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바람을 일으켰다고 했지만 사실 그리 대단한 수준은 아니었다. 바닥에 굴러다니던 먼지나 약간 날아다닐 수준?
바람의 세기로만 따지자면, 아마 지금의 아기 몸뚱아리로 그냥 한 번 온 몸을 허우적대는 게 더 강한 바람이 일어날지도 모른다.
“소공자께서 바람을 일으키셨다는 게 정말인가?”
“정말이에요, 라테이아 부인. 아까 모빌이 흔들리는 걸 저희 둘 다 똑똑히 봤다고요.”
“하필 그런 감격적인 순간에 내가 왜 자리를 비웠을까··· 이럴 줄 알았다면 전하께서 부르셨을 때 빨리 가서 공자님을 보셔야 한다고 말씀드렸을 텐데."
[부모님한테 잘 보이려고 그러나? 다들 호들갑이 심하네.]
“우우, 아우웅.”
벌써 이 정도로 열광적인 반응이라니 앞으로가 걱정되었다. 보통 아기들이 성장의 각 단계에 다다르기까지 얼마나 시간이 걸리는지 나는 모른다.
첫 뒤집기를 하기까지, 처음 기어다니기까지, 걸음마를 하고 말문이 트이기까지 보통 얼마나 걸릴까? 사실 알았어도 그게 과연 참고가 될 지도 의문이다.
[여기, 판타지잖아··· 마법 있잖아···]
“아아, 아··· 음음···”
지구의 평범한 아기가 자라나는 과정을 안다고 그게 이 판타지 세계에서도 성립할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괜히 지구의 상식에 맞춰 생각하다가, 선무당이 사람잡는 꼴이 되면 그건 그거대로 문제다. 그냥 주변 반응을 듣고 눈치껏 맞춰나가도록 하자.
유모랑 시녀들 반응이 저 정도면, 부모님 반응은 또 얼마나 야단법석일지 심히 걱정되지만 나중에 생각하기로 했다.
떠올려보면 말세가 닥친 세상을 구한 모 파문신부님께서도 ‘내일 일은 내일 걱정하자’고 하셨던 것 같다.
“우리 아기가 벌써 마력을 다뤘다고!”
흥분한 부모님이 저렇게 소리치면서 달려오실 줄 알았는데 다행히 그런 일은 없었다. 그렇다고 호들갑을 떨지 않았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뭔가 그 반대방향으로 일이 벌어졌다고 해야 할까···?
“그러니까 너희 둘이 아기를 보고 있을 때 마력으로 바람을 일으키는 걸 느꼈다고?”
“예, 전하.”
“유모는 내가 불렀을 때라 직접 보진 못했고?”
“그렇습니다, 전하.”
“알았다. 잠깐 부군이랑 둘이서 아기를 보고 있을테니 너희는 나가 있도록.”
뭔가 심각한 분위기라 가만히 누워서 듣던 내 마음도 순간 덜컹했다. 무슨 문제라도 있는건가 싶어서 걱정이 들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사람들을 내보낸 부모님의 목소리는 여태까지처럼 텐션이 통통 튀어오르는 듯한 기색 없이 진지하게 속삭이는 듯 했다.
“하필 우리도 유모도 없을 때··· 사실이긴 한 걸까? 당신은 어떻게 생각해?”
“사실이 아니라면?”
“그냥 착각? 아니면 우리 비위를 맞추려는 걸 수도 있고.”
어머니의 말씀에 아버지는 동의하지 않는다는 기색으로 말했다.
“우리한테 잘 보이겠다고 굳이 없는 일까지 지어낼 필요는 없잖아. 누군가 의도를 담고 사주했다면 또 모르지만···”
“설마. 얼마나 고르고 고심해서 뽑은 아이들인데. 그리고···”
“그리고?”
“그런 짓을 해서 뭘 얻을 수 있겠어? 당신도 알잖아?
내가 당신이랑 결혼하겠다니까, 입으로는 신분 차이가 어쩌고 저쩌고 하면서도, 언니오빠들이 다들 쌍수를 들고 환영하던 걸.”
“경쟁자 한 명이 알아서 빠져주겠다는데 왜 안 그러겠어? 단순 계산으로만 따져도 경쟁자가 셋에서 둘로 주는데.”
언니오빠들만 언급하는 걸 보면, 아무래도 어머니는 막내이신가 보다. 어머니께서 3황녀라고 했었나?
방금 하신 말씀과 종합해보면 이 곳 타레크 제국의 황제, 내 외할아버지는 1남 3녀로 4명의 자식을 두고 계신 것 같다.
후계를 놓고 분쟁이 있다니까 어떤 상속법을 채택하고 있을지도 궁금해진다. 상속법도 만지작거릴 수 있는 모 중세 시뮬레이션 게임, 참 재미있게 플레이했었는데···
잠깐 이곳도 그 게임에서처럼 암살, 불륜, 광기 등 온갖 막장 이벤트들이 벌어지는 요지경 세상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급히 생각을 지웠다.
그건 너무 끔찍하잖아··· 생각만으로도 부정탈까 무섭다. 막장물 좋아하는 잡귀야 물러가라! 내 인생에 막장요소 따윈 필요없다!
어떻게든 다른 생각을 하기 위해 위쪽에 달린 모빌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아까는 어떻게 바람을 일으켜서 저걸 어떻게 움직였더라?
기왕이면 부모님 계신 지금, 두 분 앞에서 멋있게 휘날려보고 싶은데.
나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일으켰던 바람을 이번에는 의식적으로 일으켜 보겠다고 얼마간 끙끙댄 뒤, 마침내 어머니께서 나지막하게 탄성을 내지르셨다.
“방금! 방금 봤지, 당신도? 진짜로 바람을 일으키는 걸!”
“음, 봤지. 봤고 말고.”
“우리 아기가 아니라 나를 보고 있던 것 같은데?”
살짝 새침한 투로 말씀하시는 어머니께 아버지는 말했다.
“당신을 보고 있었으니까, 바람이 부는 걸 알았지.”
그러면서 어머니 얼굴을 한 번 쓰다듬고서는 설득력 넘치는 설명을 덧붙였다.
“바람이 불어서 머리카락이 여기 얼굴 앞 쪽에 조금 붙었잖아.”
[머리카락이 앞으로 넘어온 건··· 바람이 불었기 때문이다··· 메모···]
“으으, 우우, 아.”
사실 아버지께 감탄한 건 저 말 자체보다도 그 말을 건네는 방식이었다. 일절의 느끼함이나 꽁냥거림 성분 없이, 그게 당연하다는 듯한 말투였다.
아마 같은 억양으로 ‘물이 얼면 얼음이 됩니다. 그게 H2O니까’라고 말하게 한 다음, 과학 다큐멘터리에 나레이션으로 넣어도 되지 않을까?
“진짜로 바람을 일으키다니···”
“왜? 애가 자라면 이것저것 직접 가르쳐보고 싶다더니, 가르치기도 전에 혼자 알아서 다 배우는 희대의 천재일까봐 걱정되서 그래?”
키득키득 새어나오는 웃음소리가 섞인 짓궂은 농담을 거는 어머니였다.
“이 정도로 희대의 천재 운운하는 건 많이 이르지.
어렸을 때는 곳곳에 신동이니 천재니 소리 듣는 아이들이 흘러넘치지만, 막상 어른이 되서도 천재적인 성과를 내는 건 그 중 한 둘이나 될까?”
참으로 진지한 답변이었고, 듣는 사람이 수긍할 수 밖에 없는 정론이었다. 딱 한 가지 요소만 빼면.
말투가 전혀 진지하지 못했다! 다른 누군가의 말투를 따라한 건지, 경박하고 딱따구리가 나무를 쪼듯 빠르게 투다다닥 내뱉는 말투였다.
그러자 어머니께서도 연극의 한 장면에서 튀어나온 듯 과장된 어투로 말했다.
“어머, 남편이 그새 어딜 간 걸까? 남편은 없고 왠 광대가? 광대야, 광대야, 내 남편을 보지 못했니?”
아버지의 장난에 어울려 준 어머니의 능청어린 대응에 두 분 다 웃음을 참지 못하고 또다시 한바탕 폭소가 터져버렸다. 웃음이 가라앉은 뒤에 아버지가 다시 말씀하셨다.
“진지하게 평가하자면, 재능이 있는 건 맞지만 천재성? 그것보다는 남들보다 시작이 좀 빠른 쪽이라고 봐야지.
배우는 속도나, 도달할 수 있는 고점 같은 건 또 다른 영역의 문제니까.”
“하긴. 지금 페어리 퀸도 어려서는 빠릿함이 모자란 둔재 취급이었다고 하더라.
그런데 흥미를 가지는 것도, 싫증내는 것도 빠른 다른 페어리들과 다르게 꾸준하게 실력을 갈고닦아서 퀸이 되었다지?”
흥미로운 언급이었다. 페어리··· 여기서도 나비 날개 같은 걸 달고 있는 조그마한 요정일까?
일단 ‘페어리 퀸’이 특정인을 지칭하는 걸 보면 퀸은 페어리 전체에 딱 1명만 존재하는 것 같다.
페어리들의 수나 페어리 퀸이 관리하는 영토의 크기가 어느 정도 될지는 모르겠지만.
“우리 아기는 재능도 재능이지만, 마음씨가 참 고운 것 같아.”
아버지의 뜬금없는 소리였다. 어머니는 일단 긍정하고 볼 지, 이유를 먼저 물어볼지 내적 갈등에 시달리고 계신지 바로 답변하지 않으셨다. 곧 설명이 이어졌다.
“봐봐, 사실인지 아닌지 우리가 고민하는 것 같으니까 바로 눈앞에서 바람 일으키는 걸 보여줬지? 벌써부터 부모가 걱정하는 걸 알고, 염려 마시라고 보여준 거지.”
“그러지 않았다면 정말로 바람을 일으키나 못 일으키나, 며칠 곁에 쭉 붙어있어 보려고는 했어. 사실···”
“사실?”
말끝을 흐리는 어머니께 아버지가 되물었다.
“아까 당신이 이게 지어낸 거라면 외부의 누군가의 의도일 수 있다고 했을 때, 부정하긴 했지만 나도 짚히는 게 없진 않았거든. 피니아 언니라던가.”
“2황녀 전하가 왜?”
“제국민이 아니라, 르티아프의 국왕과 정략결혼했잖아. 그쪽도 언니를 밀어줘서 부부가 함께 다스리는 동군연합을 만들 속셈이라, 정작 언니가 남편이랑 지내는 시간은 1년에 1달이나 될까? 그 짧은 기간도 불안해서 이러나 순간 의심했거든.”
어머니는 아까 순간적으로 둘째 언니를 의심했었고, 그래서 지금은 그게 좀 부끄러우신 모양이었다.
1년에 1달.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이다. 하지만 황제의 자리가 걸려있다면 충분히 불안함을 느낄 만 한 시간이었다.
“2황녀 전하가 르티아프 왕국에 머무를 때, 제도에서 1황녀 전하와 황자 전하 사이에 결판이 나버리면 대세가 정해지니까?”
“그래. 르티아프가 아국과의 동군연합을 노리는 건 맞지만, 그게 전쟁까지 감수할 정도냐면 글쎄? 하다못해 국내의 갈등이 해결되지 않고 계속중이라면 또 모르지만··· 그래서 우리를 다시 그 진흙탕으로 끌어들여서 시간을 끌만한 변수를 늘리려는 건가 싶었거든.”
“그럴듯한 추측이긴 하네. 며칠 전에 장인어른께서 집무실 책장을 책이 꽂힌 채로 들었다 놨다 하시는 모습을 못 봤다면 아마 나도 설득당했을 거야.”
네? 순간 내가 뭘 잘못 들었나 했다. 책 한 두 권도 아니고, 책 꽂힌 책장을 운동기구로 쓴다고? 황제가? 이게 그 포스트모던 예술인가?
사회적 규범을 통해 주어진 사물의 기능을 부정하고, 천상천하 유아독존으로 군림하는 이의 심상을 통해 의미를 해체하고 새롭게 재구축하여 블라블라.
어쩌면 두 번째 삶의 상식이나 평범함은 지구에서의 그것들과는 상당히 다를지도 모르겠다고 순간 당황했지만, 다행히 그 정도로 차이가 나는 건 아닌 듯 했다.
“아빠가 뭘 어쨌다고? 집무실 책장은 또 왜 괴롭히는 건데?”
“마탑 쪽에서 올라온 연구제안 서류 결재가 밀리셨다던데? 하필 이번에 마탑 내부 인사배치랑 시기가 겹쳤다더라고. 마탑주도 폐하께서 연구 제안 중에 어떤 걸 받고, 어떤 걸 떨어뜨리는지 확인하고 인사배치를 조정해야 하는 상황이라.”
“그런데 그걸 또 제 때 결재 못하고 밀렸어? 아빠야 결재만 하면 끝이지만, 마탑주는 그걸 못 받아가면 일을 시작도 못하잖아. 마탑주 속이 숯처럼 새까맣게 타버렸겠는데···”
“맞아. 집무실 밖에서 계속 기다리고 계시던데? 폐하도 많이 미안하셨는지, 며칠이 지나건 결재 다 끝내기 전까지는 절대 집무실 밖으로 안 나가겠다고 약속하셨다더라고.”
셀프 감금, 셀프 통조림을 시전하는 황제라니 이건 참 귀하네요.
권력이 집중되면 집중될수록 처리해야 할 업무도 점점 늘어나고, 결국 인간 능력의 한계를 벗어나게 된다는 교훈을 주는 일화 아닐까?
결국 일을 제 때 못 끝낸 결과 오만잡다한 문제가 터져나오는 꼴을 보던가, 권력을 도로 나눠주던가의 양자택일이라는···
“그런데 집무실 책장은 왜 건드리셨대?”
“서류만 붙잡고 있으니 집중력이 떨어져서, 잠깐 몸 좀 풀다 보니? 책 한 권도 안 떨어지게 기술적으로 움직일 수 있도록, 적절하게 마력을 통제하며 근력과 균형감각 사이의 조화를 유지하는 게 또 나름의 재미라고 하시던데 뭘 어쩌겠어.”
아까 잠깐 탈주했던 정신이 핵심을 찌른 어머니의 질문에 되돌아왔는데 바로 다시 가출할 것 같다. 외할아버지··· 그··· 휴식 중 스트레칭이라고 하기에는 좀 너무 본격적이지 않은가 하고 생각하는 점을 여쭤봐도 될까 하고 심사숙고하는 점을 문의드려도, 아. 어차피 나는 아기라 아무것도 못하는구나.
아무튼 이후 며칠 동안 토끼랑 친구 먹어도 될 정도로 귀를 쫑긋 세워봐도, 딱히 마탑의 마법사들이 황궁으로 몰려갔다던가, 단체로 파업에 들어갔다던가 하는 얘기를 듣지는 못했다. 황제 폐하께서 어떻게든 밀린 서류를 다 처리하신 모양이다. 잘됐군, 잘됐어.
다만 한 가지, 이 정도면 [괴짜]란 별명은 우리 아버지 말고 더 어울리는 분이 계시지 않을까? 딱히 누구라고 콕 집어 말하려는 건 절대 아니지만.







Comment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