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사형 곽무빈(2)

곽무빈과의 대련을 끝내고 어느 정도 내공을 회복한 뒤 다시 사무각을 찾았다. 곽무빈을 이긴 것에 있어 풍각주의 역할이 대단히 컸다.
"네놈, 혈천신공을 익히는 속도가 대단하구나?"
"그야 각주님 덕분 아닙니까?"
"흥, 입에 바른 소리 말거라! 타핫!"
또 시작됐다. 풍각주는 이번에 전력을 더 올려서 나를 공략했고, 어김없이 모든 것을 쏟아낼 수밖에 없었다.
제일식 혈영환무부터 시작하여 제삼식 신뇌격격까지 자연스럽게 연환기로 펼쳐냈다. 이미 곽무빈에게 썼던 방식으로 공격해 들어가자 풍각주 역시 본인의 절기를 꺼내들었다.
'폭풍열파(暴風裂破)'
압도적 강함!
풍각주가 날린 검이 하나의 폭풍처럼 휘몰아치면서 공기를 뜨겁다 못해 탈 정도로 데워버리는 것만 같았다. 연환기로 펼친 세 초식 모두 열 폭풍에 휘말려 버리자 주훈의 공격이 무위로 돌아갔다.
'늘 그랬다.'
풍각주의 강함에 새삼 혀를 내두른 주훈은 본인의 연환기가 깨질 것이라는 예상을 함과 동시에 다음 수를 준비두었다.
제사식 환멸유영(幻滅幽影)
앞선 연환기 뒤에 숨겨 놓은 비장의 한 수! 전혀 예상치 못한 순간에 상대를 격살시키는 암검의 일종으로 살수의 검보다 더 은밀함을 가진 검이었다.
"헙!"
처음으로 풍각주의 입에서 기함이 터져 나왔다. 방금 전까지 열폭풍으로 연환기를 무너뜨린 풍각주에게 어느새 눈앞까지 다가온 주훈의 암검은 그 어느 때 보다 막기 어려워 보였다.
'노렸구나! 이놈! ··· 풍영벽(風影壁)!'
주훈의 검은 풍각주의 몸에 한 치를 남겨두고 전진하지 못했다. 풍각주가 입은 무복의 앞섶이 펄럭이기 시작하더니 바람의 벽이 주훈의 검로를 막아 세워버렸다.
"대단하군!"
"후 ···"
약간의 시간을 벌자 풍각주가 재빨리 뒤로 퇴보하였고, 주훈은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회심의 일격마저···간다!'
어느새 주훈의 눈은 점점 혈광으로 물들기 시작했고, 비무를 통한 수련이 아닌 생사결을 앞둔 무인과 같은 모습을 취하고 있었다.
은은하게 드러나는 살기!
"그만!"
풍각주의 일갈에 주훈의 두 눈에 물든 혈광이 점차 옅어졌다.
"이 ···런 죄송합니다."
"실력이 늘었다고 좋아 하다간 점점 짙어지는 투기와 살심에··· 결국 잡아먹히고 말게야!"
풍각주는 뼈있는 조언을 뒤로하고 연무장을 빠져나갔다.
"하! 제길!"
실력은 분명 늘고 있다. 그것도 무서울 정도로 빠른 속도로. 하지만 마음이 조급한 건 살기 위해 변수를 만들어야 된다는 일념뿐이었다.
격장지계를 펼쳐 곽무빈을 이겼고, 이제는 작정하고 덤벼들 곽무빈을 제대로 상대해야 된다는 생각에 몇 날 며칠 동안 사무각에 죽치고, 혈천신공에 매달렸다. 그 결과 혈천신공은 어느 덧 사성의 문턱에 진입했다.
'조급했다.'
곽무빈과의 대련 때도 까딱하다가 그를 죽일 뻔 했다. 만약 그랬다면 이미 손범호와 신무세가에서 날 가만두지 않았을 테고, 결론은 전생보다 더 이른 죽음이 기다렸을 것이다.
"명정비록 ···."
결국에는 풍각주의 말대로 명정비록을 익혀야 했다. 그를 믿든 믿지 않던 간에 지금은 이 투기와 살기를 잠재워야할 필요성이 있었으니까.
* * *
며칠째 칩거를 하며 명정비록을 수련했다.
수련 방법은 간단했다. 구결을 암송하고, 참선하면 된다. 인간에게 번뇌를 심어주는 오욕칠정을 조절하는 것과 같이 살심과 투기를 조절하는 것에 초점을 맞춘 구결이었다. 심상 속에서 살심을 격발시키고 꾸준한 참선으로 살심을 억제해나간다. 살심을 억제해 나간 경험이 쌓이면 쌓일수록 명정비록의 구결은 살아 숨 쉬듯 더욱 강한 위력을 발휘하게 된다.
심상 속에서 살심을 격발하는 것 자체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주훈은 본인과 대결을 벌였던 상대를 하나하나씩 떠올려 그들을 정신세계에서 죽이고자 했다.
혈천신공을 익힐 수 있게 도와준 풍각주
정파 오대신성 중 한 명인 곽무빈
나에게 죽음을 선사했던 무림맹주 손범호
우선 이 셋을 떠올렸다. 그들은 각자가, 때로는 동시에 내 마음 속에서 나를 극한으로 몰아붙였다. 혈천신공이 아니더라도 충분히 살심을 제어하기 어려운 상황까지 내몰리면서도 구결을 암송하며 살심을 제어하기 시작했다.
"하 ···"
전신이 땀으로 축축하게 젖은 주훈이 한 숨을 토해냈다. 육체는 정신이 지배한다고 했던가? 참선을 수행하는 도인처럼, 면벽수련을 행하는 고승처럼 움직이지 않고 가부좌를 튼 채 명정비록을 수련했음에도 생사결을 끝낸 직후와 같이 극도로 힘의 공백을 느끼고 있었다. 그만큼 정신적인 피로도가 상상을 초월한다는 것.
명정비록을 수련할 실마리를 찾아내고, 수련에 돌입하고, 마음을 다스릴 구결을 획득한 것.
며칠 간의 노력에 대한 결과라 하기에는 대단할 정도의 성과를 얻어냈다. 그리고 그 뿐만 아니었다.
"혈천신공이 이제 사성에 완벽히 진입했다."
가부좌를 튼 상태에서 그대로 진기를 일주천하자 바로 느낄 수 있었다.
갓 사성의 문턱에 도달했었던 혈천신공이 심상수련을 통해서 완전히 자리 잡은 것이었다. 특히나 내공이 3할 정도 늘어난 것은 굉장히 고무적이라 할 수 있었다.
일주천을 끝내자 몸은 어느 정도 회복이 되는 듯 했지만, 소진된 심력은 돌아올 기미가 안 보였다.
'이럴 때는 잠이 약이다.'
무엇이든 잘 먹고 잘 쉬어야 한다는 절대적 진리는 변하지 않았으니까.
* * *
푹 잘 자고 일어났다. 고갈된 심력이 충만해진 것 같았다. 잠자리를 정리하고 거처의 마루에 앉아 잠시 멍하니 있던 중 한 사내가 내게 걸어왔다.
'처음 보는데?'
평소 맹주전에서 보낸 시비와 달랐다. 보통의 키에 호리호리한 체격을 가진 사내. 무림맹에서는 대부분 백색 무복을 즐겨 입는데 검은색 무복을 입고 나타난 사내가 정확히 주훈에게로 걸어오고 있었다. 인상 자체도 평범해 딱히 기억에 남을 것 같지 않았지만, 왠지 모르게 보통 인물로 보이진 않았다. 그만큼 정제된 무언가가 느껴졌던 것이다.
"누구십니까?"
"주훈 공자님 맞으십니까?"
공자라는 호칭이 낯설었지만, 어쨌든 무림맹주의 비호를 받고 있는 상황이기에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제가 맞습니다."
"군사전에서 왔습니다. 적비라 합니다. 제갈군사께서 모셔 오라 했습니다."
"아, 그렇군요. 안내해주시죠."
"그럼 ···."
따라 가는 동안 그의 움직임을 살펴보았다. 보폭의 일정함, 발자국 소리, 이동하는 동선 역시 군사전 특유의 냄새가 가득했다.
'일개 대원은 아닌 것 같군.'
기감에서 느껴지는 바도 딱히 없을 정도로 기도 역시 완벽하게 감추고 있는 것으로 보아 상당한 실력자임이 분명했다. 그리고 정확히 인지하기 어려우나 상대 역시 본인을 탐색하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이상하군.'
혈천신공은 상대가 경지를 파악하기가 쉽지 않은 무공이다. 대부분의 무공을 익히면 신체의 변화, 기도의 변화가 뚜렷하게 보이는 편이다. 그러나 혈천신공은 그런 내외부적인 요소들이 일체 표면적인 징후로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쉽사리 본인의 경지를 알아차리기 어렵다.
'으음 ···.'
그런데 저 자를 보자마자 이상하게도 혈천신공이 반응하고 있었다. 주훈은 인지하지 못하고 있지만 함께 걷는 동안 그의 안광이 점점 충혈 되기 시작했다.
'등을 보인 저자가 자객일 수도 있잖아?'
군사전 소속이 아니라 날 죽이러 온 자라면? 등을 보이고 있는 지금이 기회가 아닌가? 라는 생각이 점점 주훈이 사로잡히고 있었다.
도리도리
'내가 무슨 생각을 ···'
눈에서 비취는 혈광이 점점 강해지기 시작하더니 순간적으로 저자를 베고 싶다는 충동이 빠르게 올라왔다.
'으으 ··· 왜 이러지?'
주훈의 통제를 벗어날 것처럼 혈천신공의 내력이 자연스럽게 끓어오르려 하고 있었다.
끓어오르는 살심!
'으윽 ··· 저자를 베어야겠다.'
검병에 살며시 손을 올렸다. 빠르게 검을 휘둘러 상대에게 날려버리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타탁!
황급히 검병을 잡은 오른손을 반대손을 이용해서 꽉 움켜쥐었다.
'··· 명정비록'
즉시 구결을 암송했다. 살심으로 채워지고 있는 뇌리를 한 줄기 청량한 물줄기로 씻어내 버리는 것과 같은 느낌이 들자 안광을 잠식하던 핏빛이 점차 줄어들었다.
"흠, 무슨 일 있으십니까?"
내게서 틀린 갑작스러운 소리에 앞서 걷던 군사전 소속 무인이 바로 뒤를 돌아보며 말을 걸었다.
'후···.'
"아, 별일 아닙니다. 수련 중 다쳐서 그만 ···."
"그렇군요. 조심히 오시지요. 곧 다와갑니다."
"네, 알겠습니다."
알 수 없는 기운의 격동을 재빨리 잠재우지 않았더라면 저자를 벨 뻔했다. 최대한 태연하게 대처한 후 방금 전 느낀 이질적인 기운을 찾으려 했으나 씻은 듯 사라쳤다.
'하··· 이상하군.'
그렇게 의구심을 가진 채 걷다보니 군사전 입구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같은 시각 반대편 길에서도 두 사람이 걸어오고 있었다. 한 사람은 군사전 소속을 드러내는 특유의 검은 무복을. 다른 한 사람은 백색 영웅건은 쓴 차가운 인상의 미남자가.
'곽무빈'
"군사 전에서 네 녀석까지 불렀다고?"
"곽 사형을 뵙습니다."
"뭐? 사형? 이 가증스러운 새끼!"
얼마 전 당한 것에 대한 충격이 컸는지 주훈을 보자마자 씹어 먹을 듯 으르렁거렸다.
"설마 그때 이 사제에게 ···"
"그만! 닥쳐라!"
주훈이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 지 눈치 챈 곽무빈이 재빨리 그의 말을 막아버렸다.
"이따 따로 보자. 망할 자식아!"
"하하, 이리도 사제를 귀엽게 봐주신다면 그리해야지요."
곽무빈은 주훈의 비아냥에 대꾸도 없이 군사전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들어가 보시지요."
본인을 인솔한 군사전 무사가 정중하게 주훈을 내전으로 들 것을 권했다.
'흠, 내가 오해했을 수도.'
"감사합니다."
곽무빈에게 대하는 것과 달리 군사전 무사에게 정중하게 화답하며 안으로 들었다. 혈천신공이 사성에 접어들면서 살심이 더 강해졌나보다.
그렇게 안으로 들자 먼저 들어간 곽무빈이 총군사 제갈성혁과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어서오게."
제갈성혁은 주훈 역시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맹주님께서 얼마 전 자네 둘을 불렀다고 들었네. 서로 인사는 나눴겠지?"
"네, 군사!"
내가 씩씩하게 대답하자 곽무빈도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좋네, 다들 바쁜 사람들이니 본론부터 말하겠네."
그러더니 총괄군사는 한쪽 벽면에 놓여있는 무림세력에서 무언가를 가리켰다.
"사파의 준동이 심상치 않다네."
이어지는 군사 제갈성혁의 설명에 의하면 천하제일로 꼽히는 천하삼대고수 중 두 명이 생사결을 벌이다 죽음을 맞이했다. 그 결과 현 무림맹주가 건재한 정파에 의한 평화 통치가 예상될 줄 알았으나 결과는 정반대로 사파가 준동 한다는 것이다.
"사파 쪽 동태가 심상치 않네. 그 동안 귀살에 의해 눌려 있었던 사파들이 전국 각지에서 활개를 치고 있다네."
'귀살이 정파인이라 했었지?'
사무각 풍각주의 말에 의하면 귀살은 본래 정파인이었다고.
"그건 늘 있어왔던 일 아닙니까?"
곽무빈은 당연하다는 것 아니냐는 듯 물어왔다.
"사파 악인들은 늘 존재해왔었고 문제를 일으키고 있었지. 하지만 이번에는 양상이 달라졌네."
군사 제갈성혁이 일어나서 세력도에 몇 곳을 가리키며 다시금 말을 이었다.
"귀살이 이끌었던 귀령문 지배에서 벗어난 사파들이 적토문, 흑수련, 천혈문, 혈사방 등 거대 사파를 중심으로 이합집산하고 있다네."
"세력의 재편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군요."
"그렇네. 그것도 빠른 속도로 말일세. 특히 사파들은 정파와도 같은 지역에 있기 때문에 그들의 본격적인 세력 확장에 벌써 몇몇 무림맹 산하의 문파들이 당했다고 하네."
"심각하군요."
제갈성혁과 곽무빈의 대화를 듣다가 의문이 생겼다.
"그러면 마교 쪽은 어떤 상황이니까?"
사파의 발호보다 심각한 것은 무림 최대 단일 세력을 보유하고 있는 마교라 할 수 있겠다. 특히나 마교주와 소교주가 모두 죽었으니 그 혼란은 더 클 것이 분명하다.
"다행이도 그쪽은 아직 시간이 있다네."
"무슨 말씀입니까?"
" 교주와 소교주를 모두 잃은 상황이라면 어떨 것 같은가?"
지금껏 설명을 해주던 제갈성혁이 곽무빈과 주훈에게 질문을 던졌다.
"음 ··· 권력쟁투가 시작되겠죠."
"오호 정답일세!"
주훈의 대답에 제갈성혁은 제법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마교에 붙여 놓은 첩자에 의하면 본단에서 세력다툼이 한 창이라네. 한 동안은 권력쟁투로 인해 쉽사리 움직이긴 어려울 걸세."
제갈성혁의 설명을 들은 뒤 불현듯 한 사람이 떠올랐다.
'···협마 장경학'
"자, 각설하고 자네 둘을 부른 것은 특임대를 창설하기 위함이네!"
"특임대?"
제법 놀라는 곽무빈과 달리 주훈의 눈은 반짝 빛났다.
'드디어 올 것이 왔군!'
Comment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