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격앙되는 감정으로 조종간을
잡아도 기갑은 움직이지 않았다.
"으아! 움직여! 움직여!"
"라일라..."
그레첼은 분하다는듯이
조종간을 잡아당기는
라일라를 보며 눈물을 훔쳤다.
자신들이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것인가 소년은
자신들을 지상에 내버려두고
지하로 내려갔다.
그 모습은 마치 죽음을
마주하듯 담담하게
가라 앉아 있어서 손을
뻗어 잡고 싶었지만
잡을 수 없었다.
"뭐가 성녀란거야.
나는..나는."
"...그렇네."
순간.
깊은 바다속에 가라앉은
감각과 같이 주위가 어둡게
물들기 시작했다.
시각,청각,후각.
모든 감각이 마비되어가는
기묘한 경험.
그리고.
'드디어 이쪽을 봐주는구나.'
"헉!!"
자신의 앞에서 보인 소녀는
기괴할 정도로 아름다웠고
동시에.
"소름이...끼쳐."
동시에 존재할리가 없다
생각한 두개의 감상이
교차하는 소녀는 어느새
자신의 손 위에 손을 얹고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괜찮아. 힘이 필요한거지?'
"아니..나는."
"그레첼...안할거면 내려."
"라일라?"
강압적인 라일라의 말에
자신의 귀를 의심한 그레첼.
하지만 그것은 정확하게
라일라의 입에서 나온 말.
그렇기에 거짓이 아니었다.
진실이요 사실이었다.
붉은색.
바다가 붉게 물들어간다.
이질적인 감각이 몸안에
파고들어왔다.
아니 사실은.
'원래 다 가지고 있단다.
인간은. 그런거야.'
"헉."
주위가 붉다.
그리고.
"움직였어."
가동이 중지되었던
트윈 커맨더가 움직였다.
하지만.
"에너지 라인이 붉게 물들었다.
이건 마치 그때."
라일라를 걱정했던 템의
말이 떠올랐다.
푸른색과 반대되는 붉은색.
라일라는 그것에 삼켜져
무어라 중얼거리고 있었다.
"찾아야해. 찾아서 죽여.
그래 죽이는게 맞아.
가지는게 안되면 부수자.
그리고 다리를 부숴버리고
평생을 우리의 옆에 두자.
그래 그거면 되는거야.
착한 아이네 라일라는."
"라일라! 정신을.."
'넌 강한 아이구나?'
"크윽."
다시 한번 귓가에 들려온
목소리에 휘말리면 안돼.
"나는..나는!"
[블랙박스 잠금 해제.]
"뭐?"
울려퍼지는 안내음에
그레첼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프로메테우스의 불.
이어지는 향연.
릴리스 시스템 스텐바이.]
"이게 무슨..."
"...온다."
콰앙!
지면이 폭발하면서 지하에서
무언가가 올라온다.
그것은 익숙한 존재.
자신들의 적.
그것을 붉은 바다가 알려준다.
"하하! 죽기 딱 좋은날이.."
쾅!
"크윽..뭐야..이..하..하하하!!!
가레인은 웃음을 터트렸다.
아까전 푸른색 에너지 라인이
흐르던 기갑에 흐르는 붉은
에너지 라인.
"그래. 결국 왔구만 그래!
선을 넘을 준비를!"
"...비켜. 죽여. 죽여버린다.
죽이자. 그래 죽이는거야.
방해되는건 전부 죽여.
감정도 망설임도 도덕심도
모두 방해되면 죽여."
"젠장..라일라."
'그러니 너도 버려.'
"아니. 그럴수는 없다.
그러면."
소년이 한 행동이 무엇이 되는가.
지금까지 지켜온 그 행동이
올곧은 그의 행동에 반하는
그런건 자신은 못한다.
"라일라..제발."
하지만 메아리치는 그녀의
목소리는 저 깊은 바다속에
파묻힌 라일라에게 닿지 않았다.
라일라는 붉은 눈으로 자신의
눈 앞에 적을 바라보며 말했다.
"릴리스 스텐바이.
적을 섬멸합니다."
***
철컹.
지하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펜리르.
템은 주위를 살피기 시작했다.
"...기갑이 없어."
[모든 기갑을 지상에 내보내서
이곳에는 없나보군요.]
"그렇다면 이곳은 진짜
최후의 수단을 준비한
장소라는건데."
[뭐가 있을지 몰라도 조심해서
나쁠건 없을겁니다.]
순간 섬광이 펜리르를 향해서
뻗어왔다.
그리고.
[좌완 신호 로스트!]
"....이건."
[고 에너지 반응 확인.
전방 메인 카메라에
적을 포착 화면 띄웁니다!]
철컹.
붉은 기갑이 앞으로 걸어나온다.
적의는 느껴지지 않는다.
차가운 강철의 거인.
감정도 살의도 없이 그저.
[...저 녀석도 무인.]
[아니요. 제가 있습니다.]
위잉.
손에 쥐어진 빔 블레이드.
붉은 기갑은 펜리르를 향해서
돌격해왔다.
"크윽."
[한쪽팔로 가이아 렌치를
사용하는건 불가능합니다!]
"알고 있거든!"
철컹.
똑같이 빔 블레이드로 적의
공격에 응수한다.
[훌륭합니다. 하지만 당신의
그 기갑의 전술은 이미
분석이 끝났습니다.
패턴도 완벽하게 숙지한
제게 당신의 공격은 이제
의미가 없다는겁니다.]
"웃기고 있네!"
철컹.
펜리르의 어깨 장갑이 열리더니
기관포가 불을 내뿜기 시작했다.
허를 찌른 기습이었지만
그 공격은 붉은 기갑에 미미한
타격만을 줬을뿐이었다.
다시 거리를 벌린 두 기갑.
대치상황에서 먼저 입을 연것은.
[훌륭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무능하군요.]
"뭐라고?"
[코무로. 당신이 만약 방금
기갑을 조종했고 그자를
내쳤다면 우리는 이미 이 별을
오리지널이 다시 살아가는
별로 만들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저의 뜻을
거부하는거죠?]
[말했을텐데요.
저는 이미 가능성을 보았고
그 가능성에 투자하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당신이 만드는 미래는 결국
과거 오리지널과 그 창조물이
만든 비극을 되풀이할뿐입니다.]
[아니. 그렇지 않습니다.]
[당신이 봉인된 이유.]
[...닥치세요.]
순간 공기가 흔들린 기분이었다.
감정이 존재할리가 없는
자신이 무엇에 흔들린것인가.
감정이란 오리지널이 가진
번민에 불과했다.
그렇기에 지우고 완성된것이
자신이었다.
그런데 왜.
[나는 분노한건가?]
[우리는 생체 AI.
인간에 가깝게 창조되었고
그렇기에 그것은 진화라
표현해도 무방하겠죠.
당신은 지금..화가 났군요.]
"그렇구만 긁힌거구나?"
[..주인 표현이 너무 저렴합니다.]
"어쩌라고."
템은 대치중인 상태에 불만을
토로하듯이 말했다.
[..천박한 인간이.]
[그렇기에 인간이죠.
천박하고 바보같고 그렇기에
이해할수 없지만 동시에 기적을
일으키는것도 그들입니다.
우리는 절대로 불가능한걸
그들은 해내죠.
우리가 다시 오리지널.
인류를 재건한다면 그건
정말로 원래 우리가 섬긴
인류일까요?]
"아니지. 그건 완전."
[네. 과거 인류가 만든 오만을
우리가 되풀이하는것에 불과.
그렇기에.]
[아니. 완벽한 우리는 결코
오리지널의 실패를 답습하지
않고 나아갈겁니다.
이미 계획은 완벽합니다.
그러니 코무로. 마지막입니다.
저와 함께.]
[거절합니다. 당신은 미쳤습니다.
같은 생체 AI로써 당신에게
심판을 내리는게 저의 역할.]
[...그렇군요.]
이야기를 마친 두 기갑의
대치가 곧 끝날것이다.
한쪽팔을 잃은 펜리르였기에
이 싸움에 우위를 점하는건
분명 칼의 붉은 기갑일터이다.
하지만.
[불안. 내가? 아니 그럴리가.]
인간이 가져야할 불안이라는
감정을 느낀다.
그것이 너무나도 불쾌했기에.
[지지 않습니다.]
자신도 모르게 칼은 감정을
실고서 공격을 걸어왔다.
방금전까지 냉정한 기계와
같은 공격이었다면 승리는
분명 칼에게 넘어가겠지.
하지만.
[감정이 담겨서.]
"패턴이 읽힌다고!"
싸움에 익숙한 둘에게
칼이 저지른 실수는
활로였다.
푸욱.
[이런..]
능숙하게 옆으로 회피.
그리고 들어가는 찌르기.
정확하게 파고든 빔 블레이드.
조종석은 완벽하게 파괴.
[우리의 승리입니다.]
[...그럴리가요.]
하지만 그 둘도 순간의
승리에 취해서 잊고 있던것
그것은 이 기갑의 조종석에
칼이 있을거라는 확신.
[이겼습니다.]
철컹.
조종석이 파괴된 기갑이
움직이자 그제서야 템과
코무로는 알 수 있었다.
"이 자식 이것도 무인.."
[주인 물러나..]
[늦었어요.]
[크으윽!!!]
"코무로!"
자신의 옆에 떠있는 구체가
비명을 지르자 템은 당황하며
구체를 잡아당겼다.
하지만.
[...이건..데이터..생체..강제.
전송 시스..템?]
[이 순간을 노렸습니다.
코무로 이곳에 볼 일은 끝났습니다.
함께 가시죠.]
[거부..합니다..당신과 가느니..]
[그 거부를 거절하겠습니다.]
"젠장..떨어져!!"
템은 펜리르를 붙잡은 붉은 기갑을
집어던졌지만.
[이미 끝났습니다.]
툭.
코무로의 구체가 바닥을 뒹굴었다.
"코무로?"
[코무로는 위대한 어머니가
되어서 지상을 번영시킬겁니다.]
"웃기고 있네. AI를 여성화 시키는
뭔 미친짓을.."
[그럼. 저희는 이만.]
"뭐?"
[여기가 설마 제 본진이라
생각하시고 쳐들어온겁니까?
어리석군요 1차원적인 작전에
너무나도 쉽게 휘말려서
어이가 없을 정도에요.
아, 실례 당신은 인간이니까
감정적일수밖에.]
"네녀석도 어지간히 감정적이네?"
[...뭐 잘난척도 거기까지.
당신에게 어울리는 상대는
이미 준비해놨습니다.]
"뭐라는지 몰라도 또 무인기로
나를 가지고 놀 생각이라면."
[설마요. 당신도 초면이 아닌
상대일겁니다.]
"뭐?"
[상처입은 맹수를 잡아들이는데
꽤나 손해를 입었지만.
뭐 이정도면 성공적이군요.]
철컹.
엘리베이터가 열리는 소리와
함께 익숙한 실루엣의 기갑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팔랑크스?"
[그럼 즐거운 파티가 되시길.]
"이자식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 순간."
"당신은.."
익숙한 목소리였다.
이전에 싸웠던 남자.
자신과 같이 기갑을 좋아한다
생각해서 언젠가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고 생각했던.
"그란 브린거 대위?"
"프로스트..그리고 에이폰의
원수!!"
"크윽!!"
펜리르를 향해 돌진해온
팔랑크스의 추진부에서
나오는 붉은 불꽃.
그것은 분명.
"마녀의 마력.
그란 대위 당신 도대체!"
"죽이겠다. 제국의 그리고
대륙의 평화를 위협하는
존재는 군인인 내가 제거한다!"
"이건.."
자신을 인식하지 못한다.
아니 자신을 다른 존재로
보고 있는것이다.
"도대체 내가 뭘로 보이는.."
그란은 자신의 앞에 있는
자신의 동료를 죽였던
그 기갑을 떠올렸다.
한번도 아닌 두번.
자신의 부하를 동료를
죽여버린 가증스러운 원수.
제국을 불바다로 만들고
자신이 스승으로 모시던
사람을 죽인존재.
원망스러운 기갑.
검은 기갑!
"군인으로써 너는 절대로
이곳에서 살려보낼수 없다!"
"젠장할!!!"
충돌.
이전에 부딪혔던 검격에서
달라진게 있다면 두 기갑의
무장이 같은 빔 블레이드란것
그리고 살의가 담긴 상대방.
템은 이를 갈며 중얼거렸다.
"...어디서부터 잘못된거지.
젠장할..젠장!!"
"죽어라!!"
"나는..나는!!!"
멈추고 싶다.
이 싸움을.
[블랙 박스 잠금 해제.]
"뭐?"
스크린에 표시되는 글자.
그리고.
[이브. 스텐바이.]
순간.
빛이 뻗어나간다.
푸른 빛이 지면을 뚫고서
지상으로 올라간다.
검을 높게 들어올려 바닥에
쓰러진 지드키엘을 향해
마무리를 지으려던 라일라는
자신을 휘감는 푸른 빛에
고통이 몰려와 머리를
감싸안았다.
"크으윽."
"라일라!"
"..나는..나는."
덜컹.
순간 지드키엘의 조종석이
하늘로 날아올랐다.
"저 남자.."
"나는..죽여..아니..하지만.
나는 왜?"
"라일라..괜찮다. 괜찮으니까."
"그레첼...이 빛은."
하늘에 렘노스의 주위의
기갑들이 활동을 중지하자
고스트는 자신들의 앞에서
벌어진 현상을 분석하려했지만.
[분석..불가..이건 도대체..]
"...푸른 빛이 모여 바다가
은하수가 되고 있어.
이게..진정한.."
지하에서 푸른빛에 휘감긴
그란은 자신의 눈을 가리던
장막이 벗겨지는 기묘한
감각에 눈을 떳다.
그리고.
"이건.."
자신의 앞에 있는 푸른 기갑.
아니 그것은.
"펜리르? 어째서 푸른색으로."
"보인다."
"뭐라고?"
"새로운..세계...가."
그 말을 끝으로 펜리르는
푸른 섬광과 함께 자취를 감췄다.
조종사인 템 라그나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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