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방학의 어느 날(3)
너에게, 더
나와 그가 내려오자 그는 나에게서 조금 멀리 떨어졌다. 역시 너무나 가까이서 사람을 보는 것은 그도 무리인 듯했다. 보이더가 그를 보고는 눈이 동그래졌다.
“.... 넌 누구니? 너도 혹시 디스트럭션 쿰바가 일어나서 도망쳐 나온 거야?”
“아니야. 난 그 전쟁에 아무런 상관이 없어. 난 일 년 전에 별이 폭발해버리는 바람에 여기 온 거야.”
“아.. 그래?”
보이더와 그가 대화를 하고 있는 중에 난 그의 모습만을 보고 있었다. 새까만 머리에 붉은 헤드폰, 자주색 눈. 걸쳐 입은 옷은 그런 그의 이목구비와 잘 어울렸다. 언젠가 슬비가 말했던 것처럼 자기와 어울리는 옷을 입는 사람이 제일 멋있는 것 같다.
“아, 자기소개를 안 했네. 나는 헤일로 벨사다 킷 니쿱힐이라고 해. 좀 이상한 이름이지?”
뭐, 보이더도 그런 식의 이름이니까 꽤 익숙하긴 하다만.
“그리고 지구에서 1광년 떨어진 미그레시 성에서 왔어... 1년 전에 멸망해버렸지만.”
“..... 그렇구나.”
왠지 이 아이들하고 있으면 이 지구에 있는 것에 감사하게 된다. 나는 씁쓸한 기분을 감추지 못했다. 왜 별들은 사라지는 걸까? 그게 어쩔 수 없는 신의 판결이라고 해도, 그게 운명이라고 해도, 왜 이런 어린 사람들이 슬프고도 무거운 운명을 짊어지는 건데.
헤일로는 조금 슬픈 듯이 울상을 짓다가 다시 표정을 바꿔서 나에게 웃어보였다. 나는 그 웃음을 보자 얼굴이 또 빨개져서 헤일로를 잘 보지 못했다. 그저 아까처럼 고개를 숙이고 그의 말을 들었다.
“있잖아, 부탁이 있는데.”
“.... 응.”
“나, 미그레시 성에서 살았던 음파 인간이야. 음파를 먹을 수 있다는 말이지. 그래서 이 헤드폰만 가지고 있으면 밥걱정은 없어.”
“응.”
“사실 나 여기 지구에서 살고 싶거든. 나 여기 시계에서 살게 해주면 안 되겠니? 워먼덱스도 있으니까 너에게 부담은 안 될 거야.”
너도 그 워먼덱스라는 거 있구나.
ㅡ 선우, 어떻게 할래? 어차피 헤일로는 달리 갈 곳도 없는 것 같은데. 그냥 그 시계에서 살게 해주면 안 돼?”
- 나도 그 생각에 동감이야, 보이더.
“알았어. 살게 해 줄게.”
“정말?”
헤일로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응. 너 같은 사람을 그냥 놔두면 안 될 것 같아서. 너 혼자 살기는 외롭잖아.”
헤일로는 금방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이 되어서는 그대로 나에게 안겼다. 와락, 헤일로의 감촉은 따뜻했다. 나는 얼굴의 불이 그대로 귀까지 번져가지고는 꼼짝 못했다.
“고마워! 정말 고마워! 나 정말 네가 안 받아주면 흑, 어떡하나 했는데, 다행이야! 흑.”
“...... 이거 풀어줘. 나 괴롭거든?”
“아, 미안! 갑자기 흥분해서 안아버렸네.”
“... 너 스킨십이 너무 과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니.....”
나는 헤일로가 포옹을 풀고 나서도 얼굴과 귀의 불이 꺼지지 않아서 계속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야, 정말! 맘대로 얼굴하고 귀에 붉은 색 크레용 칠하는 게 아냐!
“..... 야, 헤일로 벨사다 킷 니쿱힐.”
“왜?”
“손 대봐.”
“손?”
헤일로가 손을 내밀었다. 나는 그 작은 손 위에 내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그 사이에 검고 붉은 빛이 우리 둘을 감싸고 사라졌다. 이걸로 헤일로와의 계약은 완료됐겠지. 몇 개월만 기다리면 헤일로는 이 지구에 마음대로 다닐 수 있다.
헤일로는 나와 계약을 한 것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나를 바라보았다.
“벌써 계약을?”
“응.”
“나하고?”
“응.”
“내가 방법을 안 가르쳐줬는데?”
“나, 저기 있는 보이더하고 계약해본 적이 있으니까 말야.”
“아, 그래서 그렇게 빨리...”
헤일로는 나에게 감탄했다. 나는 여전히 헤일로의 얼굴은 보지 못하고 고개를 숙이고는 말했다. 보이더는.... 헤일로가 조금 부럽지 않을까? 나하고 만나자마자 계약한 헤일로가. 슬쩍 보이더의 얼굴을 눈치 보듯 살펴보았다. 보이더는 잘 되었다면서 박수를 치고 있었다. 휴.. 상관없어 보여서 다행이다.
“오오, 바로 계약했다. 나는 좀 늦게 계약해 주던데. 다행이네.”
헤일로는 보이더에게 웃어보였다.
“고마워. 나도 이렇게 빨리 계약할 줄 몰랐는데. 계약을 경험해본 사람 집에 와서 운 좋게 됐네.”
“그러네. 이제 괜찮으니까 푹 자둬. 방금 도착했으니까 잠 올 거 아냐?”
“응... 아, 미안. 너희들 이름 물어보는 거 깜빡했다. 이름 좀 물어봐도 돼?”
“난 보이더 디르 픽 메카트니라고 해. 간단하게 보이더라고 불러줘. 출신 성은 카르텔 성이야. 앞으로 잘 지내보자!”
“..... 박선우야. 잘 부탁해.”
보이더는 자신 있게 말하는데, 나는 헤일로의 눈도 마주치지 못한 채 말하고 있다. 부끄럽다.
“아, 저, 그... 있잖아. 선우.. 라고 불러주면 안 될까?”
“보이더랑 선우. 알았어! 나는 그냥 헤일로라고 불러주면 돼, 알겠지?”
“응!”
“어.. 어.”
“그러면 나 일단 시계에 들어가서 좀 잘게. 나 너무 잠 온다.”
“응.”
헤일로는 또 한 번 웃고는 엄마가 주신 시계에 들어가 버렸다. 검고 붉은 빛과 함께.
헤일로가 시계로 들어가고 보이더도 안경 속으로 돌아가고 난 후에, 난 침대에 누워서 헤일로를 생각했다. 그건 헤일로가 나에게 눈을 맞추고 나서 생긴 본성이었다. 그의 생각은 내가 온 힘을 다해 억눌러도, 금세 원래 모양으로 원상복귀가 되었다.
헤일로가 지니는 색들이 이루던 조화. 검은 머리, 붉은 헤드폰, 하얀 피부, 그 자줏빛 눈동자. 딱 한번 마주 쳤을 때에 보았던, 지금도 천장에 아른거리는 그 색깔들의 잔상. 하나도 밖으로 삐져나온 것이 없는 완벽한 하나의 남자가 그 곳에 있었다. 내 마음을 통째로 휘어잡은 남자. 헤일로. 나는 그의 이름을 한 글자씩 발음했다. 한 글자씩 발음할 때마다 내 안에 있는 무언가가 채워졌다.
ㅡ 후후후, 선우.
- 왜?
ㅡ 너 있잖아.
- 왜에....
ㅡ 헤일로 좋아하지?
헉! 정곡을 찔렸다. 하긴 나 엄청 티났겠지.
- 역시 들켰어? 헤헤, 어쩔 수 없네. 그래. 한 눈에 반해버렸어.
ㅡ 오오오? 이거, 이거. 박선우씨가 원래 이렇게 솔직했나요?
- 그렇지만 너에게는 감출 것도 없잖아? 그리고 이게 어쩔 수 없는 내 느낌이고.
ㅡ 그래?
- 응.
보이더는 뭔가 생각하는 듯하다가 나에게 말했다.
ㅡ 선우.
- 응?
ㅡ 너, 조금 바뀐 거 같다?
- 그럴 수도 있겠지.
지금은 내가 느낀 것을 그대로 표출할 뿐이야. 솔직하게.
ㅡ ....... 네가 부럽다.
“.. 엉?”
정말 놀랐다. 내가 보이더에게서 그런 말을 들을 줄 몰랐다. 하지만 그런 말을 하는 보이더의 목소리는 슬픔이 꽉꽉 채워져 있는 것 같아서 고마워, 라고 말할 수가 없었다.
- 왜 내가 부럽다고 생각한 거야?
ㅡ 그냥. 나도 느낀 걸 표현했을 뿐이야.
보이더는 작게 웃으면서 나에게 말했다. 그녀의 조금은 슬픈 듯한 목소리가 날 슬프게 했다.
보이더, 너를 아프게 하는 그 가시는 대체 뭐야? 왜 아직도 그것은 너를 찌르고 있는 거야? 아직도 너에게 더 아프게 할 것이 남은 거야? 할 수만 있다면 내가 그 가시를 뺄 수 있다면 좋겠는데. 그렇게 생각하면서 나는 안경을 쓰다듬었다.
이렇게 헤일로의 기숙동 604호 방문 사건으로 들떴던 시간들은 노을빛 석양을 향해서 조금씩, 조금씩 나아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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