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동대

설랑대와 팽무진, 허진대가 회의실을 나가자,
남은 자들의 눈에 비친 이들의 모습이 듬직해 보이는 건 어쩔 수 없을 것이다.
특히 허장공 장문인과 팽자운 장로의 눈에는 뿌듯함이 일었다.
사천당가 당염승 장로만 씁쓸한 표정을 짓는 것은 별개로 하고.
“자, 우리도 준비하세.”
현재 점창파에는 하북팽가, 사천당가, 하란문, 그리고 무림맹 비호대, 청룡대가 모여 있었다.
전부 합친다 해도 구백 명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지원이 올 때까지 이들만으로 마교의 총 공세를 막아내야 한다.
이들은 당연히 후발대로 화산파, 무당파, 종남파에서 지원 병력이 오는 걸로 알고 있었다.
*
“잠깐. 대기.”
하종두는 일행을 멈춰 세운 다음 눈을 감고 집중했다.
쿨렁.
혼돈기가 움직였다.
진기가 순식간에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십 장, 이십 장, 오십 장······.
아직 기감에 잡히는 인기척은 없었다.
조금 더 먼 거리로 기감을 확장했다.
백 장, 이백 장······.
‘잡았다!’
하종두는 진기를 회수한 뒤, 소백을 불렀다.
“형님. 놈들은 이백 장 정도 아래쪽에 숨어 있어요.”
“놈들은 몇 명이냐?”
“정확한 건 아니지만 대략 이백여 명 정도네요. 놈들 무공 경지도 잘해야 절정급.”
팽무진과 허진대는 순간 자신들의 귀를 의심했다.
절정급을 무슨 지나가는 똥개 수준으로 얘기하는 게 아닌가?
더욱 가관인 건 설랑대 모두 아무렇지도 않게 하종두의 말을 받아들인다는 점이었다.
“그렇담. 굳이 숨어서 갈 필요도 없겠군. 빨리 해치우자고.”
“예. 진평 형님. 모두 들었죠. 자, 갑시다!”
설랑대는 들키는 건 신경 하나도 안 쓰고 놈들을 향해 달려 나갔다.
이미 이들의 신법은 극성에 도달했다.
의지에 따라 몸이 자연스럽게 나아갔다.
점창산은 중원 오악 못지않게 험난한 지형으로 십만대산의 한 줄기를 차지하고 있다.
이런 험악한 산비탈을 바람처럼 달려 나가는 설랑대였다.
“······.”
팽무진과 허진대가 머뭇거리는 사이 설랑대는 시야에서 사라지고 있었다.
둘은 서로를 바라보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우리도 갑시다.”
“예.”
근처까지 다가간 설랑대.
하종두는 몸을 숨기고 놈들의 동태를 살폈다.
기감으로 확인한 것과 같이 적의 동태에 변수는 없어 보였다.
하종두는 오른손을 들어 모두의 시선을 모았다.
그리곤.
“모조리 쓸어버리세요.”
여덟 개의 그림자가 쏜살같이 내달렸다.
먼저 도착한 하종두가 열화궁에서 익힌 열화검법(烈火劍法)을 펼쳤다.
뜨거운 열기를 두른 신멸검을 앞으로 휘둘렀다.
어두운 밤을 밝히는 검붉은 검강이 날아갔다.
“적, 적이다!”
갑자기 날아온 불꽃에 혼비백산한 마인들.
보고 반응하기에는 이미 늦었다.
퍼펑! 퍼퍼펑!
“으, 으아아악!”
엄청난 굉음과 함께 비명소리가 난무했다.
하종두만 공격한 게 아니었다.
뒤이어 일행들의 검격도 날아들었다.
콰콰콰광! 쿠구구궁!
놈들이 숨어 있던 장소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공격에 직접적으로 노출된 적들은 시체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참혹했다.
머리가 터져 뇌수가 흐르고, 잘려 나간 상반신에서는 내장이 흘러내렸다.
뒤따라 달려온 팽무진과 허진대는 감히 끼지도 못하고 구경만 하고 있었다.
‘대단하군. 북악산에서도 대단하다고 생각했는데 그때는 본 실력을 꺼내지도 않았군.’
팽무진은 설랑대의 화끈한 무위에 감탄성을 내뱉었다.
하북팽가도 호탕한 무위를 자랑하는 문파였기에 당연히 설랑대가 선보인 무위에 동경이 갈 수밖에 없었다.
‘나도 넋 놓고 있을 수만은 없지.’
“하아압!”
기합성을 내지르며 달려가는 팽무진.
그 뒤를 허진대가 따라붙었다.
*
“아버님. 이제 점창산 초입에 도착했습니다.”
“속도를 늦춰라. 적들이 숨어 있을 수 있으니까 모두 경계를 강화하면서 이동해라.”
“예. 문주님.”
이들의 정체는 진수문이었다.
장거리를 이동해 오느라 피로가 누적된 상태였지만, 눈빛만은 어둠 속에서도 번뜩였다.
진수문도 열화궁주의 요청을 받고 급히 운남에 달려오는 중이었다.
진조한 문주는 고개를 돌려 제자들 상태를 일일이 점검하곤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 잘 견뎠다. 올라가자.”
**
삼묘문 문주 삼묘백은 내일 새벽에 있을 공격을 대비해 미리 점창산에 올라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귀마의 공격 신호만 떨어지면 바로 달려 나갈 수 있게 준비를 마친 채 대기 중이었다.
그런데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고 생각지도 못한 습격에 화들짝 놀라 막사를 뛰쳐나갔다.
“이봐. 무슨 일이냐?”
삼묘백은 병장기를 챙겨 서둘러 뛰어가는 문도를 붙잡아 세웠다.
“문, 문주님. 저도 어떤 영문인지 모르겠습니다. 단지 병장기를 챙겨서 소리 나는 곳으로 가라는 지시밖에 못 들었습니다요.”
그때 마침 비영당주 송양이 뛰어왔다.
“문주님. 보고드리겠습니다. 지금 산 위에서 일단의 무리가 내려와 선두 대열을 공격했다고 합니다.”
“뭐! 산 위에서?”
“예. 점창파 놈들인 것 같습니다.”
“이, 이놈들이···. 너는 지금 당장 달려가서 전황을 살피고 다시 보고해라.”
“알겠습니다.”
삼묘백의 잔머리가 급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자신이 굳이 이 전장에 참여한 이유는 승리가 확실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점창대전을 준비한다는 정보를 입수하자마자 달려온 것이다.
의무적으로 참석하라는 연락도 없는데, 스스로 자진해서 말이다.
하지만 상황이 이렇게 바뀌면 생각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
삼묘문은 상단을 운영하면서 수집한 정보를 본 교에 전달하는 연락책 역할을 하고 있었다.
특히 묘가상단을 이용해 갖은 불법적인 일을 자행하며 막대한 부를 챙기고 있었다.
얼굴에 욕심이 덕지덕지 붙은 삼묘백의 날카로운 촉이 발동됐다.
‘여기 있다간 죽는다.’
생각을 마친 삼묘백이 몸을 일으키려 할 때.
콰과광!
이번엔 산 아래에서 굉음이 터졌다.
삼묘백의 시선이 급하게 돌아갔다.
뭔가 일이 크게 틀어졌다는 불길한 예감도 스멀스멀 올라왔다.
이제는 동시에 위아래에서 비명이 난무했다.
*
“아버님. 산 위쪽에서 싸움이 벌어졌는데요.”
“그렇다면, 점창파는 아직 무사하다는 거군. 어서 뚫고 올라가자.”
진수문은 쉬지 않고 점창산을 올라가는 중이었다.
정말 삼천 리나 되는 먼 거리를 정신없이 달려 온 것이다.
체력적으로 지칠 만도 했지만 산 위에서 들려오는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를 향해 달려갔다.
얼마 안 가서 몸을 숨기고 있는 마인들을 발견했다.
“진 대주는 좌측을 맡아라. 난 용이와 우측을 맡겠다.”
“예. 문주님.”
“가자!”
진수문 무인은 소리 없는 폭풍을 일으키며 거침없이 산을 올랐다.
과감한 돌진임에도, 움직이는 모습이 매우 은밀했다.
눈앞에서 달려가고 있는데도 존재감이 없는 듯 흐릿하게 보였다.
주의 깊게 살피지 않으면 눈앞에 있어도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였다.
마치 살수의 은신술과 같았다.
“윽! 큭!”
“누구냐? 모습을 드러내라!”
"기습이다!!"
마인들은 짧은 단발마와 함께 여기저기서 픽픽 쓰러졌다.
진수문의 무인들은 적진을 종횡무진 휩쓸고 다녔다.
특히 진조한의 움직임은 가히 명불허전이었다.
어둠과 완전히 동화된 듯 눈앞에서 스스륵 하고 사라졌다.
마인들 옆을 천천히 걸어가고 있는데도 누구 하나 인식하지 못했다.
풀썩! 풀썩!
그냥 걸어가면서 가볍게 단검으로 목을 푹푹 찔러댔다.
산 위에서는 설랑대가 폭풍이 몰아치듯 요란스럽게 몰아치고 있었고,
산 아래에서는 진수문이 조용한 죽음의 공포를 몰아오고 있었다.
설랑대 일행들도 산 아래에서 마인들을 죽이며 올라오는 기척을 느꼈다.
“누구지?”
많지 않은 인원임에도 하나하나 느껴지는 기세가 보통이 아니었다.
“지원군인가? 잘됐네. 빨리 끝내자고.”
대열이 무너진 적들은 한마디로 오합지졸이었다.
오백이나 되는 삼묘문 마인들은 제대로 검을 휘두르지도 못한 채 허무한 죽음을 맞이했다.
진조한도 설랑대가 뿜어내는 기세를 읽었다.
“저기 있군.”
진조한의 표정은 하종두를 지원하기 위해 급하게 내려온 것 치고는 무심했다.
하종두와 진수문의 만남.
“처음 뵙겠습니다. 설랑대 대주 하종두입니다. 실례지만 누구신지 여쭤봐도······.”
“자네가 하종둔가. 반갑네. 난 진수문 진조한이네. 하정문 궁주님에게 말을 많이 들었네.”
“네? 저희 할아버님을 아시는지요?”
“자네는 모르겠지만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지. 이번에도 궁주님 부탁을 받고 달려온 거고.”
“아, 그러시군요.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진수문은 살수 문파로만 외부에 알려져 있을 뿐. 정확한 실체는 알려지지 않았다.
주로 악인에 대한 청부만 의뢰받기 때문에, 사파나 마교에서는 저승사자로 불릴 정도로 위명이 높다.
물론 하종두도 진수문의 실체를 모르고 있기는 했지만.
“저, 문주님. 저희는 할 일이 있어서 자리를 떠야 할 것 같습니다.”
“할 일?”
다행히 숨어있는 정체불명의 세력을 처리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아직 할 일이 많이 남아있었다.
“예, 아마 내일 새벽이면 마교의 공격이 시작될 겁니다. 그전에 점창산에 숨어 있는 놈들을 최대한 잡아야 돼서 이렇게 움직이던 참입니다.”
“그래? 그럼 우리가 도와줄 일은 없는가?”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지금 점창산에 사파 기인혈수들이 대거 숨어 있을 겁니다. 아마 놈들은 숨어있다가 전쟁이 시작되면 저희 진영을 흔들어 놓을 심상일 겁니다.”
“그런 놈들은 우리가 전문이지. 시간도 촉박한데 구역을 나눠서 움직이세.”
설랑대 입장에서는 마음이 조급한 상태였다.
생각한 것보다 시간이 많이 흘러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진조한은 하종두를 흐뭇한 표정으로 보고 있었다.
‘잘 컸군. 형님이 괜한 걱정을 하시고 계시군.’
잠시 후,
인원을 다섯 개조로 나눈 일행은 그림자가 되어 산속을 누비기 시작했다.
지금 설랑대는 팽무진과 허진대가 포함되어 총 여덟 명이었다.
이동하는 와중에 몇 개의 무리를 처리했다.
다시 이동하던 중 또 숨어 있는 무리를 발견했다.
“형님. 보이시죠?”
“그래. 열 명 정도 되는 것 같군.”
“일단 한 명씩 맡죠.”
“놈들 중에 고수가 있구나. 최대한 은밀하게 접근해야겠다.”
작전을 전달받은 일행들은 각자 맡은 놈들을 향해 은밀하게 거리를 좁혀 접근했다.
그리곤 하종두의 손짓에 모두는 일제히 날았다.
휘익! 푹!
몰래 접근한 일행들은 각자의 병장기를 이용해 적의 숨통을 손쉽게 끊었다.
“어떤 놈들이냐?”
채챙!
청색 가면을 뒤집어쓴 놈이 기척을 느끼고 검을 뽑아 들었다.
그사이 나머지 한 명까지 처리한 설랑대.
검을 뽑아 들고 기세 좋게 소리쳤던 청색 가면은 순간 움찔했다.
하지만 자기가 누구였던가.
웬만한 문파의 수장들과 맞먹는 무공을 보유하고 있는 고수였다.
새파랗게 어린 놈들 때문에 순간 당황했던 자신이 창피했다.
“이놈들 내가 누군 줄 알고! 죽어봐야 정신을 차릴 놈들이군.”
놈을 쳐다보던 염우행이 슬쩍 미소를 지었다.
“찾았군. 청면귀검.”
청면귀검은 심장이 떨어질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그냥 아는 것도 아니고 자신을 찾아다녔다는 말이 아닌가?
이곳 점창산까지 와서.
“넌 누구냐?”
“나? 염우행.”
“···뭐라고! 멸혼도···, 염우행?!”
어찌나 놀랐는지 말도 제대로 못하는 청면귀검이었다.
“어떻게 네놈이 여기에······?”
“그거야 널 잡으러 왔지. 하하하. 이런 곳에 처박혀 있었군.”
“···이, 이놈.”
청면귀검은 이제야 눈앞에 있는 자들의 실력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염우행 한 명만 해도 살아날 가능성이 희박한데, 무려 여덟 명이었다.
‘도, 도망을······.’
가면 속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렸다.
아무리 둘러봐도 탈출구가 보이지 않았다.
“저기 염 소협. 내 항복할 테니 살려주게. 제발 죽이지만 말게.”
“아니 천하의 청면귀검께서 이게 무슨 꼴인가? 좋네. 그러면 나랑 생사결에서 이기면 살려 주겠네. 내 이름을 걸고 약속하지.”
청면귀검은 염우행 일행을 돌아봤다.
하종두가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난. 설랑대 대주 하종두다. 나도 내 이름을 걸고 약속하지. 만약 네놈이 이기면 손끝 하나 대지 않고 살려주지.”
어차피 청면귀검은 막다른 길에 와 있다.
선택의 기회라도 있는 게 어딘가.
“좋다. 약속은 지켜라.”
“당연하지. 준비됐으면 들어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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