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칭범

이때 문밖에서 하종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군사님. 들어가도 되겠는지요?”
“아 오셨군요. 들어오세요.”
제갈민은 자리에서 일어나 하종두를 맞이했다.
제갈영도 옆에 있다가 덩달아 일어섰다.
“바쁘신데 시간을 뺏은 게 아닌지요?”
“아닙니다. 하 대주.”
“···그런데, 이분은?”
“영아 인사해라. 네가 궁금해하던 하종두 대주시다.”
“···오라버니!”
제갈민을 한차례 노려본 제갈영은 하종두에게 다소곳이 인사했다.
“···말씀 많이 들었어요. 소녀 제갈영이라 해요.”
"아, 제갈 소저시군요. 하종둡니다."
실제 하종두를 대면한 제갈영은 당황했다.
생각보다 나이 차이가 나지 않아서였다.
중원에 떠도는 소문에 의하면 절대 고수라 했다.
그래서 최소한 오십이 넘는 중장년이라 생각했는데.
“녀석. 생각보다 젊어서 당황한 거냐?”
“네? 네.”
“놀랐구나. 너하고 두 살 차이가 나겠군.”
“······.”
하종두는 제갈영을 곁눈질로 힐끗 쳐다봤다.
극히 짧은 순간이었다.
하지만 제갈영의 모습이 눈에 각인되듯 박혔다.
“크흠. 군사님. 청룡대회가 이제 일주일 남았군요.”
하종두는 헛기침을 한 후 제갈 군사 맞은 편 자리에 앉았다.
소심하게 부끄러워하는 제갈영의 모습이 넋이 나갈 것 같이 아름다웠다.
“네, 그래서 하 대주를 불렀습니다.”
“저를요?”
“부탁이 하나 있습니다.”
“군사님이 저에게 무슨 부탁을······?”
“맹주님께서 비무대회 개최 전에 설랑대를 공식적으로 소개한다고 합니다.”
“···왜? 굳이 우리를······.”
물론 설랑대가 중요한 역할을 많이 하긴 했지만,
중원 전역에서 몰려든 사람들 앞에서 소개받을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대주님. 불편하시다는 건 압니다. 하지만 현 정도 무림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이들의 힘을 한 군데에 결집시키기 위해서는 영웅이 필요합니다.”
“그러니까 그걸 왜 우리가······?”
“이미 설랑대는 영웅입니다. 이번에 비무대회를 개최하는 것은 하 대주도 짐작하셨겠지만, 정파인들을 결속하고, 무림맹을 재편하려는데 목적이 있지요.”
“그러니까 그 말씀을 왜 제게 하시냐는 겁니다.”
하종두는 근본적으로 대중 앞에 나서는 걸 썩 내켜하지 않는다.
또한 공공연히 얼굴이 밝혀진다면 앞으로 활동하는 데 불편해지는 것도 자명한 사실일 터.
“설랑대가 그 구심점이 되어 주셨으면 합니다.”
제갈 군사도 여간 끈질긴 게 아니었다.
“이건 저 혼자 결정할 일이 아니군요. 동료들 의견을 모아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귀찮은 티를 팍팍내는 하종두를 제갈영은 재미있다는 듯이 쳐다보고 있었다.
대부분은 대중들 앞에 서는 걸 좋아한다.
자기 명성이 높아지는 일이니까.
하지만 하종두는 그런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제갈영의 시선을 느낀 하종두는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기에 더 있다가는 안 돌아가는 머리가 그나마 완전히 멈출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전 이만 일어나 보겠습니다.”
“하 대주님. 맹주님은 내일 알현하기로 했습니다. 그리 알고 계시길. 그리고 제안을 받아줘서 감사드립니다.”
“전 아직 아무 말씀도 안 드린 걸로 압니다만.”
여기에 조금만 더 있다 간 정신이 나갈 것만 같았다.
그래서 하종두는 제갈민과 제갈영에게 서둘러 인사한 후 군사전을 빠져나왔다.
“휘유···. 정말 대단한 미인이군. 옆에서 쳐다보고 있으니까 정신을 차릴 수가 없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하종두는 일행들에게 돌아갔다.
*
“비무대회 개회식 때 우리보고 단상에 올라와서 인사하라고 하는데요?”
일러바치는 듯한 어조로 얘기를 꺼냈다.
“응? 누가?”
“제갈 군사가요.”
“우릴 단상에? 왜?”
“문파 명숙도 아닌데 왜?”
노걸과 진평이 의문을 제기했다.
“중원 무림의 단결을 위해서 우리가 구심점이 되어달라고 하는데······?”
하종두는 당연히 귀찮았다.
그래서 일행에게 거절한 명분을 만들어 달라고 운을 띄운 것이다.
분명히 의도는 그거였는데.
“그럼, 뭐 어쩔 수 없지요. 대주 오라버니만 올라가면 되겠네요.”
“그렇지. 그러면 되겠다. 굳이 우리까지 올라갈 필요는 없지.”
“암. 그거 하라고 대주를 뽑은 거잖아.”
조가령의 의견에 염우행과 진평은 무릎까지 치며 동의 의사를 표했다.
의견을 물은 건 비록 제갈 군사였지만, 아마 맹주의 뜻일 것이다.
거절할 명분이 없다면 희생양을 내세우면 된다.
잔머리가 돌아가는 조가령이 그 희생양으로 하종두를 선택했고, 일행들은 단 한 명의 반대도 없이 만장일치로 동의했다.
“뭐 이런 치사한······!”
설랑대 일행 모두는 이상한 일에 엮이는 걸 병적으로 기피했다.
대신에 적당한 희생양을 귀신같이 찾아 몰아붙이는 재주가 있었다.
**
서안의 한 장원.
“나 참. 어이가 없어서. 이봐 장주. 손해를 끼쳤으면 책임을 져야지. 안 그래?”
“죄송합니다. 당연히 약속 시간을 지키는 게 맞습니다만,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습니다. 그것도 녹림도 놈들에게 붙잡혔다 겨우 빠져나오는 바람에 한 시진 정도 늦었습니다. 이 정도는 이해해 줘도 되지 않겠습니까? 대인.”
태화장은 서안 부근에서 소규모의 표국을 운영하고 있었다.
얼마 전, 표물 운송을 의뢰받았다.
근데 험상궂게 생긴 사내가 납품 시간을 조금 늦었다는 이유로 시비를 걸고 있었다
그런데 누가 봐도 이 사내의 속내가 너무 뻔히 보였다.
“너 따위가 나 추혼혈수의 귀한 시간을 축내놓고도 겨우? 좋다! 네놈이 그리 뻔뻔하게 나오시겠다?”
“허억! 추, 추혼혈수······.”
순간 곽 장주는 혼이 빠진다는 게 어떤 기분인지 절실히 느꼈다.
눈앞에 있는 자가 서안에서 악명 높은 추혼혈수(追魂血收)라는 자였다.
추혼혈수는 사람을 죽이는 일이라면 어떠한 의뢰도 마다하지 않는다는 미친 살인광이었다.
“흐흐흐. 그래야지. 이제야 태도가 마음에 드는군. 내 이틀 후에 다시 오지. 그때에는 성의를 보여야 할 것이야. 만약 내 성에 차지 않으면 그날로 이 태화장은 중원에서 사라질 것이다. 내 기대하고 있겠다. 하하하!”
한마디 추접한 경고를 남긴 추혼혈수는 태화장을 휘적휘적 나섰다.
“허허. 이 일을 어찌할꼬······.”
태화장주 곽 장주는 하늘이 무너져 내렸다.
하필 걸려도 살인에 미친 자에게 걸리다니.
분명히 의도적으로 접근했다는 심증은 있었으나, 상대방이 인정하지 않으면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힘의 논리에서 앞서 있지 않은 이상.
그때 총관이 곽 장주의 눈치를 살폈다.
“저···, 장주님. 이런 말씀을 드려도 되는지······.”
뒷말을 질질 끄는 총관.
곽 장주는 세상을 다 잃은 얼굴을 하고서 총관을 쳐다봤다.
“뭔가? 총관.”
“다름이 아니라, 지금 서안에 설랑대가 들어왔다고 합니다.”
“···설랑대? 그런데 그게 왜?”
“아니. 설랑대가 의와 협의 상징이 아닙니까? 그러니까 한번 찾아가 부탁해 보심이 어떨까 해서요.”
“···! 그래!! 하하하. 바로 그거야. ···근데 총관. 그들의 얼굴은 아는가?”
사실 설랑대가 대외적으로 얼굴을 밝히고 다닌 적이 없었기에 몇몇 문파를 제외하고는 일반 양민들이 얼굴을 알 리가 없었다.
“설랑대는 왼쪽 가슴에 하얀색의 늑대가 새겨진 흑의 무복을 입고 있다고 합니다. 아마 서안 바닥에 소문이 도는 만큼 쉽게 거처를 찾을 수 있을 겁니다.”
“그렇다면 다행이군. 어서 가세.”
서안의 뒷골목을 주름잡던 전가장이 얼마 전 설랑대에 의해 해체되었다.
그러자, 주인 없는 무주공산(無主空山)인 서안을 차지하기 위해 승냥이 같은 놈들이 우후죽순처럼 몰려오기 시작했다.
이런 놈들은 마치 잡초와 같아서 잘라버려도 어느새 머리를 처 든다.
그래서 완전히 박멸하기보다는 어느 정도 적정선을 유지하는 놈이라면 적당히 모른 척하는 게 오히려 나을 수가 있다.
한 마디로 필요악과 같은 놈들이었다.
곽 장주는 총관의 안내를 받아 찾아간 곳은 서안객잔이었다.
그곳엔 총관의 말마따나 흰 늑대가 새겨진 흑의를 입은 사내 둘이 술을 마시고 있었다.
지금은 미시(未時) 초.
술을 먹기에는 이른 시간이었지만 그 둘은 벌써 얼큰하게 취해 있었다.
곽 장주는 살짝 미심쩍은 마음이 들었지만, 무인이라는 족속들의 성질머리를 익히 아는지라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며 넘어갔다.
“저···, 혹시 설랑대 대인분들이신지요?”
그러자 붉은 머리카락의 청년이 고개를 들었다.
“뉘시오?”
“아, 저는 태화장주 곽도라 합니다.”
“그런데···, 나에게 무슨 볼일이라도 있소?”
청년의 나이는 기껏해야 이십 대 초반으로 보였다.
그런데 육십이 넘은 곽 장주에게 서슴없이 반말을 지껄이고 있었지만, 곽 장주는 이를 덤덤히 받아들였다.
“먼저 영웅으로 소문이 자자한 설랑대를 만나 뵈어 영광입니다.”
“하하하. 고맙군. 그런데 인사하려고 이렇게 찾아오지는 않았을 터?”
“···저, 저희를 도와주실 수 있는지요?”
“응? 갑자기 도와달라고요?”
“저 그게······.”
곽 장주는 추혼혈수와의 사정을 모두 말해줬다.
이야기를 모두 들은 청년이 일행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리곤 눈짓을 주고받더니 씨익 웃었다.
“그런 일이 있었구려. 당연히 우리가 도와줘야지.”
“고맙습니다. 대인. 일단 저희 태화장으로 가시지요.
곽 장주는 설랑대원 두 명을 동반한 채 태화장으로 돌아왔다.
그날 저녁.
“이보시오. 곽 장주. 우리만 믿으시게.”
“감사합니다. 대주님. 하지만 놈은 잔악하기 그지없는 자라······.”
자신이 설랑대 대주라 소개한 붉은 머리 청년은 곽 장주 앞에서 자신만만하게 큰소리를 쳤다.
“그렇게 보채지 않아도 되네. 우리가 누군가?”
“설랑대···, 아니 신지요.”
“그래. 많은 사람들이 우릴 독고설랑이라고 부른다지?”
“허허허. 그렇습니다만···, 그런데 나머지 일행분들은······?”
“다른 대원들은 지금 비밀 임무를 수행하고 있소. 그래서 우리와 떨어져 있는 거지.”
“그러시군요. 그런데 상대가 악명이 자자한 추혼혈수라, 정말 괜찮으신지요?”
“그자는 이 친구 혼자서도 충분히 상대할 수 있다네. 그러니 너무 조바심 내지 말고···, 음식과 술 좀 내오게. 먹어야 기운을 차리지 않겠는가. 하하하.”
곽 장주는 속으론 괜한 짓을 했나 싶은 마음이 들었다.
대주라는 자의 행동거지가 너무 껄렁껄렁한 게 파락호의 냄새가 났다.
그렇다고 지금에 와서 다시 내칠 수는 없는 일.
만약 이들이 진짜 설랑대라면 그건 그것대로 큰일이 아닌가.
곽 장주는 이왕 사람을 들인 이상 일단 지켜보기로 했다.
다음 날 아침.
태화장은 하루 중 가장 바쁜 때가 아침이었다.
누구나 할 것 없이 전부 눈코 뜰 새 없이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장주님.”
“총관. 무슨 일이냐?”
“저, 설랑대 대주가 급히 찾습니다.”
“나를?”
“예.”
총관은 곽 장주의 눈치를 살폈다.
자기가 생각해도 대주란 자의 행동이 너무 무례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곽 장주는 접객실로 걸음을 옮기면서도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다.
‘이 자들이 진짜 설랑대가 맞나?’
사실 이 의문은 서안객잔에서 그들을 처음 볼 때부터 느꼈다.
그래도 설마 설랑대를 사칭할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대주님. 찾으셨다고요.”
“아, 예. 장주님. 잠깐 여기 좀 앉아보세요.”
대주의 목소리에 날이 서 있었다.
덩달아 긴장하는 곽 장주.
“무슨 일이신데, 이렇게 아침부터······.”
“사람을 불러놓고 너무하단 생각은 안 하시오.”
“대주님. 답답하게 말씀을 빙빙 돌리지 마시고 그냥 터놓고 말씀해 주시오.”
“좋소. 우린 너무나 바쁜 사람들이오. 다른 임무가 있는데도 곽 장주가 부탁해서 도와주려고 왔소. 내 말이 틀렸소?”
“아닙니다. 대주님.”
“그럼, 그에 맞는 성의라도 표시해야 할 것 아니오. 이런 걸 내 입으로 직접 얘기를 해야 합니까? 알아서 해야 하는 거 아뇨.”
곽 장주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
이러면 이자들이 추혼혈수와 다를 게 하나도 없지 않은가.
“아니, 그게 무슨 말씀이 신지?”
“이거 이 사람들 경우가 없구만. 이렇게 나오시겠다 이거군. 어디 우리 없이 한번 잘해 보시오. 에잉, 이만 가세.”
콰앙!
대주라 불린 사내는 태화장 정문을 발길로 거칠게 열어젖혔다.
‘이, 이게 무슨······?’
곽 장주의 입은 벌어진 채 얼어붙었다.
- 작가의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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