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정원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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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이칠
작품등록일 :
2025.01.24 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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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2.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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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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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도둑 (4)

DUMMY


“공작님 목숨을 노린 게 아닙니까!”


좀처럼 큰 소리 날일 없는 스카버러 공작 저택 응접실에서 쩌렁쩌렁한 남자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분명합니다! 이건 공작님께 원한을 가진 패잔병 일당이 공작님의 목숨을 노리고 암살자를 보낸 겁니다!”


애런델의 앞에서 소리를 치고 있는 남자는 키가 크고 덩치도 산만 한 데다 덥수룩한 짙은 갈색 머리와 수염이 인상적인 현 황립 기사단 단장 매튜 뷰로린이었다. 전쟁 당시 애런델의 전 부하이기도 했던 매튜는 어젯밤 애런델의 저택에 침입한 자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한달음에 달려온 것이었다.


“얼굴은 보셨습니까? 어느 나라에서 온 자인지 추측은 가십니까?”

“글쎄...”


매튜가 좀처럼 자리에 앉지 못한 채 길길이 날뛰는 것과 달리 애런델은 응접실 의자에 꼿꼿이 허리를 세우고 앉아 가만히 홍차가 든 잔을 기울였다.


‘어느 나라라...’


번잡한 분위기에도 상관없이 애런델은 창 너머 새어 들어오는 아침 햇살 아래 물기를 머금은 청초한 푸른 장미처럼 고고한 자태로 빛을 발하고 있었다.


- 쨍그랑.


“죄송합니다! 공작님!”


아침의 평화로운 분위기를 깬 건 차 시중을 들던 젊은 하녀 엠마였다. 매튜에게 내놓을 찻잔을 옮기다 손이 미끄러져 찻잔을 깨트린 거였다.


“괜찮으니 손을 다치지 않게 조심하도록 해.”

“네. 공작님.”


애런델은 엠마를 일을 한 지 꽤 된 것 같은데도 실수가 잦은 아이구나 생각했지만, 매튜는 알았다.


‘하여간 죄 많은 남자라니까.’


엠마가 애런델의 모습에 순간 눈을 빼앗겨 찻잔을 잘못 내려놓는 실수를 저질렀다는 것을.


“그렇게 태평한 얼굴로 계실 때가 아닙니다! 공작님! 그게 사실이라면 대책을 세워야지요!”


애런델이 저택 안으로 숨어들기 전 이런 광경을 수도 없이 봐온 매튜는 별일 아니라는 듯 어제의 침입자에게만 온 신경을 집중했다.


“도대체 누가 감히 공작님 저택을!...”


별 반응 없는 애런델이 매튜의 눈에는 태평스러워 보였겠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망가진 정원 탓에 애런델은 꽤 심기가 불편한 상태였다. 물론 햇살 속에 빛나는 애런델은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아 상대가 감히 눈길을 바랄 수도 없는 공작님이라는 걸 알면서도 엠마의 심장을 떨리게 했지만.


“글쎄.”


그런 엠마의 마음을 모르는 애런델은 조용히 허공을 응시하며 같은 대답을 내뱉었다.


“공작님!”


매튜의 다그침에 애런델은 말없이 어젯밤 보았던 소녀의 모습을 떠올렸다.


어느 나라 사람이라...


‘셰리아. 셰리아 인이었지.’


눈처럼 깨끗하고 투명한 흰 피부와 옅은 연두색의 눈동자. 무엇보다 담을 넘을 때 달빛 아래 흩날리던 그 은빛 머리카락은 셰리아인 만의 것이었다. 하얀 피부는 타스몬 대륙에선 흔했고 다른 나라에서 가끔 연둣빛 눈동자와 마주할 수 있었지만, 머리카락은 달랐다.


“아닐 테지.”

“네? 뭐가 아닐 거란 말씀이십니까?”


매튜의 질문에 애런델은 말을 이었다.


“훔쳐 가려던 꽃을 놓고 갔어. 내 목숨을 노렸다고 하기엔... 그렇게 허술할 수가. 게다가 그 아인 몸집이 작은 소녀였어.”


매튜는 몸이 들썩일 정도로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공작님. 전쟁이 끝나고 5년이나 지났다지만 아예 감을 잃으신 겁니까? 꽃은 연막일 수도 있습니다. 어제 저택을 침입한 자가 얼마만큼 작은 아이인지는 모르겠으나. 공작님은 무려 열 살짜리 남자아이에게 칼을 맞은 전적도 있으십니다.”


작은 소녀라서, 허술해서라는 이유보다 애런델이 어제의 침입자를 단순한 장미 도둑일 거로 추측하는 건 상대가 셰리아인이었기 때문이었다.


/저희 셰리아는 오늘부로 브리타니아의 속국이 될 것을 선언합니다. 이 땅에 의미 없는 피를 뿌리지 마시고 저희의 항복 의사를 받아 주십시오./


타스몬 대륙의 패권을 놓고 대륙의 북쪽 전체가 전쟁에 휩싸였을 당시 대륙 최북단에 있는 셰리아는 발 빠르게 사절단을 보내 항복 선언을 했다. 덕분에 애런델은 아무런 전투를 치르지 않고 셰리아의 수도 카린에 무혈입성할 수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애런델님. 여기까지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잠시 쉬었다 가실 수 있도록 좋은 음식과 편안한 잠자리를 준비했습니다./


거기다 셰리아는 연이은 전쟁으로 지친 애런델과 그 군사들을 위해 쉴 자리까지 마련해 주었다.


/애런델님. 황제께서 셰리아의 귀족 몇을 본보기로 삼으라는 명을 내리셨습니다./


/백기를 들고 적군에게 이런 대우를 해주는 사람들을 해하라니요. 그 명령에는 따를 수 없습니다./


어느 나라와 도시를 지나던 등 뒤에 시체를 쌓아놓고 걸어왔던 애런델이 아무도, 단 한 명도 죽이지 않고 떠나온 유일한 나라가 셰리아였다. 그런 곳에서 내게 악감정을 품은 사람이 있을 리가.


셰리아가 전쟁 초반부터 항복을 선언한 마당에 다른 나라에 남아 죽음을 자초한 셰리아 인이 있었을 거란 생각할 수도 없었다. 셰리아 인들은 현명한 사람들이었다.


“공작님. 제 말 듣고 계십니까?”

“듣고 있어.”

“누구인지 보긴 하신 거지요? 침입자에 대해 짐작 가는 건 없으십니까?”


그 아이가 셰리아 인이 맞다면 나를 죽이려는 자는 아니다. 그런데도 애런델이 찜찜한 기분을 떨치지 못하는 건 서랍 속에 숨겨 둔 가발 때문이었다.


“무언가 생각나는 게 있다면 꼭 말씀해 주십시오. 저는 이렇게 넘어갈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침입자가 다시 들어올 때를 대비해 제가 당분간 이곳에서 지내며 보초를 서겠습니다.”


여자들이 예쁘게 보이고 싶어 가발을 쓰는 경우는 자주 있다. 그런데 무언가를 훔치러 오면서도 가발을 쓸 정도로 허술한 도둑이라니. 그렇다고 내 목숨을 노리러 온 자가 변장을 하기 위해 겨우 가발 하나 썼다고 생각한다면 그 또한 코웃음 칠 일이다.


“그럴 필요까진 없을 것 같은데.”

“아닙니다! 제가 아니면 공작님을 누가 지키겠습니까! 제가 지키겠습니다!”


됐다는 말을 들을 매튜가 아니라 애런델은 거기서 말을 멈추었다. 애런델이 가발을 발견했단 소리도 하지 않은 건 매튜의 이런 유난 때문이었다. 매튜는 작은 일도 크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그럼 저는 지낼 곳을 돌아보고 오겠습니다. 아무리 오는 손님이 없다지만 정원만 신경 쓰지 마시고 저택 관리에도 힘을 써주세요. 이 큰 저택에 하인이 겨우 넷뿐이라니. 이러니 유령 저택 소리를 듣는 겁니다.”


매튜가 쿵쿵대며 응접실을 나간 뒤 애런델은 창 너머 망가진 정원을 내려다보았다. 짓밟힌 꽃밭 위로 어제 본 마리의 모습이 겹쳤다.


/요정님?.../


달아나기 전 에메랄드빛 호수를 담은 듯한 소녀의 옅은 연두색 눈이 바람 속에 흐려졌었지.


/요정님. 저를 사방 가득 푸른 장미밭이 펼쳐진 셰리아로 데려다주세요./


못 견디게 셰리아가 그리워 눈물을 지을 정도면서 셰리아로 가지 못할 사정이라도 있는 것일까.


그렇다면 이 가발의 의미도 해석이 된다. 셰리아 인이면서 셰리아로 돌아갈 수 없고, 셰리아 인이면서 셰리아 인임을 숨겨야 할 사정이 있다면.


/살려... 살려주세요!/


회상 중에 언덕을 구르다시피 달려 도망갔던 작은 소녀의 모습이 떠오르자 애런델의 입가에 씁쓸한 웃음이 번졌다.


살려달라니. 내가 자신을 죽이기라도 할 것처럼.


애런델이 그 밤에 칼을 가지고 정원에 있었던 건 요 며칠 사람이 드나든 흔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유독 잘 익은 열매가 사라지곤 했다. 부랑자인지 누군가가 들어와 열매를 따 먹는 건 큰일이 아니었으나, 꽃밭에 누워 자고 열매가 달린 가지를 아무렇게나 쥐어뜯는 바람에 정원이 망가지는 건 문제였다.


그 누구라도 정원을 망치게 둘 수 없었던 애런델은 상대에게 겁을 줘 쫓아낼 심산으로 칼을 들고 있던 거였다.


“부랑자보다 정원을 더 망쳐놨군.”


소녀에게 애런델을 암살할 생각이 없었다고 해도 결과적으로는 그런 시도를 한 것이나 마찬가지긴 하다. 애런델에게 있어 정원은 자신의 생명만큼 귀한 것이었으니까.


*****


“레몬 전쟁에서 브리타니아를 승리로 이끈 영웅들이 계시죠? 누구인지 말해볼까요?”


마리의 머릿속은 가발을 찾으러 갈 생각으로 가득했지만 우선은 수업에 열중했다. 오늘 수업 내용은 어제 배웠던 레몬 전쟁 당시에 활약했던 영웅에 관한 것이었다.


“매튜 뷰로린 기사님이요!”

“가이우스 바로 기사님이요!”

“애런델 스카버러 공작님이요!”


승자의 쪽에서 기억하는 전쟁은 아름다운 법이라 브리타니아 편에서 활약한 기사들은 영웅 대접까지 받는 모양이었다. 너나 할 것 없이 신이 나 전쟁 영웅의 이름을 외치던 중 누군가가 ‘애런델 스카버러 공작’의 이름을 부르자 교실은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그래요. 그 외에도 황제의 아들이신 트바인 바이스 스카버러님과 트와인 바이스 스카버러 님도 큰 공을 세우셨지요. 자 이 전쟁의 양상은-”


마리는 궁금해졌다. 어째서 ‘애런델 스카버러 공작’. 스카버러 저택 주인의 이름이 나왔을 때 뭔가 말해서는 안 될 이름을 말한 것 같은 그런 분위기가 되었는지.


“그분은 황가에서 쫓겨나셨다는 소문이 있거든.”


수업이 끝난 후 엘리사에게 물었더니 엘리사는 스카버러 공작이 황가에서 쫓겨난 황제의 셋째 아들이란 말을 해주었다.


“잠깐만. 설마 그 스카버러 공작이 어제의 그 저택 주인이야?”

“맞아. 네가 어제 본 사람이 그 공작님일 거야.”

“뭐?!”


뭐야. 그럼 나는 브리타니아 황제에 대한 반역 혐의를 피해 이곳에 숨어있으면서 무려 황제의 셋째 아들 집에 몰래 들어갔단 말이잖아.


거기서 잡혔다면... 마리는 생각으로 식은땀이 났다.


“그런데 영웅 소리 들을 만큼 전쟁에서 공을 세웠는데 황가에서 쫓겨났다고?”

“소문이 그래.”

“왜?”

“전쟁광이라서. 사람을 엄청 많이 죽였대. 공작님이 승리를 거둔 도시에는 어린아이 하나 남아 있지 않을 정도였다고들 하니까. 그리고 그분은 황제께서 공작으로 계실 때 정부에게서 낳은 아들이래.”


아, 그래서 어제 본 정원 주인의 머리 색이 검었구나 싶었다. 애드먼드 황제는 데본셔 후작처럼 전형적인 브리타니아 귀족 같은 살굿빛 피부에 금발에 파란 눈이었다.


“전쟁광이었다고?”

“응.”


정원에 숨어들었다고 칼부터 빼어 들고는 죽이겠다 칼을 들고 쫓아온 걸 보면 그 말이 맞는 말일지도 모르겠다. 그렇게나 아름다운 얼굴의 사람이 전쟁광이라 아이의 목숨조차 쉬이 봐주지 않고 모조리 죽여 버렸다는 말이 쉽사리 믿기지 않지만.


“가도 괜찮으려나...”


마리는 스카버러 저택 근처를 둘러보러 가도 괜찮을지 여러모로 고민이 되기 시작했다.


*****


스카버러 저택 정원. 애런델은 두꺼운 작업용 장갑을 끼고 정원으로 나섰지만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조차 몰라 우두커니 망가진 정원을 바라보고 있었다.


“작정이라도 한 것 같군.”


그 작은 여자아이가 어찌나 알차게도 꽃을 짓밟고 가지들을 부러뜨려 놓았던지 일부러 이랬나 싶을 수준이었다.


“작정했을지도 모릅니다. 어떻게 생긴 아이였는지 말해주지 않으실 셈입니까!”


곁에 선 매튜는 정원에 들어온 아이의 생김새라도 알려달라 성화였지만 애런델은 입을 다물었다.


‘종일 이럴 생각은 아니겠지.’


망가진 정원을 살피느라 여기저기로 눈을 돌리던 애런델은 철제 대문 너머 누군가와 눈이 마주쳤다.


“어딜 보시는... 누구냐!”


연두색 눈동자. 마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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