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 드라이어드의 계곡(1)

“내가 그걸 왜 버려? 네가 그때 아주 ‘귀한 거’라고 했잖아. 뭐라고 했더라? 협회에서 세울 길드에 ‘특별히’ 의뢰해서 만든 거라 시중에 풀리려면 한 2~3달은 더 있어야 한다고 했나? 그런 중요한 걸 왜 버리겠어.”
“으응. 그···그렇지. 조금 의외다. 난 당연히 버렸을 줄 알았는데. 뭐 어쨌든 그거 좀 돌려줘야겠어.”
“아 맞다! 너 그거 알아? 거기에 세울길드 마크랑 너 ‘이름 석 자’도 똑똑히 적혀있는거?”
“뭐?! 거기 내 이름이 적혀있다고?! 진짜로?!”
“응.”
물론 김하석의 이름은 경수가 따로 적어넣은 것이었다. 하지만 그건 지금 중요한건 그게 아니었다.
‘젠장!’
김하석은 얼마 전에 있었던 조회시간을 떠올렸다.
-위에서 이야기가 나왔는데, 저번에 받은 던전 어쩌구 여튼 그 긴 제목의 책 기억하냐?
-예!
-그거 혹시 멍청하게 외부로 반출한 인원 없겠지?
-네! 없습니다!
-그래, 내부에서만 소지하라고 얘기했는데 밖으로 가져나가는 간 큰 미친 자식은 당연히 없어야지. 어쨌든 그거 출간 취소됐다고 하니까 그렇게 알아라.
-예!
-아, 그리고 조금 있으면 1군 승격 발표 나오니까. 제발 문제 일으키지 말고 조심 좀 하자. 지금 조장님이란 선배님들 다 엄청 예민한 거 알지?
-예! 조심하겠습니다!
자신과 같이 2군으로 승격한 인원들이 힘차게 대답하는 동안 김하석은 등골이 서늘해지며 혼자 식은땀을 줄줄 쏟아야만 했다.
상념을 마친 김하석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절대로 찾아야 돼!’
세울길드의 2군은 3군과 분위기 자체가 달랐다. 다들 1군으로 올라가기 위해 다들 혈안이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지금 같은 시기에 문제를 일으켰다가는 조용히 말로 넘어갈 일도 뺨을 맞을 정도로 다들 예민했다.
‘던전에 출근 어쩌고’가 외부로 반출되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그의 길드 생활은 그야말로 끝장이었다.
김하석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치욕스럽지만 이렇게 말할 수 밖에 없었다.
“그..미안하지만 내가 좀 사정이 있어서 말이야. 그 책 좀 다시 돌려줄 수 있을까?”
“왜? 혹시 밖으로 나가면 안 되는 민감한 사항이 포함된 거야?”
경수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지그시 김하석을 바라봤다. 혹시라도 그런 기색이 보이는지 꼭 확인해야만 했다.
“뭐?! 아니야. 뭔 개소리야 그게. 그리고 요즘 같은 시대에 중요한 건 다 암호화해서 저장하지 누가 구닥다리처럼 책에 그런 걸 담아? 아니거든!”
“으음.”
경수의 눈이 좁아졌다. 그의 말은 맞았다. 애초에 출간을 목적으로 한 책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김하석의 반응으로 봤을 때 그는 ‘던출공’이 정말로 필요해 보였다.
그리고 간절함은 사람을 움직이게 하는 법!
“그럼 지금 우리 집에 가지러 갈래?”
경수는 슬쩍 김하석을 떠보았다.
“어? 그럼 나야 좋지!”
김하석은 미끼를 덥썩 물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며 경수는 세울 길드의 투명한 평가체계를 느낄 수 있었다.
‘이런 바보도 어떻게 2군까지 올라간 걸 보니 세울 길드는 정말 철저히 실력 제인가 보군.’
“오케이.”
경수가 대답하자, 김하석은 곧바로 나갈 수 있게 삼감 김밥 포장지까지 쓰레기통에 버리며 빠르게 이동할 준비를 마쳤다.
그러나 경수는 곧장 밖으로 나가지 않고 다시금 말을 시작했다.
“아 ~ 맞다! 근데 내가 최근에 이사해서 책이 어딨는지 정확히 모르겠네, 아 그때 내가 그거를···”
“이사?! 아니 이사를 왜 해!!”
“그거야 내 맘이지. 어쨌든 내가 그거를 용달차에 실었는데 그러니까···”
경수의 말이 길어지자 김하석은 더욱 안절부절못하기 시작했다.
“가지고 있는 거 맞지?!”
“아!”
“기억났어?”
“니가 말 걸어서 까먹었다.”
“이런 씨 -”
“아 점심시간인데 삼각 김밥 하나로 때워서 그런가 머리가 안 굴러가네···”
“너 3개나 처먹었잖아!”
“그러니까 삼각김밥 ‘한 종류’니까 ‘하나’지. 하여튼 달달한 음료를 먹으면 기억이 날듯도 하고?”
“······”
김하석은 경수가 자신을 놀리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건 그의 미래가 달린 문제였으니까.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라면 이딴 유치한 놀음에 얼마든지 장단을 맞춰줄 수 있었다.
“···.내가 사올 게 뭐 마시고 싶어?”
====
찰칵 -
경수는 자신의 허름한 여관방의 문을 열었다. 그리고 그런 그의 손목에는 커다란 편의점 봉투가 걸려있었다.
모두 김하석이 지갑이 활짝 열린 결과였다. 경수는 편의점에 남아있던 도시락 및 삼각김밥을 모두 쓸어담았다.
그의 오늘 저녁, 내일 아침, 점심, 저녁 식사였다.
“자자 -, 누추하지만 들어와.”
경수가 김하석을 방 안으로 안내했다. 하지만 김하석은 차갑게 그것을 거부했다.
“됐어. 우리가 딱히 서로 집에 초대하고 그럴 사이는 아니잖아? 던전에 출근하는 그 어쩌고나 빨리 줘.”
“음, 그래? 그럼 그냥 거기서 있어.”
경수는 그렇게 김하석을 신발장에 세워둔 채 폰을 꺼내 영상을 촬영하기 시작했다.
“지금 뭐 하냐?”
‘띠 -’, 소리와 함께 녹화가 시작되자 김하석이 물어왔다.
“조용히 해주시고요. 제가 하는 질문에 잘 대답해주시면 됩니다.”
“지랄.”
“자, 김하석씨 증거 영상에 욕은 삼가 주시기 바랍니다.”
“뭐? 뭐라고 했냐? 증거 영상?”
김하석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네 증거 영상이요. 제가 당신의 뭘 믿고 ‘던출공’을 넘겨주겠습니까? 먹고 입 싹 닦아버리면 그만일 텐데요. 그러니까 이렇게 증거 영상을 찍는 겁니다. 자, 그럼 아까 우리가 했던 약속에 대해서 다시 한번 말해주실까요?”
“그거 내 동의 없으면 아무런 법적 효력 없다는 건 알지?”
“그래? 그럼 지금 물으면 되지 촬영에 동의하십니까?”
“아니요. 이건 명백한 불법 촬영임을 저 김하석은 분명히 밝힙니다.”
“앞에 세울 길드 2군이라는 것도 붙여야 하지 않을까? 그러면 좀 더 명확해질 것 같은데 어때?”
“음, 그게 더 낫나. 라고 하겠냐?! 이게 어디서 또 개수작이야!”
김하석이 발끈하여 외쳤다.
“어쨌든 나 이거 안 찍을 거고! 지금 당장 던전 어쩌고 책이나 내놔!”
“미안하지만 싫어.”
“이 자식이!”
김하석이 경수의 멱살을 순식간에 움켜쥐었다. 하지만 경수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왜 치시려고? 사람들 보는 눈 없으니까 막 힘으로 짓누르고 싶으신가 봐요?”
물론 경수는 그냥 당해줄 생각이 없었다.
만약 김하석이 손을 쓰기 시작하면 일단 ‘고통의 파동’을 먹인 다음에 ‘속박의 손길’로 마비시키고 음기를 가득 담아 명치를 갈겨줄 생각이었다.
게다가 녹화는 계속되고 있었다. 비록 영상은 남기지 못해도 음성 기록은 남길 수 있었다.
“내가 너처럼 비겁한 줄 알아?”
그러나 김하석은 의외로 순순히 경수를 놓아줬다.
“음. 지킬 건 지키신다?”
“그래 나는 내 능력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고 싶어서 헌터가 됐으니까.”
경수는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크게 소리쳤다.
“야, 누가 집 안에 신발을 신어?! 당장 내려가!!”
“어, 미안.”
김하석은 반사적으로 신발장으로 물러났지만, 곧 자신의 행동을 깨달았는지 얼굴이 새빨개졌다.
하지만 다시 방 안으로 들어오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런 김하석의 모습을 보며 경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좀 모자라지만 정직하고 정의롭다. 역시 바지사장으로 딱이야.’
“그래. 그럼 네가 그렇게 훌륭한 헌터라고 하니까 내가 이번에는 믿어주지. 대신 약속 잊지 마라. 앞으로 3번. 나랑 같이 던전에 들어가야 해.”
“알았어. 그러니까 빨리 책이나 줘.”
“그리고 분배는 3:1로, 내가 3이고 너는 1.”
“그딴 건 너 다 가져도 상관없어. 책이나 줘 빨리.”
“오케이! 그럼 몽땅 다 내꺼라는 거 확인.”
경수는 곧바로 침대 위에 놓여있던 ‘던출공’을 김하석에게 건넸다. 그리고 김하석은 책을 펼쳐 훼손 부분이 없는지 확인했다.
“됐지?”
“됐다.”
그렇게 말하고 그는 곧바로 경수의 방을 빠져나갔다.
“야 김하석! 난 너 믿는다! 약속 꼭 지켜!!”
경수는 나가는 김하석의 등에 다 대고 외쳤다. 김하석은 경수를 한번 쳐다보고는 말없이 가버렸다.
그 모습을 보던 경수는 폰을 꺼내 들고 김하석의 번호를 ‘바지1 - 김하석’이란 이름으로 저장했다.
“음, 그럼 일단 3번은 C급 던전에 갈 수 있겠군.”
그러고는 방으로 돌아와 구석에서 던출공을 스캔하여 만들어둔 제본을 꺼내 들었다.
“역시 준비된 자한테 기회가 오는 법이지.”
물론 이건 만약 책이 훼손되거나 분실을 대비하기 위해 만들어둔 보험 같은 것이 아니었다.
그저 단지 안현도에게 비싼 값을 주고 팔아넘기기 위해 미리 만들어둔 복사본!
즉, 탐욕의 산물이었지만 어쨌든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만약 김하석이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면 이 복사본의 존재를 그에게 알릴 생각이었다.
그리고 김하석은 자신의 이름 세 글자가 박힌 이 스캔 본을 본다면 개처럼 네 발로 뛰어 경수에게 달려올 것이었다.
“으흠 ~”
경수로서는 콧노래가 절로 나오는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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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아침부터 경수는 바쁘게 움직였다.
오늘 그가 향할 곳은 <일반 던전 - 드라이어의 계곡>.
비교적 온순한 나무의 정령 드라이어드들이 주로 서식하는 곳으로 ‘던출공’에 베스트 top 15위를 기록한 D급의 던전이었다.
“···.안녕하십니까..”
안현도는 아침부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경수에게 인사했다.
안 그래도 아직 남은 쇠약 저주의 여파로 멸치 같은 몸이 어째서인지 더욱 움츠러들어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그가 등진 어두운 새벽하늘을 더 어둡게 했다.
“음, 음. 괜찮아. 괜찮아.”
경수는 그의 등을 토닥여줬다. 안현도가 이렇게 기운 없는 이유는 그의 팀이 결국 해체되었기 때문이었다.
경수는 안현도를 처음 만났던 그때부터 이미 그들의 팀이 망가질 것을 예상했었다.
팀장을 버리고 도망친 사람들이 서로 어떻게 등을 맡길 수 있겠는가. 신뢰가 깨진 그 순간 안현도의 팀은 이미 끝난 것이었다.
“이번에 ‘드라이어드의 계곡’가서 경치도 보고, 산 공기도 맡고 몸을 분주하게 움직이다 보면 기분이 훨씬 좋아질 겁니다. 그리고 혹시 아나요? 팀원들이 미련을 가지고 다시 돌아올지.”
하지만 경수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위로였다.
오늘 갈 던전은 D급 던전, 그리고 E급 헌터인 경수가 드라이어드의 계곡에 출입하기 위해서는 D급인 안현도가 꼭 필요했다.
그리고 그런 경수의 말에 안현도는 다시금 고개를 들었다.
“아니요. 사실 저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냥 부정하고 싶었을 뿐이죠. 그렇지만 저를 생각해 주시는 마음 정말 감사합니다. 역시 헌터님은 참 친절하세요. 하긴 던전 폐쇄가 벌어지는 와중에서도 굳이 다른 사람들을 이끌며 노력하셨던 분이니 말해 뭐하겠습니까. 전 그저 감사하고 또 감사할 뿐입니다.”
“에이 뭘 당연한 일인데. 그나저나 다른 분들은 어떻게 잘 지나고 계시나 모르겠네요. 혹시 따로 연락 온 게 있나요?”
경수는 자신과 함께 <버프 던전 - 신체 강화의 오크의 군락지>를 탈출한 일행들의 안부가 너무나도 궁금했다.
“저도 그때 연락처만 교환하고 딱히 연락하지는 않아서..저번에 한 번 안부 연락이 오긴 했습니다. 아마 다들 몸을 추스르느라 바쁘지 않을까요?”
“음, 그렇구나.”
“아니! 그 사람들 설마 헌터님께 연락도 안 했나요?!”
“아뇨. 뭐 감사인사는 왔습니다. 다들 바쁜가 보니까요. 그리고 뭐 때가 되면 언젠가 다시 만나겠죠.”
‘김치현, 이은성, 박재현, 신현준, 최휘진’
경수는 속으로 함께 생사를 넘었던 전우의 이름을 떠올렸다. 그들은 언젠가 꼭 한 번 만나야 할 사람들이었다.
‘꼴랑 감사 인사로 넘겨? 은혜를 원수로 갚다니 반드시 2배로 갚아주마.’
그들의 이름은 마음속 장부에서 살생부로 조용히 넘어갔다. 그리고 그걸 모르는 안현도는 안면에 화색이 돌았다.
“이야 그때가 빨리 오면 좋겠네요! 다들 건강한 모습으로 만나면 얼마나 좋을까요? 술도 한잔하고 말이죠!”
“네. 저도 그때가 너무나도 기다려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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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수와 안현도는 세울 13구역에서 바로 옆에 있는 7구역으로 넘어갔다. 그리고 그곳에는 <일반던전 - 드라어드의 계곡>이 있었다.
“와 처음에 검문소 크기를 보고 엄청나게 빡빡하게 검문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쉽게 들여 보내주네요?”
- 작가의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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