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문제] 웅인의 두번째 문제

“어? 정답이다. 야~. 가만 보자, 보 잘 것 없는 기회, 보 잘 것 없는 재물. 재물!”
서진이 예상했던 대로 정답 처리 되었다.
[보 잘 것 없는 재물을 선택하셨습니다. 보상은 주 중에 적용됩니다.]
[다음 문제는 다음 주 토요일에 출제됩니다.]
서진은 흥미 없는 척 고개 돌리고 다시 누워, 아무도 모르게 미소 지었다.
‘그래, 여기 이 안에서도 니가 들여다 보고 있었구나?’
서진은 주변 상황과 반응이 출제된 문제의 정답 처리와 관계가 있다는 것을 확신했다. 바로 이 장소가 스캔 되고 있다는 뜻이다.
다시 졸리운 듯한 연기를 하며 침상에 누운 서진은 또 생각했다.
‘문제의 답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참여자의 행동에 대한 정보를 얻으려는 것이 분명하다. 사악한 새끼. 분명 보상과 페널티를 주었을 때 인간이 보이는 반응을 즐기기 위함이겠지.’
그래서 지난번 삶에서 서진에게 엄마의 정보를 유출 시킨 것이리라. 엄마의 죽음은 자신 때문이라고. 그러니 어디 억울해 보라는...
그러나 출제자도 모르는 것이 있다. 서진은 신이 주신 기회를 얻은 특별한 사람이란 것.
‘회귀... 이 말도 안되는 상황이 생긴 이유는, 저 말도 안되게 사악한 존재를 없애려는 신의 계획이 맞는 것 같다. 신이 내가 이길 것이라고 판단해서 나의 시간을 되돌린 것이라면, 내가 이길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난 반드시 이긴다.’
서진은 자는 척 누워서 바드득 이를 갈고 있었다. 지난 생 자신의 가족과 삶을 망친 실물 없는 출제자를 향해.
* * *
다음날 서진은 서울로 돌아 왔다.
월요일, 웅인의 통장으로 10 만원이 들어 왔고, 웅인은 소액의 복권이 당첨된 것 마냥 재밌어 했다.
* * *
화요일, 일이 바빠 정신이 없었다. 봄 시즌 마감에 여름 시즌 준비가 한창이어서.
서진이 맡은 제이엘전자 마케팅 부분은 가전이었다. 선풍기, 에어컨, 냉풍기, 얼음정수기, 냉장고까지 너무 많은 제품들을 전시하고 홍보해야 했다.
정신없이 일하는 동안에는 문제에서 살짝 벗어날 수 있었지만 문제는 여빈이었다.
일이 많다 보니 여빈과 같이 있는 시간도 너무 많았다. 아직, 제주에서의 행복했던 기억이 너무 많이 남아 있어서 서진은 여빈을 평상시처럼 대할 수가 없었다.
특히 자재관리팀의 고영광주임이 와 있을 때는 더했다.
고주임은 각 대리점의 가전 제품 재고를 맡고 있어서 마케팅 팀과 협업해야 하는 부분이 상당히 많았다. 그래서 이 시즌에 한 팀처럼 일하고 있었다.
쉬는 타임에 두 사람이 친하게 대하는 것을 볼때마다 묘하게 신경이 쓰였다.
낮 두 시반, 서진은 점점 예민해 지는 자신을 느끼며, 자리에서 일어나 탕비실 쪽으로 향했다.
‘알콜 보충은 어려우니 카페인이라도 보충해야겠다.’
서진은 커피머신에서 커피를 내리는 동안, 들리는 소리와 향기에 잠시 눈을 감았다. 눈을 감은 김에 목 스트레칭에, 머리도 지압하며 긴장을 풀었다.
커피가 다 내려지는 소리가 들려 눈을 뜨는데.
뜨악! 바로 앞에서 여빈이 자신의 얼굴을 똑바로 처다 보고 서 있었다.
“뭐, 뭡니까?”
“눈감고 뭐하시는가 해서요.”
여빈의 얼굴이 너무 가까운 탓에 서진은 몹시 긴장되었다.
“아, 깜짝 놀랬잖아요...”
고개를 돌리고 커피잔을 빼내는데 귀까지 빨개지는 들켜진 기분.
커피를 들고 황급히 자리를 피하려는 데 여빈이 서진의 팔을 살짝 잡는다.
서진은 당황해서 그대로 얼어 버렸다.
“어? 왜 나 안 쳐다 보죠? 내가 잡았는데?”
그제서야 서진은 마치 로봇처럼 뻣뻣하게 고개를 돌렸다.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여빈의 얼굴과 눈동자.
지난번 불쑥불쑥 사랑의 의미를 담은 과감한 말들을 날릴 때마다 서진을 똑바로 바라보던 그 눈동자였다.
“왜...요? 과장님?”
“아 또 과장님이라네? 나 대리라니까? 예쁜 정여빈 대리.”
“아, 네. 대리님.”
“나, 좋아하죠?”
“네?!”
“네, 긍정의 대답인가요?”
“네?! 뇨?”
아... 입이 왜 이리 뻣뻣하게 구는 건가.
“좋아하죠? 나?”
“아... 아닙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귀까지 빨개지죠?”
“당황해서.”
“뭐가 당황스러운데요. 팔 살짝 잡은 거?”
“아니요. 예쁘신 게.”
아, 이... 병신 주둥이.
여빈은 입에 주먹을 가져다 대고 안 웃는 척 웃다가 다시 정색하며.
“좋아하는 거 맞는 데요? 왜 아닌 척 하지?”
“아, 진짜 아닌데요.”
“그럼, 사랑하는 건가요?”
‘빌어먹을, 이 여자가 정말... 여기 CCTV가 얼마나 많은데!’
또 뇌에 여빈을 죽일지도 모르는 문제의 출제자가 훅~ 치고 들어오는 바람에 제 정신으로 돌아온 서진이 여빈을 향해 돌아섰다.
“정녕, 미치셨나 봅니다. 정여빈대리.”
서진은 도발하는 정여빈을 향해 오히려 가까이 다가서며 말했다.
“오~. 그렇지. 이제야 정상적으로 보이네.”
‘뭐야, 나 간 보는 건가?’
“저기 저~ 쪽에 오래된 친구 같은 애인 놔두고 저한테 이러지 마시죠. 대리님”
“음... 이건 질투가 좀 섞인 듯도 싶고?”
“오해십니다.”
“큭큭큭.”
제발 친하게 지내지 말자. 여기 PC며, CCTV가 엄청 많다고.
“전 그럼, 이만. 시키신 할 일이 겁나 많아서”
서진이 자리로 돌아가는데 뒤통수가 여간 뜨거운 게 아니었다. 분명 여빈이 팔짱을 끼고 가늘어진 눈으로 쳐다 보고 있을게 뻔했기 때문에.
“으휴우~.”
자리로 돌아가 앉은 서진은 풀린 긴장감 때문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아이씨... 젠장, 회사도 그만둬야 하는 건가?’
이렇게 바쁜 시즌에 사표를 던지면, 팀원 엿먹이는 거나 다름 없다. 그래도 욕 좀 먹는 게 여빈이 타겟이 되는 것 보다야 백배 나으리라.
‘뭔가 방법을 찾아봐야겠어. 이대로는 들통날 거야. 여빈이도 눈치챌 정도면.’
일 걱정과 함께 이 문제도 풀어야 하는 하는 숙제로 다가와서 인지 어깨가 더 축 처지는 서진이었다.
* * *
금요일 늦게 까지 야근을 한 마케팅팀은 퇴근 후 여름 시즌을 응원하는 회식을 갖기로 했다.
이른바 ‘파이팅해야지’ 회식.
서진은 그냥 집에 가고 싶었지만, 그날 따라 김부장이 카드 주면서 ‘한 사람이라도 빠지면 각자 돈 내’라고 말해서, 한 사람도 빠질 수 없게 만들었다.
회식 장소는 늦게까지 먹을 수 있는 회사 근처의 허름한 고기집.
좁은 먹자골목 구석에 있는 그 작은 고기집은 지난번 서진이 회사 주차장으로 복귀하고 두 주 정도 뒤에 갔었던 바로 그 고기집이었다.
‘아... 여기, 맞다. 우리팀 파이팅 회식장소.’
서진은 다시 오게 된 기분에 감회가 새로웠다. 지난번 이곳에 왔을 때는 여빈과 친해질 기회가 다시 생긴 것처럼 기뻤는데...
하지만 지금은 그 반대의 분위기를 연출해야 하는 상황. 최대한 무관한 사람인 척 해야 한다.
그런데, 또 자꾸 신경 쓰이는 놈이 있다. 정여빈 옆에 붙은 잘생긴 파리.
‘아니, 우리팀 회식에 자재팀 고주임은 왜 온 거야?’
고영광씨가 여빈과 친해지니 오히려 다행으로 여겨야 하는데, 머리로는 그러라는 데, 서진은 두 사람의 친한 모습에 자꾸 부아가 치밀었다.
예전에 썸이었을 때는 그렇지 않았는데, 아마도 제주도에서 확실히 여빈이 내 사람이었기 때문인가? 내 것을 이유 없이 뺏기는 기분이란 정말 더럽기 그지 없다.
모두 파이팅하는 즐거운 회식자리에서 박서진 혼자만 똥 씹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 * *
24년 5월 11일 토요일
웅인삼촌이 두 번째 질문을 받는 날.
서진은 지난주와 똑같이 큰 고모에게 밥을 싸 가지고 외삼촌에게 찾아 갔다.
여전히 일 도와 드리고, 친한 듯 무심한 듯 같이 있다가, 밤에는 삼촌 옆에 누워 자는 척했다.
“너... 근데 왜 오는 거냐? 내가 안쓰러워서?”
“아뇨, 엄마가 좀 잘 챙겨드리라고 해서요. 외로움 잘 타시는 성격이라고... 저도 그러고 싶고요.”
“누나는... 차라리 돈으로 도와주지.”
“아! 저번에 풀었던 문제, 보상 같은 거 들어 왔나요?”
“오~ 그거? 돈 엄청 많이 들어 왔더라?”
‘엄청 많이?’
“얼마나요?”
“야~ 무려 십만 원!”
그렇지, 십만 원도 엄청 많은 보상이지. 이게 인간이 생각하는 보편적인 생각이다. 커피 쿠폰, 로고 박힌 보틀, 아니면 상품권. 보통은 그런 것으로 프로모션을 진행하니까. 그런데 십억? 제세공과금도 안 떼고? 너무 비 상식적이다.
“와~. 삼촌 부자 되셨네요~.”
“아, 그 문제가 오늘 또 출제 된다는 데. 주마다 맞추면 십만 원 씩, 한 달에 사오십 만원은 되겠는데?”
이것도 정상적 범주. 그러나 삼촌, 이번 주엔 천만 원일껄요. 기절하시겠네.
“오, 그것도 괜찮네요. 파이팅 하세요! 삼촌.”
알고도 모르는 척 하는 것은 어렵고도 미안한 일이네.
오늘의 문제도 서진의 예상 범주 안에 있는 문제였다. 천만 원을 받아야 페널티 때 사용 될 테니, 오늘 문제에는 모험을 하지 않기로 했다. 페널티로 천만 원이 쓰여도 전혀 아깝지 않다. 그만큼 페널티는 공포스러운 것이었다.
이윽고 시간이 되었고, 묘한 이질감이 느껴지는 화면으로 문제프로그램이 떳다.
[두 번째 문제입니다.]
[인간은 어떨 때 행복을 느끼는가.]
“음... 이건 내가 행복할 때를 쓰면 되겠지? ‘집에서 편하게 쉴 때’... 어떠냐 서진아?”
“네, 뭐 사람마다 다 비슷하지 않을까요? 편하게 쉴 때가 제일 행복한 거? 정답일 듯 한 데요?”
[휴가처럼 집에서 편히 쉴 때]
삼촌은 그렇게 적었다.
서진은 뒤쪽 야전 침대에 앉아 지난번처럼 모니터를 보고 있었다.
‘나의 두 번째 문제는 <인간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였고, 비슷한 맥락이다. 여기까지는 쉽게 예측할 수 있어.’
하지만 세 번째 문제부터는 맥락이 달랐고, 그것은 참여자의 자세에 따라 다른 것처럼 생각되었다.
[정답입니다. +2의 유용한 보상을 획득하셨습니다.]
“와~ 축하 드려요 삼촌~.”
“그래~하하. 이거 재밌구나.”
[+2, 유용한 보상을 획득하셨습니다.]
[유용한 기회(수락버튼), 적절한 재물(수락버튼)]
웅인은 이번에도 재물을 선택했다.
서진은 또 별로 큰 관심 없는 듯이 자는 척 누웠다. 그리고 생각했다.
‘자 이제, 지금 부터가 진짜다.’
* * *
그 다음 주 금요일. 서진은 친구들을 불렀다. 이번엔 치킨집이 아닌 자신의 집으로.
보통은 친구들을 저녁에 만나 식사를 하고 들어오는 서진이 오늘 따라 회사도 가지 않고 친구들을 불러 하루 종일 방에 콕, 박혀 있으니 엄마와 아빠도 무슨 일인가 궁금해 했다.
“여보, 서진이가 요즘 무슨 일 꾸미는 것 같지 않아요?”
아들이 예전과 달리 성격부터 달라져 보이는 미선은 남편에게 걱정스러운 듯이 물었다.
“글쎄, 나도 좀 걱정되긴 하던데... 뭔 고물 자동차를 갑자기 사지 않나... 그런 거 살 때는 항상 나한테 물어보고 그랬는데 말이야.”
“회사가 힘든가? 원래 대기업이란 게 직급이 높아질수록 일이 힘들다면서요?”
“꼭 그렇지는 않은데... 이사 정도는 되야 실적 부담이 있겠지만, 회사를 그만두려고 그러는 건가??”
“멀쩡히 다니는 회사를 왜 그만둬?”
그 말에 미선은 펄쩍 뛰었다.
“뭐 사업 같은 거 생각해 볼 수도 있는 거지. 아직 젊으니까.”
“말도 안돼~. 에구~! 당신 꼴 나면 나는 그거 두 눈 뜨고 못 본다! 장가가기 전까지는 무조건 회사 다니라고 해요. 그 좋은 회사를 왜 그만둬? 그게 말이되?”
마침 그때, 방에서 서진이 나오며 미선을 향해 이야기 한다.
“엄마. 저 벌써 사표 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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