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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글벙글 고시원

웹소설 > 일반연재 > 로맨스, 드라마

완결

홍차임
작품등록일 :
2015.10.23 23:35
최근연재일 :
2017.12.09 21:41
연재수 :
88 회
조회수 :
63,220
추천수 :
789
글자수 :
393,947

작성
17.09.19 19:44
조회
209
추천
2
글자
8쪽

83화. 꼬물 냉장고와 고시원 창고.

DUMMY

분홍은 50개 들이 종이컵 두 줄과 두루말이 휴지 한 봉지를 사들고 낑낑거리며 검은색 건물로 돌아오고 있었다.


최소한의 품위를 위해서 아무리 힘들어도 분홍색 삼선 슬리퍼는 실내에서만 신겠다고 다짐하였던 그녀지만, 지리한 지하 음악 연습실 생활에 그런 규칙은 어느새 무너져 버렸다. 느슨한 스판 바지 아래 삼선 슬리퍼, 그리고 여름에도 늦여름에도 입을 수 있는 얇은 초록색 카디건이 그녀의 어깨를 감싸며 찰랑거리고 있었다.


“가게에 없네. 손님 올지도 모르는데 어딜 갔어 그래?”


전화를 받기 위해서 한 손에 든 두루말이 휴지 셋트를 바닥에 내려놓고 전화를 받자 연이 엄마의 목소리가 전화기에서 뻗쳐나온다. 내내 가게에 있었던 분홍을 두고 장사에 소홀하다는 듯이 비난하는 연이 엄마의 말에 짜증이 올라온다.


더군다나 상황은 달라졌다.


예전처럼 가게에 있고 없고에 대해서 분홍이 연이 엄마나 황윤희의 감시를 받아야 할 필요는 없어졌다.


분홍은 이제 ‘어엿한’ 음악스튜디오 사장인 것이다!


더군다나 하루종일 가게를 지키다가 잠시 휴지를 사려고 가게를 벗어난 지금, 그 짧은 틈에 지하 연습실을 찾아 대단한 약점이라도 잡은 것처럼 말하는 연이 엄마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나 싫든 좋든 분홍은 사업적인, 비즈니스적인 자세를 취해야겠다 생각한다.


'암. 그래야 진정한 어른이지.'


“뭐좀 살게 있어서요. 근데 무슨 일 있으세요?”

“아니, 뭐... 무슨 일은 아니고. 지비 그 냉장고 쓸 거야? 안 쓰지?”


매사 화난듯하고 급한듯한 연이 엄마의 목소리, 고음으로 올라가고 메마른 그 소리가 묻는다. 분홍이 기다리던 질문이었다. 냉장고에 관한 질문.


연이 엄마는 분홍이 검은색 건물로 들어오기로 하자, 분홍이 원룸에서 쓰던 냉장고를 탐했었다. 그녀 마음 속엔 분홍이의 냉장고가 앞으로 쓰일 용도까지도 특정되어 있었다.


‘여름에 수박 넣어놓고 먹으면 딱’이라 했다.


고시원에 들어오기 위해 살림을 많이 버려야만 했던 분홍은 연이 엄마가 냉장고를 쓰겠다고 하자, 경제적인 이득은 없어도 마음만은 기뻤다. 단, 새 냉장고가 아니고 몇 년 쓰던 거라 잘 닦아서 줘야 한다며 혼신의 힘을 다해 행주질과 걸레질을 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다음과 같았다.


분홍이 검은색 건물로 이사 오던 날, 연이 엄마는 분홍의 냉장고가 자신의 생각보다 구형인 것에 대해서 화가 많이 난 모양이었다. 분홍이 큰 잘못이라도 저지른 것처럼 험악한 얼굴로 이삿짐을 나르고 있는 분홍에게 “완전 꼬물이네. 꼬물을 모조리 끌고 들어왔네.”라고 말했다.


그 ‘꼬물 발언’으로 분홍은 연이 엄마를 미워하게 되었다, 이사 첫날이었는데 말이다.


그리고 머지 않아 그 미움은 짙어졌다.


캐시 뮤직의 입구쪽 창고에는 장롱 몇 짝과 커다란 여행용 트렁크들이 즐비해 있었다. 분홍은 고시원에 들어올 때 모든 짐을 다 버려야 하는 줄로만 알고 아까워하며, 한 편으로는 개운해하며 짐 정리를 했었다.


분홍이 애써 장만한 물건들을 아까워하고 갈등할 때에는 연이 엄마와 송이 손을 잡고 응원을 해줘서 냉장고와 책장 한 개는 버리지 않고 들고왔다. 그러나 막상 여러 짝이나 되는 장롱까지 보관되어 있는 창고를 보니, 분홍은 배신감을 느꼈다. 하지만 배시감은 잠시였다.


'성냥갑 만한 고시원 방으로 몸을 맞춰 들어오는 사람들도 자신의 짐을 다 버리는 건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이곳도 사람이 사는 곳이구나, 하는 안도감이 더 컸다.


그러나 건물주 황윤희는 분홍에게 “그 냉장고 뭐야? 그거 쓰는 거야?”라고 불쑥 물었다. 불쑥 물어보고나서 일이 주 뒤에도 “냉장고 뭐야, 쓰는 거야?”라고 다시 물었다. 분홍은 냉장고 질문을 그렇게 두 번 받았을 때까지는 그 질문의 진짜 이유를 다 이해하지 못했었다.


그러나 검은색 건물에서의 일들을 겪어내며 분홍의 내공이 깊어질수록 그 질문에는 많은 사정들이 얽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지하 창고에는 장롱들 사이로 들여다 보면 밖으로 나가는 사다리가 하나 달려 있었다. 너무나 정직하게 바닥과 수직을 이루며 벽에 붙어있는 사다리였다. 분홍은 그 사다리를 보며 ‘일자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는 건 완전히 체력훈련 수준이겠구나.’라고 생각하곤 했다.


그리고 나중에 알게 된 바에 의하면 그 정직한 수직 철제 사다리는 화재 대피로 겸 비상구였다. 그때는 ‘흠, 그럴 수도 있겠군.’이라고 생각했다. 그 사다리를 타고 싶지도 않고 탈 일도 없어야 했지만, 탈출구가 있다는 것은 꽤나 근사한 일로 여겨졌다. 6층이나 되는 건물에 그런 사다리라도 하나 있어 비상구 시늉이라도 내고 있으니 이 사회를 건전하게 빛내주는 괜찮은 일 같았다.


문제는 냉장고에 얽힌 황윤희와 연이엄마, 그리고 분홍의 감정이었다.


분홍은 냉장고를 버리고 싶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모른체하고 싶기도 했다. 연이 엄마가 가져오라고 해서 가져온 것이니 치워도 연이 엄마가 치우길 바랬다.


연이 엄마는 ‘꼬물 냉장고’ 때문에 머리가 아팠다. 황윤희는 그렇지 않아도 소방시설과 대피시설이 미흡한 지하 연습실 때문에 자꾸 구청으로부터 지적을 받는 탓에 머리가 아팠는데, 지하 창고에 추가된 냉장고가 꼴불견이었다.


‘냉장고를 버리는 데 돈이 그렇게 많이 들지는 않을 거야. 그래도 연이 엄마가 책임져야 돼.’


연이 엄마의 ‘네 냉장고 고물’발언에 대해서 앙심을 품은 분홍은 냉장고를 계속 방치하기로 결심했다.


그렇게 방치된 냉장고 위에 먼지가 쌓여가던 어느 날이었다.


분홍이 송의 방으로 화장실 투어를 다녀왔는데, 그 짧은 사이에 누가 다녀갔는지 경고장처럼 생긴 종이가 캐시뮤직 테이블 위에 놓여 있었다.


글자란, 문서란 묘한 것이다. 무슨 말이 쓰여 있는지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아도 읽어보지 않아도, 불길한 문서는 이미 그 불길함이 허공으로 뿜어져 나온다. 분홍은 그 불길함의 미스트를 온 몸으로 맞았다.


[ 비상구에 적치한 물건을 즉시 치우길 바랍니다. O월 O일까지 치우지 않을 시, OO 이하의 벌금이 부과되며 사업장은 폐쇄될 수도 있습니다. ]


분홍은 그 무시무시한 말에 가슴이 죄여왔다. 가슴이 철렁하여 숨을 쉬기가 어려웠다.


‘사업장 폐쇄? 왜 나한테...? 냉장고 하나 때문에?’


처음엔 억울했다.


‘그 많은 장롱과 트렁크들은 어쩌고 나한테 이런 문서를....?’


그 다음엔 빠져나갈 길을 찾았다.


‘구청 사람들도 조사를 해보면 내 짐은 냉장고와 책장 뿐임을 알게 될 텐데, 나한테 모든 죄를 묻진 않겠지?’


그리고는 의심이 들었다.


‘대체 어떤 연유로 나한테, 이 문서가 왔을까? 나는 지하를 사용하고 있을뿐이지, 지하 대피소를 책임져야 할 이유가 없는데.’


분홍은 이제까지와는 다른 방향에서, 다른 종류의 거친 물결이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 리얼리즘 코미디 <싱글벙글 고시원> 다음 화로 이어집니다. 구독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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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 84화. 행복한 캐시 뮤직. 17.10.22 205 3 10쪽
» 83화. 꼬물 냉장고와 고시원 창고. 17.09.19 210 2 8쪽
82 82화. 삶이 되어 버리다. 17.09.14 211 3 9쪽
81 81화. 버튼을 눌러라. 17.09.05 258 3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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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 78화. 연두식, 그가 강했을 때. 17.08.31 298 3 9쪽
77 77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노래를 불러요. 17.08.28 254 2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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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 74화. 변기로 합시다. 17.08.16 239 2 11쪽
73 73화. 다시, 싹트는 동지애. 17.08.15 472 4 13쪽
72 72화. 허리케인이 그녀에게 남긴 것. 17.08.14 268 4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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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 70화. 너의 입맞춤은 황홀하였네. 17.08.12 284 2 11쪽
69 69화. 완벽한 아이템. 17.08.11 238 4 14쪽
68 68화. 뉴 페이스가 온다. 17.08.08 265 3 9쪽
67 67화. 너의 등에 그려진 하트. 17.08.05 257 3 8쪽
66 66화. 아흐메드와 친구들. 17.07.31 244 2 9쪽
65 65화. 두 장의 계약서. 17.07.25 251 2 8쪽
64 64화. 왕경자를 만나던 날. 17.07.02 298 3 10쪽
63 63화. 형제끼리는 통한다. +2 17.06.10 698 3 9쪽
62 62화. 수사관 연분홍. 17.06.07 315 3 9쪽
61 61화. 오, 양 사장! 17.03.06 425 3 7쪽
60 60화. 현금만 가능합니다. 17.02.03 523 3 15쪽
59 59화. 키큰 유덕화. 17.01.25 570 3 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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