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험가의 조건

수레에 물건을 담는 손이 분주했다. 트리온은 주점 주인이 부탁한 물품을 싣느라 여념이 없었다. 주점 주인의 심부름은 항상 거절하지 않고 우선순위로 삼아서 일을 했는데 주점 주인은 일을 해주면 항상 품삯과는 별개로 저녁 식사를 제공해 줬기 때문이다.
‘이 정도면 되겠지.’
짐을 다 싣고 주문서를 보면서 물품을 체크한 트리온은 요청 사항과 틀림없음을 확인하자 그 위에 덮개를 덮은 다음, 움직이지 않게 단단히 끈으로 동여매었다.
‘모험가 조합에 가볼까?’
로레인과 같이 온 덕분에 평소보다 늦게 도착했지만, 트리온이 조금 서둘러서 일을 한 덕분에 시간은 좀 남는 것 같았다. 트리온은 수레를 끌고 리버사이드 시티의 모험가 조합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막상 커다란 간판이 붙어있는 조합의 건물 앞에 다다르자, 트리온은 또 겁이 덜컥 나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 앞에 수레를 세워놓고 건물 앞에서 들어갈까 말까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렇게도 되고 싶었던 모험가지만 항상 조합 건물 앞을 지날 때마다 트리온은 작아지는 기분이었다. 그러다가 문득 아까 같이 온 로레인이 생각나서 트리온은 갑자기 없던 용기가 불끈 나기 시작했다.
‘그래 까짓것 한번 들어가 보자!’
수레를 건물 앞 기둥에 단단히 묶어놓고 트리온은 심호흡을 크게 한 다음 모험가 조합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안녕하세요.”
“아, 예, 안녕하세요.”
문 바로 옆에서 안내하고 있는 직원이 인사를 하자, 트리온은 또다시 기가 죽어서 작은 목소리로 인사를 했다.
“무엇을 도와드리면 될까? 젊은 친구? 보아하니 처음 보는 얼굴인데?”
“아, 예. 저는 모험가가 되고 싶거든요. 그런데 등록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라서요.”
“응? 모험가가 되고 싶다고? 좀 앳돼 보이는데 자네 올해 몇 살이지?”
“저요? 생일 지나서 이제 스무 살이에요.”
안내 데스크에 앉은 직원이 무섭게 물어보자 한층 더 주눅이 든 트리온은 점점 목소리가 작아지기 시작했다. 그러자 안내 직원은 재미있다는 듯 웃으며 물어보기 시작했다.
“자네, 시티 주민인가?”
“아, 전 웨일 타운에서 살고 있어요.”
“여기 주민이 아니란 말이지? 그러면 신원 보증할 사람은 있나? 부모님이라든지 말이야.”
“음, 부모님은 두 분 다 안 계시고요. 신원은···여기 성당에서 좀 지낸 적이 있어요.”
“그래? 그것참 딱하군. 그러면 담당했던 성당 신부님은 누구시지?”
“브리엄 신부님이요.”
“브리엄 신부님은 나도 잘 알지. 그럼, 추천서 정도는 받아올 수 있겠지?”
이 말을 듣자, 트리온은 잠시 당황했다. 트리온이 모험가 조합을 기웃거릴 때마다 항상 야단을 치던 브리엄 신부님이라면 추천서를 써줄 것 같지가 않았다. 트리온이 망설이는 모습을 본 안내 직원은 다시 말했다.
“브리엄 신부님이 추천서를 써줄 사람은 아니지? 그러면 혹시 등록비를 낼 수 있겠나?”
“네? 등록비요? 그게 얼마인데요?”
“은화 50닢이지.”
“아, 그 정도는 지금은 없는데···혹시 다음 주에 가져와도 되나요?”
“그럼, 돈이 생기면 다시 오라고. 그런데 가급적이면 신부님을 설득하는 게 어때?”
“모르겠어요. 아무튼 다음에 다시 올게요.”
트리온은 잔뜩 풀이 죽어서 조합 사무실을 나왔다. 하루 벌어서 하루 사는 트리온에게는 은화 50닢은 큰돈이 아닐 수 없었다. 트리온은 짐이 실린 수레를 끌고 웨일 타운을 향해 걸으며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보통 트리온 수준의 심부름꾼이 하루 종일 일하면 생기는 수입이 은화 1~2닢 정도였다. 보통 리버사이드 시티 같은 도시에서의 한 끼 식사가 은화 1닢이 조금 안 되는 수준이니 사실 은화 50닢은 그렇게 큰돈은 아니었지만 하루 종일 일해야 고작 은화 1~2닢을 버는 트리온에게는 큰돈이 아닐 수 없었다.
‘일단 돼지치기를 좀 해야겠다.’
웨일에서 농사일을 돕거나 과일을 따는 일 같은 걸 하면 은화 3닢은 벌 수 있었다. 하지만 식비같이 꼭 써야 하는 지출이 있으니 그렇게 돈을 모아서는 50닢은 턱도 없을 듯했다. 그래서 적어도 하루에 5닢 이상의 벌이가 가능한 돼지나 소, 양 같은 가축을 치는 일을 해야만 빨리 자금을 마련할 수 있다는 계산이 나왔다.
마을에 도착한 트리온은 일을 마무리하고 주점으로 향했다. 부탁받은 물품도 건네주고 저녁밥도 얻어먹기 위함이었다.
“어, 왔냐? 고생했다. 배고프지? 거기 앉아서 저녁 먹고 가.”
“네, 아저씨, 근데 오늘은 메뉴가 뭐예요?”
“응, 토마토수프를 좀 해봤어. 좋아하잖아?”
고개를 끄덕인 트리온은 품삯을 받아 챙기고 빈 탁자에 앉아서 식사를 기다렸다. 그러자 주점 주인은 트리온이 앉은 탁자에 큰 그릇에 담은 토마토 수프와 빵을 가져다주고 트리온에게 물었다.
“맥주? 마실 수 있나?”
“저 생일 지났어요. 그러니까 마셔도 괜찮아요.”
“푸하하, 웃기는군. 그래 어른도 됐고, 고생했으니까 한 잔만 서비스로 줄게.”
주점 주인은 잔에 가득 맥주를 따라서 탁자에 올려놓았다. 그때 주점 문이 열리면서 한 청년이 들어왔다. 트리온과 동갑내기인 주점 주인의 아들 카알이었다.
“어, 트리온! 오랜만이네. 아버지, 저도 밥 좀 주세요. 그리고 맥주도요.”
“맥주? 넌 안 돼. 생일이 아직 안 지났잖아.”
카알이 트리온의 맞은편에 앉자, 주점 주인은 카알의 몫까지 식사를 가지고 왔다. 카알은 자기 아버지가 맥주를 주지 않자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혼자 가서 맥주를 따라왔다.
“카알, 어쩐 일이야? 입대한 거 아니었어?”
“아, 그건 내일이 훈련소 휴일이라서 훈련 마치고 잠깐 집에 왔어.”
“군대는 어때? 힘들지 않아?”
“말도 마, 힘들어 죽겠어.”
트리온과 카알은 알고 지낸 지는 오래되지 않았지만 그래도 죽이 잘 맞는 친구였다. 트리온이 웨일로 와서 살기 시작했을 때 붙임성 좋은 카알과 함께 심부름하러 다니곤 해서 금방 친해졌다. 하지만 트리온과 마찬가지로 시골 생활에 좀이 쑤셨던 카알은 지난달에 덜컥 입대 지원서를 내버렸고 곧바로 리버사이드 시티의 병영에 입대해서 한창 훈련을 받는 중이었다.
이윽고 주인이 카알의 저녁 식사를 내오자, 둘은 식사하면서 이야기꽃을 피웠다. 뭐 주로 카알의 넋두리가 대부분이었지만 그래도 마을의 유일한 친구였던 둘은 즐겁게 대화를 나눴다. 식사가 마무리될 즈음 카알이 트리온에게 말했다.
“트리온, 너도 여기서 심부름이나 할 게 아니라 군대에 입대하면 어때?”
“군대? 아냐, 난 모험가가 될 거야.”
“모험가를 한다고? 갑자기 뜬금없이 왜? 너 저번에 말한 너희 아빠 친구처럼 모험가가 되려는 거야?”
“뭐, 그런 것도 있지만···크윽, 어우 이거 쓰다.”
말하다 말고 맥주를 들이켠 트리온은 처음 먹어보는 알코올의 쓴맛에 얼굴을 찡그렸다. 주점 주인인 아버지 몰래 맥주를 마셔왔던 카알은 그런 트리온을 보며 재미있다는 듯 깔깔 웃었다.
“다른 이유도 있는 거야?”
“사실 우리 아빠가 돌아가실 때 나한테 하신 말씀이 있어.”
“뭔데? 모험가가 되라고 하셨어?”
“아니, 그게 아니고 아버지는 나한테 엄마 이름을 기억하라고 하셨어.”
“엄마? 너 부모님 두 분 다 돌아가신 거 아니었어?”
“사실 잘 몰라. 아버지는 그렇게만 말씀하시고 돌아가셨어. 그런데 왜 엄마를 기억하라고 하셨을까?”
“아, 엄마를 찾고 싶은 거구나?”
“응, 먼저 나랑 아빠가 살던 마을을 찾아가 보고 싶어. 얼굴은 잘 기억이 안 나지만 촌장님이나 나랑 놀아주시던 신부님도 보고 싶고.”
그제야 이해가 된다는 듯 카알은 고개를 끄덕였다. 식사를 마친 트리온은 남은 맥주를 들이켜며 말했다.
“근데 진짜 문제가 뭔지 알아?”
“뭔데?”
“모험가가 되는 것도 쉬운 게 아니라는 거야. 리버사이드 시티 주민이 아니라서 신원을 보증받거나, 아니면 돈을 내라는 거야. 무려 은화 50닢을!”
“뭐? 네가 그 돈이 어디 있어!”
“그러게 말이야. 심지어 신원을 보증받으려고 해도 아빠 친구인 스티브 아저씨나 성당의 신부님은 절대로 허락을 안 해주실 거야.”
트리온은 맥주잔을 내려놓으면서 투덜거렸다. 카알은 위로를 해주며 다 먹은 식기를 치웠다. 트리온도 같이 주방에 들어가서 둘은 자신들이 먹은 식기 설거지를 깨끗하게 했다.
“트리온, 나 아버지 몰래 숨겨둔 돈이 좀 있는데 보태줄게.”
“응? 그런 게 있었어?”
“대충 은화 10닢 정도는 될 거야 많은 돈은 아니지만 모험가가 되는 데 보태.”
“그거 받아도 될까?”
“어차피 난 병영 안에만 있어서 돈 쓸 일도 별로 없어. 나중에 유명해지면 이자 쳐서 갚아라.”
카알은 말을 마친 후 2층에 있는 자기 방에 올라가서 돈이 담긴 주머니를 가지고 내려와서 트리온에게 내밀었다. 트리온은 잠시 망설였지만 고맙게 주머니를 받았다.
집에 돌아온 트리온은 침대 시트를 걷어내고 숨겨두었던 돈주머니를 열어보았다. 은화가 12닢이 있었다. 그동안 아끼고 아껴서 모은 돈이었다.
‘일단, 절반 정도는 모은 셈이로군.’
다음 날부터 트리온의 돈 벌기 작전이 시작되었다. 먼저 트리온은 식비 지출부터 줄이기로 했다. 최대한 식사를 제공해 주는 일을 하고, 어쩔 수 없이 식사를 해결해야 할 때는 주로 건빵이나 싸구려 육포를 먹기로 했다. 그리고 노동의 강도는 어떻든 일단 보수가 좋은 일들을 주로 하기로 마음먹었다. 주로 높은 보수에 비해서 일이 빨리 끝나는 축사를 치우는 일이나 밭에 거름을 주는 일 같은 걸 우선적으로 하기로 했다. 좀 냄새가 나고 힘들긴 했지만, 보수도 좋은 편이고 무엇보다 식사를 해결할 수 있어서 참을만했다.
저녁이 되어 일을 마친 트리온이 고약한 분변 냄새를 풍기며 집에 돌아왔다. 오늘 받은 품삯을 세어보자 은화 7닢이나 되었다. 일단 식량을 사야 할 은화 2닢을 빼고 나머지는 침대 시트 밑의 돈주머니에 고이 간직했다. 오늘 같은 일이 내일도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많이 모은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아졌다.
그렇게 숨 돌릴 틈 없는 하루하루가 이어졌다. 트리온은 마을에서 가축을 키우는 거의 모든 집의 축사 청소를 도맡아 하다시피 했다. 그러다 보니 아무리 씻어도 몸에서 구린내가 가시지 않을 정도였다.
결국 그런 식으로 열흘 넘게 건빵과 육포만 뜯으면서 밤늦게까지 쉬지 않고 일을 했더니 젊고 건장한 트리온도 버틸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와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는데, 진짜 안 쉬고 일하는 게 너무 힘들구나.’
아침에 일어나는 것이 너무 힘들었던지 하루 쉬기로 마음먹은 트리온은 그동안 모아온 돈을 전부 꺼내서 세어보았다. 시트 밑에 숨겨둔 제법 묵직한 돈주머니를 꺼내서 세어보았더니 무려 은화가 80닢이 넘었다. 이 정도면 모험가 조합의 가입비로 50닢을 지출하더라도 은화로 30닢이나 남으니 일단 문제는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오늘은 강가에 가서 낚시나 하면서 몸도 좀 씻고 오기로 했다.
오늘은 로레인을 만나던 그날과는 달리 물고기가 제법 입질이 있었다. 제법 씨알이 굵은 놈으로 서너 마리를 낚아 올리자, 트리온은 낚싯대를 거둔 뒤 옷을 벗고 강물로 들어가 씻기 시작했다. 제법 비싸게 구매한 비누라서 평소에 정말 아껴서 사용했는데 내일은 모험가 조합에 나가봐야 하는 터라 깨끗한 강물에 아낌없이 온몸을 벅벅 닦았다.
몇 마리를 더 낚고 나서야 마을로 돌아온 트리온은 주점으로 향했다. 낚아온 생선을 팔고 또 저녁을 얻어먹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아저씨, 생선을 좀 가져왔어요.”
“웬일이냐? 오늘은 축사 청소를 안 한 모양이지?”
“네, 힘들어서 오늘은 쉬었어요.”
“그래 앉아 있어라. 한 마리 금방 구워서 올게. 어이쿠, 오늘은 생선이 제법 큰 게 많네?”
주점 주인이 식사와 함께 생선값을 건네자, 트리온은 소중하게 받아서 챙겼다. 주점 주인은 또다시 맥주를 한잔 가득 따라와서 트리온에게 주고 맞은편에 앉아서 말을 걸었다.
“트리온, 꿍꿍이가 대체 뭐냐? 요즘 우리 집 일은 해주지도 않고 계속 힘든 일만 하던데. 말이라도 한 마리 사려는 거냐?”
“아, 그게 사실은 시티에 가서 모험가 등록을 하려고요.”
트리온은 주점 주인에게 그간의 사정을 털어놓았다. 그러자 주점 주인은 한심하다는 듯 콧방귀를 뀌며 대답했다.
“흥, 술은 마실 수 있을지 몰라도, 모험가 되기는 틀렸네.”
“왜요?”
“넌 그냥 모험가의 메달만 목에 건다고 아무나 다 모험가가 되는 줄 아니? 모험가라면 모름지기 이곳저곳을 돌아다니고, 또 악당이나 괴물과도 싸워야 하고, 길에서 잠을 잘 때도 있을 텐데, 네 복장을 봐라 변변한 무기도 없고, 바람 불면 다 찢어질 것 같은 남루한 옷이나 입고 다니면서 게다가 신발 꼬락서니는 또 그게 뭐냐? 그래서 모험가가 가당키나 한 소리니?”
트리온은 가시 돋친 말을 사정없이 내뱉는 주점 주인이 좀 야속하게 느껴지긴 했지만, 그 말이 틀린 말이 아니라는 걸 깨달아서 또다시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내일이면 모험가가 된다는 꿈에 부풀어서 그 귀한 비누도 실컷 써버렸는데 또다시 내일부터 돼지 똥을 치워야 한다는 생각에 눈앞이 캄캄했다.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집에 돌아온 트리온은 침대에 벌렁 누워서 고민에 빠졌다.
‘옷이나 무기 같은 건 생각도 못 했네. 그런 건 얼마나 하려나?’
어쨌든 오늘 판 생선값까지 포함해서 은화 40닢 가까이 남았으니, ‘모험가만 되면 어떻게든 되겠지’하는 생각이 들었다.
‘정 안되면 마을에서 다시 돼지 똥을 치워야지 뭐.’
트리온은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하고 모험가의 메달을 받을 내일을 기다리며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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