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다시 홀로 (3)

소녀의 손에서 출발한 바람은 대상이 저항하지 못하고 날아가, 맞은편의 벽에 부딪혀 쓰러지고서야 멈추었다.
“...붙어있을 땐 못 쓰는 거 아니었어?”
“연습했어.”
바람이 꽤나 가까운 거리에서 불어닥친 탓에, 자칫 잘못했으면 희민 또한 말려들 뻔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자세가 무너질 정도로 휘말리게 하지 않으면서 상대를 날려버린 것은 분명 이전과 다른 안정감이었다.
희민은 혹시나 하는 생각에 검을 놓지 않은 채 기사 쪽을 응시했다.
방금 전까지 맹렬하게 자신을 몰아붙였던 그는 영혼이 빠져나간 듯 대짜로 뻗어 움직이지 않았다.
‘기절한건가?’
아멜리에가 충격으로 실신한 육체도 조종할 수 있는지, 그 자세한 기작은 알지 못한다.
다만 상대가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는 지금이야말로, 그 영혼의 족쇄를 떼어낼 최적의 시기임은 분명했다.
“조심해. 갑자기 튀어나와서 너한테 달라붙을 수도 있어.”
“나도 알아.”
천천히, 희민은 쓰러진 기사를 향해 다가간다.
투구를 벗겨 검은 곱슬머리를 한 백인 남성의 얼굴을 드러내고, 피부의 더 가까운 곳을 찾기 위해 갑옷을 더듬는다.
그 순간 목덜미의 뒷편에서, 조심스레 깃털 한 장이 빠져나왔다.
마법에 걸린 것처럼 공중을 두둥실 날아오른 그것은 매서운 속도로 소년의 얼굴을 향해 날아왔다.
“─!!”
가까스로 고개를 꺾어 피하자, 그것은 원래의 방향으로 계속해서 나아갔다.
그 주인인 한 헌터의 손길에 닿을 때까지.
“하이~. 하도 안 돌아오길래, 직접 잡으러 왔어.”
씨익, 하고, 금발의 여인이 노골적인 미소를 보인다.
예리하게 날이 선 검을 든 소년과 폭풍을 부르는 소녀를 마주한 그 모습은, 전투 능력이 부재한 인간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태연하다.
‘뭔가 수가 있는 거야.’
그러지 않고서야 저 여자가 저리 당당하게 모습을 내비칠 리가 없다.
따라서 세라는 곧장 공격을 가하지 않고, 거친 적의를 머금은 바람을 주변에서 맴돌게 했다.
그러나, 그 바람이 눈앞의 여인이 서있는 자리를 스친 순간, 세라는 그곳에 아무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즉시 알아차렸다.
‘몸이 없어?!’
이윽고, 거친 바람의 손길이 닿은 아멜리에의 형상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수채통에 푼 물감을 휘저어 풀어뜨리듯이, 그렇게 빛이 해체된 자리에는 처음부터 빈 공간만이 존재했다.
‘실비오스...!’
빛을 다루는 한 남자의 이름이 뇌리를 스쳐지나가던 그 찰나,
아멜리에의 형상이 존재하던 곳을 시작으로, 세라의 온 시야가 순식간에 무너져갔다.
자갈돌로 만든 바닥과 벽돌 건물, 시야의 끄트머리에 빛나던 푸른 하늘까지, 모든 것이 녹아내려 얼룩진 잔상으로 변해갔다.
이미, 그녀의 시각은 마비된 것과 다를 바 없었다.
“라이언!”
어떤 형체도 알아볼 수 없게 되기 직전, 세라는 소년이 있는 곳으로 달려가 팔을 붙잡았다.
그리고는 순간적으로 낼 수 있는 모든 힘을 발밑으로 끌어모았다.
‘여기선 승산이 없어.’
실비오스의 표적이 된 순간 눈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설령 멀쩡히 보이는 것 같더라도, 아멜리에의 환영이 그러했듯 그것을 결코 믿을 수 없다.
그 시각의 미궁에서 빠져나올 방법은, 즉시 상대의 능력 사거리를 벗어나는 것뿐이었다.
바람이 서서히 두 사람을 들어올리려던 순간,
거대한 ‘소리’가 세라와 희민을 동시에 덮쳤다.
“으으윽!?!?!!”
라디오 잡음, 폭발음, 칼로 칠판 긁는 소리, 생명체의 비명소리 같은 것이 한데 뒤섞인 끔찍한 소음.
그 음량은, 바람을 조종하던 소녀의 집중력을 한순간에 무너뜨릴 정도로 막대했다.
소용돌이치던 기류는 힘을 잃고, 두 사람은 귀와 머리를 부여잡고 제자리에 웅크렸다.
골목길 너머의 시야에는 웬 사람의 형체가 보이는 듯했다. 아멜리에 같은 금발이 아닌, 어두운 빛깔을 띈 형상이다.
그러나 그마저도, 시야 속 다른 모든 부분들과 같이 섞이고 흐물해져 곧 알아볼 수 없게 되었다.
뇌를 직접 긁는 듯한 이 소음 앞에서, 고유 능력을 사용하기 위한 정신력을 모으는 것은 불가능했다.
전투도, 후퇴도 할 수 없다.
“끄으으으으─으으아악!!!!!”
자신의 팔을 붙잡은 소녀의 손에 힘이 바짝 들어가는 것을 희민은 느꼈다.
그것 외에는 어떤 감각도 믿을 수 없었다.
시야는 번진 물감처럼 흐리멍텅해진지 오래인 데다, 청각은 정체 모를 소음에 의해 마비되어버렸다.
두 가지의 중요한 감각을 빼앗긴 채 혼돈 속에 잠식되어가던 도중, 희민은 미묘한 감각이 피어나는 것을 느꼈다.
촉감에 가까운 ─아니, 기존의 것들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종류의 감각이다.
자신의 몸 밖에서 느껴지는 피의 존재.
타인의 혈관을 따라 흐르며 근육의 움직임에 맞추어 출렁이는 뜨거운 피가, 거의 사람의 형상과 같이 움직임을 느낀다.
그것은 희민의 바로 앞에서 팔을 들어올려, 마치 무언가를 휘두르려는 듯한 형태를 띄고 있었다.
“...!!”
순식간에, 소년은 오른손으로 쥐고 있던 검을 들어올렸다.
피의 감각이 일러준 방향대로 휘두른 칼끝에서, 공기보다 질긴 무언가가 찢겨나갔다.
사람의 형태로 순환하고 있던 피의 감각이, 어떤 지점에서 바깥으로 흩뿌려졌다.
《‘견문’ 효과를 발동합니다》
피의 주인은 소리를 다루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직전의 기사처럼 아멜리에가 세뇌한 인물인지, 아니면 레드하운드의 또다른 헌터였는지, 그런 것은 생각할 수 없었다.
새로운 힘이 들어온 것을 확인하자마자, 희민은 들려오는 소리의 파장을 반전시키는 것만을 생각했다.
소음을 완전히 제거하는 것은 불가능했으나, 그 크기를 줄일 수는 있었다.
집중력을 잃었던 소녀가 다시 바람을 불러일으키기에는 충분힌 수준이었다.
“세라!!”
희민이 외침이 끝나기도 전에, 다시금 발밑으로 모인 바람이 두 사람을 확실하게 들어올렸다.
더 이상의 방해도 추락도 없이, 가세되어가는 기류에 몸을 맡기고 높은 하늘로 날아올랐다.
형체를 갖추지 못하고 일렁거리던 풍경이 제자리를 찾아갔다.
칠판 긁는 듯한 끔찍한 소리도, 어느샌가 들리지 않게 되었다.
그저 하염없이 높기만 한 희푸른 하늘이 그를 반기고 있을 뿐이었다.
“허억...”
뒤늦게 가쁜 숨이 트이던 찰나, 몸을 들어올리던 바람이 서서히 힘을 줄이기 시작했다.
자신의 팔을 붙잡은 세라와 함께 희민은 서서히 발밑의 도시로 활강했다.
함께 묵었던 여관도, 프리베른의 성도 보이지 않는, 인적이 뜸한 어느 거리의 한복판이었다.
쿠웅.
평소보다 착지가 거칠었다.
억겁의 세월동안 팔을 붙잡고 있었던 것만 같은 작은 손에 스르르 힘이 풀렸다.
싸움의 흔적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고요 속에서, 희민은 떨리는 손으로 검을 집어넣었다.
체온이 느껴지는 방향을 돌아보자, 세라가 말없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검은 머리는 마구잡이로 헝클어졌으며, 눈동자가 떨리고 있었다.
눈과 귀를 어지럽혀진 후유증이 아직 남아있던가. 아니면 그 속에서 맞은 위기로 인해 유독 긴장했기 때문일까.
“저, 저기...”
괜찮냐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희민은 어째서인지 말문이 턱 막혀버리고 말았다.
목이 메여왔다. 소녀의 눈이 떨리는 것과 아마도 같은 이유일 것이라고, 잘은 모르면서도 그런 생각이 들었다.
천천히, 세라가 다가왔다.
끽해야 몇 뼘 정도 떨어져있을 뿐이었지만, 발걸음이 매우 느렸다.
그럼에도 거리는 좁혀져, 0이 된다.
“......!?”
부드러운 온기가 느껴졌다.
가느다란 두 팔이 어깨를 감싸안고, 손바닥으로 그의 등을 쓸어내렸다.
“못 빠져나오는 줄 알았어. 거기서...”
서로의 왼뺨이 맞닿은 채, 반쯤 쉰 목소리로 세라가 속삭인다.
희민은 잠시 어떤 말도 움직임도 하지 못한 채 바짝 얼어있었다. 지금까지 봐왔던 그녀와 너무나 다른 모습이었기에.
─어쩌면 그것 또한 오해였을 지도 모른다.
그녀라고, 처음부터 늘 무뚝뚝한 표정만 지어온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지난 번, 드높은 하늘 위에서 보았듯이.
위험으로 흘러넘친 세상에서 수 년을 홀로 발버둥쳐온 소녀의 본 모습에 관해, 자신은 과연 얼마나 알고 있을까.
몸이 떨리고 있었다.
추위라도 타는 듯 야릇한 고동이 침묵을 대신해 말을 전했다.
그 말에, 희민은 대답하고 싶어졌다.
대답하기 위해서, 고목처럼 빳빳하게 굳어있던 두 손을 조금씩 들어올렸다.
...그러나, 이후 희민은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만약 운명 같은 게 정말 존재한다면, 그것은 아마도 자신이 행복한 꼴을 보고 싶지 않은 거라고.
“푸흡─.”
때아닌 웃음과 함께, 소녀의 몸이 경직되었다.
더 이상, 그녀의 체온은 직전과 같은 온기로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실실 새어나오던 웃음은 점점 커져, 마치 무언가에 홀린 듯한 폭소로 변해 있었다.
외면하고 싶을 정도로 두려운 한 가지 가능성이 뇌리를 스쳐지나갔다.
“세, 세라...?”
“아닌 거 알잖아, 도련님.”
전신에 닭살이 돋았다.
소녀의 입을 빌려 나온 말을 듣자마자, 희민은 필사적으로 그녀의 옷을 더듬기 시작했다.
‘어디야, 어딨는 거야!?’
“어머, 손버릇 좀 봐라.”
손바닥이 뺨을 무참히 내리쳤다.
순식간에 희민의 품에서 물러난 소녀로부터 억센 바람이 불어닥쳐 그를 멀찌감찌 날려버렸다.
아멜리에로부터 벗어나기 전, 시야와 청각이 모두 무너졌던 그 몇 초의 시간.
그 사이에, 그 여자의 손길이 세라에게 닿고 말았던 것이다.
“그 애한테서 나가.”
“어머, 나한테 그런 요구를 할 수 있는 거야? 어떤 대단한 수가 있길래?”
희민은 허리춤에서 다시금 칼을 빼내었다.
그러나 진정 베어야 할 것이 눈앞에 존재하지 않았기에, 그 칼끝은 뚜렷한 목적을 갖지 못하고 흔들렸다.
“이 아이를 베어봐야 내 정신엔 기스도 안 나. 혹시라도 후회할까봐 미리 말해주는 거야.”
같잖은 협박이 귀엽다는 듯, 소녀의 얼굴은 픽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 얼굴의 본래 주인에게서는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웃음이다.
“...원하는 게 뭐야.”
“알고 있는 대로야. 배신자의 응징을 원해. 너희가 농땡이 피우고 있는 동안 생각을 좀 해봤는데, 그냥 죽여서는 성이 안 차겠더라고.”
시선을 내려 스스로의 몸을 스윽 훑으며, 소녀는 말을 잇는다.
“그래서, 쓸모가 있을 때까진 최대한 부려먹어볼 생각이야. 난 이만 입을 다물 테니, 어디 재밌게 놀아봐~.”
이대로 끝내선 안 된다고, 희민은 생각했다.
그러나 생각만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취할 수 있는 선택 없이 정지해있던 사이, 먼지를 동반한 바람이 한 차례 불었다.
바람이 그치었을 때, 흑발의 소녀는 입을 꾹 다문 채 표정 잃은 얼굴로 제자리에 서 있었다.
언뜻 보기에, 그 얼굴은 평상시의 세라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멀찌감찌에서도 희민은 알 수 있었다.
그것이 혼이 빠져나간, 평소와는 전혀 다른 얼굴임을.
“...세─!”
희민이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거센 바람 기류가 그를 뒤로 날려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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