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막 1세 생일이 지났다. 근황을 말하자면, 생일에 부모님이 황궁에 데려가서 ‘이 아이가 폐하의 외손자입니다’ 하고 얼굴도 비춰주고 숨가쁜 일상을 보냈다.
사실 숨가쁘지는 않았다. 애초에 아기 일상이 숨가쁠 정도로 바쁠 수가 있나? 지구에서는 아기 모델 같은 경우가 있긴 하니까 어땠을지 모르겠다. 그렇다고 해도 상식적으로 불가능하지 않을까 싶지만. 다만 황궁에 간 날에는 무척 정신없었던 건 사실이다.
아마 그게 집 밖으로의 첫 외출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 전까지는 나를 과보호하시는 건지, 아니면 정치적인 문제가 엮여있는지, 외출은커녕 부모님께서 집에 찾아온 손님에게 나를 보여준 적도 극히 드물었다. 화가한테 한 번, 황궁 시종 한 번, 이모들이랑 외삼촌이 보낸 사람들에게 한꺼번에 한 번 정도?
“소공자께서 두 분을 닮아서 벌써부터 이목구비가 훤칠하십니다, 허허허.”
“귀엽지 않은 아기가 몇이나 되겠나. 물론 우리 아이가 귀여운 건 사실이지만.”
그나마도 딱 이런 형식적인 덕담 몇 마디 주고받는 수준이었다. 화가야 나를 그리러 온 거니까 좀 오래 있었지만, 그림 그리는 데만 온 신경을 집중해서 무척 심심했다. 평상시라면 유모나 시녀들의 잡담을 듣는 재미라도 있는데 그러지도 못하니까.
그래서 부모님이 처음 황궁에 데려가자고 하셨을 때는 의식적으로 기분 좋은 티를 계속 보이려고 애를 썼다. 그러지 않으면 혹여나 중간에 오늘은 날이 아닌 것 같다면서 도로 집으로 돌아가는 건 아닐까 싶어서. 다른 누군가가 안다면 쫄보냐고 할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외출이 도로아미타불 되고 후회하느니, 그냥 쫄보가 되는 게 차라리 낫지 않을까?
황궁은 전형적인 판타지 느낌의 화려한 궁궐 형태였다. 엘리베이터 대신 이동 마법진이 존재해서 층을 이동할 수 있고, 전기 대신 마법으로 조명을 밝히는.
[판타지 세계 대단해···]
“와! 다다(대단)!”
원리는 모르겠는데 내가 문장을 말해도 언어 수준이 자동으로 필터링 되는 건 너무 편하다. 적극적인 환생 초보자 보호조치, 10점 만점에 10점 드립니다.
“하하, 저 분수가 마음에 들었구나? 마탑의 역작이란다.”
“많이 신기하지? 사실 엄마도 처음 봤을 때 많이 놀랐었단다.”
그것은 분수라기에는 너무 대단했다. 단순한 규모의 문제가 아니었다. 물론 규모도 충분했다.
황궁 분수다운 위엄이 느껴지는 크기였다. 그렇지만 단순한 크기의 문제라면, 지구에서도 대륙의 기상이니 천조국의 기상이니 하는 것들 중 잘 찾아보면 필적할 만한 스케일의 물건이 나올지도 모른다. 이 분수를 진짜로 특별하게 만들어주는 것은 여기에 적용된 마법이었다.
마법을 어떻게 적용했는지, 물줄기들은 물리 법칙을 무시하고 아크로바틱한 궤적을 보여주고 있었다. 중간 중간 바뀌는 색도, 여러 색의 조명을 바꿔가며 비춘 게 아니라 물줄기 자체에 걸린 마법에 변화를 준 듯 했다. 심지어 물방울이 튀는 것까지 다 계산했는지, 부모님이 나를 데리고 분수 가까이, 아버지가 손을 뻗으면 물에 닿을 정도로 가깝게 다가가도 셋 중 누구에게도 물이 한 방울도 튀지 않았다.
“아까 얘 눈이 동그래지면서 눈빛이 반짝반짝하는 거, 경도 봤나요?”
“사실 저 분수의 가장 대단한 부분은 따로 있는데, 아직은 알아들을 수 있는 나이가 아닌 게 아쉽습니다, 전하.”
주변 시선을 의식해서인지 부모님의 말투도 평상시와는 달리 상당히 격식을 차렸다. 나야 그보다는 분수의 뭐가 가장 대단하길래 저렇게 말씀하시는 지가 더 궁금했지만.
알현 과정은 예상과는 많이 달랐다. 드넓은 홀에 지위 고하에 따라 정렬해 있는 사람들, 홀의 저 끝에 높이 솟은 상석에 마련된 옥좌, 그 옥좌에 앉아서 근엄한 표정으로 신하들을 내려다보는 황제··· 이런 게 보통 아닌가? 하지만 그런 건 없었다.
물론 시종이라던가 기타 수행원들이 따라붙기는 했다. 그렇지만 아까 분수를 구경할 때 정도를 제외하면, 이동하는 동안 가끔 경비근무 중인 기사들로 보이는 이들을 지나칠 뿐이었다.
“저 조각상은 아직도 안 치웠어? 안 부술 거라면 하다못해 안 보이게 창고에 치워 놓기라도 하지.”
“폐하께서 놔두라고 명령하셔서 저희도 어쩔 수가 없습니다. 몇 사람들이 미관을 해치니까 하다못해 다른 곳으로 옮기면 안 되겠냐고 건의를 드렸는데···”
“그런데?”
“황족 전용 구역에 있으니까 보는 사람만 볼 텐데 무슨 미관 타령이냐고 하셨습니다. 마탑에서도 연구 과제로 삼을 만한 업적인데, 오히려 전하의 작품이라고 공개 전시를 못 하는 점을 아쉬워하셨···”
분수를 지난 뒤로는 황족 전용 구역을 따라 이동해서 마주치는 사람이 없는 모양이었다. 하기야 여러 사람 만나서 뭘 할까. 황제 폐하께 처음 나를 보이러 가는 길인데, 중간에 만난 사람이 나를 먼저 보게 되는 것도 구도가 좀 별로긴 하다. 황궁의 시종, 시녀, 기사들이야 원래 하는 일이 준비, 수행, 호위 같은 일이니 먼저 보더라도 그러려니 하겠지만.
“어머니는? 어머니께 저번에도 말씀드렸는데 저걸 놔 두셨다고?”
“황후 폐하께서는 공개 전시나 마탑 장기 대여를 막았으니 본인 할 일은 다 하셨다고, 지금처럼 황녀 전하께서 저희에게 하문하시면 ‘태운 요리는 태운 사람이 처리해야’ 라는 말씀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아마 지구의 ‘결자해지’ 사자성어와 비슷한 의미의 속담이 저 ‘태운 요리는 태운 사람이 처리해야’ 인 것 같다.
조각상은··· 뭐라고 해야 할까··· 어머니께서 왜 그렇게 질색하시는지 알 것 같았다. 재질은 대리석이나 유사한 석재인 듯 했다. 한쪽 발로 물고기를 낚아채는 곰을 형상화했는데, 그 조각 솜씨 자체는 황궁에 놓일 만큼 무척 훌륭했다. 다만 어머니의 작품이란 게 조각 자체를 가리키는 게 아니란 건 나조차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색이 좀··· 심하게 알록달록했다. 유치원생 낙서처럼.
“아흐, 차라리 저걸 들키기 전에 치워버렸어야 했는데. 그냥 마법 몇 번 써서 깔끔하게 부숴버릴 걸 그랬나 봐.”
어머니의 한탄에 아버지가 위로했다.
“너무 창피해 하지는 마시지요, 전하. 배색에 약간의 문제가 있긴 하지만, 마탑의 마법사들도 복원에 실패한 반영구적 채색 마법 아닙니까.”
“그러니까 부끄럽다고! 길어야 한나절이면 원상복구 되었어야 할 장난이 10년 넘게 흑역사로 박제되어 있는데 어떻게 안 부끄러워 할 수가 있겠어?”
대충 SNS에 끄적거렸던 감성 넘치는 허세글들을 10년 뒤에 다시 봤을 때의 느낌과 비슷할까. 차이점이라면 그 사람들은 10년을 잊고 지내다 과거를 마주하지만, 우리 어머니께서는 아마 매일이나 그에 준하는 정도로 사고 친 결과물을 계속 보면서 지내셔야 했을 거라는 점?
그렇지만 반영구적 채색 마법이라니, 확실히 업적이라 언급할 만한 성과긴 했다. 채색에 값비싼 염료가 필요한 색을 하나라도 마법으로 대체할 수 있다면? 상당한 파급효과가 있을 게 틀림없다. 특히 원료를 수입해야만 하는 경우라면 더더욱.
어머니께서 한나절이면 원상복구 운운하신 걸 보면, 일단 일반적인 마법으로 채색할 경우에는 시간이 지나면 마법이 풀리는 모양이다. 아마 시전자가 얼마나 정교하게 마법을 시전하느냐, 얼마나 많은 마력을 투입하느냐 정도가 지속시간에 영향을 미칠 것 같다. 전에 부모님이 내 아기 모습을 그림으로 남기려고 집에 불러왔던 화가도 그냥 물감을 써서 색을 낸 것 같은데, 아마 이래서겠지.
“원리가 밝혀졌다면 오늘도 염료를 이리저리 섞어가며 새로운 색에 도전하고 있을 수많은 예술가들과 염색업자들을 해방시켜 줄 수도 있을 텐데 아쉽습니다.”
안내하던 시종이 상당히 안타깝다는 어조로 말했다. 아첨, 아니 ‘대화의 기술’ 이라기에는 의외로 꽤 진심 같아 보이는데 그쪽으로 취미가 있는 사람인가?
“사실 나도 제국에 큰 이득이 될 지도 모르는데 아깝긴 하더라고. 그래서 내가 저걸 어떻게 저 꼴로 만들었는지 다시 생각해봤는데, 아무리 기억을 돌이켜서 비슷하게 해봐도 반영구적 지속이 안 되더라.”
“예전에 제게는 창피해서라도 마법을 부분적으로라도 어떻게든 재현해서, 하다못해 저 알록달록한 모습은 없애버리고 단색으로 통일하겠다고 하셨··· 아닙니다.”
실수하셨군요, 아버지··· 차라리 잊어버리셨다면 입 밖으로 그런 말씀을 내실 일도 없었을 것을···
유모 품에 안겨서 가던 나도 갑자기 으슬으슬 한기가 느껴지는 듯 했다. 내가 잠깐 주의를 끈다거나 해서 도와드려야 할까? 고민했지만 그럴 필요 없었다.
“다 왔네. 우리 왔다고 전해드려.”
사적인, 비공개 알현이라서인지, 아니면 그런 문화가 없는 건지, 누가 입실한다고 소리내서 안내하고 이런 건 없었다. 사실 공개 알현이더라도 매번 그러면 시끄러워서 좀 귀가 아프지 않을까? 적응하면 괜찮나?
황제 부부가 휴식을 취하는 공간이라서인지, 공간을 큼지막하게 쓰는 것 같긴 했지만 그렇다고 휑하게 느껴질 정도는 아니었다. 우리 저택의 방보다 좀 넓은 정도? 우리 집도 황녀가 사는 곳이니까 최고급으로 훌륭한 저택이긴 하지만.
“저희 왔어요, 아버지, 어머니.”
“두 분 외손자를 데려왔습니다, 황제 폐하, 황후 폐하.”
“그래··· 너희 왔구나.”
외할아버지 목소리에 어째 불편한 기색이 서려 있는데? 뭐지?
부모님이 뭘 잘못하셨나? 아니면 아직 얼굴도 제대로 못 비춘 내 인상이 별로인가?
“외손자 얼굴 한 번 보기 참 힘들구나.”
이렇게 말하며 외할머니가 손짓을 한 차례 하자, 내가 유모 품에서 둥실둥실 떠올라 그 쪽으로 흘러갔다. 1세(환생 전 나이 제외)에 체험하는 공중부양이라니··· 역시 과학보다는 마법 아닐까? 혹자는 그런 하찮은 이유로 과학을 폄하하지 말라고 할 지도 모르겠지만, 지구에서 비슷한 체험을 하려면 우주선 정도는 타야 하지 않을까? 그냥 일반인이 우주선을 타기도 힘들지만 1세 아기? 불가능하다.
“아니, 그러다 실수해서 떨어뜨리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애를 그렇게 데려가세요···”
약간의 시간이 지나 내가 외할머니 품에 안긴 뒤에야, 어머니께서 뒤로 갈수록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소심하게 지적하셨다.
[항상 발랄한 듯 보이던 어머니도 외할머니 앞에서는 눈치를 봐요?]
“마마? 아야?”
이 문장이 왜 이렇게 필터링이 되지? 흠··· 나야 모를 일이다.
“내가 천 번, 만 번을 이래도 그 실수할 확률이 지브니아, 네가 애 데리고 걷다가 넘어질 확률보다 낮을 거다. 아무려면 이 정도를 실수해서 외손자를 위험하게 하겠니?”
“그나저나, 제국의 지존, 우리들의 경애하는 황제 폐하께서는 또 왜 저러세요?”
“얘는! 가뜩이나 너희가 찾아오기만을 벼르고 계셨는데 비꼬지 마렴!”
“알았어요, 어머니. 아버지, 무슨 일로 화나셨어요?”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부모님이 잘못했을 것 같은데 내가 대신 재롱이라도 보여드려야 하나 싶었다. 바람 일으키는 거라도 보여드리면 될까?
“정말로 모르겠느냐? 모를 수가 없을 텐데? 너야 그렇다 쳐도 아르투스 자네는 할 말 없나?”
“저번에 마탑주를 기다리게 해놓고 안에서 책장으로 스트레칭 하신 일 말씀이시라면, 정말 제가 일러바친 게 아닙니다.”
아까 어머니랑 대화할 때 말실수했던 것도 그렇고 오늘은 아버지의 액일인가? 또 실수하시네.
“그걸 따지자는 게 아니···(뻐끔뻐끔)”
“애 놀라니까 큰 소리 내지 마요.”
무음 처리를 바로 풀려고 하던 외할아버지를 눈짓 한 번으로 제압한 외할머니는 외할아버지 대신 이유를 설명했다.
“내가 진짜인지 확인하기도 부끄러워서 이제야 너희한테 직접 묻는 건데, 우리 외손자 이름을 아직도 못 정했다는 게 정말이니?”
순간, 이 장소의 시간이 멈췄다.
장면을 흑백 처리한 다음, 어떤 BGM 넣고, 모 카페 로고 박아넣으면, 지구의 모 시트콤 마지막 장면이라고 착각할 만한 정적이었다.
이건 저도 못 도와드립니다, 어머니, 아버지. ‘엄마아빠 화이팅!’하고 (속으로만) 응원할게요.
저는 메소드 연기에 집중하고 있겠습니다.
나는 아기다,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 나는 숨만 쉴 거다···
Comment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