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글벙글 고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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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홍차임
작품등록일 :
2015.10.23 23:35
최근연재일 :
2016.04.02 21:40
연재수 :
38 회
조회수 :
69,052
추천수 :
969
글자수 :
181,952

작성
15.10.24 00:51
조회
5,3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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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글자
9쪽

1화. 7만원의 경건함.

DUMMY

‘아. 드디어 노래를 다시 시작하는구나.’


스마트폰 속의 약도를 보면서 분홍은 낯선 연습실을 찾아 걷고 있다. 약도를 보면 전철역에서 그리 먼 것 같지는 않았는데, 걷다보니, 거리가 꽤 되는 것이 학생들이 찾아오기가 쉽지는 않을 것 같다. 날씨가 더워서인지 분홍에게는 더 멀게 느껴진다.


‘이쪽으로 가면 있을 것 같은데, 캐시 뮤직, 캐시... 아! 저깄다!’


백 미터쯤 앞에 검은색 건물이 보인다. 사진 속에서 보았던 검은색 벽과 검은색 음악 연습실 입구, 잘 찾아왔다.


분홍은 검은색 입구를 지나 두리번거리며 지하로 내려간다. 약도를 보고 온 게 아니었으면 이 검은 건물과 검은 입구를 도저히 음악 연습실이라고 생각하지 못했을 거라고 분홍은 생각한다. 송의 말이 이 음악 연습실은 후불제로 돌아간다고 한다. 할머니가 전화를 받더라는 말이 다소 아리송하게 느껴진다. 음악 연습실은 보통 젊은 사람들이 운영하는 경우가 많은데, 문의 전화를 받은 사람은 할머니이고, 입구는 온통 검은색이고, 셀프 운영이라니, 뭔가 이상하다. 단, 셀프라면 지키는 사람이 없는 것일 테고, 그러면 좀 자유롭게 연습실을 쓸 수 있지 않을까, 분홍은 기분 좋은 짐작도 하고 있다.


분홍은 지하의 두 번째 출입문을 지나다가 흠칫 놀란다. 셀프 운영 음악 연습실이라고 해서 아무도 없을 줄 알았는데, 심한 아줌마 파마를 한 할머니가 분홍을 보고 부스스 일어난다.


“왜요? 쓰게?”

“아... 안녕하세요. 오늘은 좀 한번 볼게요. 다음부터 자주 쓸 것 같은데 미리 한번 보려고 왔어요.”


할머니는 이내 입맛을 다시면서 다시 눕는다.


“볼라면 봐야지. 거 봐요.”

“감사합니다.”


분홍은 할머니가 혹시라도 변덕을 부릴까 얼른 안쪽으로 도망치듯 들어간다. 방이 여러 개인 것 같은데, 분홍의 호기심은 모든 방을 다 들어가 보고 싶다. 하지만 입맛을 다셨던 할머니를 생각하니, 그랬다가는 잔소리를 퍼먹을 것 같아서, 두세 개의 방을 들어가 본다. 방 내부의 드럼과 전자 피아노, 다소 커다란 스피커, 심각하게 어지러운 분위기이다. 발을 딛기 힘들 정도로 바닥이 지저분하다. 분홍은 전자 피아노를 본 순간 흠칫 놀란다. 분홍은 전자 피아노 앞에 망연자실 서 있다.


“에휴. 차라리 그냥 피아노가 나은데...”


혼잣말을 내뱉은 분홍은 전자 피아노의 버튼들을 되는대로 이것저것 눌러본다. 그래도 피아노 건반에선 아무 소리가 나지 않는다. 입구 소파에 누워있던 할머니를 깨우기엔 반기지 않던 표정이 떠올라, 망설인다. 바닥에 어지러이 널려 있는 전선 줄들을 혼자 풀기엔 막막하다.


‘에이. 그래도 주인한테 물어보는 수밖에.’


분홍은 방 밖으로 나가 용기를 내어 할머니에게 다가간다.


“할머니, 피아노가 안 켜지는데요.”

“뭐? 아, 피아노야 피아노 치는 사람이 알지, 내가 어떻게 알어!”


분홍은 화들짝 놀라 상처를 받는다. 하지만 웃는다.


“아... 예... 그렇죠. 하하하. 그게요. 제가 그냥 피아노만 쳐봐서요, 전자 피아노는 잘 몰라서요. 하하하”


음악 연습실처럼 고무줄 장사가 있을까. 분홍은 몇 군데 연습실을 이용해 보았다. 연습실 주인의 성향에 따라서 문 앞에서 지키고 섰다가 시간 되면 쫓아내듯이 보내는 데가 있는 반면, 어떤 곳은 먼저 간다면서 알아서 잠그고 가라고 하는 데도 있다. 그런 곳은 시간도 좀 넉넉하게 쓸 수 있고, 무엇보다 마음이 편하다. 방음이 잘 안 되면, 주인장이 티비 보는 소리에 연습하는 데 주의가 흐트러져서 짜증이 나면서도, 굳이 자주 사용할 연습실이라면, 주인장의 신경을 거슬리게 할 필요 뭐 있나 해서 그냥 지나간 적도 많다. 결론은, 연습실 계속 쓰려면 주인장과 좋은 관계로 지내는 것이 중요하다. 좋은 관계가 정말 좋은 것인지는 다시 생각해 볼 일이지만.


할머니의 타박에 놀라 다시 연습실 안으로 들어온 분홍은 조금더 자세히 방 안을 둘러본다. 전신 거울이라고 하기엔 기장이 부족한, 사람의 무릎 정도부터 머리까지 비춰지는 거울이 있다. 거울 속의 자신의 모습을 보니, 미친년이 따로 없다. 그녀의 아버지가 응급실에 계시다는 전화를 어머니로부터 받은 날 이후로 거울을 본 적이 없는 것 같았다. 묶은 머리가 몇 가닥씩 밖으로 삐져 나와있다. 병원에서 오래 지내기 편한 스판이 잔뜩 들어간 바지와 면 티에 카디건...


‘애 셋 키우는 엄마가 시장을 갈 때도 이것보다는 예쁘겠다.’


분홍은 한숨을 쉰다. 몇 프로 부족한 전신 거울이지만, 그래도 연습실에 오랜만에 와서 전신 거울 앞에 서니, 분홍은 기분이 업되는 듯하다.


셀카를 찍는다. 거울에 대고. 찰칵.


“분홍아. 아빠 물좀 주라.”

“분홍아. 먹기 싫다. 이것좀 치워라.”

“분홍아! 어딨냐? 분홍아!”


분홍의 아버지를 간병하던 중국인 여자가 갑자기 그만두면서 분홍이 아버지를 간병하게 되었다. 분홍의 아버지는 집 근처 골목길을 걷다가 왕경자라는 이름의 할머니가 모는 승용차에 치이는 사고를 당했다. 왕경자와 보험회사, 간호사와 간병인, 합의와 소송, 변호사와 배상금, 이라는 새로운 이름과 용어들이 분홍을 괴롭혔다. 그러면서 너무나 많은 정보들을 알게 되었다. 아주 힘들게. 그중 하나, 간병인 일당이 7만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분홍이 아버지를 좀더 사랑했다면, 아버지가 분홍을 부르는 소리가 덜 거슬렸을까? 분홍은 아버지의 목소리를 싫어하는 것인지, 아니면, 아버지가 분홍을 부르는 것을 싫어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아버지의 소변 냄새를 맡게 된 것은 크나큰 충격이었다. 둘째 가라면 서러울 멋쟁이셨던 아버지가 어느날 구두가 불편하였는지 바바리 코트 아래 하얀색 운동화를 신은 것을 보고 받았던 충격보다 더 큰 충격이었다. 분홍의 아버지는 교통사고로 인해 허리와 무릎에 수술을 받았다. 허리를 움직이지 못하니, 화장실을 갈 수가 없게 되었고, 그래서 소변을 침상에서 보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점차 허리가 나아졌음에도 소변을 누운 자리, 앉은 자리에서 보기 시작했다. 간병인이 있을 때는 아버지의 기저귀를 그녀가 갈아주었다.


하지만 아버지가 병원을 옮기게 되자, 간병인이 다음 병원은 자기 집에서 너무 멀다면서 그만두고 말았다. 간병인은 집이 멀어서라고 했지만, 분홍과 분홍의 어머니는 아버지의 날카로운 성격을 맞추기 어려워서 그만둔 것이리라 짐작을 하고 있다. 간병인의 빈 자리를 다음 간병인을 구할 때까지 분홍이 맡기로 했다. 분홍의 어머니는 직장 때문에 아버지 간병을 할 수가 없는 상태이다. 일꺼리가 별로 없는 강사인 분홍은 언니 대신, 엄마 대신, 아버지를 당분간 간병하기로 했다. 직장을 다니는 사람도 시간이 없지만, 직장을 안 다니는 사람이 시간이 더 많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직장을 안 다니는 사람은 직장을 다니는 사람에게 시간이 많은 사람이어야 한다. 그것이 불만이지만, 간병비가 하루에 7만원이라니, 그 돈을 가족들이 부담하느니, 내 한 몸 바치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 7만원은 분홍이 인생을 좀더 경건하게 여기게 했다. 7만원이라니. 그 돈은 분홍이 수업 세 타임, 또는 개인 레슨 한 타임이면 벌 수 있는 돈이었다. 즉, 짧으면 한 시간, 길면 세 시간이면 버는 돈이다. 물론 쉬지 않고 말을 하거나, 쉬지 않고 노래를 하다보면, 목도 아프고, 땀도 나고, 학생들 때문에 상처 받고 화나는 일도 있다. 하지만, 길어야 세 시간이다. 그런데, 아버지 사고 이후로 지켜본 간병인의 삶은, 하루 종일의 노동이었고, 심지어 병상 옆에서 잠을 자야 했다. 그러니까 말 그대로 하루 24시간을 환자를 지키고 돌봐야 7만원이었다.


간병인의 하루를 보며 분홍은 알수 없는 감정을 느꼈다. 아버지의 간병이 끝나는대로 다시 수업을 해야 한다. 라고 결심했다.


전신 거울 앞의 분홍은 생각했다.


‘강사라는 직업은 복이다. 어쩌면 간병인의 삶을 목격한 게 내겐 축복일지도 몰라. 이제 다시 외모도 꾸미자. 노래를 하자. 수업을 하자. 내 레슨을 찾는 학생들이 꽤 많았지. 구체적이지 않은 목표와 계획은 우선 다 뒤로 미루자.’


분홍은 셀카질을 만끽하고 결연한 다짐을 한 뒤 연습실을 나섰다. 조금 전에 면박을 준 할머니에게 분홍은 “다시 올게요. 내부가 좋네요. 자주 올 것 같아요.”라며 다소 경쾌하게 말을 한 뒤 온통 검은색인 그 건물을 나섰다.


- 리얼리즘 코미디 소설 <싱글벙글 고시원> 다음 화로 이어집니다. 구독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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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30화. 추억이라는 놈. 16.02.24 876 16 13쪽
29 29화. 고시원 첫날밤 잘 보내. 16.02.23 1,098 20 6쪽
28 28화. 그녀의 대답은 노. 16.02.22 842 17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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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26화. 방 두 개. +2 16.02.21 860 19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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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10화. 깊어진 계약. 16.01.25 1,049 20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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