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상가상

그때 배낭 안에서 뭔가를 꺼낸 스티브는 한창 죽은 거미로 식사를 하고 있는 슬라임 쪽으로 집어 던졌다. 쨍그랑하는 소리와 함께 고약한 기름 냄새가 퍼졌다. 스티브가 던진 것은 등잔이나 모닥불을 피울 때 사용하는 싸구려 등잔용 기름이었다.
“누구 가지고 있는 기름 더 없어?”
“제가 좀 가지고 있어요!”
“다른 사람들은?”
스티브의 외침에 트리온이 대답하자 스티브는 재차 물었다. 그러자 다들 싸우면서도 기름이 있다고 대답했다.
“트리온! 너만 빼고 나머지 사람들 기름 빨리 내놔봐!”
“기다려! 이놈 좀 잡고!”
그래도 넷이서 덤비니까 거미 한 마리는 수월하게 잡을 수 있었다. 거미가 죽은 것을 확인한 후 세 용병은 각자 배낭에서 기름을 꺼내서 스티브에게 넘겨주었다. 스티브는 넘겨받은 기름을 아까 자신이 던진 슬라임 근처에 마저 던져서 그 근처를 기름 범벅으로 만들었다.
“방화벽을 세우겠다는 속셈이군? 근데 기름은 뭐로 불을 붙이게? 잘 안 붙을 텐데.”
“내가 다 생각이 있지!”
스티브는 싸우면서 떨어뜨린 횃불을 집어서 기름 범벅이 된 곳에 던졌다. 횃불은 잘 타올랐지만, 모험가들이 가지고 다니는 등잔용 기름은 품질이 좋지 못했기 때문에 빌리의 말대로 빨리 불이 붙지 않았다. 그걸 본 스티브는 재빨리 배낭에서 술이 담긴 가죽 자루를 꺼내서 뚜껑을 열고 재차 집어 던졌다.
스티브가 가지고 다니던 술은 워낙 독한 술이었기 때문에 횃불에 닿자마자 폭발하듯 요란한 소리를 내며 불이 붙었다. 워낙 화력이 강했던 터라 불이 잘 붙지 않던 등잔용 기름도 불이 붙어서 타기 시작했다. 사실 등잔용 기름이라는 게 불이 잘 붙지는 않지만 일단 붙으면 잘 꺼지지도 않고 오래 타서 슬라임을 저지할 방화벽으로 사용하기엔 지금 상황에서는 이보다 더 알맞을 수는 없었다. 불길이 거세지자, 스티브는 트리온이 지고 있던 장작을 조금 꺼내서 방화벽 근처에 던져넣어서 화력을 유지하는 용도로 사용했다.
“뭣들 해? 어서 도망치지 않고!”
슬라임이 불길에 막혀서 더 다가오지 못하고 주춤하자, 일행은 꽁지가 빠지게 내달렸다. 왔던 길을 돌아가고 있었기 때문에 그동안 줄곧 지도를 그려와서 동굴의 내부 구조를 알고 있는 스티브가 앞장서서 일행을 인도했다. 트리온은 장작을 지고 있어서 좀 무거웠지만 그래도 그런 걸 신경 쓸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에 일단 뒤처지지 않게 열심히 내달렸다.
“아이고, 죽겠다. 스티브! 좀 쉬었다 가자고.”
한참을 달려서 도망치다가 조금 안전해진 것 같으니까, 빌리가 앓는 소리를 하며 주저앉았다. 물론 모두 코볼트와 한바탕 전투를 치르고, 쪽잠을 잔 데다가 거미와 전투를 또 벌이는 바람에 제대로 된 휴식을 취하지도 못한 채 도망을 친 것이기 때문에 좀 쉬어갈 필요가 있었다.
“그럼, 잠깐만 쉬어갈까?”
일행은 헐떡이며 앉아서 물을 마셨다. 원래는 자고 일어나서 물을 보충할 생각이었는데 느닷없이 슬라임이 나타나는 바람에 물 보충을 못해서 남아있는 양은 매우 적었지만 일단 먹고 죽자는 생각으로 벌컥벌컥 들이켰다. 트리온도 덩달아 물을 들이켜려고 했지만, 스티브가 눈치를 줘서 그냥 목만 축이는 정도로 끝내고 물이 담긴 자루를 다시 배낭에 넣었다.
“빠른발, 아까 그건 뭐야? 내 도끼도 안 먹히는 거미의 다리를 쓱 잘라버리던데?”
스콧이 막 생각났다는 듯이 아까 거미와의 전투에 관해서 이야기를 꺼냈다. 트리온은 어쩌나 싶어서 스티브의 눈치를 봤는데 스티브의 옆에 있던 빌리가 슬쩍 고개를 가로저어서 그냥 웃기만 하고 대답은 하지 않았다.
“흥! 말 못 하겠다. 이거구먼? 알았다. 더 묻지 않을게.”
스콧이 흘겨보며 투덜거리자, 이번에는 스티브가 웃으며 트리온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트리온, 고맙다. 내가 목숨을 빚졌구나. 코볼트랑 싸울 때만 해도 덩치만 큰 어린아이인 줄 알았는데 지금 보니 누군가를 지킬 줄도 아는 녀석이었네.”
누구보다 동경하던 스티브의 칭찬을 받은 트리온은 너무 기분이 좋은 나머지 눈물을 찔끔 흘렸다. 하지만 역시나 냉정한 스티브는 본 척도 안 하고 다시 짐을 메고 일어났다. 그런데 빌리가 트리온을 보고 물었다.
“빠른발, 손에 든 그건 뭐야?”
“이거요? 거미 다리인데요?”
“그건 뭣 하러 들고 왔어?”
“그냥 왠지 먹음직스러워 보여서 혹시 먹을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요.”
“푸하하, 현지에서 식량을 조달하겠다는 마음은 모험가로서 바람직한 자세긴 해. 뭐 처음이니까 먹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한참을 쉬던 일행은 횃불을 교체하고 다시 행군을 시작했다. 정신없이 도망치기도 했고, 방화벽이 효과를 발휘했는지 지금까지는 슬라임이 추격해 오는 기미는 느껴지지 않았다.
“아저씨, 동굴 탐사는 이제 끝난 건가요?”
“응, 보물도 챙길 만큼 챙겼고 일단 슬라임이 있는 마당에 우리끼리는 딱히 어떻게 할 방법이 없으니까 중단하는 게 맞지. 게다가 거미가 더 있을 것 같으니까.”
트리온은 생각보다 일찍 끝난 모험에 조금 불만이 생겼지만, 코볼트와 거미와의 전투를 연속으로 치렀으며, 진짜 정체가 뭔지는 몰라도 함께 모험하던 베테랑들이 누구 하나 빠지지 않고 생각할 겨를도 없이 도망갈 정도의 강적인 슬라임을 목격한 것만으로도 이야깃거리는 많이 생겼다고 생각해서 만족스러웠다. 그리고 아버지의 유품인 단검의 무시무시한 절삭력도 놀라웠고···
전리품이 많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탐험에 들인 시간에 비해서 꽤 짭짤한 소득이었다. 일행은 도망칠 때에 비해서 확연히 느려진 속도로 출구를 향해 걷고 있었다. 트리온은 긴장이 풀리자, 배가 고파지기 시작했다. 좀 전에 빌리가 비웃긴 했지만 그래도 살이 가득 찬 거미 다리 두 개를 챙겼기 때문에 빨리 안전한 곳에 가서 먹어보고 싶었다.
“걷는 속도를 조금 올려야겠어.”
그래도 동굴의 꽤 깊은 곳까지 들어왔던 모양인지 쉬면서 바꿨던 횃불이 다 타서 바꿨는데도 동굴의 끝은 보이지 않았다. 일행들이 가지고 있었던 기름은 아까 방화벽을 만들 때 다 써버렸기 때문에 트리온이 가지고 있던 기름으로만 횃불을 만들고 있어서 이 상황이 길어지면 나중에 모닥불을 피울 때 애를 먹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모를 리 없는 스티브는 일행을 재촉했다.
‘도대체 시간이 얼마나 흐른 걸까?’
그냥 남들 걷는 대로 따라 걷는 트리온이었지만 동굴 안에서는 볕이 전혀 들지 않아 시간의 흐름을 가늠할 수가 없어서 조금 답답했다. 그나마 어렴풋이 알 수 있는 방법은 횃불의 교체 주기로 미루어 생각하는 수밖에 없었지만 그러기엔 트리온은 이미 신체적 정신적으로 스트레스를 양껏 받아서 그런 걸 생각하기 어려운 상태였다.
“밖이다!”
다시 횃불을 교체하고 그게 절반쯤 탔을 무렵 드디어 일행이 진입했던 입구에 도착했다. 트리온은 컴컴하고 칙칙한 동굴 안에서 줄곧 시간을 보낸 터라 좀 화창한 날씨의 밖을 기대했으나. 밖은 해가 져서 어두운 상태였다. 트리온은 나름대로 이게 하이언 타운에서 출발하고 나서 몇 번째 밤인지를 생각해 보았으나 수면을 줄인 상태로 행군했기 때문에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스티브, 꼬마가 힘들어하고 있는데 어디서 좀 쉬어가야 할 것 같아.”
빌리가 트리온의 표정을 살피더니 스티브에게 말하자 스티브는 트리온에게 다가와서 물었다.
“트리온, 너 괜찮아? 조금 더 걸을 수 있겠어?”
“네, 괜찮아요.”
“그럼, 조금만 더 걷자. 여긴 위험해 안전한 곳으로 가서 쉬자. 여기 이 친구 짐 좀 나눠서 들어야겠어. 좀 도와줘.”
사실 이제는 장작도 얼마 남지 않았지만,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트리온의 짐을 줄여주기 위해서 용병들이 다가와서 트리온이 지고 있던 장작을 나눠서 각자의 배낭에 넣고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일단 안전하게 쉴 수 있는 곳을 먼저 찾아야겠어. 쟤도 그렇지만 우리도 좀 쉬어야지. 마을로 돌아가는 건 그다음에 생각하세.”
스티브를 선두로 한 일행은 달빛과 횃불에 의지해서 숲을 헤치며 걸었다. 트리온은 피로도가 누적돼서 그런지 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짐승의 울음소리나 나뭇잎을 건드리는 바스락거리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기도 했다.
“저 앞에 큰 바위가 있으니, 그쪽으로 가보세. 쉬기엔 적당한 것 같으니까.”
스티브는 어두운 와중에 용케도 쉴만한 장소를 찾아내서 일행은 그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막상 바위에 도착해보니 몸을 숨기면서 야영하기엔 꽤 괜찮은 곳이어서 일행은 쉬어가기로 했다.
스티브는 바위 위로 올라가서 별을 보며 현재의 시간과 위치를 파악하려 하고 있었고, 나머지 세 용병은 주변에 혹시 위협이 될 만한 게 있을까 싶어서 탐색을 나갔다. 혼자 남은 트리온은 전에 하던 대로 모닥불을 피우기 위해 짐을 내려놓고 주변을 돌아다니며 불쏘시개로 쓸만한 마른 가지나 낙엽들을 모아왔다. 그리고 땅을 파고 얼마 안 남은 횃불을 이용해서 불을 피웠다.
트리온은 불을 쬐며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문득 가지고 온 거미 다리가 생각났다. 아무래도 손질을 하려면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거미의 외골격을 어떻게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아무도 없을 때 가지고 있는 단검으로 해체해야 할 것 같았다. 거미 다리 같은 건 먹어본 적도 손질을 해본 적도 없었지만 일단 단검을 꺼내서 거미의 다리를 반으로 갈랐다. 사람 종아리만 한 두께를 반으로 자르니 안에 뽀얀 살이 가득 차 있었다. 트리온은 입맛을 다시며 거미 다리를 불 곁에 놓고 굽기 시작했다.
“아이고, 잔치 벌였네. 야 인마, 냄새 맡고 짐승들이라도 꼬이면 어쩌려고 그래.”
“스티브, 좀 봐주라고. 오늘 고생했잖아. 주변을 돌아보니 괜찮을 것 같아.”
이윽고 일행이 돌아오고 스티브는 고기 굽는 냄새가 난다며 트리온을 구박했지만, 다른 용병들은 괜찮다고 트리온을 위로해 주었다. 잠시 후 일행은 불을 쬐며 식사를 시작했지만, 트리온은 거미 다리가 아직 덜 익어서 조금 더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빌리가 작은 병 하나를 던져주며 말했다.
“빠른발, 소금이니까 뿌려서 먹도록 해. 귀한 거니 너무 많이 뿌리진 말고.”
트리온은 빌리가 시키는 대로 소금을 뿌려서 거미 고기를 익혔다. 얼추 익은 것 같아서 냄새를 맡아보니 꽤 그럴듯한 냄새가 났다. 트리온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한입 물었는데 좀 묘한 맛이 났다. 아니 정확하게는 그냥 아무 맛도 안 나는 물컹한 종이를 씹는 맛이었다. 트리온의 표정을 본 용병들은 킥킥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조금 더 태우면 낫지 않을까?”
“그럴까요?”
제시가 물어보자, 트리온은 기다렸다는 듯 먹던 거미 고기를 불 쪽에 더 가까이 대었다. 잠시 후 고기 타는 냄새가 나자, 트리온은 다시 거미 고기를 들고 한입 베어 물었는데 아까보다는 좀 낫지만 그래도 맛이 없는 건 마찬가지였다.
“어때? 먹을만해?”
빌리가 익살스럽게 묻자, 트리온은 싫은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건빵보다 맛이 없는 건 처음 먹어보네요. 아니 이건 그냥 쓴맛조차 나지 않아요. 그냥 물을 씹는 기분이랄까?”
“그래도 네가 거부감없이 잘 먹어서 다행이다. 앞으로 계속 이런 걸 먹으면서 살아야 할 텐데 의외로 비위가 약해서 집어치는 모험가들도 많아.”
트리온은 가져온 두 개의 거미 다리 중의 하나는 어찌저찌 먹어 치웠는데 두 번째 것은 도무지 엄두가 나질 않아서 망설이다가 버리기로 했는데 트리온이 치우는 모습을 본 스티브가 말했다.
“트리온, 껍데기는 버리지 말고, 모아둬. 캐피탈 시티에 가지고 가서 방어구를 만들어달라고 하자. 거미 다리의 외골격은 단단하니까 쓸모가 있을 거야. 그리고 고기는 안 먹을 거면 땅에 묻어버려 괜히 냄새 맡고 짐승이라도 꼬이면 골치 아프니까.”
“네.”
식사를 마치고 일행은 잠이 들었다. 트리온은 처음 겪는 모험이라 그런지 불을 줄이고 눕자마자 제대로 뻗어버렸다. 하지만 달콤한 잠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트리온, 일어나, 어서!”
스티브가 흔들어 깨우자, 트리온은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정신을 차려보니 모두 상기된 표정으로 무기를 들고 사방을 경계하고 있었고 심지어 스티브는 활에 화살까지 걸어 놓은 상태였다. 정신이 번쩍 든 트리온이 확인해 보니 자기 전에 불씨를 남겨두었던 모닥불이 아직도 불씨가 유지되고 있는 것을 보니 잔 시간이 얼마 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었다.
‘이게 무슨 일이야?’
트리온도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중얼거리며 일어났다. 풀숲에서 나는 거친 숨소리와 함께 가끔 보이는 안광으로 미루어 보아 맹수가 확실했다. 그런데 다들 이렇게까지 긴장하는 이유는 그 맹수가 혼자가 아니라는 것과 쉽게 상대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세상 물정 모르는 트리온이라도 금방 눈치챌 수 있었다.
“트리온, 일단 모닥불에 남은 장작을 모두 넣어서 모닥불의 화력을 높여. 그리고 늑대는 일단 무는 공격을 하니까 달려들면 대가리 쪽을 주의해야 해. 무조건 다리 쪽을 물려고 할 테니까 조심하는 거 잊지 말고.”
스티브가 활을 겨누며 말했다. 트리온은 꺼져가는 모닥불에 가지고 있던 남은 장작과 불쏘시개를 마저 넣은 뒤, 왼팔에 방패를 단단히 조여 매고, 다른 손에는 검을 뽑아 들었다.
시간이 지나자, 불쏘시개로 넣은 잔가지와 나뭇잎에 불이 붙으며 화력이 좀 살아나기 시작했다. 주변이 좀 밝아지니까 아까보다는 상황 파악이 조금 나아졌는데 아까는 안광만 보이던 것이 이제는 조금씩 형체도 보이기 시작했다.
“일단 보이는 것만 여섯이고 안광만 보이는 게 더 있으니 열 마리 이상으로 봐야겠군.”
“분명히 우두머리가 있을 거야. 그 녀석만 잡으면 크게 문제는 없을 듯싶군.”
빌리와 스티브가 이야기하는 것을 들은 트리온은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트리온은 검을 검집에 꽂더니 별안간 불이 붙은 장작 하나를 들어 늑대를 향해 집어 던졌다. 불붙은 장작이 날아오자, 늑대들은 놀라서 뒤로 물러섰다.
“미쳤어? 숲을 다 태울 셈이야?”
앞에 도끼를 들고 서 있던 스콧이 기겁을 했으나 스티브는 덤덤하게 활을 겨눈 채로 말했다.
“뭐, 그건 나중 일이고, 일단 조금 더 잘 보이니까 좋긴 하네. 트리온 몇 개 더 던져봐.”
장작이 떨어진 곳이 밝아지자, 늑대들이 조금 더 자세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그냥 집에서 기르는 개와는 차원이 다른 엄청난 덩치를 자랑하는 녀석들이었다. 트리온은 정작 자신이 장작을 던져놓고는 늑대를 보고 본인이 더 놀라서 또다시 식은땀을 흘리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장작을 더 던지라는 스티브의 말에 용기를 내어 이쪽저쪽으로 불붙은 장작을 몇 개 더 던졌다.
“장작이 오래 타지는 않을 거야. 그 전에 우두머리를 죽여야 해. 어디 한 번만 딱 걸려라.”
스티브가 활을 겨눈 채 주위를 둘러보며 우두머리를 찾는 동안 세 용병은 조금씩 앞으로 나가며 각자의 거리를 벌렸다. 아무래도 좁은 공간에서의 난전은 가지고 있는 무기로는 조금 불리했기 때문이었다.
“스티브, 풀숲에 불이 옮겨붙기 시작했어. 활을 쏠 거면 빨리 쏴야겠는데?”
빌리가 말한 대로 아까 트리온이 집어던진 불붙은 장작 중에 몇 개가 마른풀에 옮겨붙기 시작했다. 이게 산불이 되면 걷잡을 수 없는 사태가 벌어지기에 빨리 정리를 하고 도망치거나 불을 끄거나 해야 할 판이었다.
그때 대답을 하지 않고 노려보기만 하던 스티브가 활시위를 놓았다. 활시위가 가볍게 튕기자, 화살은 번개같이 날아가서 한 녀석을 쓰러뜨렸다. 그러자 갑자기 늑대무리들이 동요하기 시작하더니 마구 짖어대며 으르렁대기 시작했다.
“우두머리가 아니었네? 친구들, 미안하지만 한바탕 싸울 준비를 해야겠는데?”
스티브가 다시 활시위에 화살을 메기며 투덜대자, 나머지 일행은 고개를 끄덕이며 무기를 꽉 쥐었다. 그렇게 대치가 이어지다가 스티브의 화살이 다시 허공을 가르자 또 한 녀석이 화살을 맞고 쓰러졌다. 그러자 그것을 신호로 우두머리의 것으로 짐작되는 울음소리가 길게 이어지더니 늑대들이 달려들기 시작했다.
과연 늑대들은 스티브의 말대로 자세를 낮추고 접근하더니 벼락같이 덤벼들었다. 제일 먼저 덤벼드는 녀석을 빌리가 발길로 걷어차자 깨갱거리는 소리와 함께 늑대는 물러났는데 쉴 틈 없이 다른 녀석이 또 덤벼들어서 또다시 난전이 벌어졌다. 트리온은 겁이 좀 나긴 했지만, 가만히 서 있을 수는 없어서 불붙은 장작을 하나 주워 들고 고함을 지르며 달려가서 마구 휘두르기 시작했다.
“스콧! 전투의 함성!”
스티브가 활을 겨눈 채 외치자, 스콧은 기다렸다는 듯이 우렁찬 함성을 질렀다. 조금 과장되게 표현해서 천지가 흔들릴 것 같은 고함이 들리자, 늑대들은 기가 죽어서 슬슬 물러나는가 싶더니 다시 달려들기 시작했다.
“어림도 없다. 이 녀석들!”
늑대무리 중 한 녀석이 스티브에게 덤벼들자, 트리온이 일갈하며 앞을 가로막고, 덤벼드는 늑대의 대가리를 방패로 냅다 후려쳤다. 이 공격이 효과가 있었던지 한 방 얻어맞은 늑대가 주춤하자, 트리온은 들고 있던 불붙은 장작으로 늑대의 옆구리를 지져버렸다. 털이 타는 냄새가 나자 공격당한 그 녀석은 꼬리를 내리고 도망쳐버렸다.
“좋았어! 트리온! 아주 잘하는데?”
용병들이 늑대들과 난전을 벌이는 동안 트리온은 불붙은 장작을 든 채 스티브의 앞을 지켰고 스티브는 화살을 쏴서 한 놈씩 쓰러뜨리고 있었다. 그때 제일 뒤에서 지켜만 보고 있던 유달리 크고 밝은 안광이 움직이기 시작하더니 서서히 속도를 높이며 접근하기 시작했다.
“트리온, 큰놈이 이쪽으로 온다. 조심해.”
스티브가 낮은 목소리로 말하자, 트리온도 정신을 바짝 차리고 노려보기 시작했다. 스티브는 움직이는 녀석을 신중히 겨누다가 화살을 쏘았는데 늑대는 순간적으로 몸을 흔들며 피하더니 바람같이 다가와서 트리온을 덮쳤다.
“아이고야.”
트리온은 자신을 향해 덮쳐오는 늑대를 방패로 막았으나 워낙 큰 녀석이라 그 힘을 이기지 못하고 뒤로 넘어졌다. 넘어지면서 무기로 사용하던 불붙은 장작은 놓쳐버렸지만, 꽉 조여 맨 방패 덕분에 물어뜯으려는 녀석의 얼굴을 필사적으로 막고 있었다. 스티브는 화들짝 놀라서 얼른 검을 뽑아서 달려왔으나 다른 늑대가 덤벼드는 통에 일단 그 녀석을 떨쳐내느라 더 이상 도와줄 수가 없었다.
한편, 트리온은 필사적으로 몸부림치며 버티고 있었는데 또다시 자신을 부르는 노래 같은 것을 느끼고 눌린 몸을 최대한 비틀어 허리에 찬 단검을 뽑아 들었다. 번뜩이는 섬광과 함께 단검을 휘두르자, 트리온을 공격하던 늑대는 뒤로 펄쩍 뛰어 피했다. 트리온은 그 틈을 타서 재빨리 일어나서 방패를 앞세우고 땅에 떨어진 불붙은 장작을 녀석 쪽으로 걷어찼다. 불티가 확 퍼지자, 그 늑대는 뒷걸음질 치며 으르렁댔다.
“트리온을 공격한 저 녀석이 우두머리인 게 틀림없어.”
스티브는 자신이 상대하던 늑대를 쓰러뜨리고 다시 활을 들어서 겨누었다. 활을 쏘기에는 제법 가까운 거리였지만 스티브는 신중하게 활을 겨누다가 확신이 든 순간 시위를 놓았다.
“으악!”
스티브가 쏜 화살은 우두머리 늑대의 뒷다리 부근을 스쳐 지나갔지만, 늑대의 비명으로 미루어 봤을 때 분명 상처를 입은 것 같았다. 하지만 스티브가 활을 쏨과 동시에 다른 늑대가 달려들어서 스티브의 다리를 물었다. 다리를 물린 채 쓰러진 스티브는 고통에 비명을 질렀지만, 상처를 입은 우두머리 늑대는 더 이상의 싸움을 포기하는 듯 꼬리를 내리고 울음소리를 내며 뒷걸음질 쳤다.
트리온은 스티브가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는 것을 목격하자 이성을 잃은 채 달려와서 스티브를 물고 늘어지는 늑대의 옆구리를 단검으로 찔렀다. 거대 거미의 외골격마저 잘라버릴 만큼 예리한 단검은 순식간에 푹 박혔고, 이미 이성을 잃은 트리온은 울부짖으며 이미 전투 불능 상태에 빠진 늑대를 마구 찔러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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