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섞임

그들은 차원 이동 장치를 빌려주겠다는 이현상체 관리국의 말을 한사코 거절하고 꿈차원으로 들어갔다.
‘좌표만 있으면 꿈차원으로 이동할 수 있는데 굳이 그럴 필요 없지.’
“우와아아, 저번에 왔을 때는 정신 없어서 제대로 둘러보지 못했는데. 여기 정말 신기하구나!”
투명머리는 인공물이 뒤섞인 숲과 리하의 집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그리고 눈에 보이는 이곳 저곳을 돌아다녔다.
“와, 뭔가 징그러워!”
투명머리는 돌아다니다가 이상한 건축물들을 발견했다.
빛을 오색으로 구분시키고 있는 프리즘, 사용자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듯 꼬여있는 계단, 물리법칙을 무시하는 형태의 조형물들.
투명머리는 그 이상한 조형물들의 구조를 알아내겠다며 올라타고 난리를 피우다...
“끄악. 이게 말이 돼?”
바닥으로 몇 번이나 추락하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아이가 아래에서 받아주기도 했다. 그러면 투명머리는 머쓱해져서는 이렇게 말했다.
“크흠, 이 나를 당황시키는 물체가 있다니. 너희 집은 만만치 않구나.”
친구 앞에서 자존심을 챙기는 모습이 어린 애 답다면 어린 애 다웠다.
“나중에 중층도 소개해줄게. 거기에 신기한 게 더 많거든. 이야기 거리도 많고. 내가 진짜 사는 곳이기도 해.”
“지금 가보면 안 돼?”
“우리 다른 문명에 가보기로 한 거 아니었어?”
“맞다, 그랬지. 헤헤.”
레티베아도 흥미로운 눈빛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뭔가 현실의 물질들하고는 느낌이 많이 다르네요. 이건 마치 관념으로 이루어진 것 같아요.”
그들은 아이의 인도에 따라 밖으로 향하는 통로를 지났다. 현실과 관념이 뒤섞여 있는 통로는 그 뒤섞임의 비율로 길이 얼마나 남았는지 알려주었다.
그리고 그들은 마침내 경계에 도착했다.
“여길 넘기만 하면 다른 차원으로 가는 거지?”
투명머리가 약간 긴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뭘 망설이는 거야. 빨리 가버려!”
“우와앗! 이러기 있-”
아이는 그런 투명머리를 뒤에서 떠밀어 버렸다.
투명머리의 나머지 말은 아마 다른 차원에서 메아리치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아이는 곧바로 투명머리를 따라 경계를 넘어갔다.
리하와 레티베아는 그런 아이들의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다 따라 들어갔다.
다음 순간 그들이 본 것은 침식 공간이라 해도 이상하지 않을 기이한 도시였다.
한 쪽에는 지구로 치면 1900년대쯤 돼보이는 도시의 모습이, 한 쪽에는 미래적인 도시의 모습이 있다. 다른 곳을 돌아보면 또 다른 도시의 모습이 펼쳐져 있다.
“와 정신 없어. 이게 다 뭐래?”
그리고 도시의 어떤 부분은 엄청나게 크고, 어떤 부분은 작고 디테일이 떨어진다. 마치 누군가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에만 신경 쓴 듯한 모습이다.
게다가 중간중간 어떤 부분들은 그림으로 그린 듯 이질적이었다.
어떤 곳은 특정한 시간에 갇힌 듯 같은 일이 반복되고 있었다.
“이게 다 뭐지? 우리가 침식 공간으로 들어온 건가?”
리하는 능력을 발동하며 말했다.
구슬이 맥동하며 울려퍼진다. 울려퍼진 맥동이 주변을 감쌌다.
“침식 공간은 아니야. 모두 존재로 판정되고 있거든.”
그때 그 혼란 속에서 누군가 걸어나왔다.
“안녕하세요, 손님 여러분. 좀 난잡한 곳이죠?”
그것은 1900년대 스타일의 정장을 입은 중년 남성의 모습을 하고 있다.
“안녕하십니까. 여기가 어딘지 물을 수 있겠습니까?”
“음? 당신께서 그런 질문을 하시니 조금 의외군요. 당신보다 이곳을 잘 아는 이는 없을 텐데 말이죠.”
“...그게 무슨 말인지 더 자세히 들을 수 있겠습니까?”
“여긴 대화를 나누기 알맞지 않는 듯 하군요. 일단 조용한 곳으로 모시겠습니다. 모든 정신의 주인이시여.”
‘일단 능력으로 확인해 보았을 때 이상한 점은 없으니 조금 경계를 풀어도 되겠어. 그나저나 무슨 말인지 당최 알아먹을 수가 없네.’
그들이 도착한 곳은 따로 묘사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모두에게 익숙한 곳이었다.
“여긴 꿈차원?”
누군가의 개성이 반영된 듯 세세한 부분은 달랐지만 기본적인 특징들은 매우 유사했다.
“아까 그곳은 기억의 무덤입니다. 세간에 잘 알려진 무의식이라는 것의 일종이기도 하죠.
그것은 저들끼리 경쟁하며 이긴 쪽은 의식이라는 수면 위로 나가게 돼요.
그리고 지금 여러분이 있는 여기가 바로 수면 위입니다.”
“그 말은 여기가 정신세계의 일종이라는 겁니까?”
“그렇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래서 내가 제일 잘 알거라 했던 거구나.’
리하는 한가지 의문의 해답을 찾았다. 하지만 문제에 대한 답을 찾으면 찾을수록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증식했다.
“그런데 누군가의 정신이 어떻게 현실에 있는 겁니까? 게다가 일반적인 정신세계와 다르게 관념이 아니라 실체로 이루어져 있군요.”
“아...제가 여기서 더 설명하기 보다는 직접 보시는 게 더 빠를 듯 합니다. 이미 대부분 알고 계실 내용이기도 하고요.
어쩌면 저따위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많은 걸 알아내실지도 모르겠습니다. 하하.”
남자는 어색하게 웃으며 질문을 피해갔다.
‘음, 이런 것까지 스포를 조심할 필요는 없는데 말이지. 뭐 그래도 이 아저씨는 영화 스포했다고 칼빵 맞을 일은 없겠어.’
리하는 그런 실없는 생각과 함께 의문을 지워냈다.
‘하긴 이런 건 남이 알려주면 재미없지.’
리하는 오랜만에 재밖에 남지 않은 마음에 열정을 불태워 보았다.
“저는 이만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래 자리를 비울 수는 없어서요. 그럼 즐거운 여행 되시기 바랍니다.”
“설명 감사했습니다.”
남자는 순간이동을 하듯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뭐야, 자기 할 말만 하고 가버리고.”
“그래도 완전 두근거리지 않아? 시작하자마자 이런 이벤트라니!”
완전 럭키비키잖아!
리하는 환청처럼 따라오는 뜻 모를 단어에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별로 상관하지 않았다.
그때 레티베아가 주위에 어떤 음표들을 띄웠다. 거기서는 웅장한 노랫소리가 흘러나왔다.
“모험에는 음악이 빠질 수 없죠!”
“레티베아, 뭘 좀 아는구나.”
아이도 레티베아의 행동에 방금 일은 잊은 듯 좋아라 했다.
리하는 그런 일행들을 다른 세상의 사람을 보듯이 바라봤다.
‘레티베아씨는 같은 편인 줄 알았는데.’
그들은 이곳 저곳을 돌아다니며 단서를 찾아나갔다. 광활한 공간이었지만 그들의 능력으로는 그리 어려울 건 없었다. 그러다 어떤 마을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다들 여기로 와봐! 사람들이 있어!”
“사람? 여기에 누가 살기도 해?”
리하가 아이의 부름을 듣고 간 곳에서 본 것은 독특한 건축물이었다. 마을의 모든 건물들이 미끄럼틀 같은 통로로 연결되어 있다.
‘저러면 사생활 침해 문제는 없나.’
게다가 원시 인류의 집처럼 풀과 나무를 엮어 만들어져 있다.
밤처럼 어둠이 깔린 그곳에는 마법적으로 보이는 파랑과 노랑의 빛이 주변을 조금씩 밝히고 있었다.
“잘 오셨습니다. 치열한 경쟁을 뚫고 진리의 땅으로 올라온 깨어난 자여. 당신의 첫걸음은 이 땅에 깊은 발자국을 남길 겁니다.”
어둠속에서 부족장처럼 보이는 한 남자가 걸어와 그들을 환영했다. 곧이어 여러 목소리가 섞여있는 다성음악이 들려왔다. 남자는 그들 앞에서 어떤 의식처럼 보이는 행동을 했다.
“으악 이게 뭐야!”
그러자 그들에게 어떤 전기적인 연결이 생겨났다. 리하는 연결을 받아들일까 잠시 고민했다.
‘뭐, 나한테 딱히 위협이 될만한 건 아니니까. 그냥 받아들이자.’
리하는 아이에게도 눈짓하여 신호를 보냈다. 아이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본인도 연결을 받아들였다.
그렇게 무언가 연결이 일어나자 여러 정보들이 머릿속에 범람했다. 리하는 마치 거대한 네트워크의 일부가 된 듯한 기분을 느꼈다.
“이건 깨어난 자들을 잇는 기적입니다. 선조들은 이걸 시냅스라고 불렀지요. 이제 우리는 하나입니다. 우리는 하나처럼 화합해야 합니다. 다만...”
남자가 잠시 뜸을 들이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그렇다고 각자의 개성을 잃으면 추방을 면치 못하겠지만요.”
“좀 더 자세히 설명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당신들은 과연 이 속에서 화합하면서도 자신을 유지할 수 있을지. 지켜보겠습니다.”
남자는 그렇게 말하고는 뒤로 이동하여 어둠속으로 스며들었다.
“뭐야, 본인 할말만 하는 게 여기 문화라도 되는 거야?”
“너무 마음쓰지 마세요오. 정해진 대사만 하는 게 그의 역할이니까요~.”
“왓, 깜짝이야.”
아이는 깜짝 놀라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거기에는 아무도 없었다.
“뭐야?”
그때 다시 한번 목소리가 들려왔다.
“으흐흐흐. 저는 귀신이랍니다아~. 하얗길래 동족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네요오. 그러니 사라져주셔야 겠어요.”
아까보다 묘하게 낮은 음색이었다. 목소리는 마을의 어둡고 영적인 분위기와 합쳐져 더욱 으스스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힉!”
딸꾹
아이는 겁을 집어먹고는 근처의 투명머리 뒤에 숨었다.
[놀라셨나요오? 미안해요. 이건 시냅스를 통한 전언이랍니다아~.]
“뭐? 그럼... 지금 나 놀린거야?”
아이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네? 제가요?]
“아까 귀신이니 뭐니 하면서 놀래켰잖아!”
[전 그런 말 한 적 없는데요오~? 잘못 들으셨겠죠.]
“뭐, 그럼 진짜로...”
아이가 몸을 오슬오슬 떨었다.
‘저걸 속냐.’
리하는 목소리에 놀아나는 아이의 모습을 한심하게 처다보았다.
‘순수한 건지 바보인 건지.’
[제가 여러분을 안내해 드리겠습니다아. 저는 이쪽에 살아요.]
리하는 머릿속으로 들어온 정보에 따라 마을을 걸어나갔다.
“정신세계 속 사람들의 마을이라, 재미있네요.”
“어떻게 이런 행성이 문명 연합에 가입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후훗. 그것도 그러네요. 너무 불친절하고 폐쇄적인 것 같은데 말이죠.”
그들은 한 집 앞에 멈춰섰다. 집주인은 그들이 온 것을 알아차렸는지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냈다.
“계신가요?”
“나갑니다아~.”
거기서 모습을 드러낸 건 레티베아의 어깨쯤 오는 작은 여성이었다.
“이렇게 쉽게 정체를 드러내다니 내가 무섭지도 않나보군. 유령씨.”
아이가 허리에 손을 올리고 자기 딴에는 무서워 보이는 표정을 지었다.
“유령씨라아~. 그거 괜찮은 별명이네요오. 앞으로 그렇게 불러주세요, 귀여운 꼬마친구우.”
“아까 역할에 대해 언급했었죠. 그게 정확히 뭔지 알 수 있겠습니까.”“말 그대로 이곳에는 각자의 역할이 있어요오. 일종의 직업이라고 이해하셔도 돼요~.”
“그럼 당신의 역할은 새로 온 사람을 안내하는 것입니까?”
“그것만 있는 건 아니지만, 대충 그렇다고 할 수 있겠네요오.”
“저희도 역할이 있을까요?”
“마침 잘 말하셨어요오. 지금 우리는 그 역할을 찾아 순례를 갈겁니다아. 저는 그 순례를 돕는 역할을 맡고 있어요오.”
‘처음부터 말해주면 될걸. 질문에만 답하는 이 심보는 뭐지?’
“오랜만에 보는 뉴비라 흥분되네요오. 하악.”
‘...그리고 상태도 좀 이상해 보이고.’
“크흠. 제 소개는 여기까지 하고 바로 출발해 볼까요오? 먼저 우리가 갈 곳은 감각의 호수랍니다아.”
그 말을 끝으로 그들이 서있는 바닥이 왜곡되며 그들을 빨아들였다.
그 시각, 의식 아래.
“이로써 무의식의 2할 정도를 포섭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무의식이라기에는 매우 안정된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공간. 거기에는 사람 몇몇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뭉치기 어려운 그들을 이렇게나 모으다니 잘해줬어요. 이정도면 계획을 실행하는 데 문제는 없겠어요.”
공간의 벽면에는 텔레비전의 화면처럼 각기 다른 장면들이 흘러가고 있다. 그중 그녀는 한 곳을 응시한다.
과거 도시와 사람들,
누군가의 잊을 수 없는 강렬한 순간의 박제들,
상상 속 장소와 존재들.
형이상학적 개념들로 이루어진 공간.
시대, 배경, 생김새와 능력까지 모두 다른 수만 개의 세력들.
원래는 서로 경쟁하며 위로 올라가려 하겠지만 어째서인지 한 곳에 모여 있다.
“그런데 정말 성공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의식 위의 기만자들은 인정하기는 싫지만 소수정예니까요. 세상에 대한 통제권도 훨씬 강하고요.”
“그들은 최근 침식 공간 문제로 그쪽에 통제권을 모조리 사용하는 중이에요. 이런 상황이 다시 올지 알 수 없어요. 지금이 유일한 기회에요.”
“...알겠습니다. 그럼 저는 이만.”
그곳은 폭풍전야 그 자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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