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풍(風)각주(3)

사람이 사람에게 배신을 당한다면?
결코 사람을 쉽게 믿을 수 없을 것이다.
명정비록(明正秘錄)
마음을 바로 세우는 정신수양의 일종인 '심공(心功)'이다. 풍각주의 말에 의하면 혈천신공의 부작용을 일부 상쇄하는데 도움을 준다고 했다. 하지만 아직 혈천신공의 부작용을 겪을 만한 경지에 오르지 못했다.
'풍각주를 절대적으로 믿기에는 내가 당한 배신의 상처가 너무 컸으니까.'
처음에 풍각주가 건넨 명정비록은 그 날 하루 탐독을 한 뒤 접어뒀다. 당장 명정비록을 익힌들 효과를 발휘한다고 생각할 수도 없고, 오히려 나에게 이것을 건넨 의도가 의심될 뿐이었다.
그렇게 다음 날부터 일상적으로 혈천신공을 익히고 있으니 풍각주가 내 속을 어찌 들여다봤는지 대뜸 내지르는 것이 아닌가?
'오호, 돌다리도 두들겨보고 건넌단 말이지? 오냐, 겪어봐야 알 놈이구나!'
그 말을 끝으로 수련을 도와준다는 명목 하에 풍각주의 구타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 시간은 근 한 달간 이어져 있었다.
"헉헉"
풍각주가 내지르는 검에 오른쪽 볼이 갈라질 뻔했다. 황급히 유령보를 밟지 않았다면 당할 뻔 했을 것이다.
"정녕 죽일 작정입니까?"
"죽이기는? 잘 도 피해내는구나! 자, 이번에도 계속 피해보거라. 아니, 아주 죽을 때까지 피하기만 하거라. 허허!"
풍각주의 검이 빛을 발하면서 순식간에 쇄도해왔다. 내가 유령보를 사용해 피하는데는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고 생각하는지, 그것보다 배속으로 공격해 들어오는 것을 보고는 눈앞이 캄캄해졌다.
'공격은 최선의 방어!'
전투에 있어 절대적인 진리를 풍각주가 깨우쳐 줌에 따라 혈천신공 제이식 무중섬인(霧中閃刃)을 펼쳤다. 상대의 쾌검에 대항하기 위해 떠올린 최고의 수는 극쾌다. 물론 풍각주는 충분히 나를 제압할 수 있을 정도로 경지의 차이가 높지만, 나를 극한으로 모는 정도로 수위를 조절해주고 있기에 가능한 한 수였다.
풍각주의 검을 빠르게 한 차례 처낸 뒤 다시 뒤따르는 두 번째 검으로 반격에 들어갔다. 무중섬인은 한 초식에 두 번의 움직임으로 들어가는데, 첫 번째 검격과 그에 따른 잔상으로 보이는 두 번째 수까지 모두 진초였기에 풍각주도 빠르게 수비 초식으로 전환할 수 밖에 없었다.
'허참 기가 막히는군.'
주훈은 고작해야 군사전 말단 정보요원으로 갓 스물에 접어든 시기에 혈천신공을 격체전수 받았다. 운 좋게 천하제일의 무공을 얻은 놈의 환상을 짓밟아 주려고 했는데, 오히려 발군의 기재가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 정도로 검술에 대한 이해가 상당히 높았다.
'꼭 과거 귀살을 보는 것 같군.'
반대로 주훈은 이미 한 번 혈천신공을 모두 익혔고 8성까지 연마를 했던 상태이기에 풍각주의 실전을 방불케 하는 수련이 오히려 빠르게 그를 성장시키고 있었다.
'혈천신공은 극한의 실전을 통해 완성된다고 했던가?'
한 달 전부터 본인에게 달려들던 풍각주에게 왜 이렇게 달려드냐고 했을 때 그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그리고 그 말은 정확했다.
"하압!"
주훈은 무중섬인으로 빠르게 공세로 전환하면서 벌어진 거리를 틈타 제삼식 신뇌격격(迅雷殛擊)을 터뜨렸다. 풍각주가 뒤로 물러서면서 다시금 반탄력으로 검을 내지를 시점에 맞춰 그 공간을 정확한 타점 삼아 한 점에 힘을 응축시킨 강검을 펼쳤다.
파앙
공기를 찢어발기는 소리가 마치 천둥소리와 같았고 무중섬인에 이어 신뇌격격으로 이어지는 검초가 연환기라 보아도 무방할 정도로 매끄럽게 전개되었다.
콰쾅!
주훈의 검이 풍각주의 무복 앞섶을 가르려 했지만 풍각주의 가공할 내력이 담긴 초식이 이를 상쇄해 버렸다. 간발의 차이지만 뒤늦게 나온 풍각주의 검이 더 빠르게 주훈의 검을 쳐냈기 때문이다.
'이런! 흑풍쇄영(黑風鎖影)을 쓰고 방어만 했다??'
검과 검이 부딪혔다는 소리보다 강렬한 타격음이 쩌렁쩌렁 울려퍼쳤고, 주훈은 풍각주의 검에 튕겨나 연무장 구석으로 처박혀 버렸다.
"끄윽!"
"엄살 부리지 말도록. 오늘은 여기까지 하지."
스팟
그만하자는 말에도 주훈은 흙먼지를 날리며 재차 달려들었다. 과연 눈빛 만큼은 강렬한 독기, 아니 독기를 넘어서 살기까지 엿보이고 있었다.
'신픙참(神風斬)'
까강!
이미 내력이 바닥을 드러낸 주훈이 백번 더 달려든다 한 들 되받아치는 풍각주의 한 수를 감당할 수는 없었다.
주르르르
간신히 연무장 끝에 선 주훈은 여전히 풍각주를 노려보고 있었다. 풍각주는 그런 주훈의 발자국을 보며 순간이지만 눈에 이채를 발하였다.
'허허, 유령보에 혈천신공이라. 죽은 귀살이 알면 웃을 일이구먼.'
다시금 주훈이 달려드려 하자, 풍각주는 검을 회수하고 몸을 돌려버렸다.
"그만! 수련이었으니 망정이지. 그게 아니라면 네놈의 그 투기가 저승길을 당겼을 게다."
주제를 알고 덤비라는 말이었다. 입안에 잔뜩 들어간 흙을 뱉어내고, 그대로 돌아 하늘을 보며 누워버렸다. 생각이 복잡했다.
"캬악 퉷!"
'하, 죽겠구먼!'
온 몸이 죽겠다고 농성을 벌이는 것처럼 근육이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풍각주와 함께근 한 달이라는 시간 동안 매 수련이 죽음의 경계에 닿아있었다. 그만큼 극한으로 날 몰고 있었다. 덕분에 혈천신공은 어느덧 3성을 넘어 4성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미 지나온 길을 다시 가는 것이기에 이런 가공할 수련 속도를 가질 수 있었다.
'제삼식 신뇌격격까지는 이제 자연스럽다. 그런데 ··· 점점 주체할 수 없군.'
결론적으로는 풍각주의 말이 다 맞았다. 경지가 급격히 올라가면서 전투에 임할 때 평정심은 무너지고, 오로지 상대를 쓰러뜨려야겠다는 투기만 치솟았다. 그리고 오늘은 그것을 넘어서 내 생명이 풍각주에 의해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자 오히려 내 안에 잠재되어 있던 살심이 강하게 터져 나왔던 것이다.
'명정비록 ···.'
결국 풍각주의 말처럼 명정비록에 수록된 심공을 익혀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 * *
오늘도 어김없이 사무각으로 수련하러 갈 생각이었는데, 맹주전 시비가 날 찾아왔다.
"맹주님께서 부르십니다."
사무각에서 수련을 시작한 지 한 달이 지났으니 월 마다 나를 점검, 아니 감시하는 맹주의 호출이 있을 법했다. 얼른 채비를 하고 맹주의 집무실로 들었다.
"맹주님을 뵙습니다."
포권을 취하고 고개를 숙였다.
"허허, 둘만 있으니 사부라 부르라 하지 않았는가?"
"그래도 어찌 ···."
"그래 아직은 어색하고 불편하겠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자네의 후견인일세."
"···네."
그랬다. 맹주 손범호는 항상 이렇게 사람 좋은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결정적인 순간에 날 죽였다. 아직도 지금 이 순간만 놓고 본다면, 내가 잘못 본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그의 연기는 완벽했다.
"상의를 풀게."
그리고 시작된 맹주의 추궁과혈. 아니 신체 검사였다. 맹주는 막힌 혈맥을 뚫어준다는 명목으로 상의를 탈의하고 추궁과혈을 도와줬다. 혈천신공을 격체전수받았기에 맹주 독문무공을 전수받을 수도 없는 상황이고 하니 , 나름 비공식 사제지간으로써 지원해준다는 것이 추궁과혈이었다.
"자네, 혈천신공의 성취는 어떻게 되고 있나?"
"자질이 부족하여 아직 1성에 머물러 있습니다."
"흠 ··· 그런가? 허허! 이제 시작이니, 너무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게."
1성이라 함은 무공을 연마한 초입단계로 볼 수 있고, 대성(大成) 또는 극성(極成)이라 한다며 일반적으로 12성을 이야기하는 것이니 맹주의 말에서 느껴지는 실망감도 약간은 이해가 되었다.
'혈천신공은 특이하게, 일정 경지에 접어들지 않고서는 그 경지를 알 수가 없다.'
천하제일인의 신공을 격체전수 받았다지만, 이제 한 달이었다. 나이도, 자질도 따지기 전에 절대적인 시간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그것을 이해했기에 맹주도 더는 말하지 않았다.
그때 밖에서 시비가 맹주에게 고하였다.
"맹주님, 곽 소협 들었습니다."
"들라하게"
맹주 집무실로 한 사내가 들어왔다. 키가 크고, 눈매는 날카로웠지만 백색 영웅건이 잘 어울리는 미남자였다.
"사부님을 뵙습니다."
"!!!"
'곽··· 무빈···.'
그를 수식하는 문장은 한 둘이 아니었다.
신흥무가 중 일좌(一座)인 신무세가(神武世家) 곽가의 소가주.
정파 오대신성.
무림맹주의 기명제자.
그리고 내 ··· 사형.
'전생에 날 완벽한 절름발이로 만들었던 괴물 같은 놈!'
드디어 만났다.
"어서 오너라. 앉도록 하지."
세 사람이 자리에 착석하고 맹주 손범호와 곽무빈이 간단한 안부 인사를 주고받았다.
"사부님, 오늘 부르신 연유는 혹 이 분과 연관이 있습니까?"
꿔다 놓은 보릿자루 마냥 앉아서 있다 보니 곽무빈이 먼저 물어보았다.
"하하, 내 정신 좀 봐라. 자, 서로들 인사하거라. 비록 사정이 있지만, 내가 후견인이 되어주기로 하였으니, 비공식적이나마 둘은 사제지간이나 다름없다."
"네!?"
곽무빈은 정말 놀랐다는 듯이 무림맹주를 쳐다보자 맹주가 짧게 부연설명을 해주었다.
"무림맹주의 신분이다 보니, 부득이하게 대의를 위해야 할 일들이 있는 법이다. 그 점을 헤아려주길 바란다."
제법 맹주가 단호하자 곽무빈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을 하면서도 더는 묻지 않았다.
"곽무빈이요."
"··· 주훈입니다."
어색하기 그지없었다. 전생이었다면 선망하는 대상을 만났기에 그에게 잘 보이기 위해 강아지 마냥 꼬리라도 흔들었겠지만, 이 전생에서 그를 겪어본 적이 있었기에 결코 반갑지 않았다. 최대한 티를 내지 않은 것만 해도 대단한 절제력이라 할 수 있겠다.
"너희 둘 모두 올해 스물이구나. 공교롭지만 사형제 관계는 나이보다 입문한 순이니 무빈이 네가 사형이다."
"네···."
"네."
맹주 역시도 우리 둘 사이에 흐르는 기류를 예상하고 있었던지라 빠르게 용건을 말하였다.
"둘을 한 자리에 부른 것은 단순히 소개를 하고자 함이 아니다."
곽무빈은 그의 의중을 전혀 눈치 채지 못했기 때문에 이어지는 말에 집중하였다.
"주훈의 무공수련을 돕거라."
"사부님! 어찌!"
곽무빈은 반발심이 터져나왔다. 갑작스럽게 사제 들어왔다는 것도 기분이 나쁜 상황인데 수련까지 도우라니? 정녕, 진심으로 하는 말인가 싶어 감히 맹주의 말에 강하게 반문했다.
'이런 제길! 곽가만으로도 부족하다는 말이냐!'
신무세가 곽가의 지원을 받아 무림맹주의 자리에 오른 손범호였다. 그런데도 본인만이 아닌 다른 이를 제자로 들인다는 것 자체가 용납할 수 없는 일인 것이다.
곽무빈이 예상보다 강한 반발심을 보이자 무림맹주가 주훈을 보고 말했다.
"자네는 밖에서 기다리도록 하지."
"네, 사부님!"
주훈의 대답에 들어간 '사부님'이라는 말에 곽무빈이 신경질적으로 주훈을 노려보았다. 주훈도 알고 있었다. 곽무빈의 신경을 자극하는 방법을.
그렇게 주훈이 멀어져가자 곽무빈은 맹주에게 울분을 토했다.
"사부님, 아니 맹주님! 제가 그렇게 부족합니까?"
정파 오대 신성 중 일인으로 뽑히는 이가 과연 어디가 부족하단 말이냐고 항변하는 곽무빈이었다.
"정녕, 네게 부족함이 없었더냐?"
"그게 무슨 말입니까?"
"현재 너의 꿈은 차기 맹주에 가 있다는 것을 내 잘 알고 있다. 그리고 너는 충분히 그럴만한 실력도 갖추고 있다. 다만,"
곽무빈은 이어지는 손범호의 말이 제발 설득력 있기를 바랄 뿐이었다.
"네게는 늘 경쟁이란 게 없었다."
"그게 무슨!"
당치도 않다는 듯 한 곽무빈의 대꾸에 손범호의 말투가 거세졌다.
"신무세가 곽가의 적장자로 태어났고, 무림십대고수인 내 친우(親友) 곽철용을 아비로 뒀다. 그와의 약조에 따라 무림맹주인 나 손범호의 제자도 되었지. 자연스럽게 정파무림 오대신성으로 불리기도 했다."
손범호는 그 부분을 강하게 지적했다.
"여기서 네가 스스로 이룩한 게 과연 무엇이냐?"
"그건 ···."
결국에는 좋은 집안에서 태어났고, 좋은 무공에, 영약에, 지위까지 얻은 것이었다. 그것에 대한 부분을 지적하니 할 말은 없었지만, 분명 개인의 피땀 어린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생각했다.
"사부님! 그 부분은 부정하지 않겠으나, 저 또한 분명히 ···."
"알고 있다. 그러니 이제는 네게 증명할 기회를 주겠다."
한 차례 강하게 몰아붙인 뒤에는 완급 조절이 필요하다는 것을 노련한 손범호는 잘 알고 있었다.
"경쟁자를 능가하는 아니 압도하는 모습을 보여준다면, 능히 무림맹에서 너를 중히 쓸 것이다. 맹주의 제자가 아닌, 곽무빈 한 사람으로써 인정받게 될 것이다."
"사부님 ··· 반드시 증명해 보이겠습니다."
사부 손범호의 말에 이미 설득된 곽무빈은 무언가 새로운 목표로 눈을 반짝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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