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니아케아 귀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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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히
작품등록일 :
2024.12.31 01:02
최근연재일 :
2025.03.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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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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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gnition (3)

DUMMY

뱀의 머리가 잠시 뒤로 물러났다.


포탄처럼 돌진해 들이받기 직전 전조의 움직임이다.

잿빛 형체가 천천히 뒤로 멀어져가며, 희민은 천천히 위로 올라가는 롤러코스터에 탄 것과 같은 기분이었다.

당장의 상승 중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지만, 잠시 후 고지에 다다른 이후에는 가차 없는 추락의 길만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폭풍전야와 같은 찰나의 고요 속에서, 희민은 선택할 수 없는 운명을 강요받고 있었다.



─그 순간, 희민의 시야가 순간적으로 섬광처럼 하얗게 물들어갔다.

찰나 동안 주마등처럼 눈앞을 스쳐지나가는 무수한 장면의 파편들.


그 회상 속에서, 자신의 키의 3배에 달하는 거대한 괴물을 상대로 희민은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손에 쥔 롱소드의 검신이 광채를 뿜어내기 시작하더니, 수차례 이어지는 화려한 참격으로 이윽고 괴물을 쓰러트린다.


장소도, 주위의 사람들도, 상대하는 적마저도 낯설다. 장담컨데, 헌터가 된 이래로 한 번도 겪어본 적 없는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이 장면들은, 오래 전부터 당당히 기억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는 듯 너무나 선명했다.


검신에 스며드는 스킬 특유의 빛깔도, 그 스킬의 움직임도 모두 처음 보는 것이지만, 희민은 그 시전 동작을 보았다.


만약 이것을 지금 사용할 수 있다면...?


쿠오오오오!


롤러코스터는 꼭대기에 도달했다.

뱀의 머리가 이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속도로, 훨씬 더 공포스러운 기세로 돌진해온다.

기세를 몰아 거리를 좁혀오는 그 머리가 닿기까지 앞으로 단 1초.


‘적어도 잠깐의 시간만큼은─!’


필사적으로 힘을 끌어낸 세라가 마지막으로 손을 뻗었다.

이제 막 회복된 조금의 기력을 쥐어짜내어 부른 거센 바람이 희민을 빙 돌아 나아가서는 거대 뱀과 정면으로 부딪혔다.


그렇게 잠시 속도가 느려지고, 주어진 몇 초의 연장 시간동안 소년은 시기모를 기억 속에만 행해본 새로운 동작을 취했다.

두 발을 비스듬히 사선으로 튼 채, 검의 끝은 땅을 향해 수직에 가깝게 내린 하단세.

그 상태에서 깊게 숨을 들이쉰 뒤, 엔진에 시동을 걸 듯 손목을 틀어 칼날을 바짝 세운다.


동시에, 검신이 진한 보라빛의 광채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일반적인 스킬 발동 효과와는 사뭇 다른, 바깥으로 강렬하게 번져나가는 빛의 화염에 칼날 전체가 휩싸였다.

형용하기 힘든, 전례없이 강한 모종의 힘이 몸 주위를 맴도는 것을 희민은 느꼈다.


‘이 검, 이 기억은...─’


크아아아아!


소녀의 마지막 바람을 뚫고, 뱀의 시뻘건 눈동자가 코앞까지 다가온 순간,

눈부신 광채를 머금은 희민의 검이 불꽃 같은 잔상과 함께 휘날렸다.


동시에, 살며시 시야를 스쳐지나가는 시스템 메시지.


《시스템 에러: Erkd@#$···》

《특수 능력 옵션을 확인했습니다. 에러 선언을 철회합니다》

《유니크 스킬 ‘하이머 클러스트럼’이 등록되었습니다》


보라빛으로 점화된 검이 잿빛 뱀과 충돌한 순간, 그 느낌은 이전과 확연히 달랐다.

스킬을 발동한 것만으로, 전신에 감도는 힘의 규모 자체가 달라져 있었다. 이제, 더 이상 희민은 저것에게 밀리지 않는다.


“하아아아악!!!!”


목이 다 쉬어버릴 듯한 기합과 함께, 희민은 땅바닥에 디딘 뒷발부터 힘을 끌어올려 검을 앞으로 밀어냈다.


놀랍게도, 뱀의 머리가 조금 밀려났다.

8레벨의 헌터가 가진 전력을 그대로 실체화한 형상에게, 잠시동안이지만 대등하게 싸울 수 있는 힘을 얻은 것이다.


얼마나 지속될 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이 순간, 모든 것을 걸어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기회가 왔다고, 본능이 소리치고 있었다.


우측 상단에서 하단으로, 곧이어 반대로 회전하여 수평 우측으로.

스스로의 눈으로 동작을 인식할 수 없을 만큼 빠른 속도로 몸과 검이 움직인다. 더 이상 뇌가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영역이라고 할 수 없었다.

그저 스킬이 인도하는 동작에 몸을 맡겨, 감각적으로 검을 휘두를 뿐.


9번, 10번, 11번.

쉴틈없이 이어지는 연격 속에서, 검신이 품은 빛의 화염이 눈부신 잔상을 남기며 회전했다.

전장 어디에서도 본 적 없는, 닿는 모든 것을 불살라 버릴 듯한 검의 광휘.

그것에 난도질당하는 닉스의 잿빛 뱀은, 조금씩 그러나 확실하게 존재를 잃어가고 있었다.


’마지막...!’


땅을 박차고 공중으로 도약해, 양손으로 쥔 검을 머리 위로 높이 들어올린다.

하강하기 시작하는 한 자루의 검에 영혼의 마지막 조각까지 실어담아, 희민은 타오르는 광채를 뽐내는 칼날로 뱀의 머리를 내리쳤다.


콰아아아아아앙!!!!


충돌의 순간, 충격파와 함께 먼지인지 무엇인지도 모를 짙은 안개가 희민을 덮쳤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마침내 그것이 걷히었을 때.

희민은 땅바닥에 비스듬히 꽂힌 검에 의지해 간신히 웅크려 앉아 있었다.


칼날의 불꽃은 사그라들었고, 6레벨이라는 분수에 맞지 않는 힘을 이끌어낸 대가라도 되는 듯 묵직한 근육통이 전신을 짓눌렀다.

마지막 기력으로, 희민은 고개를 올려 백발 소년이 서 있던 자리를 쳐다보았다.


그 자리에는 여전히 뱀이 있었다.

꺼지기 직전의 잔불처럼, 처음의 그 위용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초라한 몸집이었지만, 팔뚝 크기 정도의 그것에게는 여전히 붉은 눈이 빛나고 있었다.


누군가를 죽이기엔 충분한 양이다.

모든 힘을 소진하고 무방비가 된 사람이라면 더더욱.


‘딱, 저만치가 모잘라서...’


허탈함에 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힘의 주인인 닉스는 진작에 이성을 잃고 폭주한 상태. 자신을 살려두라는 명령 따위가 남아있기는 할 지도 미지수였다.

실제로도, 한 줌 남은 잿빛 뱀은 목숨에 굶주린 듯 희민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무언가를 물어뜯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아... 아아...”


희미한 목소리의 의중 모를 중얼거림과 함께, 리미트리스 에너지의 형상은 신기루처럼 소멸했다.

그 너머에서는, 눈이 뒤집히고 코에서는 피가 주륵 흐르는 백발의 소년이 제자리에 털썩 쓰러졌다.


이성의 부재로도 모자라 본능으로 움직일 정신력마저 사라진 것이다.

그럼에도 죽지는 않았는지, 닉스의 몸은 부서지고 흩어질 기미 없이 그대로 있었다.


싸움이 끝났다.

그 현장에 남은 것은 희고 검은 무(無)로 돌아간 지형과 쓰라린 열상뿐이었다.


“후우... 하.”


수 차례의 호흡 끝에, 희민은 쓰러질 것 같은 다리를 채찍질해 몸을 일으켜세웠다.

검의 끝이 가리키는 방향에는 백발의 소년이 하늘을 바라보고 누워 있었다.


그를 마무리지어야 할까?

조금도 원하지 않았던 이 싸움에 참전해 살이 찢기도 머리를 꿰뚫린 끝에, 결국에는 그런 추한 결단을 지어야 하는 것일까?


─아니,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다.


희민의 시선은 닉스를 넘어서 그 배경의 성으로 향했다.

저 위에 동생이 있다. 그래, 자신이 생각해야 할 것은 오직 그것 하나.

가로막는 자가 전투 불능 상태가 된 지금, 저곳에 올라가 지민을 데리고 귀환하면 비로소 모든 것이 끝난다.


그렇게, 희민은 성을 향해 전진을 시작했다.

수직으로 꽂은 롱소드를 지팡이 삼아 한 발짝 한 발짝 걸어가는 그 속도는 기어가는 것에도 미치지 못했다.

그럼에도, 그는 계속해서 걸었다.


아무것도 없었던 방향에서, 무언가가 그의 복부를 후려칠 때까지.


“컥...!?”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희민은 무기력하게 쓰러지고 말았다.

아뜩해지는 정신을 붙잡아 시야를 바로잡았을 때, 그의 앞에는 한 남자가 서 있었다.

키는 170 후반 정도에, 적당히 균형 잡힌 체형.

곱슬곱슬한 흑발에 붉은 복면을 쓰고 있어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추정하기로는 20대 초중반 정도의 젊은 남성이다.


이름 태그는 ‘실비오스’.


“하아, 이래서 애 하나만 믿고 보내면 안 된다니까.”


그렇게 중얼거리며 닉스를 흘겨본 남자는, 한숨을 쉬며 주머니를 뒤척였다.

이윽고 그가 품에서 꺼낸 것은, 은색의 리볼버식 권총.


그리고, 희민이 반응을 취할 틈도 없이 방아쇠가 당겨졌다.


.

.

.


화약 폭발음이 아닌 피슉 하는 소리가 났다.

세라는 여전히 자리에 주저앉은 채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희민에게 총을 ─정확히는 실탄 대신 마취침을 발사한 남자를 알고 있다.


실비오스. 8레벨 헌터이자, 레드하운드의 실질적 전투력 2위.


“오랜만이다, 세라.”


마취침을 맞은 소년이 의식을 잃은 것을 확인한 실비오스는 복면을 벗고 그녀에게 소리쳤다.

왼쪽 뺨에 난 십자가 모양의 흉터가 눈에 띄는 와중에, 그의 목소리는 세상 물정 모르는 아이처럼 활기찼다.

동료로서 마지막으로 보았던 몇 달 전과 마찬가지로.


“...실비오스.”

“전에 봤을 때보다 얼굴이 많이 상했다? 하긴, 얼마나 개고생을 했겠냐. 설마, 팀을 나가도 그런 식으로 가버릴 줄이야.”


대화 자체는 언뜻 평범해보였으나, 결코 가볍지 않은 긴장이 감돌고 있었다.

세라의 입장에서, 조금이라도 위화감을 느끼는 것은 당연했다.


“나한테 이렇게 굴어도 괜찮은 거예요? 날 살리라는 명령 같은 건 없었을 텐데.”

“...그래, 맞아.”


철컥, 하고, 실비오스의 총이 세라를 향해 겨눠졌다.

리볼버의 약실이 돌아간 지금, 블래스터는 마취가 아닌 사살 모드.


그러나, 실비오스는 방아쇠를 당기지 않고 총구를 하늘 위로 들어올렸다.


“하아, 사사로운 정이 이렇게 무섭다니까. 역시 난 리더가 될 재목은 아닌가봐.”


팀 리더의 명령은 ‘배신자는 어떻게 처리해도 좋으나 남자애는 살려둘 것‘.

아멜리에의 독자적인 결정으로 죽이려 하고 있던 것이었으니, 자신이 거기에 어울려줘야 할 이유는 없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눈앞에서 적을 놓아준 것을 알면 라이카가 좋게 생각하지는 않겠지만, 목격하지 않은 것을 어찌 알까.


“기회 줄 때 얘 데리고 빨리 도망쳐. 괜히 아멜리에가 보면 골치 아파지니깐.”


실비오스의 위치에서 베풀어 줄 수 있는 최대한의 자비였다.


“그게 싫으면, 나랑도 한 번 끝까지 붙어볼까?”

“...아뇨, 됐어요.”


거절하는 것이 당연했다.

실비오스를 아는 사람이라면, 그리고 정상적인 사고 방식이 박힌 사람이라면.


“명심해, 다음에 만나면 적이다. 아멜리에나 대장이 보고 있으면 봐주고 싶어도 못 봐줘.”


희민에게서 떨어져 서서히 뒤로 물러서며, 실비오스는 단호히 말했다.


“알고 있어요.”


그대로 앞으로 다가와 희민에게 접근하며, 세라는 대답했다.


“그건... 저희도 마찬가지예요.”


소녀의 말을 들은 순간, 실비오스는 저도 모르게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오냐, 기대하마.“


세라는 잠든 희민의 팔을 잡고 기류를 불러 일으켰다.

거센 소리와 함께 두 헌터가 바람에 실려 날아간 뒤, 쑥대밭으로 변한 공터에는 쥐 죽은 듯한 정적만이 감돌았다.


“하아, 이 골칫덩어리를 어쩌면 좋을까.”


실비오스는 쓰러진 닉스의 몸을 양팔로 번쩍 들어올렸다. 8레벨 치고 제법 마른 체형인지라 마치 여자아이를 안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우선 올라가서 좀 쉬어라. 가능하면 자는 동안 또라이 같은 기질도 좀 고쳐보고...”


그렇게 중얼거리며 성을 향해 걷는 남자의 눈은, 한편으로는 무척이나 슬퍼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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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3인의 방랑자 (2) 25.03.11 6 0 11쪽
51 3인의 방랑자 (1) 25.03.10 8 0 11쪽
50 고요가 삼킨 바다처럼 25.03.09 8 0 13쪽
» Ignition (3) 25.03.08 9 0 11쪽
48 Ignition (2) 25.03.07 8 0 11쪽
47 Ignition (1) 25.03.06 8 0 12쪽
46 희생할 결심 (3) 25.03.05 9 0 12쪽
45 희생할 결심 (2) 25.03.04 9 0 12쪽
44 희생할 결심 (1) 25.03.03 11 0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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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불통(不通) (4) 25.03.01 9 0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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