뱀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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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어타다끼
작품등록일 :
2024.11.21 22:15
최근연재일 :
2024.12.05 21:00
연재수 :
21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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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21 2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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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

DUMMY

#04



2년 전. 빙설의 마녀 세레나의 등장으로 고착 상태에 빠졌던 기아스 전투.


리오트 동북부 해안지역의 요지 기아스가 게이르의 유격대에 의해 급습을 당했다. 기아스가 위치한 카이라스 지방의 백작, 이삭 비 카이라스 리오트 왕자는 이를 되찾기 위해 동원이 가능한 정예병은 모두 쓸어 담다시피 해서 수복에 나섰고, 에스미라덴 역사상 손에 꼽을 정도로 잔혹했던 14일 간의 혈투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 때 미네르 미라덴은 열다섯 살이었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았고 당장이라도 무기를 버리고 엎드리고 싶었다.


지금쯤 와서 항복을 하지 못하는 이유는 다름이 아니었다. 쫓기는 와중에서도 쓰러뜨린 넷에 대한 보복이 두려워서도, 에스미라덴을 배신하기 싫어서도, 살아남을 수 있다는 확신이 있어서도 아니었다.


무기를 버리는 순간 죽는다.


그런 밑도 끝도 없는 공포감 때문이었다. 하필 잘 닦인 길가로 들어서버린 자신의 발을 원망할 뿐이었다. 길가로 다시 새고 싶었지만 어느새 우거져 버린 수풀 때문에 성급하게 뛰어들었다가는 꼬치 신세를 면할 수가 없을 것 같았다.


툭- 하고 순간 발에 뭐가 걸린 느낌이 난다.


“······!”


다소 내리막이었던 터라 몸을 가누지 못하고 몇 바퀴를 우당탕 굴러버렸다.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시야가 만화경처럼 빙글빙글 돈다.


몸에 충격이 전해지지만 고통보다는 어지러움으로 다가왔다. 시간이 느리게 흘러가고 있다. 분명 크게 다칠 거라고 생각이 들었지만 몸을 어떻게 놀려야 할지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말 그대로 내 몸이 내 것이 아닌 것 같다.


시야가 크게 한 번 흔들리고 등으로 서서히 충격이 전해져 왔다. 생각해보니 무언가가 크게 부딪히는 소리도 들었던 것 같다.


그리고 허리께부터 전해진 고통은 그녀를 현실로 다시 내팽개친다.


“커, 어억······!”


끔찍한 고통.


내리막에서 전력 질주를 하다가 넘어져 한참을 구르다 나무에 부딪쳐 멈춘 것이다. 수십 명에게 둘러싸여 돌팔매질이라도 당한 듯 전신이 말도 되지 않게 아프다.


미네르는 고통을 그대로 받아들일 자신조차 들지 않아 억지로 몸을 채찍질 했다.


일어나야 돼.


다시 도망쳐야 돼.


하지만 땅을 밀어내고자 해도 팔을 펴지지가 않았다. 오감이 불규칙하게 열리고 닫히며 공포심만 부채질 한다.


긴 창을 든 그림자들이 보였다가 만다.


웃음기 섞인 숨소리가 들렸다가 만다.


진득한 피 냄새가 맡아지다가 만다.


땅이 조금씩 울렸다가, 점차 커진다.


미네르는 억지로 고개를 들었다.


모르긴 몰라도 그녀의 큰 눈동자에는 적들이 무엇보다 보고 싶었던, 절망의 빛깔로 가득했을 것이다. 그저 그것 밖에 할 수 없었지만, 그것만으로 미네르 미라덴이라는 한 인간성의 패배를 확정지을 것이었다.


그 소년의 등이 적들의 시야를 가려주지 않았더라면, 아슈 미라덴이 열네 명의 장정들과 한 소녀의 사이를 막아서지 않았다면 말이다.


분명, 그랬을 것이다.




오늘도 궁상과 왕년으로 점철된 크론의 주정 앞에서 미네르는 과거회상을 마쳤다.


“아직 인가?”


그리곤 고개를 쭉 빼 두리번거린다.


뭐가 그리 좋은지 혼자 낄낄거리던 크론은 이내 민이 자신의 이야기를 듣고 있지 않았다는 사실에 분노하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려다 의자에 다리가 걸려 옆으로 나자빠졌다. 그 충격에 테이블이 흔들리며 맥주를 담은 작은 오크통이 넘어져 옆 테이블로 굴러갔다.


“아이고, 이 영감탱이 좀 어떻게 해봐!”


맥주의 범람으로부터 소시지 접시를 지켜낸 리오는 있는 짜증 섞인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곧 주변에서 쏠린 시선들의 의미를 다채로운 욕들과 함께 곱씹어보곤, 그 자리에서 가장 낮은 서열의 주인공이 바로 자신이라는 것을 깨닫고 묵묵히 크론을 부축하기 시작했다.


“으악, 이 영감탱이 토하잖아!”는 단말마 같은 비명에 미간을 찌푸린 미네르는 곧 자신이 찾던 사람을 찾아내었다.


“벤자크!”


한 손에는 양꼬치, 다른 한 손에는 호리병을 쥔 채 어딘가로 걸어가던 벤자크는 느릿느릿 고개를 돌려 민을 바라보았다. 눈이 반쯤 풀려 있었지만 민은 그것이 취기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었다.


에스미라덴의 수석 의무담당인 벤자크는 전투가 끝난 지 3일째 밤인 오늘까지 단원들의 자잘한 수발을 들어주고 있었던 것이다. 어지간하면 푹 잘만도 한데 역시 주당은 주당. 간만에 좋은 안주가 제공되는 날 기어 나오지 않을 수가 없었나 보다.


“아슈는 붉은 늑대랑 대장 막사에 있어. 곧 나올 거야.”


빨빨거리며 자신의 앞으로 뛰어온 미네르에게 벤자크는 심드렁하게 말했다. 미네르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어, 어, 어떻게 알았지? 아슈라도 빙의한 거냐?”

“너 생각하는 거야 뻔하지. 공주님께선 멀쩡하시니까 걱정 마세요, 미네르 왕자님.”


벤자크는 이죽거리다 양꼬치 하나를 베어 물었다. 민은 살짝 아니꼬웠지만 아직 아쉬운 게 있는 터라 한 번은 꾹 참고 재차 질문하였다.


“덧나거나 불구되는 건 아닌 거 확실하지?”


벤자크는 지난 삼일 동안 수도 없이 들어온 질문에 미간을 찌푸렸다.


관자놀이라도 문지르고 싶은데 양손은 이미 찼고. 벤자크는 그 대신 자신이 직접 담근 딸기술을 쭉 들이키곤 말했다.


“출혈 빼고는 크게 상한 데도 없고, 아슈는 마구(魔具) 덕분에 자가치유도 빠르잖아. 사실 오늘 아침에야 깬 것도 마력의 문제였지 체력의 문제가 아니야.”


그나저나 재생을 돕는 마구라니. 살면서 한 번을 보기 힘들 정도로 희귀한 것이 마구라지만 정말 대단하긴 하다. 하긴 마구 따위 보다 훨씬 더 마주치기 힘든 존재인 마법사가 바로 우리의 수석 참모님 아니셨는가?


“응? 아침에 깼다고?”


미네르는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응, 성까지 다녀오던데? 완전히 회복된 것 같아.”

“아, 성까지 다녀온 거야? 거긴 왜?”


아차, 순간 벤자크는 피곤함이 삭 달아나는 것을 느꼈다.


한 시간 전 마지막으로 아슈의 몸 상태를 점검하면서 그가 데보라를 만나고 왔다는 사실을 알았다. 미네르가 들으면 길길이 날뛰겠거니 싶어 말을 아끼려고 했는데 의무용 천막을 다 정리하고 술 한 잔 하러 나오면서 긴장이 풀려버린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사흘 전 마상에서 아슈가 실신한 것을 보고 길길이 뛰던 민이었다.


이튿날 아침까지 일어나지 않자 괜히 옆 침대에서 잠깐 눈을 붙이던 자신도 뺨을 여섯 대나 맞고 깨어나지 않았던가? 기력이 빠져서 잠든 환자의 상태에 대해 도대체 어디까지 브리핑을 하라는 건가?


동시백의 귀신에 홀린 거라느니, 독에 당한 거라느니 등 말도 되지 않는 발상들로 민폐란 민폐는 다 끼치던 그녀를 진정시키는 데 몇 명의 장정들이 달라붙은 줄을 모른다.


때 마침 길을 지나던 붉은 늑대가 못난 딸의 진상질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그녀의 가느다란 뒷목을 내리쳤기에··· 아니, ‘아버지의 위엄’을 발휘했기에 망정이지 전투 때도 못 봤던 송장을 치를 뻔 했다.


이후 미네르는 붉은 늑대의 명으로 승전에 대한 피로연 준비의 일환으로 양고기 해체 작업을 수행했고, 곧 이번 연회의 양꼬치는 그 어느 때보다 의욕이 없는 해체담당자에 의해 그 어느 때보다 알이 굵은 꼬치가 배분되었다는 것은 또 다른 이야기.


벤자크에게 엄습한 위기는 그가 그런 잡설정으로 도피하는 것을 허락지 않았다.


“설마······ 또 그 망할 계집애 만나러 간 거야?”


아니, 수습할 기회라도 줘야 뭐라도 할 것 아니야!


벤자크는 이글이글 타오르는 민을 바라보며 이번 건을 잘 달래지 못하면 그녀가 인육을 해체할 수도 있겠다는 위기감을 느꼈다.


아슈가 데보라와 교제를 하고 있다는 사실은 에스미라덴의 대부분이 알고 있었다. 수석참모일과 관련 없는 외부인과는 일체 교류가 없던 그가 매일 한 장님 소녀를 만나러 성내로 가는 모습은 확실히 이색적이었기 때문이다.


아슈 자신이 딱히 숨기지도 않았고. 미내르도 속으로는 항상 부글부글 끓어 했지만 아슈 앞에서는 자존심 때문에라도 철없이 징징거리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와중에 쥐어터지는 것은 벤자크였다. 벤자크 역시 에스미라덴의 정규단원이긴 했지만 전투 포메이션상에서는 평단원인 그가 유격 2조의 차석인 미네르를 상대하기에는 무리였다.


무엇보다 질투에 눈이 돌아간 열일곱 소녀를 저지할 담력을 가진 이가 얼마나 있겠는가? 벤자크는 괜한 저항으로 그녀가 무기를 잡는 상황을 피하는 선에서 끝낼 수 있게 진득하게 맞아주는 쪽을 택해왔다.


하지만 오늘은······.


남다른 분노.


눈 뜨자마자 삼일 내내 간호한 자신을 내팽개치고 외지 여자를 만나고 와? 미네르의 눈동자는 타오르다 못해 숫제 뜨겁고 투명한 용암이 흘러나올 정도였다. 잠깐? 투명해?


“야, 너 울어?”


벤자크는 다시 한 번 각성하는 것을 느꼈다. 미네르의 커다란 두 눈에서는 닭 똥 같은 눈물이 한 방울씩 떨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벤자크는 동시에 그녀의 반 곱슬의 머리가 평소보다 더 곱게 빗겨져 있었다는 것과 평소 가죽부츠나 토시로 가려져 있던 그녀의 가느다란 팔다리가 새로 산 것이 분명한 새 셔츠와 바지로 덥혀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바보. 벗을 거면 견갑도 벗어야 할 거 아니냐?


작고 마른 체구라 볼륨감도 없는데 딱 들러붙는 견갑 때문에 체형이 일자로 떨어진다. 가느다란 얼굴선만 아니었으면 소년처럼 보일 정도다.


“흐, 흐에······.”

“자, 잠깐!”


아, 엉뚱한 생각하는 사이에 미네르의 감정이 더 복받쳐버렸다!


벤자크는 이것저것 생각할 여유도 없이 호리병을 쥔 손으로 어떻게든 양꼬치 한 덩이를 빼 미네르의 입 속으로 처넣어버렸다. 안 그래도 작은 얼굴 작은 입이다 보니까 한 덩어리에 꽉 차버린다.


울다 말고 숨이 막혀 바둥거리는 미네르의 등을 감싸며 벤자크는 의무용 막사 근처 구석진 곳으로 그녀를 데리고 갔다.


한참을 듣기 참혹한 소리로 질질 짜고, 벤자크의 정강이를 까고, 고기를 우물거리고, 술을 뺏어 먹던 그녀는 벤자크가 딸기술을 한 병 더 가지러 막사로 잠시 돌아가고 나서야 상대해줄 사람이 없어져서인지 다소 진정이 되었다.


벤자크는 이제 작게 훌쩍이는 그녀에게 잔 하나를 내밀었다. 새 술을 가져오며 챙겨온 것이다. 미네르는 물끄러미 잔을 바라보다가 두 손으로 받아 들었다. 잔에는 이미 향긋한 냄새를 풍기는 빨간 딸기술이 가득 차있었다.


“이제 좀 괜찮아?”


벤자크는 약간 불안한 표정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2차 폭주의 기미가 보이면 이번에야 말로 냉큼 도망갈 생각이다.


“응. ······미안.”


미네르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사과했다.


그제야 벤자크는 다소 안심하며 그녀의 옆자리에 털썩 앉았다. 앉고 보니 전망이 좋다. 드넓은 애플리나트 평야가 끝없이 펼쳐지고 아득한 구릉 위부터 밤하늘이 값비싼 감청색 비단처럼 끝없이 펼쳐져 있다. 날씨도 좋아 별도 이루다 셀 수가 없다.


평야의 야경을 잠시 즐기던 벤자크는 슬쩍 미네르을 바라봤다. 달빛이 밝아 한 밤인데도 얼굴이 잘 보인다. 매일 모래바람과 따가운 햇볕을 그대로 받는 것 치곤 고운 피부나 딱히 결이 좋지는 않지만 그래도 짧게 자른 붉은 머리가 제법 잘 어울린다.


예쁘장하다.


벤자크도 데보라를 본 적이 있다. 블라누 성에 도착한 이후 민의 폭력이 한층 더 심해졌기 때문에 그의 가장 큰 동인인 데보라를 얼굴이라도 알고 있어야 덜 억울할 것 같아서였다.


확실히 신비로운 매력이 있었지만 미모 자체가 엄청난 절색인 것은 아닌 것 같았다. 수수하고 단정하고 기품 있는 정도? 벤자크는 생기 넘치고 귀여운 미네르가 훨씬 더 괜찮아 보여서 오히려 아슈가 이상하게 여겨졌다.


하지만 뭐 취향은 다 다른 거니까.


뭔가 돌이킬 수 없는 생각을 한 것 같다. 벤자크는 그 생각이 꼬리를 물기 전에 술을 벌컥 들이켰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뭐 울기까지 하냐?”

“그냥 막 분하다가······ 갑자기 초라한 기분이 들잖아.”


미네르는 답지 않게 기운 빠진 목소리로 느릿느릿 말했다. 벤자크는 그 모습이 너무 한심해서 혀를 찼다.


“쯧쯧. 그 여시 같은 놈도 참······.”


2년 전. 빙설의 마녀 세레나의 등장으로 고착 상태에 빠졌던 기아스 전투.


리오트 동북부 해안지역의 요지 기아스가 게이르의 유격대에 의해 급습을 당했다. 기아스가 위치한 카이라스 지방의 백작, 이삭 비 카이라스 리오트 왕자는 이를 되찾기 위해 동원이 가능한 정예병은 모두 쓸어 담다시피 해서 수복에 나섰고, 에스미라덴 역사상 손에 꼽을 정도로 잔혹했던 14일 간의 혈투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당시 역대급 선발이라 자부했던 에스미라덴은 백이십오 명의 정규단원 중에서 서른두 명의 사상자와 스물일곱 명의 중상자가 발생했다. 쇼크로 전역한 이들을 포함하면 반 이상을 갈아치운 전투였다.


그 이후로 아슈가 수석 참모에 오르는 등 전격적인 세대교체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지면서 역대 최강이라는 수사도 갱신되어버리긴 했지만 여하튼 전례 없이 치열한 전투였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지금도 솜털도 가시지 않았지만 당시 애송이 용병에 불과했던 미네르도 큰 부상을 당한 채 십 수 명의 게이르 병사들에게 몰리는 위기에 처했고, 그 위기에서 그녀를 구한 것이 아슈였다.


소꿉친구라지만 평소 비리비리해 보이는 아슈를 다소 업신여기며 대했던 미네르가 귀한 뱀술까지 구해 벤자크의 천막에 찾아온 것도 며칠 후의 일이었다.


“내가 답 없는 년이지 뭐······.”


잔뜩 의기소침해 있는 미네르의 모습에 벤자크는 또 한숨을 내쉬고 술잔을 내밀었다. 힘없이 건배하는 미네르. 벤자크는 머리를 쥐어뜯었다.


“어휴, 너 따라와봐!”

“······?”


벤자크는 자리를 박차고 자신의 막사로 성큼성큼 걸어가다 뒤를 보았다. 제자리에서 아직도 멀뚱멀뚱 보고 있는 미네르을 보니 부아가 치민다. 냉큼 뛰어가 민의 손목을 잡아서 끌듯이 막사로 데리고 갔다.


“벗어!”

“뭐? 뒤질······.”

“견갑 말이야, 멍청아.”

“아······.”


대충 말귀를 알아들은 듯 민은 주섬주섬 견갑을 벗었다. 다른 부분은 빳빳해서 새 옷 같았던 하얀 셔츠가 견갑 부위만 쭈글쭈글 구겨져 있었다.


벤자크는 인상을 쓰고 그 모습을 바라보다 한 켠에 둔 야전 캐비닛을 뒤져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귀한 유리거울이다. 환자에게 환자 자신의 환부를 보여주기 위해 붉은 늑대에게 수차례 청원을 넣은 끝에 세 달 전에 겨우 구입한 값비싼 물건이었다. 크기는 손바닥 두 개 정도에 불과했지만 이 정도 거리면 미네르의 상반신을 비추기엔 충분할 정도다.


“옷은 그렇게 과장되지 않고 좋은 것 같아. 단정하기만 해도 충분히 여자처럼 보일 수 있으니까 옷깃만 좀 정리하고 판판하게 당겨봐.”

“으, 응!”


옷매무새를 정돈하는 미네르에게 거울을 건네곤 다시 캐비닛을 뒤진다. 한참을 뒤진 끝에 벤자크는 자신이 찾던 물건을 발견했다.


“이건 성수로 만든 영양크림이야. 원래 연고와 함께 바르는 거지만 로물리아의 신관들은 하얗고 고운 피부를 유지하기 위해 사용한다고 하더군. 헬렌이 시집갈 때를 대비해서 구해뒀던 거야.”


헬렌은 벤자크의 사수이자 전대 수석 의무담당으로 2년 전 기아스에서 목숨을 잃었다. 제법 자상한 구석이 있었던 사수를 벤자크는 곧 잘 따랐었다.


어리둥절한 민을 힐끗 본 벤자크는 한 쪽에 받아둔 물통에서 손을 씻고 닦은 후 붕대용으로 챙겨둔 깨끗한 무명을 꺼내 물에 푹 적신 후 짜내었다. 그리곤 미네르의 얼굴을 박박 닦아냈다.


“아우웃! 아파! 야!”


어리벙벙해서 저항하지도 못하고 얼굴을 내줬던 그녀가 이상을 찾고 주먹을 날리기 전에 벤자크는 천을 거두었다. 약간 붉게 달아 오른 조막만한 얼굴.


영양크림이 담긴 작은 통의 뚜껑을 열어 검지로 듬뿍 찍어내 그녀의 양 볼에 각각 찍었다.


“앗, 차거!”

“발라주긴 좀 그러니까 직접 문질러.”


벤자크는 거울을 뺏어 미네르의 얼굴을 비쳐줬다. 미네르는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크림을 얼굴에 발랐다.


애초에 그렇게 나쁜 피부도 아니었고 상성도 잘 맞는지 피부 톤이 한층 더 화사해진 것 같았다. 벤자크는 그제야 흡족하게 웃으며 미네르의 양 어깨를 눌러 의자에 앉혔다.


“조금 얌전해 보이고 싶은 것 같으니 머리도 다시 빗겨줄게.”

“아냐, 머리는 내가 빗을 수, 아야!”


몹시 당황 그녀가 제대로 말릴 새도 없이 벤자크는 적당히 촘촘한 빗을 꺼내들고 그녀의 머리를 빗었다.


잠깐 난동을 부린 덕분에 머리가 다시 헝클어져 있어 처음에는 몇 개씩 뽑혔지만 금세 제법 단정한 티가 났다. 벤자크는 영양크림을 찾는 와중에 발견했던 헬렌의 머리핀으로 그녀의 앞머리를 고정해주고는 미네르에게 다시 거울을 보여주었다.


“아······.”


한결 소녀 같은 모습에 미네르는 탄성을 지르고는 벤자크에게 감동의 눈빛을 보냈다. 벤자크는 그 시선이 부담스러워 괜히 막사 밖을 바라보며 말했다.


“우리가 블라누에 있어봐야 얼마나 더 있겠어? 동시백도 베었으니 대공이 들이닥치기 전에 튀어야지. 아슈도 그걸 아니까 데보라를 정리하려고 바로 성에 들린 거일 수도 있어. 그리고 너희 둘이 보통 인연이냐? 동갑내기에 정규단원도 동기고······.”


이건 괜한 말이려나? 벤자크는 그대로 목구멍을 삼키려던 말을 소중한 우정을 위해서 다시 토해내었다.


“너 충분히 예뻐. 조만간 아슈도 너를 바라봐 줄 거야, 분명.”


순간 미네르와 벤자크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얘가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미네르는 어쩔 줄 몰라 하다가 벤자크가 들고 있는 거울을 다시 한 번 보게 되었다.


타는 듯한 적갈색 머리칼이 차분하게 빗겨져 있어 제법 맵시가 있었다. 벤자크가 준 머리핀은 노란색 꽃 모양이었는데 크기도 적당하고 상당히 귀엽게 잘 어울렸다. 생기 있는 조그마한 얼굴과 오밀조밀한 이목구비와 커다란 두 눈. 그렇게 깊게 생각해보지는 않았지만 벤자크 말대로 제법 예쁘지 않는가? 민은 조금씩 자신감에 차오르는 자신을 느끼고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고마워, 벤자크! 넌 정말 좋은 녀석이야!”


갑자기 자신의 품으로 뛰어들어 거의 목을 조르다시피 하며 껴안은 미네르의 모습에 벤자크는 당황해서 그녀를 밀쳐내기 시작했다.


“야, 얌마! 무슨 짓이야!”

“벤자크, 벤자크으!”


벤자크는 그녀의 체취에 숨이 멎을 듯한 느낌이 들었다.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고 정신이 아득······. 아, 안돼! 목을 조르고 있어!


“미, 민. 수움······! 야아······!”


뭔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는지 미네르는 잠시 멈칫했다가 화들짝 놀라 그에게서 떨어졌다.


“미, 미안! 너무 흥분해서.”

“흐억, 헉, 헉.”


벤자크는 숨을 몰아쉬며 손사래를 쳤다.


미네르는 진심을 담아 그에게 사과했다. 한참의 빌던 미네르와 투덜거리던 벤자크가 동시에 웃음을 터트린 건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둘은 실없이 웃으며 의무용 막사를 나와 다시 술자리로 향했다. 발걸음이 사뭇 경쾌하다.


술자리가 벌어지고 있는 중앙 캠프장엔 여러 준비가 끝난 용병들이 마저 합류하여 아까 전보다 더 시끌벅적 하였다. 둘은 동시에 아슈를 찾기 시작했다. 미네르가 조금 더 빨리 아슈를 발견하고는 그곳을 향해 뛰어갔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벤자크는 피식 웃으며 중얼거렸다.


“저러다 또 머리 헝클어진다, 바보.”


미네르는 환한 웃음을 지으며 아슈의 뒤로 다가갔다. 아직까지 아슈는 자신의 존재를 깨닫지 못할 것 같았다.


놀래 켜 주고 싶다는 짓궂은 생각도 들어 발걸음을 죽이고 몰래 다가갔다. 그런데 무슨 이야기 하는 걸까? 그런 의문이 드는 순간 아슈와 같은 자리에 있던 리오의 목청이 폭발했다.


“800실링! 동시백의 머리를 딴 거 말고 순수하게 800실링 말이야? 우와 수석참모가 세기는 센 직업인가 보네.”


800실링? 성과급이라도 나온 건가? 800실링이면 쓸 만한 말을 사도 열 마리는 넘게 고를 수 있을 정도로 거금인데 붉은 늑대가 그렇게 손이 컸었던가?


새삼 부자가 된 아슈에게 다음 도시에선 밥이나 한 끼 거하게 얻어먹어야지 하는 소박한 다짐을 갈무리하고 미네르는 계속 숨을 죽인 채 그에게 다가갔다. 아슈는 아는지 모르는지 맥주를 한 번 들이키고 시원스레 말했다.


“수석 참모에 수석 외무담당이라고. 지금까지 해낸 건수가 얼만데 퇴직금으로는 짠 편이지.”


퇴직금?


미네르는 눈앞이 새하얗게 변하는 걸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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