뱀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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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어타다끼
작품등록일 :
2024.11.21 22:15
최근연재일 :
2024.12.05 21:00
연재수 :
21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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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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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205

작성
24.11.21 2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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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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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UMM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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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빛에서 시작되었다.


마땅히 그 모든 것은 끝까지 차올라 영원히 멈춰있으리라 느껴졌던, 그 달빛에서 시작되었으리라. 소년은 지금을, 이 영겁 같은 찰나를 그렇게 이를 수밖에 없었다.


하얀 달빛은 폭포수처럼 쏟아 내리고 눈앞의 기적 앞에서 순교하듯 산화한다. 이는 죽음을 떠올리게 만들기 보다는 무언가로 다시 태어나버린, 어떤 것이다. 눈부신 날개를 가진 나비처럼, 어쩌면 정령과도 같은 모습으로 나팔을 불고 리라를 켜며 현생을 축복한다. 지금의 이 환상을 말로써 표현하는 것을 포기하고 만다. 이 표상은 그야 말로 지금까지 구름 너머로 짐작되던 달빛이다. 다만 가슴 깊숙한 곳에서 부터 묵직하게 울리는 고동 소리, 그 울림만큼은 잊고 싶지 않을 뿐. 눈조차 깜빡이지 못한다.


그것은 굵은 나뭇가지 위에서 줄기에 비스듬히 기대어 옅은 숨을 가눈다. 세상의 모든 잡스러운 빛은 다 비워낸 듯한 순결함으로 머리칼은 새카맣다. 그렇기에 이 황홀한 달빛을 담기엔 더할 나위가 없다. 달빛 아래서 달빛보다 더 파리하고 처량하게 빛나··· 마치 귀한 옥을 장인의 섬세한 손길로 대를 이어 깎고 문질렀을까 싶은 살결. 무명 옷 너머로 느껴지는 가냘픈 실루엣. 무엇을 담고 있는지 짐작조차 되지 않는 깊고도 깊은 눈동자. 소년은 한차례, 자신이 몸을 떨었다고 생각했다.


달은 그저 시간과 방위를 알려주는 개념이었다. 세계에는 사실과 사실, 그리고 그 사실을 잇는 관계만이 존재했다. 소년은 그것을 파악하는 자신의 눈에 대해 남들보다 자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그가 처음으로 세계를 의심해본다. 이는 그저 모르고 지나쳐왔다는 말로도 부족한, 억조 속에서 창연히 빛났던 어떤 진실 중 하나가 아니었을지. 소년은 그의 세계의 반례를 만나고 있는 것일까?


이 모든 것은 잔인할 정도로 긴, 그렇듯 영겁 같은 찰나이다. 너무 많은 생각이 이어지지만 그러한 생각을 하나하나 곱씹기엔 다소 조급해진다. 무결한, 무결했던 세상을 일거에 부셔버린 기적을 가능한 한 곁에 두고 싶다. 마른 입술을 살짝 적셨다.


검은 머리와 검은 눈의 아름다운 소녀다. 이국적인 복식의 작은 소녀이다. 헤진 옷깃과 피로하게 기댄 모습은 미지의 사연을 말한다. 하지만 미지라는 것은 검은 색이 아니라 그저 어두움, 그래 그림자일 뿐이다.


헤진 옷. 나무 위. 피로감. 그림자에 가려졌지만 소녀가 쥐고 있는 무언가가··· 손잡이. 검이다. 극도로 피로한 와중에서도 소녀는 자신을 경계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자신이 건넬 수 있는 말이 있다.


“도와줄까?”


어떤 감정 몇 가지가 소녀의 새까만 홍채를 스쳐갔다. 의문, 불신의 겉 아래로 자그맣게 희망이 스치는 것도 발견한다. 소년은 속으로 깊이 안도했다. 이 기적은 말로 다할 순 없지만 우선 사람의 모습을 가지고 있다.


“도와줄게.”


천천히 양팔을 벌리며 소녀가 있는 나무를 향해 천천히 다가간다. 소녀는 경계하는 듯 잠시 움츠려 들었지만 금새 포기하는 듯 전신의 힘을 풀었다. 소년에게 향하던 시선도 자신의 정면, 발끝 쪽으로 돌아갔다. 작은 움직임이었지만 소녀의 얼굴에도 달빛 대신 그림자가 덮였다. 조금해진다. 소녀를 설득할 많은 생각이 스쳐갈 뻔했지만 놀랍게도 그 직전에 소년의 입이 거짓말처럼 혼자 움직였다.


“믿어.”


소년은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스스로의 말에 놀랐다. 생각을 거치지 않고 말을 한다는 것은 소년에게 익숙하지 않은 일이었다. 그에 소녀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모른다.


확실한 것은 뭔가 중요한 것이라도 빠져나간 듯 곧 소녀의 몸이 축 늘어졌고, 동시에 몸의 균형을 잃었으며, 그 몸이 소년 쪽으로 천천히 기울어졌다는 것이다.


중얼거림에 가까운 한 마디가 산파가 되어 새로운 기적을 낳는다. 한 마디가 전해지고 달빛이 땅으로 쏟아지고, 보이지 않는 새 한 마리가 푸드덕 홰 질을 할 것이다. 소녀의 몸이 기울어지며 하얀 깃털이 나풀대듯 소년의 앞으로 넘어온다. 달빛처럼 너무나도 평온한 빛으로 자신을 향해오는 소녀의 새하얀 얼굴을 바라보며 소년은 다시 세계를 잊었다.


모두가 알다시피 이 죽음은 달빛에서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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