뱀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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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어타다끼
작품등록일 :
2024.11.21 2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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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21 2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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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

DUMMY

#03



이 계절엔 아카사누야에도 해빙이 오기 시작 한다.


아카사로 건너는 관문도시라 몹시 추울 것 같은 인상이지만 바다와 인접해 의외로 따뜻한 도시다. 서문 너머로 수심이 깊지 않은 호수가 있는데, 이런 초봄에는 살짝 호수가 녹기 시작한다.


호수가 완전히 녹는 건 4월로 그 전까진, 어린 자식들을 둔 부모들은 자식들이 호수로 가지 못하게 단단히 단속한다. 수심이 얕다지만 위험한 건 내나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이들은 위험한 것을 알면서도 부모의 눈을 피해 호수로 향한다. 얼음은 녹기 시작해야 더 미끄러운 법이기 때문에 보다 즐거운 놀이터가 되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몰래 호수로 나와서 조잡한 썰매나 기름을 잘 먹인 가죽신 째로 마음껏 미끄러진다. 빠른 속도로 미끄러지며 넓은 호수 반대편까지 한 달음에 갈 수 있을 것만 같은 그 쾌감, 속도감은 넘어지는 두려움을 가뿐히 넘어 선다.


바람을 딛는다는 것은 그런 느낌이다.


몸을 놀리면 여태껏 땅만을 향하던 체중이 등을 떠밀 듯 밀어주고, 아슬아슬하게 잡은 무게중심에서 속도감은 배가 된다.


하늘을 나는 것이 이만큼 짜릿할까?


아슈는 기분 좋게 웃으며 피보라를 피해 가상의 빙판 위로 미끄러져 갔다.


“뭐, 뭐야!”


화살을 내어 시위를 메기던 마궁수 앞을 스쳐가자 상대는 기겁을 하면서 물러선다.


엎드려 죽은 척하던 용병의 등을 가볍게 딛자 나른한 신음소리가 들려온다.


부러진 깃대를 수습하는 기수의 등을 살짝 밀고간다.


치열하게 삶과 투쟁하는, 남들과 다른 시간 속에서 악동처럼 노닌다. 하지만 이것은 큰 장난의 과정에 불구하다. 술래의 시야를 교묘하게 피하며 살금살금, 기대감을 머금고서 가벼운 발걸음으로 뛰어가는 것이다.


각기 다른 옷의 세 주검이 겹쳐진 낮은 시산(屍山)을 넘고, 각기 다른 부위에서 흐르는 세 줄기의 피가 만나 고인 얕은 혈해(血海)를 피해가니 어느덧 술래가 지척이다.


아슈는 양손을 마주잡았다.


“아라한(Arahan).”


금강(金剛)의 염념(炎念).


오른손 장심에서부터 활력이 인다. 서서히, 동시에 막힘없이 밀려오는 기운은 뼈와 관절을 감싸고, 근섬유 사이사이로 스며든다.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이는 불꽃은 뜨겁기 그지없으나 압도되는 자는 주인이 될 수 없는 법이다.


“실피레인(Shylphirain).”


선인(仙人)의 영감(靈感).


왼손 장심에서부터 청량감이 샘솟는다. 감싸듯, 동시에 뻗어나가는 기운은 오감의 영역을 확장하여, 지금 이 땅의 입체를 보여준다.


천지를 꿰뚫어보는 초월자의 시야는 현묘하기 그지없으나 떠나버리는 자는 거닐 수 없는 법이다.


실피레인으로 더욱 선명해진 길을 아라한의 추진력으로 내닫는다.


솨아아아-


가속에 가속을 더하지만 시야는 더 없이 맑다.


눈여겨 봐둔 바위를 딛고 도약할 땐 절정으로 치닫는다.


“아다르드 실피레이느(Adardu Shylphirainu).”


풍류여의(風流如意).


부츠 아래서 받쳐주기만 하던 바람이 무릎 사이를 눈으로 하여 비스듬히 전신을 감싸는 선풍(旋風)이 된다. 관성으로 쏘아지는 몸을 마지막으로 힘껏 밀어준다.


까드드득-


일곱 걸음 정도 앞일까?


몸을 활처럼 젖히며 아라한으로 강화된 오른 팔을 있는 힘껏 뒤로 뺀다.


여섯 걸음 정도 앞일까?


무언가를 느낀 듯 다급히 돌아서는 단단한 인상의 중년의 얼굴이 보인다.


다섯 걸음 정도 앞일까?


“에즈라 아케로(Ezra Kasa)." 왼쪽 귀걸이에서 쏟아낸 섬광이 그의 시신경을 파괴한다.


네 걸음 정도 앞일까?


있는 힘껏 던지는 검, 첸 샤이넬에는 몸 자체에 실린 있는 가속도 함께였다.


세 걸음 정도 앞일까?


첸 샤이넬은 이미 동시백의 복부를 꿰뚫었다.


두 걸음 정도 앞일까?


동시백이 반사적으로 휘두르는 칼이 예상보다 빠를 것이라는 예상이 적중한다.


한 걸음 정도 앞이려나?


“엘 스위츠.” 영체화(靈體化)한 소년의 몸이 장군의 몸을 겹쳐지나갔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눈빛을 마주하며 아슈는 검에 체중을 실었다.


쓰러진 상대의 목을 수직으로 겨누고 있던 검 끝에서 콰직 소리와 함께 경추가 분리되는 감각이 꼬리뼈까지 전해져 왔다. 주변을 둘러본다. 얼빠진 표정으로 이쪽을 돌아보던 마궁수(馬弓手) 한 명의 가슴팍을 창 한 자루가 꿰뚫는다.


창을 회수하지도 않은 채 미네르는 아슈를 향해 팔을 뻗으며 그대로 말을 몰아왔다.


“멍청아, 잡아!”


아슈는 침착하게 미네르의 손을 잡았다. 익숙한 합으로 그대로 그녀의 뒤에 안착한다. 민의 가느다란 허리를 둘러 깍지를 끼고 그녀의 작은 어깨에 머리를 묻는다.


긴장이 탁 풀리자 깊은 피로감이 몰려왔다.


아슈 같이 숙련된 마법사라도 한 번에 다섯 가지 마법을 운영하는 것은 무모한 일이다. 운용할 수 있는 마력의 총량과 출력은 둘째 치고 각기 다른 회로를 동시에 운영하는 것 자체가 무리다. 아슈의 마법의 원류(原流)가 가진 특성상 마구의 자동회로가 제법 많은 영역을 처리해주기도 하지만 결국 다섯 갈래로 사고를 분화해야 하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


굳이 예를 들자면 역사, 문학, 수학, 지질학, 음악의 전문가들 다섯을 한자리에서 실시간으로 논파하는 것과 같은 상황이랄까? 한마디 허점을 보이면 곧장 잡아먹을 기세로 독이 단단히 오른 상대들과 말이다. 그 상황에서 마구는 결국 오픈북 수준의 이점에 불과하다.


한 달 전 실제로 성공하기 전까진 아슈 그 자신도 확신하지는 못한 기술.


샤이넬 에즈(Shyinell Ez).


가속을 극대화하여 전신을 하나의 투창처럼 날린다. 적과 인접해서는 강화된 근력으로 검을 던짐으로써 운동에너지를 더함과 동시에 작용점을 집중, 관통력을 배가시킨다. 적의 시야는 섬광으로 교란한다. 궤도상 상대와 충돌할 수밖에 없지만 이는 순간적인 영체화를 통해서 회피, 혹시 모를 반격에 대해서도 대비가 된다.


그 모습은 실로 섬전(閃電).


광룡(光龍) 샤이넬이 암룡(暗龍) 가즈마를 하늘에서 떨어뜨리곤 그를 향해 벼락을 토해냈다는 신화(神話)를 오마주한 작명.


효과도 패널티도 예상을 벗어나진 않았지만 역시 몸으로 직접 전해지는 부담은 편하게 받아들이기가 힘들다. 기력이 남지 않았다. 아슈는 미네르의 어께에 묻은 얼굴을 비볐다.


타는 듯 붉은 머리칼은 비릿한 피 냄새로 가득하다. 지긋하게 눈을 감으며 그녀에게 속삭이듯 묻는다. 스스로도 놀랄 만큼 잔뜩 갈라진 목소리다.


“사후 처리는 누가?”

“진짜 동시백(銅矢伯)이었어? 아까 그 중늙은이가?”


미네르는 짐짓 어이가 없다는 말투로 되물었다.


질문엔 질문으로 답하는 게 아니라니까. 숙녀가 되려면 아직 한참이구먼. 머리만 지끈거리지 않았다면 아슈는 어느 정도의 낙마의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마땅히 할 말을 했을 것이다.


“그래, 그래. 임무는 완수했어.”


말 떨어지기 무섭게 미네르는 큰 헛바람을 들이마셨다.


“우와, 진짜 미친 놈 소리 골 백 번도 더 처먹더니 결국 진짜 미친 짓을 해버렸구나! 하늘도 돌았지, 돌았어. 천하의 동시백이 개전 첫날부터 이 상꼬맹이한테 객사할 줄 불사왕(不死王)이 알았겠어, 대공(大公)이 알았겠어? 미쳤어, 미쳤어.”


미네르는 흥분의 도가니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동시백 란츠 파 가논이 누구인가?


아슈나 그녀가 태어나기도 전에 발발했던 십년전쟁의 전쟁영웅 중 한 명으로 일신의 무예로는 아방가르드 후작과 수위를 다툰다는 게이르 최고의 기사 아닌가?


이십 년 이상 야전에서 군공(軍功)을 쌓아온 전설적인 무사를 고작 17세의 소년이 베어냈다? 그 계획과 시행까지 어느 정도 다 지켜본 입장일지라도 놀라울 법하다.


아슈는 그런 미네르의 기분을 이해할 수 있었지만 그 흥분이 진정될 때까지 의식을 계속 붙잡고 있을 자신도 없었다.


“그러니까 회수는 누가······?”

“음? 너 피 엄청 흘렸나 보다. 안 들려, 지금?”


완전 녹초인거 안보이니, 이 망할 계집애야··· 라고 말하기 보단 억지로라도 머리를 굴리고 감각을 깨운다.


누군가가 대신 목을 베어 창끝에 꽂고 유세라도 하고 있나 보다. 고개를 돌려 확인해보고 싶지만 역시나 다 죽어가고 있는 터라 그것조차도 여의치 않다.


“아빠가 직접 베었어. 제법 인연이 있는 사이잖아?”


미네르 미라덴의 친부이자 에스미라덴 용병단의 단장 케이온 바라 미라덴은 그 이름보다 붉은 늑대라는 별명으로 더 유명하다. 십년전쟁의 종결 후 별다른 기반을 잡지 못해 십 수년째 유랑하는 신세이긴 하지만 그 난세에는 불사왕 카로이드의 오른팔로서 최전선을 누볐다고 한다. 대공의 에이스인 동시백과 불사왕의 에이스인 붉은 늑대의 대결이라면 그 시절 음유시인들의 대표적인 단골 소재였을 정도.


“후우······.”


아슈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실패할 거라 생각은 추호에도 한 적 없었지만 사실 지금까지 한 번도 도전해보지 못한 스케일의 전술이었다.


정규병만 따지면 백 명이 살짝 넘는 규모인 에스미라덴을 운용하는 전술이나 전략은 수석참모가 된 이래 2년 간 단 한 번도 헤맨 적이 없었다.


하지만 도합 오천여 명의 애플리나트 정규군이나, 아홉 개의 머리를 가지고 있는 천여 명의 용병부대를 이끄는 일 역시 단 한 번도 상상해본 적이 없었다.


그런 지휘계통이 손에 들어오는 것도, 그런 위험한 자리에 엉덩이를 들이미는 것도 말이다.


자신에게는 바람직하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다만, 등이 떠밀렸다.


총지휘관이자 십 수 년 간의 평화기간 동안 이 최전선을 지켜왔던 블라누 자작은 비록 고지식한 구석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담대하고 최선을 가려낼 줄 아는 장군이었다. 붉은 늑대가 추천한 아슈에게 전황에 대한 분석을 들은 직후부터 이 노기사는 이 소년 용병에게 이 작전의 모든 것을 과감하게 위임하였다.


다만, 빠져나올 구멍이 없었다.


언제 이탈할지 몰라 항상 기대되던··· 아, 아니 걱정되던 용병들은 붉은 늑대의 이름에 존경심을 표하며 마치 예하 부대처럼 작전에 협조하며 일사불란하게 움직여주었다. 오히려 짧고 굵은 난전 상황에서 용병단 개별의 개성이 다목적 특수병과로서의 장점으로 부각될 정도였다.


다만, 뚫고 나갈 동기가 생겼다.


여느 때나 다름없었던 마법사 길드 방문. 보낸 것은 삼 개월 치의 연구 성과였고 받은 것은 십삼 개월 만에 전달된 한 장의 서찰. 검은 양초로 된 봉인에는 익숙하면서도 난해한 진(陣)의 문양이 새겨져있었다.


“······.”


아슈는 눈을 감은 채로 품을 뒤적였다.


손끝에는 거의 감각이 없었으나 대신 옷가지 넘어 맨 가슴에 양피지가 구겨지는 촉각이 전해진다. 아슈는 눈을 감고 그에 써져 있는 짧은 문구를 또 한 번 되새겼다.


“죽음이 시작된다.”




블라누는 루멜리아 최대 단층지대인 태벽(泰壁)의 유일한 통로 입구에 자리한 요새였다. 수직으로 까마득하게 치솟은 태벽을 넘을 수 있는 군세가 없는 이상 블라누를 포위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이런 천혜의 요새에 있어, 오천의 정규군과 천의 용병 정도의 전력이면 능히 수만 명의 대군을 상대할 수 있다고 판단되었다.


그렇기에 동시백의 일만 오천 군세 자체는 사실 그렇게 위협적이라고 볼 수 없었다. 동시백과 카마츠 마궁대를 상대로 요격을 하기엔 무리였지만 원조를 기다리며 적당히 수성하는 데는 큰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동시백이 도착한지 반나절 만에 그러한 상식은 산산이 깨어졌다.


문제는 신무기들이었다. 일만 오천의 군세가 모두 말을 타고 달려왔을 때부터 무언가 이상한 낌새가 보였지만 설마 반나절도 걸리지 않아 운제를 이십 대나 조립해버릴 줄은 블라누, 아니 연합의 그 누구도 상상조차 못했다.


완성된 운제 위에서 위협용으로 쏜 쇠뇌가 한 대가 블라누의 성문에까지 와서 박혔을 때, 블라누 자작이 지휘하던 전술회의는 그 활력을 잃었다. 여기서 활을 쏴봐야 운제에 닿기는커녕 반절이나 겨우 갈 정도였기 때문이다.


대공답지 않은 과감한 수였지만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기동성이 뛰어난 별동대로 거의 기습하다시피 블라누를 습격한다. 블라누가 함락되고 아래로 두 개의 관문만 통과하면 애플리나트 평야 동쪽에서도 새로운 진격로를 확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십년전쟁 때 블라누에서 치고 올라오는 병력들을 견제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병사들의 발이 묶였는가? 초장부터 대 연합군 전쟁에서 가장 귀찮은 짐을 치워버리고 승기를 잡으려던 대공의 의지가 돋보이는 작전이었다.


하지만 그 다음 날 오전 요격에 나선 블라누의 삼천의 군세는 식사 한 끼 제대로 하기에도 모자란 시간에 게이르의 지휘관 란츠 파 가논 백작의 수급을 취하고 유유히 돌아왔다.


전투시간이 워낙 짧아 병사나 장비 상 치명적일 정도의 피해가 없었기에 게이르군은 그대로 진격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기엔 동시백이라는 이름이 가진 무게가 너무 컸다. 연합이 블라누로 보낸 신뢰가 한 순간에 무너졌듯 게이르가 동시백을 보며 품은 확신 역시 무너지는 것은 순간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제대로 공격도 시도해보기 전에 국가의 영웅을 잃어버린 게이르 군은 하룻밤을 버텨내지 못하고 후퇴하였다. 어떤 풍운이 일지는 이제 아무도 모르게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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