이들을 살리려면 마을로 돌아가야했다. 거동할 수 있는 우리 일행과 중년 남성이 각각 한명의 부상자를 데리고 내려간다면 가능하긴 했다.
“바르사, 레이첼. 각자 한명씩 부상자를 맡아라. 다같이 산을 내려갈 것이다. 그리고 당신도 좀 도와줘야겠어.”
내가 중년 남성에게 부탁하자, 그는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그럼요. 제 식구를 구할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 할겁니다.”
“좋았어. 그럼, 가자고.”
내 말에 이들의 표정이 비장해졌다.
***
다행히 부상자들을 데리고 산을 별 탈없이 내려왔다.
“아이고, 이게 무슨 일이야.”
겨우 그들을 데리고 마을로 돌아오니, 그 뒤부터는 마을 사람들이 이들을 챙겨 의원으로 데려갔다.
“고맙소.”
우릴 도와 부상자들을 옮겼던 중년 남성이 고개를 숙였다.
“귀한 집 자제 같은데, 정말 큰 은혜를 입었소이다.”
“별 말씀을.”
내가 땀으로 범벅된 이마를 쓸어내리며 대답하자, 남자가 덥썩 내 손을 잡았다.
“내가 받은 은혜에 비하면 턱없이 모자르지만, 여러분이 이 마을에 있는 동안 숙박은 내게 맡기시오.”
그러더니 남성이 우릴 이끌고 마을에서 제일 큰 여관으로 향하더니, 가장 좋은 방을 하나씩 잡아주었다. 그러더니 남성은 우리를 여관에 딸린 음식점으로 데리고 갔다.
“이곳은 멧돼지 요리가 일품이라네.”
멋대로 멧돼지 요리를 추천한 남자를 향해 나는 물었다.
“당신을 포함한 생존자들에게 물어보고 싶은 게 있다.”
그러자 남성은 먼저 온 맥주를 들이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무엇이 궁금한가?”
“빅풋과 대치한 이야기를 듣고 싶은데.”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남성은 잔을 내려놓고 심각한 얼굴로 과거를 회상했다.
“우선 나는 멘델 상단의 상단주일세. 보다시피 우린 나폴 산맥을 넘다가 변을 당했고······.”
“준비는 하지 않고 간 것인가?”
내가 묻자 남자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오히려 만반의 준비를 했지. 아이템도 사놓고, 용병도 고용하고, 마법사도 고용하고.”
하지만 소용이 없었다고 한다.
“마법은 애초에 먹히질 않았고, 용병들은······. 눈바람엔 소용이 없었네.”
빅풋이 오면서 눈바람도 같이 왔다고 한다. 백색현상이 자연스럽게 드리웠고 방향을 잃은 용병들은 하나 둘 빅풋에 의해 스러졌다고 멘델은 증언했다.
“그래도 자네들 덕분에 몇몇 목숨은 구했으니, 다행인 셈이지.”
씁쓸하게 미소를 지은 멘델은 다시는 생각하기 싫은 듯 진저리를 치더니 다시 맥주를 들이켰다.
‘마법도 통하지 않는 생명체라······.’
그렇다면 물리밖에 먹히질 않는다.
“다른 사람들 말이 맞았네.”
그때 멘델이 입을 열었다.
“그 마수가 눈을 부린다는 말을 믿었어야했는데······.”
다른 증인들도 빅풋이 눈보라와 함께 등장했다고 진술했나보다.
‘그렇다면 열감지 고글을 사용하면 될텐데.’
다만, 그런 고글이 이 세계에도 있을지는 의문이었다. 내가 고심에 빠진 사이 멧돼지 요리가 나왔다.
“드시게.”
멘델의 권유로 우리는 저녁식사를 하게 되었다. 멧돼지고기는 생각보다 맛있었다. 괜히 멘델이 권유한 게 아니었다. 그렇게 식사를 마친 후 멘델은 자신의 직원들을 살펴보러 가겠다며 자리를 떴다.
“우리도 그만 가자.”
내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자, 바르사와 레이첼도 따라 나섰다. 그리고 2층으로 올라가 각자의 방으로 들어가려는데, 레이첼이 나를 불렀다.
“도련님. 뭔가 필요한 게 있으신거죠?”
항상 생각하는 거지만, 신기했다. 어떻게 내 마음을 그리도 잘 읽는 것인지······.
“뭔데요? 말씀만 하세요. 만들어드릴테니까.”
그 말이 왠지 믿음직 스러웠다. 나는 천천히 그녀에게 열감지고글에 대해 설명했다.
“그러니까 열에 따라 색이 다르게 보인다는 거죠? 그걸로 생명체의 위치를 식별할 수 있고?”
“그렇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이번엔 레이첼이 생각에 잠겼다. 벌써 어떻게 구현해야할지 머리를 굴리는 걸 보니, 데려오길 잘 했다는 생각이 조금은 들었다.
***
다음 날이 밝았다.
나와 바르사는 의원을 찾아가보기로 했다. 레이첼은 늦게 잠이 든 모양인지, 방에서 나오지 않아서 그냥 우리끼리 가기로 했다.
다행히 심각한 부상이 아닌 세 명의 생존자가 의식을 차렸고, 우리는 그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멘델 씨가 했던 말과 같았네요.”
생존자들을 보고 여관의 식당에 자리를 잡은 바르사가 중얼거렸다. 그의 말대로, 생존자들은 눈보라 때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고 증언했다. 그래서 용병들이 서로를 베기도 했단다.
저 빅풋을 어떻게 잡아야할지 각자의 고민에 빠져있는데, 저 멀리서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련님! 제가 만들었어요!”
우다다다 달려온 레이첼이 탁하고 두꺼운 안경같은 걸 탁자에 내려놓았다.
“도련님의 말씀처럼 열을 감지하는 방법은 찾지 못했어요. 하지만!”
레이첼이 턱끝까지 차오른 숨을 고르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대신 마나를 감지하는 기술을 적용해서 안경을 만들어봤어요.”
하긴. 이 세계는 마나가 존재하는 세상이었다. 그게 더 쉬웠을 거란 생각은 왜 하지 않은 것인지. 나는 망설임 없이 안경을 썼다.
“어때요?”
레이첼이 묻자, 그녀 안에서 내어나오는 보라색 빛알갱이들이 번쩍 빛을 내며 물결쳤다.
“잠시만.”
시야가 차단된 곳에서도 보이는지 확인을 해야했기에, 나는 안경을 쓴 채, 방으로 올라갔다.
‘제일 어두운 곳이······.’
주변을 둘러보던 나는 곧장 옷장으로 향했다. 한 줌 빛도 들어오지 않는 좁은 공간에서 보라색 빛이 넘실거렸다.
‘보인다.’
내 손이며 발의 위치가 보였다. 다만 아까와 다른 점이라면, 내 마나는 색이 두가지라는 점이었다. 장비를 찬 쪽만 갈색빛을 내는 것을 보니, 이건 마고일과 스톤골렘의 핵에서 나오는 마나인가보다.
“좋았어.”
확인을 마친 내가 다시 식당으로 돌아오자, 레이첼이 물었다.
“어때요? 괜찮아요? 아직 프로토타입이긴 한데······.”
“이정도면 충분해. 이걸로 총 3개를 만들어줘.”
내가 말하자, 레이첼이 씨익 입꼬리를 늘렸다.
“당연하죠. 바로 만들어 드릴게요.”
그러더니 레이첼은 도로 건네준 안경을 가지고 윗층으로 올라갔다. 그후 하루동안 레이첼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 그녀가 다시 나타난 것은 다음날 아침이었다.
“괜찮은······건가?”
눈동자가 퀭한 것이 잠을 한 숨도 못잔 얼굴이었다.
“맞습니다, 레이첼. 얼굴이 말이 아닙니다.”
바르사까지 걱정하는 걸 본 레이첼이 제 얼굴을 쓰다듬었다.
“저 그렇게 몰골이 말이 아니에요?”
차마 아니라고 거짓말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묵언을 택하자, 레이첼이 한 숨을 내쉬고는 고글을 건네줬다.
“도련님이 말한 모양이 등산에는 더 적합할 거 같아서 그렇게 만들었어요.”
오, 확실히 더 쓰기 편해졌다.
“고맙군.”
내가 흡족해하며 말하자, 레이첼이 손으로 하품을 가리며 물었다.
“지금 출발할거죠?”
원래라면 그럴려고 했다. 하지만, 레이첼이 밤을 샜다는 사실을 알고나서 무리해서 산을 오르기가 미안했다.
“저 때문에 망설이시는 거면, 괜찮아요. 원래 기술자들은 죽어서 잠을 자는 거거든요.”
“그래도—.”
“무리 아니에요. 아, 그런데 물론 명령이시라면······.”
긴장한 레이첼이 내 눈치를 보며 말을 이었다.
“명령이면 그대로 따르겠습니다.”
어제 어지간히 놀란 모양이었다. 나는 아공간 주머니에서 포션 하나를 꺼내 레이첼에게 던져줬다.
“그거라도 마셔 둬. 한시간 뒤에 떠날 것이다.”
그러자, 그녀의 표정이 밝게 변했다. 그렇게 우리는 다시 설산을 오르게 되었다.
***
“으으, 역시 추워.”
레이첼의 투정을 들으며 산 중턱에 다다랐을 즈음이었다. 갑자기 세찬 바람이 일더니 눈폭풍이 불기 시작했다. 감이 좋지 못했던 나는 바르사와 레이첼에게 외쳤다.
“다들 고글을 써!”
세상이 하얗게 변해버림 동시에 우렁찬 고함이 희미하게 들려왔다. 멘델 일행을 만나기 전에 들었던 것과 똑같은 소리였다.
“준비해.”
나의 명령에 레이첼은 멀찍이 달아났고, 바르사는 내 옆에서 검을 들었다. 그리고 얼마지 않아 파란 빛덩이가 굉음과 함께 나타났다. 그리고 그 빛의 크기에 나는 입을 떡 벌릴 수 밖에 없었다.
이건 마고일보다 크기가 더 크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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