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지는 않겠죠?

울퉁불퉁한 비포장도로를 달리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리무진이 멈춰 섰다.
저기 앞에 중국 경찰들이 바리케이드를 설치하고 길을 막고 있다는 김실장의 말이 인터컴에서 들려왔다. 그가 가서 무슨 일인지 확인해 보고 있다며 차에서 내렸다.
아영이는 다시 타이머를 확인했다.
58: 04: 44
그러자 네이트가 짧게 물어왔다.
“남은 시간은?”
“오지게 빨리 사사삭 하고 뒈질 시간밖에 안 남았네요. 쳇!”
“·······?”
그때 김실장이 다시 돌아와 얼마 전에 C급 안개 괴수가 이곳으로 숨어들었는데 블랙윙 팀이 짙은 안개 때문에 추적에 실패했다고 한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녀석이 다시 등장할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다며 철수했는데, 그 이후로 경찰들이 천문산 주변 전체의 출입을 통제하고 있디는 이야기였다.
“어떻게 할까요? 중국 경찰이니까 뇌물 좀 먹여볼까요?”
김실장이 내려진 창문 너머에서 네이트와 하루카를 번갈아 쳐다보며 물었다.
“아니. 시간이 없다. 조용히 처리하고 바로 들어간다.”
네이트의 지시에 하루카도 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김실장과 함께 안개 속으로 사라져 갔다.
잠시 후.
안개 너머에서 ‘쿵,퍽,끅’ 같은 묘한 짧은소리들이 들려오는가 싶더니 김실장과 하루카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차분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리무진은 다시 출발했다.
한참을 달리던 리무진은 더 이상 차량이 진입할 수 없는 곳에 이르러서 멈춰 섰다.
“차아영. 라이프 스톤을 꺼내라.”
김실장과 하루카가 트렁크에서 필요한 물품을 챙기는 동안 주변을 찬찬히 둘러보던 네이트가 말했다.
아영이는 네이트의 지시대로 가방에서 그걸 꺼내기는 했지만, 왠지 당장에라도 어웨이칸들과 안개 괴수들이 들이닥칠 것만 같아서 불안했다.
“느껴지는 특별한 점은?”
“딱히···없는데요?”
라이프 스톤이 만들어 내는 빛의 양, 소리.
달라진 것은 하나도 없어 보였다.
밑단에 새겨져 있는 바빌로니아 언어의 문장도 그대로고.
“최대한 많은 지역을 빠르게 커버해야 한다. 그러니 김실장이 아영이를 업는다.”
“헐···내가 기저귀 찬 아기예요? 나를 왜 업어요? 나도 뛸 수 있다고요!”
“백 미터 기록이 어떻게 되나?”
“······이십···사초···”
“그러니까.”
“·········”
김실장이 큭큭 웃으면서 아영이에게 등을 내밀었다.
“야. 내가 술 잔뜩 마시고 옆으로 뛰어도 이십 사초보다는 더 빨리 뛰겠— 아야! 아야!”
아영이는 김실장의 등을 사정없이 꼬집기 시작했다.
***
55: 18: 18
‘오오 씨발씨발’ 이라니.
아영이는 왼 손바닥을 내려보다가 너무 어이가 없어 ‘핫!’ 하는 제법 큰 소리를 내며 웃음을 터뜨렸다.
세 시간 가까이 천문산의 계곡 사이를 누비며 뛰어다녔지만, 별다른 소득은 없는 상태였다.
중간중간에 네이트가 휴식 시간을 주기는 했지만 하루카와 김실장도 이제는 제법 지친 기색이 들어 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멀쩡한 건 오직 네이트였다.
‘모르지. 속으로는 엄청 짜증 내면서 힘들어하고 있을지도.’
아영이는 네이트의 조각 같은 얼굴선을 타고 흐르는 땀방울을 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얼굴 표정으로만 봐서는 네이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도저히 알 길이 없었다. 맨날 포커페이스의 무표정이었으니까.
하지만 땀에 젖은 얼굴과 새로 갈아입은 셔츠가 축축이 젖을 정도로 땀을 흘리고 있는 마당인데 저 정도면 속으로는 조금 힘들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하고 짐작해 본 것뿐이었다.
네이트는 입고 있던 짙은 남색의 코트를 벗어서 옆에 살며시 내려놓고는 땀을 식히며 물을 마시기 시작했다.
‘오우···’
땀에 젖은 새하얀 셔츠가 네이트의 몸에 착 달라붙어서 그의 몸선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단단하게 다져진 어깨선과 조각처럼 갈라진 가슴 근육, 잘록하게 들어간 허리까지. 모든 게 완벽했다.
아영이는 자신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시선이 저절로 그의 상체를 따라 움직였다.
셔츠 아래로 희미하게 보이는 근육의 결이 마치 조각상이 움직이는 듯한 착각을 일으켰다.
'이건 반칙이야···’
입술을 깨물며 시선을 떼려 했지만, 눈길이 자꾸만 그의 가슴팍과 팔뚝에 붙잡혔다.
강하면서도 치명적인 그 선들, 무심한 얼굴로 옷깃을 잡아당기며 땀을 닦는 모습까지 그 순간만큼은 네이트가 재수없는 이마트 아저씨가 아니라, 누군가의 판타지 속에서 막 튀어나온 남주처럼 보였다.
‘저 아저씨는 그냥 상체를 탈의하고 다니는 게···’
아영이는 머릿속의 문장을 완성하지 못하고 화끈 달아오른 얼굴을 양 무릎 사이로 얼른 묻었다.
‘정신 차려라, 이 바보야! 지금 네가 남자 몸매 감상이나 하고 있을 때나? 너 곧 죽는다고. 차아영!’
***
“업혀라.”
네이트가 아영이에게 내민 등에는 어느새 남색 코트가 그의 멋진 등 근육을 가리고 있었다.
“됐어요. 조금 걸을게요. 아니. 저도 조금만 뛰어볼게요.”
아영이는 자신의 머릿속에 맴도는 네이트의 등 근육 환상들을 뜀박질로 날려 보낼 생각이었는지 갑자기 앞으로 혼자 뛰어가기 시작했다.
“야! 혼자 가면 어떻— ?!!”
김실장은 아영이를 향해 외치다가 갑자기 말을 멈추며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물론 그의 몸이 갑자기 경련을 일으킨 것은 아니었다.
그건 바로 발밑에서 느껴지는 거대한 진동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지진인 줄 알았다.
하지만 그게 아니다.
뭔가···뭔가가 땅속에서 움직이고 있다.
그리고 그건 아주 빠른 속도로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피해라!”
네이트는 짧은 외침과 함께 아영이를 향해 뛰었다.
쿠쿠쿠쿠쿠쿠!
하루카와 김실장은 접근하는 거대한 뭔가를 피해 양쪽으로 몸을 날렸다.
마치 거대한 불도저가 땅 아래로 지나가면서 지면을 갈라놓는 듯한 모습에 어이가 없었지만, 그냥 넋 놓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그게 뭐가 됐든 아영이를 향해서 가고 있었으니까.
쿠오오오!
땅속에서 튀어나온 거대한 입이 아영이를 집어삼키려 달려드는 장면과, 그 순간 그녀의 허리를 단단히 붙잡고 옆으로 튕기듯 날아오르는 네이트의 모습이 겹쳤다.
“차아영. 정신 차리고 책을 꺼내라. 그리고 뒤로 물러서라.”
“아···네···네!”
아영이는 후들거리는 다리를 이용해 천천히 뒤로 물러나면서도 가방을 뒤져서 <노인과 바다> 책을 꺼내 손에 꼭 쥐었다.
눈앞에는 20미터 크기에 달하는 시커먼 안개 괴수가 등골이 오싹해지는 괴성을 질러대고 있었다.
그 괴성이 얼마나 포악했으면 주변의 안개들도 소스라치게 놀라며 뒤로 물러날 정도였다.
그리고 확연히 드러나는 괴수의 모습.
시뻘겋게 물든 핏빛 눈에서는 사악한 기운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흘러나오고 있었고, 기다란 발톱은 바위도 쉽게 파괴할 수 있을 것처럼 날카롭고 단단해 보였다.
“두더지?”
아영이의 눈에는 분명 그렇게 보였다.
등장한 안개 괴수는 분명 두더지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고작 C급 주제에 아주 발성만 무진장 높아요!”
부우우웅!
어느새 괴수의 옆구리 쪽으로 파고든 김실장이 주먹을 날렸다.
퍼어어어엉!
평소 같았으면 괴수의 옆구리에서 수류탄이 터져 나가는 소리가 들려오는 게 정상이었다. 괴수의 울부짖는 비명도 동시에 들려오면 금상첨화이고.
하지만 이번에는 그 정반대였다.
바닥을 구르며 자갈돌 마사지를 받고 있는 건 다름 아닌 김실장이었다.
“크으···저 자식이···?”
펄럭! 펄럭!
“·······?!!”
안개 괴수의 양 옆구리에서 날개가 솟아 나와 펄럭이고 있었다.
녀석의 몸통이 왠지 조금 통통해 보인다 싶었더니 허리 쪽에 양 날개를 접고 있어서 그런 모양이었다.
게다가 날개와 몸통 전체가 칠흑 같은 검은색이다 보니 쉽게 구별이 되지 않기도 했다.
아무튼 불의의 날개 공격에 바닥을 굴렀던 김실장이 다시 일어서기도 전에, 안개 괴수가 땅을 박차고 높게 날아올랐다.
네이트를 넘어서 바로 아영이를 노리는 형세.
하지만 네이트는 녀석의 의도를 미리 파악하고는 뒤로 몸을 날렸다.
그리고 아영이의 머리 위쪽으로 날아들며 루하츠온 검을 뽑아 녀석의 날카로운 발톱들을 막아냈다.
카가가가각!
하지만 안개 괴수의 육중한 몸무게가 실린 그 발톱들은 허공에 떠 있기에 힘을 제대로 쓸 수 없는 네이트의 검을 강하게 짓눌렀다.
잘못하면 네이트가 무너져 내리면서 아영이를 깔아뭉갤 수도 있는 상황.
그리고 바로 프레스 기계처럼 찍어 내려오는 안개 괴수의 넓적한 발바닥에 네이트와 아영이가 동시에 압사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네이트는 왼손으로 아영이의 어깨를 살짝 짚으면서 몸을 공중에서 최대한 비틀었다.
동시에 검면을 타고 옆으로 흘러 내려가는 안개 괴수의 발톱.
그사이 네이트는 다시 아영이의 허리를 낚아채며 뒤로 유유히 빠져나갔다.
퍼퍼퍼퍼펑!
안개 괴수는 바로 네이트를 쫓지 못하고 하루카가 날린 염랑수리검들에 의해 고통스러운 괴성을 지르며 옆으로 물러났다.
“여기도 있다! 이 자식아!”
부우우우웅!
이번에만큼은 반드시 적중시키겠다는 결의가 가득 담긴 김실장의 펀치가 방금 착지한 괴수의 앞다리를 향해 매섭게 날아들었다.
하지만 안개 괴수는 입으로 희뿌연 안개를 마치 소화기가 분사하듯이 김실장에게 뿌려대면서 다시 공중으로 살짝 날아올랐다.
“콜록···콜록···이 자식이 비겁하게!”
“우리 사무실의 에이스가 이리 굼떠서야.”
네이트는 아영이를 데리고 김실장 쪽으로 다가왔고, 역시 그쪽으로 다가온 하루카와 함께 아영이를 중앙에 놓고 삼각 대형을 형성했다.
“아니. 사장님! 저 자식이 막 날아다니는데 어떻게 잡아요? 내 팔이 루피처럼 막 늘어나는 것도 아니고 말이죠!”
“루피는 어디 사무실의 에이스인가? 아. 옆 동네에 있는 <막다찾아> 탐정 사무실인가?”
“·······”
만화 <원피스>를 봤을 리가 없는 네이트에게 도대체 루피를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하고 김실장이 머리를 긁는 사이에, 하루카는 두더지 안개 괴수의 특이점을 발견했다.
“네이트님. 녀석은 하늘을 완전히 자유롭게 날 수 있는 건 아닌 것 같습니다.”
“흐음···”
녀석은 분명 날개를 펄럭이며 공중으로 높게 점프해 올라가고는 했다.
하지만 자세히 보니 하루카의 말이 맞아 보였다.
녀석은 날개를 이용해 하늘을 오랜 시간 날지는 못하는 모양이다. 몇 번 펄럭이다가 반드시 다시 땅으로 내려오는 걸 보면.
“그럼···저건 두더지 몸에 달린 건 닭 날개라는 뜻인가?”
김실장의 표현이 조금 어색하기는 했어도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닭들은 날개를 펄럭이면 잠깐 허공을 날 수는 있지만 고작 몇 초에 불과하다. 그리고 저 두더지 안개 괴수의 행동도 그와 별반 다를 게 없어 보였다.
“제가 녀석의 움직임을 잠시 묶어 두겠습니다. 그때 기회를 노려 네이트님께서—”
“아니.”
네이트가 하루카의 말을 끊고 김실장을 하루카 쪽으로 슬쩍 밀었다.
“김실장을 미끼로 던져준다.”
“네에?!”
“에이스의 제대로 된 실력을 기대하마.”
“········”
하루카는 품에서 부적을 몇 개 꺼내 김실장의 옷에 붙였다. 그리고 거기에다 어떤 기운을 불어넣기 시작했다.
“차크라를 주입한 부적입니다. 잠깐이지만 염랑의 방어막이 형성될 겁니다. 하지만 방어막이 아주 강력하지도 않고 지속 시간도 짧으니 조심하시길 바랍니다.”
“······죽지는 않겠죠?”
“그거야···”
툭.
하루카가 김실장을 앞으로 밀었다.
“에이스의 운명이 결정해 주리라 믿습니다.”
“으···”
김실장은 대형에서 앞쪽으로 삐쭉 튀어나온 자신을 매섭게 노려보는 두더지 안개 괴수를 불안한 눈빛으로 올려다봤다.
하지만 이내 코를 벌렁거리며 인상을 쓰기 시작했다.
“그래! 이 싸나이 김대한! 오늘이야말로 진짜로—”
“닥치고 일단 달리도록.”
네이트가 화이팅을 다지고 있는 김실장의 엉덩이를 걷어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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