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니아케아 귀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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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히
작품등록일 :
2024.12.31 0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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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3.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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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22 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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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인의 성 (5)

DUMMY

“아, 이름 때문인가요?”


당황한 희민의 표정을 읽은 여성은 익숙하다는 듯 여유로운 미소를 띠었다.


“이름표는 눈을 봐야만 뜨거든요. 제가 개인정보에 좀 민감해서.”


확실히, 얼굴의 반 정도를 가린 검은 가면 때문에 희민은 그녀의 눈을 찾을 수 없었다.


고향에서의 실명도 아닌 전장에서 무작위로 정해주는 이름을 개인정보라고 볼 수 있는지는 의문이 남았지만, 거기까지는 신경쓰지 않기로 했다.


“그럼, 모처럼 내려오신 김에 게임이나 한 판 즐기시는 게 어때요?”

“네? 아, 아뇨, 전 딱히...”

“흐으음~. 하긴, 이런 곳이 익숙할 만한 분 같지는 않네요. 오히려 그래서 재밌을 법도 한데.”


감정을 종잡기 어려운 말투로 중얼거리며, 여자는 희민의 곁에 바짝 붙어 그의 주위를 한 바퀴 천천히 맴돌았다.

그의 지식으로는 식별할 수도 없는 강렬한 향수 냄새가 야수처럼 숨통을 확 조여왔다.


“뭐, 억지로 끌고 다닐 수도 없죠. 천천히 둘러보세요. 안쪽으로 들어가보면 아마 깜짝 놀라실 걸요.”


가면에 가려지지 않은 얼굴 틈으로, 윙크를 하듯 입꼬리 근육이 씨익 올라가는 것이 어렴풋이 보였다.

그 말을 끝으로 사뿐히 손을 올려 인사를 건넨 여자는, 그대로 등을 돌려 도박장 한복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위험한 사람이었다.’


향수 냄새가 어느 정도 연해지고 나서야 희민은 편히 숨을 내쉴 수 있었다.

말투 하나하나, 몸짓 하나하나가 상대의 감정을 자극하기 위한 행동인 것처럼 느껴졌다.

물 위를 걷는 듯한 우아함 속에서 이루 말할 수 없는 위압감을 느낀 것도 어쩌면 그 점 때문이었다.


‘조심히 둘러만 볼까.’


게임이나 유흥 같은 것에 손을 댈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다만, 멜이 남긴 ‘찾는 사람이 멀지 않은 곳에 있다’라는 말이 여전히 마음에 걸렸다.

그렇다고 지민이 대뜸 이런 도박장 어딘가에 있을 거라고 생각하긴 어려웠지만, 적어도 한 번쯤은 훑어볼 필요가 있겠다 싶었다.


가면 쓴 여성과 같은 사람에게 다시 붙잡히지 않게 최대한 경계하며, 희민은 조심히 도박장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그렇게 10분 정도 경과했을 무렵까지도, 그는 별다른 무언가를 찾을 수 없었다.

아무리 돌아다녀봐도, 14살짜리 여자아이를 가둬둘 수 있을 만한 공간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틈틈이 도박에 열중인 헌터들의 이름도 확인해보았으나, [레드하운드]의 멤버라고 전해들었던 이름도 찾아볼 수 없었다.


‘...괜히 내려왔나.’


문득 세라를 위에 내버려둔 것이 뒤늦게 생각나 지금이라도 돌아갈까 생각하던 와중,

가장 구석까지 들어온 희민은, 앞에 설치된 마지막 시설을 보곤 눈이 휘둥그레지지 않을 수 없었다.


“...!!”


견고한 철창으로 둘러싸인 지름 10미터 남짓 정도의 원형 경기장.

그 안에서는 지금도 두 존재가 격렬한 혈투를 벌이고 있었다.

한 쪽은 능력을 사용하고 있는 평범한 남성 헌터.

그리고 다른 한 쪽은, 마을 바깥에서 숱하게 볼 수 있을 ‘몬스터’였다.


‘저게 왜 여깄어!?’


분명 이 성은 마을 안에 있고, 마을은 몬스터가 침입할 수 없는 안전지대이지 않았던가.

진리처럼 여겨지던 법칙이 깨진 것을 눈앞에서 목격한 희민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경기장을 응시했다.


그러자, 이윽고 그의 존재를 눈치챈 한 헌터가 그에게로 다가왔다.


“여어, 자네! 한 번 도전해보려고?”

“아니, 저, 그, 몬스터가 왜 여기에...”

“아아, 저거? 꼼수를 좀 썼지.”


어쩐지 신난 목소리로 설명을 시작하는 그 남자는, 차려입은 복장으로 볼 때 경기장 구역의 딜러인 듯했다.


“원래 몬스터는 마을 안으로 못 들이지만, 시스템이 땅 밑은 안전구역으로 인식을 안하더라고. 저 팬텀 한 놈 잡으려고 몇 달 동안 굴을 파서 간신히 끌고왔다 이거야.”

“아......”


설명을 듣고나니 의문은 해소되었으나, 어딘가 정신이 아득해지는 느낌은 여전했다.

애당초 이런 경기장을 생각해낸 것도, 그것을 실행하기 위해 시스템의 허점까지 찾아낸 것도, 어찌보면 참 징하다 싶었다.


“규칙은 간단해. 50골드를 내고 들어가. 네가 저 놈을 잡으면, 이전에 실패했던 사람들이 낸 돈까지 전부 네가 갖는 거야.”


즉, 이것은 일종의 ‘몬스터 사냥 챌린지’인 셈이었다.

사행성 도박에는 생전 관심이 없었던 희민이지만, 이런 종류의 게임에는 묘하게 흥미가 생겼다.


“돈이 얼마나 모였는데요?”


소년의 질문에, 딜러는 말없이 경기장 상단의 전광판을 가리켰다.

코인 기호 옆에 노란색으로 번쩍거리는 숫자는, 그의 예상보다 자릿수가 꽤 많이 길었다.


“마, 만 오천 코인이요!?”

“숫자는 제대로 읽을 줄 아는 구만!”


참가비 50코인으로 저 정도의 금액이 모이려면, 그동안 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실패해왔다는 뜻인가.

이쯤 되면 어디 던전 보스급 되는 몬스터라도 잡아왔나 의심되는 수준이었다.


“너무 쫄진 마라. 하다가 안 될 것 같으면 언제든 포기할 수 있으니까. 입구 쪽에 있는 버튼을 누르고 버저가 울리면 바로─.”


그 순간, 타이밍 좋게 삐이이이! 하는 알림 소리가 경기장 주위로 울려퍼졌다.


사냥에 도전했던 남자 헌터는 다리 쪽에 심한 고통을 호소하며 경기장을 뛰쳐나왔고, 주위에 몰려있던 구경꾼들 사이에서는 야유가 터져나왔다.

동시에, 경기장 안의 몬스터는 경련을 일으키며 제자리에 쓰러졌다.


“이야, 아쉽구만. 자넨 어때? 저 놈이랑 좀 붙어볼 마음이 생겼나?“


많은 헌터들이 실패한 도전이다.

그럼에도, 만 오천 코인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보상이 희민을 강하게 자극해왔다.


‘흡혈로 버티다보면... 할만 하지 않을까?’


전투를 지속할 수록 상황은 자신에게 유리해진다.

만약 유리해질 때까지 버틸 수 없을 것 같으면, 버튼을 눌러서 도망치는 선택지도 있었다.

게다가, 한 번이라도 상대를 베어 피를 흘리게 하면 피의 정수 또한 획득할 수 있을 터였다.


단 3 BP만 모아도, 상점에서 ‘진화의 주문’을 구매할 수 있었다.


“해볼래요.”

“그거지! 문 앞에 있는 구멍에 코인을 넣으면 자동으로 시작이야. 행운을 빈다!”


호탕한 웃음과 함께 딜러는 소년의 등짝을 두들겼다.

마지막으로 장비 상태를 점검한 후, 희민은 문 앞으로 다가가 50 코인을 실체화했다.

누가봐도 동전 구멍처럼 생긴 곳에 그 코인을 집어넣자, 오락실을 연상케하는 띵 소리와 함께 철창 문이 스르륵 열렸다.


“...후우.”


심호흡을 하는 사이 문이 닫히고, 쓰러져 있던 몬스터가 서서히 몸을 일으켜세웠다.

희민은 검집에서 에메랄드 빛의 롱소드를 꺼내들어 그것을 향해 똑바로 칼끝을 겨누었다.


“뭐야, 저 놈. 아직 능력 못 쓰나본데?”

“에이, 팍 식네.”

“야, 1분이라도 좀 버텨봐라!”


바깥에서 들려오는 비웃음과 조롱의 목소리에 희민은 애써 귀를 기울이지 않으려 했다.

그러자, 잠시 후 그 목소리들이 정말로 들리지 않기 시작했다.


“...?”


그것은 집중의 문제가 아니었으며, 청각만의 문제도 아니었다.

일어선 몬스터의 주위에서부터 퍼져나온 검은 안개와 같은 기운이 경기장을 완전히 둘러싸기 시작한 것이었다.

순식간에, 희민의 시야에는 온전한 어둠밖에는 남지 않았다.


‘눈을 가린 거야!?’


자신의 몸과 검은 볼 수 있는 것으로 보아, 완전한 시야 차단이라기보다는 가시 거리를 줄이는 기술인 듯했다.

옷을 뚫고 살결에 스며드는 듯한 오싹한 기운에 등골이 서늘해지는 와중에도, 희민은 애써 감각을 곤두세웠다.

상대가 다가왔을 때, 곧바로 대응을 가하기 위해서.


‘...왔다!’


부스럭 하는 발소리를 감각함과 동시에, 정면에서 어둠을 뚫고 몬스터가 튀어나왔다.

검과 함께 들이민 머리 위로는 고유 이름 태그가 떠올랐다.


《Phantom, the loyal edge》


신장이 제법 큰 인간형 몬스터.

여성형의 외관을 가졌으며 팔다리가 비정상적으로 가늘고 길쭉한 모습까진 레이스와 유사했지만, 결정적인 차이가 몇 가지 있었다.

길쭉한 손톱 대신 갑옷과 장검으로 무장했다는 점과, 공중을 부양하지 않고 두 발로 땅을 밟고 서 있다는 점 등.

확실히, 전장에서 한 번도 마주쳐본 적 없는 종이었다.


‘회피기가 있나? 패턴이나, 공격 스타일은...‘


정보가 없어 쉽사리 접근하지 못하던 찰나,

가늘게 휜 장검의 날을 바짝 세운 팬텀이 눈깜짝할 새에 그의 앞으로 도약했다.

접근하는 도중 손목을 돌려 참격을 준비하는 그것의 칼날에서는 이윽고 광채가 뿜어져나왔다.


‘스킬!?’


몬스터가 스킬을 구사한다는 소리는 처음 들어보지만, 눈앞의 팬텀의 동작은 물 흐르듯이 자연스러웠다.

당황도 잠시, 경각심을 느낀 희민은 재빨리 반격을 위해 스킬 모션을 취했다.


그가 선택한 대응은 정수로 구매했던 주문서에서 획득한 [세이빌런트].

군청색의 광채로 뒤덮인 검이 오른쪽 하단에서 사선으로 올라가 팬텀의 장검을 아슬아슬하게 막아냈다.


그리고는, 빛을 유지한 채 곧장 이어지는 수평 베기.

깔끔하게 반격이 들어가는가 했지만, 에메랄드빛 칼날은 팬텀의 은색 갑옷에 상처를 냈을 뿐 출혈은 내지 못했다.


‘쉽지 않겠는데.’


약점을 정확히 노리는 게 아니고서야, 갑옷 때문에 제대로 된 상처를 입히는 게 쉽지 않아보였다.

피를 흘리게 하지 못하면 전투가 지속되더라도 이렇다 할 이점을 가지기 힘들다.


빈틈을 만들어 파고들어야 한다.

근접한 거리에서 한 번, 두 번, 세 번, 연속적으로 두 자루의 검이 맞부딪혔다.

그러다 어느 순간 대각선으로 충돌한 두 검이은 교착 상태에 들어가, 제자리를 유지한 채 힘싸움을 시작했다.


희민은 표정을 잔뜩 찡그린 채로 상대를 쳐다보았다.

‘유령’이라는 이름이 붙은 주제에 몸의 형체를 온전히 유지하고 있는 이 몬스터는 구멍도 무늬도 없는 매끄러운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채였다.

오싹한 표정을 한 귀신의 얼굴을 보지 않아 다행일지도 모르지만, 상대의 감정을 읽을 수 없는 이 상황도 조금은 섬뜩하게 느껴졌다.


“에이 씨─!”


불쾌한 기분을 애써 털어내며, 전투는 계속되었다.


* * *


철창 안에서 팬텀과 싸우는 소년을 보며, 검은 드레스를 입은 여성은 미소를 지었다.


‘여기 들어오자마자 빠진게 저거라니, 어떤 성향인지 알만 하네.’


경기장 주위로는 어느덧 꽤나 많은 헌터들이 몰려 구경중이었다.

검을 사용한다는 이유로 소년을 업신여기던 이들이 무색하게, 경기장 안에서는 손에 땀을 쥐게 하는 박진감 넘치는 싸움이 이어지고 있었다.

정작 당사자는, 팬텀의 환술로 인해 바깥 분위기를 인지조차 하지 못하고 있을 테지만.


“잠깐 갔다오는 사이에 죽어있으면 안 돼, 도련님?”


아무도 듣지 못할 작은 목소리로 그렇게 중얼거리며, 여자는 경기장을 떠났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으로 올라가, 복도 중간에 위치한 계단으로 향한다.

윗층과 바로 이어지는 그곳 계단은 성문 입구와 마찬가지로 경비병이 지키고 있었다.


“여긴 개방 구역이 아닙니다.”

“아잇, 참. 목소리 기억 못하는 건 좀 서운한데.”


실소와 함께, 검은 드레스를 입은 여성은 얼굴을 가리고 있던 가면을 살며시 들춰보였다.

얼굴을 드러내며 보인 것은 흰 피부와 녹색 눈동자.


그리고, ‘아멜리에’라는 이름 태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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