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 전투의 서막

손가락을 까딱거리는 염우행.
‘웃는 표정의 청색 가면’을 보고 있으면 왠지 섬뜩한 기분이 들 정도로 소름이 끼쳤다.
청면귀검은 가면으로 사람의 눈을 현혹시킨 후 몰래 찔러 들어가는 수법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농락했다.
한 마디로 얍삽한 자라 보면 된다.
“죽어라!”
초반부터 자신의 절기로 공격해 오는 청면귀검이었다.
검을 휘둘렀는데도 눈앞에서 검이 사라졌다.
귀검이라 불릴 정도로 단연코 귀신 같은 검이었다.
하지만.
채앵!
얇은 금속성이 울렸다.
염우행의 도가 귀검을 간단하게 막았다.
“움직임이 많이 둔해졌군.”
“···웃기는 소리.”
염우행이 도를 앞으로 겨누었다.
“이번엔 나의 도를 보여주지. 네 놈처럼 조잡하지는 않을 거다.”
흑풍참격(黑風斬擊).
검은 바람이 해일과 같이 묵직하게 몰아쳐 들어갔다.
청면귀검의 검은 한없이 가볍고 소리 없이 은밀한 반면, 염우행의 도는 앞을 막는 모든 걸 부숴버릴 것처럼 강맹했다.
콰콰광!
가벼운 검으로 막기에 버거웠던지 청면귀검의 몸은 뒤로 한껏 뒤집어졌다.
‘이런 미친······!’
놀라는 청면귀검과 달리 염우행은 여유가 있었다.
“더 놀고 싶은데 내가 시간이 없네.”
“······.”
“이제 끝내자.”
휘이익!
도가 휘둘러지는데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났다.
“자, 잠깐마······.”
서걱!
검과 함께 잘려 나가는 청색 가면.
그리고 드러나는 얼굴.
그건 바로 무영이었다.
무림맹 사마군사와 함께 있던 그림자.
사마군사의 정체가 들통나면서 무림맹을 몰래 빠져나왔던 무영이 이곳에 있었다.
그동안, 사마군사의 밀명을 받고 정파인들을 죽이고 다녔던 자의 정체가 바로 청면귀검. 무영이었다.
하지만, 염우행은 이 자가 사마 군사와 엮여있다는 사실은 모르고 있었다.
알아도 이젠 소용이 없게 되었지만.
“옛날부터 쫓던 자예요. 그런데 여기서 놀고 있었네요.”
염우행은 청면귀검의 시신에서 고개를 돌리며 멋쩍은 듯 웃었다.
“자, 시간이 너무 지났군. 아직 몇 마리나 더 숨어 있는지 모르지만 최대한 잡아 봅시다.”
하종두는 염우행 어깨를 툭 치곤 말했다.
**
인시(寅時) 초.
조금 있으면 동이 튼다.
점창파로 돌아갈 시간이 다 되었다.
한 자리에 다시 모인 설랑대와 진수문.
밤새도록 돌아다니며 죽인 사파 기인혈수는 청면귀검, 투귀, 추혼혈수이고,
그리고 그 수하들까지 포함하면 모두 이백여 명이 되었다.
아쉽게도 단혼창과 혈광도. 두 명은 놓쳤다.
하지만 그놈들은 이 전장에 다시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
“문주님. 고생하셨습니다. 이제 올라가시죠.”
“그래 가자구나.”
그 시간. 점창파에서도 전투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설랑대와 올라오고 있는 진조한을 향해 조대가 마중 나갔다.
“어서 오시오. 형님. 좀 늦으셨소이다.”
“그래 아우도 와 있었구먼. 올라오다가 종두와 함께 몸 좀 풀고 왔네.”
“그러시군요. 잠시 휴식을 취하시지요. 곧 놈들이 공격해 올 겁니다.”
“알겠네. 사실 좀 쉬어야겠네.”
곧이어 접객당에 조대와 허장공, 당염승, 팽자운을 비롯한 무력대 대주들이 참석했다.
허장공이 회의를 주관했다.
“하 대주. 고생했네. 덕분에 수월해졌네.”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하지만, 귀마 그자가 문제군.”
회의를 듣고 있던 진조한이 의견을 피력했다.
“그자는 저희와 설랑대가 맡겠습니다. 어젯밤처럼 저흰 별동대로 움직이면서 놈들의 본진을 습격하려 하는데 다들 어찌 생각하는지요?”
어제 삼묘문과 사파 떨거지들을 처리한 결과 병력 면에서 조금 여유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이 정도면 나름 생각한 전략을 펼칠 수도 있다고 보았다.
“그렇소. 이제 놈들은 수적 우위는 없어진 상태. 충분히 해 볼만 하다고 봅니다.”
“그럽시다. 놈들을 운남 땅에서 몰아냅시다.”
분위기는 점점 고조되고 있었다.
이들에게 희망이, 가능성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진수문과 설랑대가 몸을 일으켰다.
“저희는 지금 움직이도록 하겠습니다. 무운을 빕니다.”
“조심하시오.”
“무운을 빌겠소.”
조대가 몸을 돌려 나가는 하종두에게 다가왔다.
“종두야, 몸조심하거라.”
짧은 말이었다.
하지만 그 속엔 진심으로 걱정하는 마음이 담겨 있었다.
하종두는 조대에게 고개를 숙였다.
“다녀오겠습니다.”
역시 짧은 대답이었다.
언제 이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응원을 받아 본 적이 있었던가.
돌아서는 하종두는 아무도 모르게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설랑대원들도 아무 말 없이 하종두의 뒤를 따랐다.
뒤에 남아있던 팽자운과 허진대는 설랑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팽자운이 허진대를 쳐다봤다.
“어떻게 할까?”
두 사람은 어젯밤 작전을 함께 하면서 서로 말을 트기로 했다.
실제 동갑이기도 했고 말이다.
“에이. 뭘 고민하고 있어. 그냥 따라가자.”
시선을 교환한 둘은 급히 설랑대를 쫓아가기 시작했다.
그들의 모습을 쳐다보던 또 다른 두 사람의 얼굴에 슬쩍 미소가 떠올랐다 사라졌다.
“따라오는군요.”
하종두의 말에 소백이 빙긋 웃었다.
“그러고 싶겠지. 아직 팔팔할 나이니까.”
“그러게 말입니다.”
다른 이들이 들었다면 기가 막혀 말문이 막혔을 것이다.
더군다나 하종두는 그들보다 어리지 않는가.
“고생하고 싶다는데 열심히 굴려줘야죠.”
“···그래라.”
*
먼동이 붉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삐이익! 펑!
하늘로 날아오르는 한 대의 화살.
아득히 높은 곳까지 솟구치더니 폭음과 함께 터졌다.
전쟁의 서막을 알리는 신호였다.
여기저기서 터지는 고함과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에 적막하던 점창산은 일 순간에 아비규환으로 변했다.
챙! 채채챙! 쾅!
“물러서지마!”
“으아악!”
"정신 차려!!"
싸움을 독려하는 소리와 비명이 끊이지 않고 울려 퍼졌다.
전쟁은 아무리 미화한다 해도 참혹할 수 밖에 없는 전쟁이다.
수많은 목숨을 바쳐야지만 비로소 끝난다.
서로의 이념과 욕망이 뒤섞이고, 정도인과 마도인이 뿜어내는 살기에 공기는 점점 텁텁해지고 있었다.
가장 먼저 부딪친 쪽은 마교 마천대와 무림맹 비호대였다.
이들은 마교와 무림맹을 대표하는 무력대 중 하나였다.
자기 조직의 명예와 자존심을 건 한 치도 양보할 수 없는 싸움이 시작되었다.
콰과과광!
사백여 명의 무인들이 발출하는 진기가 한꺼번에 부딪치는 소리는 그야말로 굉장했다.
마치 산 자체가 흔들리는 거 같았다.
마천대주 추보의 몰골은 뭐라 설명할 말이 없을 정도로 기괴했다.
덩치는 육 척이 넘는 장신에, 온몸에는 근육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말라 있었다.
해골이 걸어 다니면 저럴 것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네가 추보인가?”
비호대 대주 서이윤은 앞에 시선을 끄는 자를 향해 물음을 던졌다.
“크크크. 내가 바로 추보다. 넌 비호대 대주 서이윤이냐?”
추보에게서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불쾌한 기운에 서이윤은 눈살을 찌푸렸다.
“기분 나쁜 기운이군.”
“크크. 자랑스러운 마인들만 가질 수 있는 기운이지.”
추보는 입에서 연기와 같은 기운을 뿜어내며 흉악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무인이 언제부터 말로 싸웠지. 몸의 대화를 나눠보자고.”
“좋지.”
무림맹의 대주와 마교의 대주의 격돌을 시작으로 대원들도 다시 부딪쳤다.
이들은 우연하게도 이백 명씩 동수였다.
그야말로 진검승부였다.
그때.
따로 움직이던 설랑대와 진수문이 마천대 진영을 한바탕 휘저은 뒤 사라졌다.
이후부터 힘의 균형추는 비호대로 기울기 시작했다.
“이, 이런 비겁한······.”
“이봐, 쳐들어온 건 바로 네놈들이야. 전쟁하는 마당에 비겁하다니? 웃기는 놈들이군?”
“정파 놈들도 이제 한물갔군.”
“미.친.놈.”
서이윤은 추보를 향해 달려들었다.
사실 추보는 서이윤보다 고수였다.
무려 초절정에 들어선 초고수였으니.
설랑대가 한바탕 휘저어 준 덕분에 병력 운용에 여유가 생겼다.
부 대주와 대원 네 명이 서이윤의 싸움에 합류했다.
오 대 일 싸움.
절정 고수들이 합류하면서 내력이 소모되기 시작한 추보는 점차 뒤로 밀렸다.
잠시 거리를 벌린 추보.
불안한 눈빛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추보는 발치에 쓰러져 있는 부하를 발견했다.
부하는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대, 대주··· 살려주십시오······.”
추보는 무표정하게 부하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손을 뻗었다.
그 순간 손끝에서 보라빛 불꽃이 일렁였다.
“내 것이 되어라.”
후와와악!
부하는 눈을 부릅뜨며 몸부림쳤지만, 상처 입은 몸으로는 역부족이었다.
피부는 점점 창백해지면서 생기가 빠져나온 몸은 말라비틀어져 목내이가 되었다.
“후욱! 후욱!”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는 추보의 눈에서는 시뻘건 안광이 발산되기 시작했다.
기운을 흡수한 추보는 더욱 강한 기세를 발산하고 있었다.
그동안 전투 중에 입었던 내상뿐만 아니라 외상 모두 사라진 채.
이건 혈야귀가 펼치던 흡혈마공과 또 다른 형태의 마공이었다.
“크크크. 기분이 아주 좋군.”
“흡성대법? 지독한 놈, 자기 부하를 잡아먹다니.”
사실 추보는 지속적으로 타인의 진기를 흡수해야지만 내공을 유지할 수 있었다.
내공이 소모되어 줄어들면, 무공 경지도 초절정에서 절정으로 하락한다.
그렇기에 어딜 가든지 항상 부하들을 대동하고 움직였다고 한다.
말하자면 여분의 내공을 가지고 다닌 셈이었다.
서이윤의 오랜 실전 감각이 급하게 덤빌 하등의 이유가 없다고 알려주고 있었다.
흡성대법으로 타인의 내공을 흡수한다고 하더라도 분명히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벌써 해가 중천에 떠 올랐다.
어느새 마인을 처리한 비호대원들은 대주 서이윤에게 하나둘 모여들고 있었다.
서이윤은 대원들에게 무리하지 말도록 주의를 줬다.
“천천히 놈의 숨통을 쥐어짜면 된다. 무리할 필요가 없다.”
추보의 충혈된 눈에는 광기로 서렸다.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는 것이 흡기로 인해 솟아오르는 힘에 도취 된 듯 보였다.
“···네놈들을 모조리 죽여야 직성이 풀리겠군.”
부하들이 죽어 나가도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러는 와중에도 마천대 마인들 대부분은 바닥에 뒹굴고 있었다.
비호대도 상당수의 사상자가 발생했지만, 이만하면 마교의 정예부대를 상대로 선방한 셈이다.
물론 설랑대의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한 성과였지만.
“으아악!”
추보와 서이윤의 팽팽한 대치 상태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
“제갈 군사.”
“예. 맹주님”
“군사 일은 할만한가? 무리한 부탁을 해서 미안하네.”
“무슨 말씀을 그리하십니까? 오히려 제게 이런 기회를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그래도 자네가 응해주지 않으면 안될 일이었네."
"맹주님이 부르시는데 어찌 달려오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허어. 이러다 끝이 없겠군. 그만하도록 하지.”
“그러시죠. 맹주님.”
사마공리가 첩자임이 밝혀지면서 후임으로 새로 부임한 군사가 제갈민이다.
제갈민은 제갈세가의 소 가주로 나이는 스물여덟이다.
어렸을 때부터 머리가 비상해 언젠가는 무림맹 군사를 할 것이라는 소문이 자자할 정도였다.
“현안 사항부터 살피세.”
“먼저 점창대전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한마디로 패한 전투입니다.”
“뭐? 패한 전투라 했는가?”
“지금 점창파에 병력을 파견된 문파는 어딥니까? 하북팽가와 사천당가, 그리고 무림맹 비호대와 청룡대 뿐입니다.”
“끄응······.”
남궁무백은 머리가 아픈 듯 눈두덩이를 손으로 비볐다.
“병력을 다 합쳐봐야 꼴랑 팔백 명밖에 안 됩니다. 반면에 마교는 이천 명이죠. 사도련 운룡채까지 합치면 이천오백 명이 됩니다.”
“그렇구려, 애초부터 싸움 자체가 불가했었군.”
“그나마 버티고 있는 건 설랑대 때문입니다.”
“설랑대라···? 자주 입에 오르내리는군.”
이전에 사마 군사로부터 보고를 몇 번 받은 적이 있었다.
“설랑대가 지금까지 물리친 문파가 운룡채, 환두문, 사파 기인들, 정체가 확인 안 된 문파. 이렇게 네 개 문파. 총 일천사백 명입니다.”
“거의 오할 가까이 처리해 준 셈이군. 정말 대단하군.”
“그래서 지금 마교에서 귀마에게 설랑대를 처리하라는 특명까지 내렸습니다.”
“···허허, 명색이 맹준데 아무것도 못 하고 구경만 하고 있구려.”
남궁무백은 자신의 신세가 처량한 듯 헛웃음만 지었다.
“맹주님. 혹시 진수문과 하란문을 아시는 지요?”
“진수문은 들어봤네만, 하란문은 금시초문이군.”
“그 진수문과 하란문이 설랑대주 하종두 소협을 돕겠다고 달려왔다고 합니다.”
“이것 참. 많은 사람이 정도 무림을 위해 고생하고 있는데, ···이거 염치가 없구려.”
오늘은 여러 가지로 할 말을 잃어버린 남궁무백이었다.
전 사마 군사의 농간에 무림맹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되었다.
사실 사천당가가 움직일 수 있던 것도 설랑대가 건네준 단목 때문이지 않는가.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문제라고?”
“예. 마교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습니다.”
“계속해 보게.”
“운남 쪽 상황이 당초 예상했던 것과 달리 불리하게 돌아가자, 마교에서 추가 병력을 파견했습니다.”
“추가 병력이라면 얼마나 되는가?”
“삼백여 명 정도 되는데, 더 큰 문제는 검마도 같이 온다는 겁니다.”
“뭐! 뭐라고?!”
얼마나 놀랐는지 남궁무백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 작가의말
읽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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