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활쏘기 연습을 하다가 잘못 쏜 것이다.”
엘프의 설명을 들은 이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연습은 정말 중요한 것이니까. 뭐든 처음부터 잘할 수는 없는 법이다. 연습을 통해 점차 성장해야 한다. 연습을 하는 동안에는 언제든 실패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을 부끄러워해서는 안 된다. 실패는 곧 성공의 어머니이기 때문에.
“그렇군.”
“실수로 쏜 화살에 누가 맞은듯하여 확인하러 온 것이다.”
“책임감 있는 자로다.”
이라는 엘프에게 호감을 느꼈다. 책임감 없는 사람이 차고 넘치는 요즘 시대. 이렇게 자신이 저지른 실수를 직접 확인까지 하는 자는 드무니까.
“내 이름은 이라. 운명의 아이다.”
“내 이름은 아이다. 엘프족 궁수지망생이지.”
이라와 엘프는 뜨거운 악수를 나누었다.
“한 가지 확실히 하고 넘어가지.”
“무엇을 확실히 하고 싶은 거지?”
“네 이름은 ‘아이’인 것이냐 ‘아이다’인 것이냐.”
“내 이름은 아이다. 두 번 말할 필요가 있는가?”
긴가민가했다. 억양만으로는 아이인지 아이다인지 확신할 수가 없었다.
‘어딜 가나 이름이 속을 썩이는군.’
가가가가가 놈들도 그렇고. 아이인지 아이다인지 하는 이 녀석도 그렇다. 하지만 이름이 뭐가 중요하겠는가. 인어놈들은 인어의 예절 타령을 하며 계속 인사를 시켰기 때문에 문제가 됐을 뿐. 그런 게 없다면 이름 정도야 대충 두루뭉술하게 말해도 상관없으리라.
“질문하고 싶은 것이 있다.”
“그런가. 마음껏 해보아라.”
“신목이 있는 곳을 아는가?”
신목. 그것은 대지의 여신 테라가 엘프들에게 남긴 유물. 앞으로 닥칠 위험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신들이 남긴 유물들을 모아야 했다. 그래서 가가각가가에게 양해를 구하고 심해의 물방울이 담긴 삼지창을 빌려온 것이다. 이번엔 신목을 빌려갈 차례다.
“신목이 어디 있는지 모르는 엘프는 없다.”
“다행이군. 신목의 위치를 알려다오.”
“하지만 신목이 어디 있는지 알고 있는 인간도 없지. 인간은 신목의 위치를 알아서는 안 된다. 그것은 엘프족의 규율이다.”
“누가 만든 규율이지?”
“과거 엘프족을 이끌었던 엘프족장, 엘라릴라 님께서 만든 규율이다.”
“과거에 이끌었단 말이지. 그럼 지금 와서 그 엘프족장이 만든 규율은 왜 따르는 것인가?”
“그거야, 규율이니까.”
“너는 인어 대통령이 만든 규율도 따르는가?”
“그렇지 않지. 인어 대통령은 우리를 이끄는 지도자가 아니지 않은가.”
“엘라릴라 또한 너희를 이끌고 있지 않다. 왜냐면 과거에 이끌었으니까. 현재에는 이끌고 있지 않지?”
“어라? 확실히 그렇다.”
“인어 대통령과 엘라릴라는 그게 그거 아닌가? 둘 다 현재 너희의 지도자가 아니지 않은가.”
“확실히 그렇다. 이럴수가. 어째서 지금껏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한 것이지?”
아이다(혹은 아이)는 충격에 휩싸였다. 아이(혹은 아이다)는 지금까지 자신의 지도자도 아닌 자가 만든 규율을 따르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분통을 터뜨렸다.
“한평생 엘라릴라가 만든 규율을 따라왔는데! 나는 지금 분노를 참을 수가 없다!”
“진정해라. 분노를 한번 참아 봐라.”
“음. 참으니까 또 참아지는군.”
아이다(혹은 아이)는 금세 진정했다. 생각해 보니 그렇게 화날만한 일은 아니었던 것이다.
“이제 엘라릴라가 만든 규율은 따르지 않을 것이지? 왜냐하면 엘라릴라가 만든 규율을 따른다는 것은 곧 인어 대통령이 만든 규율을 따르는 것과 다름이 없고. 인어 대통령이 만든 규율을 따른다는 것은 곧 네가 엘프족을 배반한 년이 된다는 뜻이니까.”
“확실히 그렇다. 제길. 자칫했으면 엘프족을 배반한 년이 될뻔했군.”
이라의 논리정연한 일침에 아이(혹은 아이다)는 정신을 차린듯했다. 종족을 배반하는 것은 해선 안 될 짓이다! 이라는 아이다(혹은 아이)가 정신을 차려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종족을 배반하는 것은 어느 종족이든 종족을 막론하고 중죄일 테니까. 자신의 실수를 맞이할 줄 아는 책임감 있는 녀석이 종족배반죄로 처형당한다면 이라는 슬플 것이 분명했다.
“아무튼 신목. 신목이 어디 있는지 이제 알려줄 수 있겠지?”
“물론이지. 왜냐하면 엘라릴라가 만든 규율은 이제 더는 지키지 않을 것이니까. 나는 엘라릴라가 만든 그 모든 규율을 지키지 않을 예정이다.”
“무척 바람직하다. 그럼 신목의 위치를 말해다오.”
“신목은 현재 엘프족의 족장이신 엘푸라리 님께서 가지고 계신다.”
“그렇다면 날 엘푸라리 님께 안내해 줄 수 있겠는가? 나는 운명의 아이. 세상을 구하기 위해서는 신목의 힘이 필요하다.”
“알겠다. 안내하지. 나를 따라와라.”
이라는 아이(혹은 아이다)의 안내를 받아 따라갔다. 아이다(혹은 아이)의 발걸음을 따라 나아가던 이라는 어느새 마을에 도착하였다. 하늘을 찌르는 높은 나무들 위에 집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들의 마을은 자연을 해치지 않고서 숲과 완벽하게 동화된 채였다. 나무와 나무를 잇는 밧줄과 다리들이 하늘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장관이었다.
“이곳이 엘프족의 마을이다. 족장님의 집은 가장 높은 나무에 지어져 있지.”
그때 이라와 아이(혹은 아이다)에게 한 늙은 엘프가 다가왔다. 그는 노기에 가득 찬 목소리로 아이다(혹은 아이)에게 소리쳤다.
“네 이년! 어찌 인간을 마을에 데리고 왔는가!”
“당신은 우리 옆집에 살고 있는 와완 할아범? 어찌 내게 소리를 지르는가?”
“네 이년! 게다가 존댓말도 하지 않고! 정신이 나간 것이 분명하구나!”
와완 할아범의 호통에도 아이(혹은 아이다)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히려 당당한 모습으로 와완 할아범에게 소리쳤다.
“너야말로 엘프족의 배반자가 틀림없구나!”
“무슨?!”
“인간을 마을에 데려오지 말라. 연장자에게는 존경을 표하라. 이 모든 규율이 엘라릴라가 만든 규율임을 모르는가!”
아이다(혹은 아이)의 일갈. 와완 할아범은 놀란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래! 그 규율은 엘라릴라 님께서 만드신 규율이다! 잘 알고 있는 녀석이 왜 그러느냐!”
“엘라릴라가 만든 규율을 따른다는 것은 곧 엘프족을 배반했다는 것! 네 녀석, 인어 대통령이 보낸 첩자가 분명하렷다!”
“대체 무슨 소리냐!”
“이 더러운 배반자. 내가 처단하겠다!”
아이(혹은 아이다)가 와완 할아범과 실랑이를 벌이는 사이, 이라는 족장의 집을 향해 기어올랐다. 높은 나무에 달린 사다리를 열심히 탔다.
“굉장히 높군. 올라가는 데에 1시간은 걸리겠어.”
3시간 뒤, 이라는 족장의 집이 위치한 나무의 정상까지 올라오는 데에 성공했다. 이라는 족장의 집 문 앞에 섰다.
[부재중]
족장의 집 문에는 부재중이라는 팻말이 걸려있었다.
“제기랄!”
이라는 다시 나무를 기어 내려갔다. 올라가는 것보다 내려가는 것이 더 힘들었다. 4시간이 걸려서 다시 지상에 도착했다.
“이게 무슨 일이지?”
아이다(혹은 아이)가 온몸이 멍투성이가 된 채 나무에 묶여있었다.
“이라. 나를 도와다오.”
“엘프. 어째서 그곳에 묶여있지?”
“엘프족 전원이 엘프족을 배반했다. 엘라릴라의 규율을 따르면 안 된다고 주장했더니 모두가 내게 손가락질하였다. 게다가 엘프족 모두가 엘라릴라의 규율에 따라 나를 무참히 폭행했다.”
충격적인 일이다. 엘프족 전원이 엘프족을 배반했다니! 이라는 이가 갈렸다.
‘아니지. 사실 내가 이를 갈 이유는 없지.’
엘프족 전원이 엘프족을 배반한 것이 이라에게 무슨 상관이겠는가. 이라는 인간인데! 이라는 이를 갈지 않기로 결심했다. 치아는 인간에게 있어 오복 중 하나라고 하지 않던가. 상관도 없는 일에 이를 갈다가 이가 상하기라도 한다면? 오복 중 하나를 날리는 것과 같다. 억울하지 않은가.
“안타깝게 됐군, 엘프. 나는 신목을 찾아야 해서 그만 가보겠다.”
“거기 서라, 이라. 나를 좀 풀어다오.”
“내가 풀어줄 이유는 없다.”
“그러지 말고 풀어다오. 부탁이다. 엘프족을 배반한 엘프족 전원을 갈가리 찢어 죽여야 한다. 그것이 엘프로서의 사명이다. 내가 사명을 지킬 수 있게 도와다오.”
아이(혹은 아이다)의 각오가 느껴지는 발언이었다. 엘프족을 배반한 엘프족 전원을 몰살하겠다니. 정말이지 충직한 엘프다.
“존댓말.”
“뭐라고?”
“존댓말로 부탁하면 풀어주겠다.”
“나는 이래봬도 200살이다. 너 같은 꼬마에게 존댓말을 할 이유는 없다.”
“연장자가 아닌 자에게는 존경을 표하지 않겠다는 건가?”
“···앗!”
“눈치챘는가? 연장자가 아닌 내게 존경을 표하지 않는다는 것은 곧, 연장자에게 존경을 표하라는 엘라릴라의 규율을 따르는 것. 너 또한 엘프족의 배반자가 되는 것이다.”
“큰일날뻔했군. 아니, 큰일날뻔했군요. 엘라릴라의 세뇌가 아직 가시지 않은 모양입니다. 죄송합니다, 이라 님. 부디 제 존경을 받아주십시오.”
아이(혹은 아이다)가 나무에 묶인 채로 고개를 숙였다. 이라는 아이다(혹은 아이)의 진심을 마음으로 느끼게 되었다. 이라는 아이(혹은 아이다)의 구속을 풀어주었다.
“감사합니다, 이라 님.”
“그래. 드디어 일이 옳게 돌아가는군. 그래서 네 이름이 뭐였지?”
“제 이름은 아이다입니다.”
아이다의 이름은 아이다였다. 드디어 진실을 알게 된 이라는 속이 다 시원했다.
“그래, 아이다. 이제 너는 어떻게 할 생각이지?”
“엘프족의 배반자들을 처단할 것입니다.”
“촌장도 처단할 것인가?”
“그렇습니다. 엘푸라리 촌장은 촌장의 자격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엘프의 배반자니까요. 엘푸라리를 제거하고 제가 엘프족의 촌장이 되겠습니다.”
“바람직하군. 나 또한 엘푸라리 촌장을 처단할 생각이다.”
“어째서입니까?”
“엘푸라리가 부재중이었다. 그래서 난 똥개훈련을 하고 말았지. 견디기 힘들 정도로 화가 난다. 아이다. 너 내 동료가 되어라. 나와 함께 엘프족의 배반자, 엘푸라리를 처단하자!”
“예!”
이라는 아이다와 동료가 되었다.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이었다. 아니, 다시 생각해 보니 그 정도는 아니었다.
‘백군천마 정도? 아니, 십군백마? 아니야. 일군십마 정도가 맞겠어. 아닌가? 이 녀석이 말 열 마리의 가치를 하나? 그냥 일군을 얻은 정도 아닌가? 그래. 딱 일군 정도 든든하군.’
일군을 얻은 기분이었다.
“엘푸라리는 지금쯤 어디에 있을까?”
“엘푸라리는 약 2시간 전 묶여있던 제게 침을 뱉고 다른 엘프들과 술을 마시러 갔습니다.”
“침이라. 더럽구나, 엘푸라리!”
다시 생각해 보니 더러운 것은 엘푸라리가 아니었다. 엄밀히 따지자면 침을 맞은 아이다가 더러운 상태였다.
“가까이 오지 말거라, 아이다.”
아이다와 거리를 둔 채, 이라는 엘푸라리가 갔다는 술집을 향해 갔다. 술집은 다행히도 낮은 나무 위에 있었다. 당연하다. 술집이 높은 곳에 있다면 취객들이 계속 줄도 없이 번지점프를 하지 않겠는가.
그때였다.
“으아악!”
술집에서 누군가 떨어졌다. 바닥에 떨어진 엘프는 처참한 몰골로 사망했다.
“엘푸라리! 이 녀석, 술집에서 떨어졌구나!”
“이 녀석이 엘푸라리인가?”
“그렇습니다. 이 시체가 엘푸라리입니다.”
귀찮게 나무를 기어 올라가지 않아도 돼서 다행이었다. 이라는 엘푸라리의 시체를 뒤졌다. 엘푸라리의 허리춤에 신비한 기운이 감도는 나뭇가지가 꽂혀 있었다.
“혹시 이것이?”
“네. 그렇습니다. 이것이 바로 신목입니다.”
“신목은 어떤 힘을 가지고 있지?”
“모든 식물을 다스릴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엘푸릴라의 규율에 따르면 오직 엘프족만이 이 신목을 손에 쥘 수 있다고 했습니다. 즉, 저는 이 신목을 만지면 안 된다는 뜻입니다.”
“그렇군. 그렇다면 이것은 내가 챙기도록 하지.”
이라는 신목을 챙겨 허리춤에 걸었다. 이제 비로소 이라는 총 두 개의 유물을 얻게 되었다. 심해의 물방울이 담긴 삼지창과 신목. 아버지에게 버림받은 지 10년 만에 쟁취한 것이었다.
“이제 남은 유물은 세 개. 황금빛 별의 조각과 드워프의 생명의 망치. 그리고 용족의 신성한 불꽃이 담긴 심장. 이것들을 반드시 내 손에 넣으리라.”
“어째서 유물을 모으고 계신 겁니까?”
“곧 칼리오스가 부활할 것이다. 그럼 이 세상은 어둠으로 가득 차게 되겠지. 나는 그것을 막을 생각이다.”
운명의 아이는 세상을 구해야 한다. 어둠에 고통받는 모든 자들을 구하는 것이 운명의 아이의 사명이다.
“그렇습니까. 솔직히 뭔진 모르겠는데 아무튼 대단하십니다, 이라 님. 그럼 제 소원을 하나만 들어주십시오.”
“말해보거라.”
“엘프족을 배반한 엘프족 전원을 처단해 주십시오!”
“그거야 어렵지 않지.”
이라는 허리춤에 꽂아뒀던 신목을 손에 쥐고 가볍게 휘둘렀다. 그러자 높게 솟아 있던 나무들이 빠른 속도로 시들어갔다. 나무들이 꺾이고 부서지며 나무 위에 살고 있던 엘프족의 배반자들이 땅으로 추락했다. 모든 엘프족이 사망하였다. 아이다를 제외하고 말이다.
“이제 되었다. 나는 신들의 피조물을 구하기 위해 끝없이 노력할 것이다.”
이라는 진정한 영웅이었다. 이라는 또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다음 목적지는 드워프들의 지하 왕국. 그곳에서 생명의 망치를 빌려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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