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섞임

그 시각,
리하는 자신의 능력 탓에 굳어있는 유령씨에게로 다가갔다.
“유령씨, 저희한테 숨기는 것 없습니까?”
“뭐뭐, 뭐 말인가요오?”
“...”
리하는 말없이 그저 유령씨를 바라보기만 했다.
“으으음, 그게에.”
그 압박감에 못이겨 입을 열려던 그때,
“리하 무슨 일이야?”
아이가 곁으로 다가왔다.
‘오늘 따라 타이밍이 왜 이렇게 안 좋은 쪽으로 공교롭냐.’
“꼬맹아 잠깐만.”
리하는 유령씨를 돌아보며 말했다.
“우선 자리를 옮기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저쪽, 무의식 영역의 친구들이 있는 곳으로 말이죠.”
“그쪽으로 말이죠오. 하하. 그, 그래요오.”
리하는 유령씨를 이끌고 굳어있는 이들에게 다가갔다.
“모두 주목.”
일반인은 인지하는 것만으로 정신을 붕괴시키는 존재가 그들 앞에 섰다.
현실에 덩그러니 존재하는 관념상의 무언가.
그런 역설 그 자체가 그들을 휘어잡고 있었다.
“일단 무의식 영역으로 돌아가도록 합시다.”
그런 말 한마디만 남기고 꿈차원을 응용한 차원문으로 수백억을 이동시켰다.
무의식 영역의 이들은 리하의 그런 방대한 권능을 목도하며 생각했다.
개인의 힘이라기에는 너무나 거대하며,
자연재해라기에는 존재 자체가 너무나 부자연스럽다.
그래, 그건 역설이다.
이 세상에 있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그런 역설 말이다.
리하에게 압도당한 이들은 그저 굳은 체 그의 말에 따를 뿐이었다.
그 앞에서 이들은 협상을 가장한 협박을 그대로 수용했다.
“정신세계를 파괴하려는 의도는 아니었습니다. 그저 의식 영역과의 협상을 원했던 것 뿐입니다.”
“이렇게 많은 이들을 이끌고 말입니까? 이만한 인원이 무의식 영역을 이탈하는 것 만으로도 정신세계의 안정성에 문제가 될 듯한데 말입니다.”
“방식이 많이 과격하기는 했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그들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을 겁니다. 그리고 많아 보이시겠지만 무의식 영역의 일부만 이탈한 거라 이걸로는 큰 피해는 없을 겁니다.”
무의식 영역의 대표는 리하에게 변명하기 바빴다.
“그럼 민간인들을 건드릴 생각은 없던 겁니까? 제가 보기에는 지도층과 협상이 잘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그런 혼란을 일으키는 것도 서슴치 않았을 것 같은데요.”
“그, 그건...”
“됐습니다.”
‘지도층만 칠 생각은 아니었나보네. 방심했으면 큰일날뻔 했어.’
리하는 자신의 판단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에 안도했다.
그렇게 모두가 포기하는 분위기가 만들어지자 유령씨도 입을 열었다.
“이미 알고 계신 듯 하지만 저는 무의식 영역 쪽의 스파이에요오. 어제만 해도 함께 대화하던 사람이 사실은 세계를 파괴할뻔한 범죄자라니... 많이 놀라셨죠오.”
“그렇게는 생각 안합니다. 애초에 저희는 이 세계에 속하지 않은 외부인입니다. 저는 무의식 영역과 의식 영역 어느 쪽의 편도 아닙니다.”
“아이들 얼굴은 어떻게 봐야 할지 모르겠어요오.”
유령씨가 혼란스러워 보이는 표정으로 말했다.
‘이런 성격으로 어떻게 스파이 일을 했던 거지?’
“혹시 좀 혼자 있어도 될까요?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해요.”
그리 말하면서 유령씨는 무의식 영역의 구석 어딘가로 향했다.
‘과활성화도 끝났으니 얘네들도 다시 올라오지는 못할거고. 이제 올라가 볼까.’
리하는 일행들에게 어서 상황을 전하려 의식 영역으로 올라갔다.
그렇게 리하가 의식 영역으로 올라가 본 경관은,
한 세계의 파멸이자,
누군가의 탄생이었다.
* * *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누구나 태어나기 위해서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해야 한다.
언젠가 들어봤던 문구.
그 문장이 라니의 머릿속을 계속 맴돌았다.
“언니 이게 대체...”
“미안해. 그런데 필요한 일이었어.”
그들이 있던 들판은 녹아내려 기억 저편으로 사라지고,
이내 흩어져 재구성되는 정신세계가 그들 눈에 들어왔다.
사람들이 분해되어 휘날린다.
그들의 고민, 그들의 일상, 그들의 행복, 그들의 소중한 누군가.
삶이라 부르는 그것들이 낱낱이 분해되어 함께 휘날리는 환상이 겹쳐 보이는 듯하다.
그 삶의 조각들은 이내 세계의 일부가 되어 녹아든다.
그리고 그 휘날림 속에서 한 남자가 다가온다.
“리하씨 그리고 라니, 미안하게 됐습니다. 이건 꼭 필요한 일이라서요. 린 아니, ‘유령씨’? 당신도 어서 사과하세요.”
“...”
“같이 지낸 지도 꽤 되었는데 아직도 낯가림이 있나 보군요. 대신 사과드립니다.”
리하의 눈에 유령씨가 들어오자마자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리하는 대답하지 않고 곧바로 능력을 사용했다.
‘먼저 존재를 통제하는 능력부터.’
“너무 급하신 것 아닌가요? 일단 대화를 해봅시다.”
‘통제력은 침식 공간에서처럼 통하지 않아.’
리하는 차원을 중첩시키며 놀란 가슴을 진정시켰다.
‘하아. 진정하자. 아직 원래대로 되돌릴 방법이 없는 건 아니야.’
리하는 차가운 이성을 끌어올리며 계획을 세웠지만, 한편으로는 솟아오른 감정을 완전히 외면할 수는 없었다.
‘유령씨가 무의식 쪽이 아니었다고? 분명 그 말은 거짓말이었는데.’
[화신님이 틀릴 리는 없으니 지도층의 문제려나요오?]
‘아.’
리하는 유령씨의 말을 떠올리며 트릭을 알아챘다.
‘지도층이 하나의 정신으로 합치려는 행동을 문제라고 한 게 거짓말이었던 거군. 나는 그걸 지도층이 화신의 말을 듣지 않는다고 거짓말 한걸로 착각한거고.’
거짓말의 여부만 파악하는 리하의 능력을 교묘히 파고들어 그를 속인 것이다.
‘내 능력에 대해서는 어떻게 알고, 또 왜 이렇게 까지 한거지?’
리하 본인은 잘 모르고 있지만 그는 이현상체 특유의 직감이 매우 뛰어난 편이라 이렇게 속이는 작업이 필요했다.
‘그나저나 유령씨가 우리처럼 외부인이었다니. 그럼 여태까지는 다 연기였던 건가? 참, 어디까지가 진심이었는지 모르겠군.’
누군가의 속임수에 넘어간 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지만 썩 좋은 기분은 아니었다.
특히 더 이상 정든 대상을 신뢰할 수 없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나 리하는 씁쓸한 웃음과 함께 금방 털어냈다.
그리고 차원의 중첩도를 확인했다.
[중첩도: 40%]
‘현실에서는 보통 중첩도가 80%인데. 여긴 침식공간에서처럼 낮군. 특수한 공간이라 그런가.’
조금 더 집중하자 50%까지는 올랐지만 그게 다였다. 여러 번 능력을 사용하면서 올라간 숙련도로도 이 정도가 한계였다.
‘뭐, 상관없어. 유인만 할 수 있다면.’
리하는 새로운 차원을 얻고 아이와 세웠던 전략을 상기했다. 그리고 아이에게 눈짓했다.
아이는 조용히 고개만 끄덕였다.
리하는 끄덕임을 확인하자마자 걸어다니는 개념들을 생성했다.
남자는 그 개념들을 가만히 구경하며 말했다.
“흥미로워요. 단순하면서도 당신만이 만들 수 있는 강력한 무기군요.”
그런 한가로운 태도가 허풍은 아닌지 개념들은 남자를 둘러싼 구체에 가로막혀 어떠한 위해도 가하지 못했다.
‘개념 그 자체에게도 영향을 받지 않는다라. 무슨 방법인지는 모르겠지만 까다롭게 됐어.’
리하는 그들을 자세히 살폈다.
‘침식 공간과 비슷한 느낌이야. 잠깐, 침식공간?’
리하는 전에도 이와 비슷한 이들을 마주친 적이 있었다.
‘신을 섬기며 신성을 빌려오는 자들. s급 침식 공간에서 마주쳤던 이들과 완전 똑같군.’
신성을 이용하는 거라면 리하의 힘이 영향을 주지 못하는 것도 어느 정도 이해가 되었다. 신성은 현실의 법칙과는 다르게 작동하는 이현상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침식 공간은 신성에 의해 현실의 것이 변형된 것일 뿐이지만 이들은 신의 힘을 직접적으로 다루니 말이야. 더 이현상에 가까운 퍼포먼스를 낼 수 있겠지.’
그리고 리하는 금방 파훼법을 찾아냈다.
‘그래. 개념에게 영향을 받지 않는 게 아니야. 그저 현실과 간극이 너무 큰 힘이기에 현실의 개념들이 영향을 주지 못한 것 뿐이지.’
예를 들어 죽음이 없는 대상에게 죽음이라는 개념을 쓴거나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저자가 쓰는 신의 힘을 완전히 파악하지는 못하겠지만 일단 기하학적 형태를 띄고 있는 걸로 봐서는...’
리하는 그들의 힘에 맞는 카운터 개념을 다시 날렸다.
그러자 여태껏 평정을 유지하던 남자의 얼굴이 꿈틀했다.
그러면서 뒤로 물러나는 순간,
‘잡았다. 요놈.’
그들은 리하가 새롭게 얻은 차원의 통로로 빠져버렸다.
“꼬맹아, 따라와.”
“...끝나면 다 설명해 줘야 해.”
‘맞다. 요녀석 유령씨하고 친하게 지냈었지.’
리하는 자신이 아이에게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았던 것을 알아차렸다.
리하보다 착잡했던 건 어쩌면 아이일지도 몰랐다.
“그래.”
“흥, 가기나 하자.”
* * *
“여, 여기는 어딘가요오.”
겁먹은 듯한 목소리에 남자는 짜증난다는 듯이 대답했다.
“쉿. 조용히.”
순백의 세계. 모두 하얘서 물체의 외곽선조차 제대로 인식할 수 없다. 어디까지가 물체고 어디부터가 허공인지, 물체와 세상을 제대로 구분할 수가 없다. 그리고 그걸 넘어서
‘아예 공간과 물체가 일체형이군.’
물체와 세상을 구분하기 어려운 게 아니었다. 진짜로 둘이 하나이다.
‘이런 미친 공간이 다 있나.’
웬만한 침식 공간은 전부 경험했다 자부하는 그조차도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그들이 출구를 찾아 헤매고 있을 때,
차원의 주인이 도착했다.
“나가실 수 없을 겁니다.”
리하가 소름끼칠 정도로 무감정한 어투로 말했다.
그는 본인이 어떤 표정인지 모른 체로 말을 이었다.
“제 허락이 있기 전까지는.”
남자는 심각한 표정으로 동료에게 말했다.
“린씨 순간이동 술식을 완성하는 데 얼마나 걸리겠습니까?”
“잠시만요, 어어 그, 여기 좌표가 많이 이상해서... 못해도 십분은 걸릴 것 같은데.”
“신성을 있는 데로 써도?”
“그걸 가정한 게 아니었으면 아예 나갈 가능성조차 없었을 거예요오.”
“저분을 상대로 십분이라. 그것도 본인의 영역에서. 너무 가능성이 희박한데.”
“뭘 그렇게 속닥거리는 거지.”
훅
쩌엉!
리하의 주먹이 그들을 감싼 구체를 강타했다.
“잠깐만요, 리하씨. 이건 정말 우주를 위해 필요한 일이었습니다.”
“내가 만났던 신의 사도들은 다 그렇게 말하더군. 그리고 실제로는 난장판을 쳤지.”
‘...이번이 두 번째긴 하지만.’
리하는 굳이 뒷말을 하지 않고 상대를 압박했다.
우웅
리하의 구슬의 맥동이 몸을 타고 이내 손에 도달하자,
부르르르
쩌어어엉
어딘가 위험한 소리와 함께 손에 잡혀 있던 구체가 미친 듯이 흔들리며 제 구성을 잃어가기 시작했다.
“...이런.”
구체가 자꾸만 열화되어 이차원의 원으로 깜박거렸다. 다른 불안정한 형태로 변하며 조금씩 구체의 구성요소들이 없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구체가 수복되는 속도가 더 빨랐다.
리하는 구체를 놓치 않은 상태에서 차원을 조작했다.
‘왜곡 지점은 구체 안. 물체의 모양은 무작위.’
구체 안으로 공간이 도드라지면서 어떤 물체가 만들어진다.
원래라면 보호막의 안 같은 술자의 영역은 침범하기 어렵다.
‘그런데 지금 구체 안의 공간도 내 지배 아래 있어서 말이야.’
그러나 그들이 있는 차원 자체가 리하의 소유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생각보다 저항이 거셌지만 결국 구체 안에는 물체가 만들어졌고,
부정형의 물체가 남자를 찌르려 할 때,
꾸구구구
남자는 간신히 반응하여 자신이 만든 도형 안에 물체를 가두는 데 성공했다.
‘저게 가둬지기도 하는 거였어?’
그건 외곽선 자체가 제대로 정의되지 않은 물체라 크기라는 것이 딱히 존재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크기가 정해지지 않은 것을 가둔다는 것 자체가 역설이었다.
‘물체를 만들어내는 공간 자체를 억누르지 않는 이상에야... 정말 그렇게 막은 건가?’
실로 엄청난 기교다.
‘그 단시간에 그것까지 파악하고 막아낸 건가. 도형의 수복력도 만만치 않고. 쉽지 않은 상대야.’
“꼬맹아, 시원하게 휩쓸어줘.”
“왜 혼자 튀어나가서 아무것도 못하고 돌아오고 그래. 폼 떨어지게.”
“크흠, 알았으니 빨리.”
곧 아이를 중심으로 무언가가 튀어나온다.
이 세상과 어떤 공집합도 없는 완전히 새로운 것.
신이나 가능한 진정한 창조의 영역에 닿은 그것.
그건 이 세상의 어떤 걸로도 해석할 수 없어 마치 공백처럼 보인다.
하얀색의 무언가를 보자마자 남자의 눈이 크게 뜨였다.
곧 그 하얀 불가해의 파도가 휘몰아치며,
때로는 바람에 휘날리는 이불처럼 따스하게,
때로는 거침없는 토네이도처럼 맹렬하게,
그들을 덮쳤다.
구체가 해석할 수 없는 방식으로 뒤틀린다.
“과연 이것도 받아낼 수 있을지 보자고.”
리하가 무기질적으로 입꼬리를 말아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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