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진짜 아기들은 어떻게 느낄지 모르겠지만, 내가 환생해서 아기로 생활하며 느낀 점은 크게 2가지였다.
갑갑하다. 하지만 편하다!
갑갑한 점도 크게 2가지로 나뉜다. 우선 말을 하지 못하니 젖이면 젖, 화장실이면 화장실, 부모님이면 부모님이라고 내가 원하는 걸 요구할 수 없다.
[거기 누구 없어요? 지금 배고픈데···]
“우우웅, 응애! 응애! 응애!”
“예, 무슨 일이실까요, 소공자? 화장실 가고 싶으신 걸까요? 심심하신가요?”
이렇게 그냥 울고 본 다음 주변에서 알아서 파악해주기를 바라는 수 밖에 없다.
다른 하나는 움직이지를 못한다. 다른 사람들이 가끔 안고 돌아다녀주거나 할 때를 제외하면 아기방, 거기서도 아기 침대란 공간이 내 공간 전부나 다름없다.
[익숙한··· 천장이다···]
“아우우··· 우우우웅···”
정신차려보니 낯선 천장이라면 그거야말로 심각한 일이긴 하다. 납치당했거나 아기까지 데리고 갑작스레 움직여야 할 긴급상황이란 뜻이니까. 그러므로 익숙한 천장을 바라보며 반복되는 하루하루의 일상에 감사···는 개뿔, 계속 똑같은 천장만 바라보고 있는 것도 돌아버릴 노릇이다.
그나마 영혼이 환생했을 뿐 실제 두뇌발달은 그냥 아기라서 그런지, 하루종일 정신이 깨어있는 게 아니라 들어왔다 나갔다 해서 살았다. 아니었다면 긴 무료함을 견디지 못했겠지. 아마 환생했다는 사실 자체를 잊어버리고 평범한 아기가 되기 위해 정신줄을 놓아버리지 않았을까.
과연 정신줄을 놓는다고 환생 전의 기억을 잊어버릴 수 있을지, 기억을 잊어버린다고 평범한 아기가 될 수 있을지, 아니면 그냥 백치가 될 지는 모르겠지만. 어느 쪽일지 굳이 알고 싶지는 않다.
[어쩌면 지구의 아기들도 태어날 때는 전생을 기억하다 아기 시절을 못 넘기고 잊어버리는 게 아닐까?]
“아우··· 우우··· 아아···”
“이것 좀 봐, 아르투스. 우리 아기가 뭔가 엄청 심각한 고민 중인 것 같지 않아? 어쩌면 아주 똑똑해서 대마법사의 자질이 있을지도 몰라!”
엄마, 어머니, 어마마마··· 기대가 참 크십니다···
그래도 전생을 기억하는데 ‘엄마, 엄마’하고 타령하는 건 좀 그런가? ‘어마마마’는 너무 거리감이 느껴지는데. 그리고 내게 건네는 말을 듣다 보면, 사람됨 자체가 그런 단어에서 느껴지는 위엄을 내뿜기보다는 그냥 친근한 분 같았다. 내가 친자식, 그것도 아직 아기에 불과해서 그렇지, 다른 사람들한테는 또 다를 수도 있겠지만 아무튼.
이렇게 3.141592초 만에 부모님 호칭을 ‘어머니, 아버지’로 정리하는 동안, 두 분은 ‘이 아기가 정말로 고민이란 걸 하고 있을까요?’를 가지고 이야기하는 듯 하다 삼천포로 빠지고 있었다.
“그냥 착각이실 겁니다, 전하. 제가 찾아본 육아 서적들에서도, 주변에서 얻은 조언들도 하나같이 너무 과도한 기대를 하지 말라더군요. 아이에게 부담을 줘서 이후 성장이 오히려 느려질 수 있다고 합니다.”
“지금은 우리 둘 뿐이잖아? 황녀와 국서가 아니라 동등한 부부일 뿐이니까 경칭 말고 이름으로 불러줘.”
“당신이 원한다면, 지브니아. 그렇게 할 게. 다만 시종, 시녀들이 보는 앞에서는 안 된다는 것, 알지?”
“그래, 그래. [괴짜]란 칭호를 당신이 얼마나 싫어하는지 아는데 내가 당신이 싫어할 일을 하겠어?”
저 한 마디에 갑자기 감격이 벅차올랐는지, 아버지가 격하게 어머니를 포옹하면서 키스를 퍼붓는 듯 했다. 아기 침대에 눕혀진 내 상태로는 잘 보이지 않지만, 들리는 소리로 추측하기에 대충 그런 느낌이었다.
아니면 대낮이지만 평상시에 항상 주변에 대기하던 시종, 시녀들까지 모두 방 밖으로 내보내고 여기엔 둘 뿐이라는 점을 새삼 깨닫고, 갑자기 흥분이 확 끓어올랐을 수도 있고.
사실 나도 있으니 엄밀히 말하자면 여기 있는 사람은 둘이 아니라 셋이긴 하다. 그렇지만 지금 부모님께서 둘만의 오붓한 시간을 보내고 싶어 하시는 기색 아닌가. 이런 때 있는 듯 없는 듯, 색즉시공 공즉시색을 되네이며 무념무상으로 존재감을 지워드리는 거야말로 한낱 아기가 해드릴 수 있는 몇 안 되는 효도 중 하나가 아닐까?
절대로 불순한 의도는 일절 없다. 가만히 있으면 진도를 어디까지 나가실지 궁금하다던가, 저번에 모유 수유는 적당히 하고 유모한테 의지하라고 속삭이시던 아버지께서 정말로 마니악한 취향이 있으신지를 확인하고 싶다던가 하는 그런 사람일리가 없지 않은가, 내가.
“자, 여기까지! 이 다음은 밤에 하자, 밤에. 아기 앞인데 이 이상은 안 돼!”
“아직 아기잖습니까··· 부모가 사이 좋은 모습을 보여주는 게 오히려 좋은··· 아얏!”
이후 찰싹거리는 소리와 함게 사이좋은 모습도 정도라는 게 있다면서 아버지가 어머니께 혼나는 것 같았지만 거기서부터는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아무튼 오늘은 몇 가지 새로운 사실들을 알아내는 보람찬 수확을 거뒀다. 부모님 성함, 마법의 존재, 아버지한테 [괴짜]라는 칭호가 있다는 사실, 그리고 육아 서적의 존재.
마법의 존재가 일반인들까지 책을 접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고 있는지, 아니면 책이 상류층의 전유물이지만 황녀의 집안이라 육아 서적 같은 것도 문제없이 구할 수 있는지는 아직 모른다. 그렇지만 육아 서적 같은 게 존재하고, ‘서적들’이라고 할 정도로 여러 권이 존재하는 걸 보면 다양한 분야의 책이 나오기는 하는 모양이다.
[음, 완벽한 추론이군. 흠 잡을 데 없어.]
“으, 우우웅, 아아. 아우우.”
“이번엔 아르투르 당신도 봤지? 우리 애가 벌써 고민이란 걸 한다니까? 봐봐, 아까는 장난감을 흔들어주면 시선이 왔다갔다 하다 잠들었는데, 지금은 눈앞에서 장난감을 이렇게 흔들어도 쳐다보지를 않고 옹알대기만 하잖아.”
“확실히 아까와는 다르긴 하네, 지브니아.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벌써 대마법사 운운할 일은 아니라고 봐. 괜히 기대하다가 실망하는 것보다는, 건강만 챙기다 다른 재능을 발견하면 축복이라고 생각하는 게 좋지 않을까?”
“하지만 당신도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벌써부터 목검이니 목마니 파는 곳들을 구경 다니고 있잖아? 아직 몇 년은 더 기다려야 할 텐데.”
쿡쿡 새어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지적하시는 어머니 앞에 아버지는 할 말을 잃은 듯 했다. 듣고 보면 어머니 지적이 맞는 것 같다. 어머니는 아버지랑 나만 듣는 상황에서 호들갑을 떨었을 뿐이지만, 아버지는 남들 시선 따위 신경쓰지 않고 몇 년 뒤 일을 준비하신 거니까.
이럴 때는 아직 말도 못하는 아기인게 아쉽다. 말문만 트였어도 어머니 뒤를 이어서 이것저것 짖궂은 질문을 던져 볼 수 있었을 텐데. 표정관리는 잘 하셨느냐, 아는 사람이랑 마주쳐서 어머니 말씀과 비슷한 이야기를 듣지는 않았냐, 충동구매해버린 물건은 없냐 등등. 지금은 그저 어머니가 사람들을 다시 호출해서 나를 돌보게 한 뒤, 머쓱해진 아버지를 달래면서 방을 나서는 소리를 듣고 혼자 웃음지을 수 밖에 없었다.
* * *
이렇게만 보면 아기로 산다는 것은 무척 지루하고 무료한 일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동전의 양면처럼 나쁜 점이 있다면 좋은 점도 있는 법이다. 마음이 무척 편하다. 아기인 내게 짊어지워진 의무는 딱 하나밖에 없다. 건강하게 지내는 것. 열심히 먹고, 열심히 자고, 열심히 싼다.
사실 이조차도 나 혼자 의무라고 생각하니까 의무인 쪽이라고 봐야 할 것 같다. 아마 주변 사람들은 내 건강도 자기들이 챙겨줘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을까? 특히 시종, 시녀들은 내가 잠깐 앓기라도 하면 자신들이 뭔가 잘못한 게 없어도 부모님이 책임을 물을 수 있으니 더 그렇다.
할 일이 없어서 그런지, 이들이 나누는 대화도 은근히 재미있다. 자기들은 하루하루 엇비슷한 일과를 보낸다고 하는데, 듣고 있는 내 입장에서는 전혀 그렇지 않다. 시시콜콜한 얘기를 다 듣고 있다 보면 저택 내 사건들만으로도 가십지를 낼 수 있지 않을까 싶을 정도다. 내 옆에 유모가 붙어있을 때와, 가끔 자리를 비워서 자기들만 있을 때 말투나 대화 주제가 확 달라지는 것도 들어볼 만 하다. 유모가 있을 때는 좀 자극적이거나 민감한 주제는 피하고 체면을 차리는 편이라면, 없을 때는 다음처럼 나를 가지고도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하고는 한다.
“소공자께서는 복을 타고나신 것 같아.”
“당연한 소리를 뭘 그리 새삼스럽게 하니? 이런 대단한 집안에서 태어나신 것부터가 복이지.”
고개를 끄덕 거릴 수는 없지만, 대신 속으로 저 말에 몇 번이고 동의했다. 살기 팍팍할 정도로 형편이 어려운 집에 태어났다면? 아직 울음소리 밖에 내지 못 할 때 벌써 부모를 다 잃고 누군가 주워가기만을 바라야 했을 수도 있다. 그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굶주림에 부모님부터 가느다란 나뭇가지 몰골이면 아기는 어떻게 살아남겠는가.
말라붙어 나오지도 않는 젖을 어떻게든 빨아먹겠다고 빽빽대던가, 물인지 미음인지 모를 걸 마시면서 아무튼 죽지 않고 자라게만 해달라고 기도하던가, 주변이 심청전 속 마을사람들처럼 젖동냥을 받아줄 정도로 착하기를 바라던가.
태어나자마자 버려지는 아기들도 있는 걸 생각하면, 그보다도 상황이 더 나쁠 수도 있겠지만 만약타령하며 늘어놓는 불행 포르노는 그만 생략하도록 하자. 굳이 그렇게 비교질하지 않아도 지금 생은 충분히 럭셔리하다.
“아니, 내 말은 그게 아니라니까. 넌 좀 이상하다고 생각해본 적 없어?”
저 시녀가 하려던 건 금수저 흙수저 얘기가 아닌 모양이다.
“아까는 도련님이 복을 타고났다면서 이번에는 또 뭐가 이상한데?”
“너 혹시 아기 돌보는 게 처음이니?”
“아니! 그럴 리 없다는 건 너도 잘 알잖아. 황녀님께서 슈브렌느 시녀장한테 신신당부하셨잖아. 무경험자가 소공자 주변에서 실수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그래서 잠깐 도련님 방 창문을 닦고 나온다거나, 기타 잡일하러 드나드는 하녀들은 젊은 사람이 하나도 없잖아.”
“시녀장님이 전부 애 몇 명 낳아서 키워본 하녀들만 골라서 이쪽 잡무를 맡겼다는 게 진짜였어?”
저게 정말 사실이라면 꺼진 불도 다시 보라는 표어조차 따위 취급할 정도의 걱정과 조심성이라고밖에 할 말이 없다. 하기야 황족한테 그 정도는 사치도 아니겠지. 그런데 하녀들은 그렇게 신중하게 뽑았다면서 정작 시녀인 얘들은 그 정도로 나이가 많아 보이진 않는데? 뭐지?
“우리는 운이 좋았던 거야. 황녀 전하께서는 그 말 듣고 시녀들도 똑같은 방식으로 채우고 싶어하셨는데, 시녀장님이 말리셨잖아. 그럼 유모가 시녀들에게 지시하기 불편하고, 갈등의 여지가 있다고. 그래서 우리 같이 아이 돌본 경험은 있지만, 나이는 어린 시녀들한테 기회가 온 거야.”
“맞다, 저번에 그랬었지. 저번 휴가 때 너희 어머니를 도와서 늦둥이 동생 돌본 얘기를 시녀장님이 듣고서는 널 여기로 보낸 것 같다고.”
“그 얘기야 더 할 필요 없고. 아까 네가 이상하다던 건 뭔데?”
“나만 이런 생각하나? 도련님 돌보기 너무 편하지 않아?”
[앗, 아아··· 그런가?]
“아우우··· 우···”
“예, 예. 소공자 얘기에요. 칭찬하는 거에요, 도련님. 아이, 대단해라.”
“낮밤 없이 자는 사람 깨우는 일도 없고 남다르시긴 하지. 아마 황가의 외손이라 남다르신게 아닐까?”
“그런가?”
듣는 입장에서는 내가 황실의 외손이라 이 정도라면, 황실 직계는 태어나자마자 천상천하 유아독존하고 사자후라도 터뜨리냐 묻고 싶었다. 그렇지만 갑자기 울음을 터뜨려서 괴롭힌다거나 하진 않고, 그냥 관대하게 넘어가기로 했다. 어차피 내가 울어도 저걸 따져묻는지도 모를텐데 울어서 힘 뺄 이유가 뭐가 있을까.
대단하다면서 날 칭찬해주던 목소리가 듣기 좋아서 봐 주기로 한 건 절대 아니다. 생각해보면 마법 그런 게 딱히 없어 보이던 지구에서도 비슷한 특별 취급은 오래도록 존재했잖은가. 나만 재능빨, 혈통빨이 아니라 전생빨이란 걸 명심하고, 진짜 천재라도 된 것처럼 굴지 않도록 조심하면 된다. 그렇겠지?
“어라? 너도 뭔가 좀 시원한 느낌 들지 않아? 산들바람 부는 것처럼?”
“바람이··· 불잖아? 저기 모빌도 살짝 흔들리는데.”
“너도 아니고, 나도 아니면, 설마··· 소공자께서?”
나... 어쩌면 재능빨이나 혈통빨도 있을 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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