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도둑 (2)
현실감이 없는 남자의 외모에 마리가 가진 큰 착각은 얼마 가지 않았다.
듣기 좋게 울리는 낮은 목소리로 내뱉은 남자의 말에 마리는 그럼 그렇지, 라고 생각했다.
요정 같은 게 있을 리 없지.
“겁도 없이 내 정원에 들어오다니. 목숨이 아깝지 않은가 보군.”
마리가 대답이 없자 남자는 다시금 입을 열었다. 겁을 주려는 의도가 다분한 말이었음에도 남자의 낮게 울리는 목소리가 듣기 좋아 마리는 또 한참 동안 넋을 놓았다. 요정은 아니겠지만 혼을 빼 놓는건 그 이상이다. 전설 속 세이렌을 마주한 선원들이 이러지 않았을까? 몰래 들어온 사실을 들켜 위험한 상황이라는 생각조차 떠올리지 못한 채 마냥 이끌리게 되는 목소리였다.
“어?”
혼을 쏙 빼놓는 남자의 아름다움에 눈이 멀었던 마리의 눈가에 반짝하고. 무언가에 반사된 달빛이 날카롭게 눈을 찔렀다. 그 빛은 남자가 손에 쥔 날이 선 긴 칼날을 통해 온 거였다.
“사···. 살려···.”
칼. 이라는 걸 인식하자마자 꿈을 꾸는 듯 풀어졌던 긴장감이 바짝 올라왔다. 따지고 보면 유령이니 괴물이니 하는 것보다 더 조심해야 했던 건 이 저택의 주인이었다. 이 새벽에 몰래 담을 넘은 침입자를 곱게 보내 줄 리가.
“살려주세요.”
그래도 그렇지. 전후 사정도 들어보지 않고 칼부터 꺼내다니. 요정이라 해도 믿을 만큼 아름다운 모습과는 달리 조금의 자비도 없는 사람인 걸까?
마리가 아직도 아름다운 남자의 외모에 홀려 제대로 된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던 사이 멈춰 서 있던 남자가 천천히 발을 옮겨 마리를 향해 걸어오기 시작했다. 날카로운 빛이 다가오는 듯한 느낌에 마리는 그제야 완전히 정신을 차리고는 공포감으로 등골이 서늘해졌다.
“살려주세요!!!”
마리의 비명에 오히려 남자의 걸음이 빨라졌다. 마리는 힘을 다해 굳은 몸을 풀어 담장 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저 남자는 나를 살려줄 생각이 없나 보다.
“으악! 악!!”
죽을지도 모른다 생각했더니 여유롭게 길을 고를 시간 따위 없었다. 마리는 당장이라도 서늘한 칼날이 등 뒤에 닿을 것만 같은 기분에 길을 벗어나 담장으로 향하는 직선거리 상에 있는 꽃밭으로 뛰어들었다. 아까는 그렇게나 예쁜 꽃들이 자꾸 발에 걸려 마치 마리의 발목을 잡아당기는 것만 같았다.
“멈춰!”
제자리에 있어야 할 나무들도 꼭 일부러 자리를 옮겨 앞을 가로막는 것만 같아 마리는 마구잡이로 팔을 휘저으며 눈앞의 가지들을 쳐냈다.
“멈춰!”
“살려주세요!”
그러는 사이 손과 팔에 생채기가 나고 몇 번이나 넘어져 바닥을 굴렀지만, 마리는 멈추지 않았다. 나는 여기서 죽을 수 없다. 여기서 죽으려고 어울리지도 않는 데본셔 후작가의 친척 행세를 하고 있던 게 아니다.
“멈추라고!”
어쩐지 다급함이 느껴지는 남자의 목소리에도 마리는 뒤 한번 돌아보지 않고 달려 남자의 손이 닿기 직전 담을 넘을 수 있었다.
“마리? 너 머리가-.”
“엘리사! 달려!”
“응?”
엘리사에게 설명을 하고 말고 할 시간도 없었다. 마리는 무작정 엘리사의 손을 잡고 스카버러 공작 저택의 담장이 끝날 때까지 달리고 또 달렸다. 올 때도 참 큰 저택이다, 생각했지만 이렇게 달리다 보니 연이어 이어지는 담장이 정말 끝은 있나 싶을 정도로 길었다.
“헉헉.”
“헉헉. 마리. 왜 그래? 무슨 일이야?”
“헉헉. 아무도 안 쫓아 오지?”
저택 끝에 다다른 마리는 모퉁이 뒤에 숨어 아무도 따라오는 사람이 없다는 걸 확인 하고서야 가쁜 숨을 진정시켰다.
“설마. 들킨 거야?!”
“응···.”
엘리사는 잔뜩 겁에 질려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얼굴로 마리를 바라보았고, 마리는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은 뒤 엘리사의 양쪽 어깨를 잡은 채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
“괜찮아. 엘리사. 아무 일 없을 거야.”
“들켰다면서. 네 얼굴도 본 거지?”
“응. 달이 이렇게나 밝으니까.”
마리는 조금은 원망스럽게 밝은 달을 올려다보았다.
달이 밝지 않았다면 들키지 않았을지 모른다. 들켰다 해도 그 남자의 아름다운 얼굴에 얼이 나가 바보같이 그러고 서 있지 않았을 거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마리는 머릿속에 떠오른 남자의 모습에 절로 웃음이 피어올랐다.
“마리. 왜 웃어?”
“응? 아. 아니야.”
마리는 빠르게 고개를 휘저어 생각을 떨쳐 내었다.
한심하긴. 마리. 지금이 웃을 때야? 넌 방금 그 잘생긴 남자에게 죽을 뻔했다구.
“어떡해. 널 찾아내면.”
“내가 누군지 모를 거야. 나 브리타니아에서 지낸 지 삼 개월밖에 되지 않았잖아.”
“그렇지만···.”
“거기 주인도 5년이나 밖을 나온 적이 없다며? 내가 누군지 절대 모를걸?”
꼭 5년이나 집 밖을 나오지 않은 사람이 아니래도 글린트 사람이 마리를 알 리 없었다. 마리는 이곳에서 지낸 지 삼 개월밖에 되지 않았고 마리는 그동안 흔한 티파티 한번 참석한 적이 없었다. 마리가 정확히 어디 출신인지를 떠나, 마리라는 존재를 아는 사람이라고는 마리가 신세를 지고 있는 데본셔 후작 가 사람과 학교 아이들이 다였다.
마리의 확신에 찬 주장에도 엘리사는 여전히 불안한 눈빛을 감추지 못했다.
“괜찮아. 엘리사. 들킨다 해도 정원에 들어간 건 나잖아. 넌 안전하니 안심해.”
“그렇지만...”
“여기서 이러고 있는 게 더 위험하겠어. 우선은 집으로 가자. 엘리사. 우린 여기 온 적 없었던 거야. 알았지?”
“응.”
마리의 말에 뒤돌아 걸어가려던 엘리사는 자신의 쓰고 있던 보닛을 벗어 마리의 머리카락을 가려 주었다.
“이거 쓰고 가.”
“응? 응. 고마워.”
누가 보면 들킬까 봐 그러나?
마리의 말에 엘리사는 근심 가득한 얼굴로 인사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길을 따라 사라졌다.
“아! 장미···!”
엘리사를 보낸 뒤 터벅터벅 데본셔 후작 저택 쪽으로 걸음을 옮기려던 마리는 자신의 손에 아무것도 쥐어져 있지 않다는 걸 알았다. 손도 다치고 무릎도 까지고, 죽을 뻔까지 하고는 장미도 못 가져오다니. 정말 바보 같은 짓을 했다.
*****
어두운 밤길을 걸어 데본셔 후작 저택 앞에 다다른 마리는 무사히 도착했다는 사실에 길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나를 죽이려고 하셨던 걸까?’
이제는 안전하다는 생각에 긴장이 풀렸던지 마리는 정원에서 보았던 애런델의 모습이 다시금 떠올랐다. 아까는 당장 죽는 줄 알고 도망치긴 했지만, 정말로 애런델이 자신을 죽이려 했던 것인지 의문이 일었다.
‘그렇게나 아름다운 분이 설마.’
그나저나 이 늦은 시간에 정원엔 왜 나와 있었는지, 그것도 의문이었다. 들어가면서 무슨 큰 소리를 내지도 않았건만.
“어쩌지?...”
마리는 데본셔 후작 저택 옆문으로 쪽으로 향하며 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푸른 장미를 가져오겠다며 올리비아 앞에서 그렇게 떵떵거렸는데 하필 담을 넘다가 장미를 떨어트려 버렸다. 거기다 정원 주인에게 들켜 스카버러 저택을 다녀왔다는 소리조차 못하게 생겼다.
“어?... 샬롯이 깼나?...”
우선은 한숨 자고 생각하자 옆문을 열고 들어섰던 마리에게는 그보다 더 큰 문제가 생겼다. 분명히 아무도 모르게 잘 빠져나갔다고 생각했건만 별채 로비 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다.
“마리 아가씨! 어딜 다녀오시는 거예요!”
마리가 문을 열고 로비로 들어서자 유모 샬롯이 눈물 바람으로 마리에게 달려왔다.
“샬롯....”
샬롯은 아직도 놀란 기운이 가시지 않은 얼굴로 마리가 멀쩡한지 마리의 몸 여기저기를 살폈다.
“어디서 뭘 하다 오신 거예요. 이 밤중에! 이 상처들은 다 뭐고요.”
“미안해. 샬롯.”
마리는 샬롯의 잠을 깨운 것이 미안해 겸연쩍은 얼굴로 웃었다.
“어서 데본셔 후작님께 이야기해 드려야겠어요. 마리 아가씨가 무사히 돌아오셨다고요.”결국 헛수고가 된 마리의 바보 같은 짓의 여파는 샬롯의 단잠을 깨운 것에서 그치지 않았다.
“데본셔 후작님까지 나서셔서 아가씨를 찾느라 난리가 났었어요.”
대본셔 후작님까지 아셨단다. 지금 보니 데본셔 후작 저택에 불이 켜져 있는 건 마리가 지내는 별채만이 아니었다. 멀리 떨어진 본채에도 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다.
“아무튼 이리 돌아오셨으니 다행이에요. 아가씨. 아가씨가 잘못되신 줄 알고 어찌나 걱정했던지. 흰 머리가 백 개는 늘었겠네요.”
“내가 밖에 나간 줄은 어떻게 알았어?”
잠도 자지 않고 저택을 지키는 기사가 따로 있는 것도 아닌데 어떻게 마리가 사라진 걸 알고 이 난리가 났나 했다.
“헤이든 남작가에서 연락이 왔어요. 그 댁 엘리사 아가씨가 사라졌다고요. 마리 님이 아는 게 있으실까 해 물어보려 침실에 들어갔더니. 세상에. 아가씨도 안 계신 거예요. 제가 얼마나 놀란 줄 아세요? 꼼짝없이 브리타니아 병사들한테 잡혀가신 줄 알았잖아요!”
헤이든 남작이 딸인 엘리사가 없어진 걸 눈치챈 거였다. 이 늦은 새벽에 갑자기 딸이 사라졌으니 놀라서 여기저기 연락을 넣을 수밖에.
“마리. 어딜 다녀오는 거냐.”
마리와 샬롯이 별채 문을 열고 나서자 잠옷 위에 가운을 걸쳐 입은 아서 데본셔 후작이 다가섰다.
“후작님···.”
생기가 도는 연한 살굿빛 피부에, 금발에 파란 눈, 전형적인 브리타니아 귀족의 얼굴을 한 데본셔 후작은 다정하지만 어설픈 대답은 허용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느껴지는 목소리로 물었다.
“어딜 다녀왔어. 이 늦은 시각에. 샬롯조차 대동하지 않고 혼자.”
“저···. 그게···.”
마리는 차마 유령 저택으로 불리는 스카버러 공작 저택에 다녀왔다는 말은 할 수 없어 눈을 들지 못한 채 손가락만 꼬물거렸다.
“샬롯. 세바스찬에게 마리가 무사한 걸 확인했으니 수색을 내보낸 사람들을 불러들이라고 전해 주세요. 헤이든 남작가 영애도 돌아왔는지 확인해 보라는 말도.”
“네. 후작님.”
샬롯이 본채 쪽으로 뛰어가 사라진 뒤 긴장을 풀고 마리가 보닛을 벗자 데본셔 후작의 얼굴이 급격히 일그러졌다.
“마리. 가발을 어떻게 했지?”“네?”
마리는 깜짝 놀라 머리카락을 만져 보았다. 어떻게 된 영문인지 마리가 셰리아인 임을 숨기려 은발의 머리 위에 덮어쓰고 있던 갈색 머리 가발이 감쪽같이 사라진 상태였다.
*****
스카버러 공작 저택 정원.
정원의 주인 애런델은 마리가 사라진 담장 앞에 멈춰 서 있었다.
“장미 도둑인가?”
이곳에 푸른 장미가 있는 건 또 어떻게 알고.
애런델은 담장 아래로 다가서 마리가 흘리고 간 푸른 장미 두 송이를 집어 들었다.
요 며칠 잘 익은 열매들이 사라진다 했더니 여기 들어온 부랑자가 어디선가 푸른 장미 얘길 흘린 건가. 푸른 장미는 비싸게 팔린다고 하니 소문을 듣고 왔는지도 모르겠다.
꺾인 장미를 보며 한숨 짓던 애런델의 눈에 담장 앞에 떨어진 갈색의 털 뭉치 같은 것이 눈에 띄었다.
“가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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