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니아케아 귀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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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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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2.31 0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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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25 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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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인의 성 (8)

DUMMY

복도 전등의 후광으로 비친 소년의 모습은 10대 중반쯤 되어보이는 외모에, 한겨울에 쏟아지는 눈꽃처럼 새하얀 피부와 머리카락.

그리고, 색소가 모두 빠져나간 듯한 붉은 눈동자.


이름 태그는 ‘닉스’.


“참~ 그렇게 부수고 들어올 거면 문이 달려있는 이유가 없잖아~.“


능글맞게 웃는 아멜리에에게는 대꾸도 하지 않은 채, 닉스는 방 안으로 한 발짝 발걸음을 내딛었다.


“모처럼 살았으면, 다시 기어오지 말았어야지.”


백발의 소년이 입을 연 순간, 세라 쪽으로 눈을 돌린 희민은 그녀의 상태가 어딘가 평소같지 않다는 느낌을 받았다.

얼굴 표정은 늘상의 무표정이라기보단 경직된 것에 가까웠고, 손마저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녀를 만난 지 불과 몇 주밖에 되지 않은 희민의 입장에서 그것은, 조심스럽긴 했으나 일종의 각인된 공포처럼 느껴졌다.


닉스. 세라가 알려주었던, 레드하운드의 간부급 멤버 중 하나.

레벨은 8에, 고유능력명은 ‘리미트리스’.

전형적인 에너지 방출계 능력으로, 불이나 물 등의 원소가 아닌 ‘존재하지 않는 고유의 에너지 입자’를 생성하는 힘이다.


지금 그의 오른손 주위를 맴돌고 있는 잿빛 덩어리가 바로 ‘리미트리스’의 에너지 입자인 듯했다.

아마 직전에 문을 부수고 들어올 때도 저것을 사용했을 것이다.


‘위험해.’


당장에라도 싸움이 터질 것 같은 전조를 느낀 희민은 검집에서 롱소드를 뽑아 준비 자세를 취했다.

그제서야, 백발의 소년은 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니가 라이언이냐? 들은 소문에 비해 생긴 건 샌님이네.”


자신보다 적어도 두 세살은 어려보이는 소년에게 그런 소리를 들으면, 아무래도 기분이 묘할 만도 하다.

그러나 지금, 희민은 그가 내뿜는 모종의 위압감에 거의 집어삼켜지고 있었다.

서있는 것만으로 상대를 짓누르는 그 분위기는, 9레벨 헌터와 만났을 때의 그것과 비교했을 때 떨어진다기보단 성격이 조금 달랐다.


라이카에게서 느꼈던 것은, 여유롭고 호탕하게 웃으며 수백 명의 헌터를 가지고 노는 압도적인 힘에서 나오는 절망감과 무력감.

반면에 닉스는, 특유의 색소 빠진 얼굴에 웃음기라곤 찾아볼 수 없는 표정이 결합되어, 마치 사신을 마주한 것만 같은 적막한 공포를 남긴다.


그의 과거가 어땠는지는 몰라도, 그 세라가 겁에 질린 듯한 반응을 보이는 것이 어렴풋이 이해가 갈 정도였다.


‘정신 차려.’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다잡은 희민은, 금방이라도 다시 침투해올 것만 같은 위압감을 떨쳐내고자 입을 열었다.


“너야말로, 들은 걸로 생각했던 거랑 비교하면 완전 꼬맹인데?”

“걱정마, 여기 경험으론 너랑 급이 안 맞을 정도로 대선배니까.”


가소롭다는 듯 피식 실소한 닉스는, 이내 희민에게서 시선을 거둬버렸다.


“오늘 처리할 건 네가 아니니까, 짜져있어.”


그 시선이 향한 곳은 당연히 세라였다.

조금 전 두려움을 느끼는 듯했던 흑발의 소녀는 여전히 표정이 썩 좋지 않아보였다.

희민은 그런 그녀의 곁으로 가, 그녀와 닉스 사이를 가로막고 섰다.


“얜 못 건드려.”

“빠져, 둘 다 죽여버리는 수가 있으니까.”

“그렇게 해보던지.”


목숨을 바쳐서라도 소녀를 지키려는 영웅 심리 따위가 발동한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마냥 믿는 구석도 없이 블러핑을 친 것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이 자들은, 날 죽일 수 없어.’


멜에게서 들었던 이야기로 인해 확신할 수 있었다.

라이카에게 있어, 희민은 자신의 레벨업을 위해 반드시 성장시켜야만 하는 존재.

지민을 성에 가두고 던전 같은 이 체계를 구축해놓은 것도, 모두 자신을 빠르게 고레벨로 만들기 위한 것이다.


이 모든 것은 그가 생존해있을 것을 전제로 한다.


자신을 살리는 것과 세라를 죽이는 것 중, 라이카가 전자를 우선시한다는 것은 센트럴 벨에서도 이미 확인했다.

라이카의 명령으로 움직이는 이들이 그 원칙을 위반할 리는 없을 터였다.


“...성가시게 구네.”


희민의 추론이 정확했는지, 닉스는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벽 너머의 아멜리에 쪽을 응시했다.


“어머, 나 보지마~. 지켜야 할 ‘원칙’은 이미 다 말해줬잖아?”


소년, ‘라이언’과 전투하되, 죽이거나 불구로 만들지 말 것.

그가 상실감에 빠져 더욱 처절하게 싸움에 매달리도록, 배신자인 세라를 죽여 그를 자극할 것.

두 가지 원칙 속에서 최우선으로 고려해야 할 게 무엇인지는 꽤나 명확했다.


“아무래도, 슬슬 내가 빠져주는 게 좋을 것 같네. 잘 부탁하고, 나중에 또 만나 도련님?”


찡긋 눈웃음을 지어보이곤, 아멜리에는 프리베른과 함께 금고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내부에 다른 통로가 존재하는 것인지, 한동안 텅텅 하는 발소리가 어렴풋이 울렸다.


“자기 위치를 이용해 귀찮게 하겠다 이거지.”


짜증난다는 듯 이를 바득 갈며, 닉스는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좋아, 그럼 이렇게 할게. 먼저 널 기절시키고, 그 다음에 저 여자를 죽인다.”


목표를 확실히 정리한 닉스는 망설임 없이 오른손을 들어올렸다.

그 손의 끝에서, 잠잠해져 있었던 잿빛 에너지가 다시 피어오른다.

막대한 힘을 축적한 그 구체는 당장에라도 터질 것처럼 부풀어오르기 시작했다.


“...!”


위험을 직감한 희민은 본능적으로 검을 세워들어 방어자세를 취했다.

동시에, 잿빛 에너지 덩어리가 구체로부터 레이저처럼 뻗어나와 검신과 충돌했다.


쿠우웅!!!


다행히 물질을 통한 방어가 통했는지, 칼날에 부딪힌 리미트리스 입자는 두 갈래로 쪼개져 희민과 세라를 빗겨갔다.

대신, 그 부산물로 상당한 충격이 몸을 휩쓸었다.


“끄윽!”


잿빛 입자가 안개 구름처럼 피어올랐다.

좁은 공간에 순식간에 차오른 그것은 희민의 몸을 감싸, 거칠고 육중한 압력으로 그를 단숨에 무릎꿇렸다.

마치 쇠사슬로 전신이 감긴 듯, 희민은 단 1cm도 움직일 수 없었다.


에너지 덩어리로 그를 완전히 제압한 닉스는 다시금 세라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활짝 편 오른손에서는 이미 새 입자가 구체의 형태로 응집되고 있었다.


“끄으으─!”


속박에서 벗어나기 위해 어떻게든 몸을 움직이려 애쓰는 희민이었지만, 진전의 기미는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몸을 비틀면 비틀수록, 거친 에너지 입자에 피부가 쓸려 상처만이 남을 뿐이었다.


대책이 필요하다. 지금 당장.

그렇지 않으면, 당장에 눈앞에 일대일로 방치된 소녀에게 무슨 일이 생길지 장담할 수 없었다.


‘...워 크라이?’


문득 뇌리를 스쳐간 그것은, 불과 며칠 전 주문을 통해 습득했던 스킬의 이름.


《사용자에게 걸린 모든 상태 이상 효과를 제거합니다》


레드하운드의 동굴에서는 감옥을 빠져나가는 데 도움이 되지 않아 실망했던 스킬.

그러나 지금은, 상황을 타개할 유일한 돌파구가 되어줄 지도 모르는 스킬이다.


‘독 같은 게 아니어도 풀리나...?’


알아볼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희민은 즉시 숨을 두 번 빠르게 내뱉었다.

스킬 시전 동작이 감지됨과 동시에, 노란빛의 장막이 그의 피부를 감싸듯 형성되었다.

그리고 바로 다음 순간, 장막이 구체의 형태로 폭발하듯 퍼져나가며 그를 옥죄던 리미트리스 입자를 밀어냈다.


‘됐다!’


찰나의 순간 동안 압력으로부터 벗어난 희민은 즉시 몸을 던져 잿빛 안개를 빠져나왔다.

그대로, 에너지 구체를 오른손에 머금은 백발 소년을 향해 검을 내지른다.


“...!”


가까스로 반응에 성공한 닉스는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검에 구체를 날려 밀어냈다.

안전거리를 확보한 그는, 한껏 짜증이 올라와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작작해!”


백발 소년의 몸 주위에서, 전신을 휘감고 에너지 입자가 한없이 뿜어져나오기 시작했다.

그 양과 기세는 응접실이라는 작은 공간이 감당할 수 없을 것만 같이 심히 위협적이었다.


희민은 충격에 얼얼한 팔로 급히 검을 고쳐쥐었다.

당장에라도 폭발해 방을 통째로 날려버릴 것만 같은 저 에너지를 회피할 공간은 없다.

그렇다면, 직전에 그랬듯 공격으로 맞대응하는 게 유일한 선택지다.


“하아아아아아!!”


어깨 위에서 수평으로 들어올린 검신이 짙은 검붉은색 광채를 뿜어냄과 동시에, 희민의 몸이 총알처럼 튀어나갔다.

잿빛 에너지 입자를 어느덧 사람의 크기만큼 거대하게 압축시킨 닉스를 향해.


쿠우우우우우우웅!!!!


빛을 머금은 칼날과 에너지 덩어리가 충돌한 순간, 이전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거대한 폭발음이 공간을 뒤덮었다.

그 폭발은 아멜리에가 사라졌던 금고의 문을 심각하게 찌그러트렸으며, 복도와 방 사이를 가로막던 벽을 완전히 파괴해버렸다.


충격파로 인해 응접실 밖으로 튕겨져나간 세라와 희민은 복도 벽에 부딪혔다.

이 성의 외벽이 조금이라도 더 약했다면, 그대로 이 벽마저 뚫고 날아가 까마득한 지상에 쳐박혔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으윽...”


뼈가 바스러지는 듯한 끔찍한 통증이 엄습해왔다.

팔다리는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고, 머리 위에서부터 흘러내린 피 때문에 오른쪽 눈을 제대로 뜰 수 없었다.


그리고, 폭발의 여운이 가라앉고 난 뒤,

희민의 눈에 들어온 것은 먼지와 잿빛 입자로 자욱했던 안개가 걷히는 틈 사이로, 생채기 하나 없이 멀쩡히 서있는 흰머리의 소년이었다.


“목숨 연명한 줄 알고 있어. 오늘은, 저 여자만 죽일 거니까.”

“...!”


주어진 명령에 묶여있던 8레벨의 헌터가 충동적인 감정에 휩쓸려 그 총력의 일부를 개방했을 때, 전력차는 이루말할 수 없이 압도적이었다.

이런 그조차도, 희민이 이전에 싸웠던 9레벨 헌터에게는 상대도 되지 않을 터이다.


가장 치명적이었던 것은 변수의 부재.

눈앞의 적, 닉스는 수백 명의 다른 헌터들을 상대하느라 주의가 분산되지 않았으며, 스스로의 힘에 심취해 빈틈을 노출하지도 않았다.


무엇보다, 상처를 입을 여지를 전혀 허용하지 않았다.

피를 흘리게 하지 못한 시점에서 무능력자나 다름없는 희민에겐, 8레벨이나 9레벨이나 범접할 수 없는 상대인 것은 매한가지였다.


‘도망쳐야... 해...’


고통 속에서도 간신히 정신을 붙잡은 세라는 빠르게 주변을 살폈다.

복도 끝, 계단 벽 쪽에 제법 큰 창문 하나가 달려있었다.

현재 위치에선, 저것이 ‘바깥’과 이어지는 가장 빠른 탈출구였다.


“뭐, 뭐야!?”

“성주님의 안전부터 확보해!”


때마침, 뒤늦게 소란을 눈치챈 경비병들이 하나 둘씩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닉스의 성격을 생각할 때, 그런 것에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을 죽이려 할 위인임이 분명했지만, 잠시나마 시선을 끌어 시간을 번 것은 충분히 의미가 있었다.


세라는 간신히 팔을 뻗어 희민의 옷덜미를 붙잡았다.

직후, 손가락 굵기 정도로 가는 강풍이 총알처럼 창문의 모서리를 강타했다.

큰 창을 한 방에 깔끔하게 깨트리고 나자, 외부의 공간과 공기의 흐름이 연결되며 능력의 사용범위가 비약적으로 상승했다.


“꽉 잡고 있어.”

“무슨 소리...!?!!“


희민이 마음의 준비를 미처 마치기도 전에, 세라는 복도 안의 공기를 바깥으로 급격하게 뿜어내는 기류를 형성했다.

마치 우주로 올라간 우주선에 구멍이 뚫린 것처럼 강한 기류의 작용에, 세라와 희민은 순식간에 창밖으로 빨려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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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3인의 방랑자 (1) 25.03.10 8 0 11쪽
50 고요가 삼킨 바다처럼 25.03.09 8 0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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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귀인의 성 (8) 25.02.25 11 0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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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귀인의 성 (3) 25.02.20 10 0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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